< <381화> 아, 제가 결혼합니다만? >
- 스코타 성, 후작 집무실 -
똑, 똑, 똑.
안에서 들리던 소란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한 집사가 천천히 문을 두드린 후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 노엘입니다.”
잠시 후, 집무실 안쪽에서 착 가라앉은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한 일이 아니면 지금은 듣고 싶지 않군.”
“죄송합니다만, 지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집무실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집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성정이 불같기는 하지만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깐깐한 전대 후작의 밑에서도 단 한 번의 잡음 없이 후계자 자리를 유지하지 않았겠나.
그리고 후작은 집사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며 문틈으로 후작이 낮게 말했다.
“주변은 다 물렸나?”
“네, 각하.”
“자네만 들어오게.”
집무실은 난장판이었다.
성한 물건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
최근 들어 후작이 이렇게 화풀이를 심하게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리안이라는 자가 꽤나 속을 긁었던 모양이다.
“후우, 아무 데나 앉지. 지금은 치워봐야 어차피 또 똑같아질 것 같으니.”
“네, 각하. 먼저 이것부터.”
집사가 공손하게 내미는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챈 후작이 물었다.
“뭔가?”
“은행, 아니, 마법사 길드로부터 왕실에 온 공문입니다. 닷새 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건방진 놈들. 돈이나 만지는 놈들이 감히 한 나라를 상대로 공문? 어이가 없군.”
이후로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고 달려들 만한 폭언을 몇 마디 내뱉은 후작은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집사 노엘이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후작이 앉을 자리를 다 치웠을 때쯤, 후작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천한 놈이 건방을 떨어대는 이유가 있었군. 노엘, 어떻게 생각하나?”
“병사들을 대기시킬까요? 마침 나이트 이튼이 성 내에 대기 중입니다.”
침착한 노엘의 말에 후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게. 지금 감정대로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후작의 말에 노엘은 더 깊숙이 허리를 숙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당장 화를 풀기 위해서 리안 일행을 죽이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었으니까.
인원이 적은 것도 아니고, 몰래 온 것도 아닌 타국의 사신 일행을 죽였다가는 그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죽으면 후작의 순간적인 울분이야 풀리겠지만, 이를 빌미로 왕실과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쯧,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어. 치운다, 치운다 하면서 다른 일에 치여 시간을 줬더니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군. 하다못해 믿을 수 있는 녀석을 섬에 보내 보기만 했어도···.”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노엘의 펴질 줄 모르는 허리를 보던 후작이 손을 내 저었다.
물론 노엘이 리안이라는 놈의 문제를 뒤로 미뤄도 된다고 진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후작 역시 그놈이 이렇게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 말이다.
고작 능력 좀 있는 상인 놈 따위, 위협이라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 책임을 노엘에게 떠넘기는 것은 비겁한 짓에 불과했다.
“그만하고 앉지. 자네가 사과한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닌가?”
“네, 후작 각하.”
노엘이 빈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자마자 후작이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놈은 내게 봉신 관계 철회를 요구해왔어. 폰테 섬 말고는 알량한 배 몇 척 가진 놈이 미쳤나 싶었는데, 방금 자네가 가지고 온 소식을 보니 이해가 되는군.”
“네, 믿기 힘들지만, 최소한 프레티아 왕국이나 마법사 길드 측에서 사라진 페리아 족을 확보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노엘의 말에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페리아 족이라고? 수백 년 전에 멸망했다는? 이걸 믿어야 한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 공문의 내용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허, 멍청한 어린놈은 인어인가 뭔가를 찾는다고 정신이 나가 있고, 이제는 페리아 족까지?”
후작이 어린놈이라고 무시하는 발레리아 백작은 후작보다 고작 세 살 어렸지만, 노엘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인어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입을 열었다.
“최근 항구에서 도는 소문도 그렇지만, 진짜 페리아 족이 존재한다면 인어 역시도 존재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데?”
잠시 고민하던 노엘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페리아 족이 폰테 섬에 사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후작 각하께 아무런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느냐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전대 후작이 있을 때부터 리안의 선박에는 적지 않은 수의 첩자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후작가의 하수인들이 술집에서 몇 푼 찔러주면 아는 것만 내뱉는 놈들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한 정보가 모일 수 있었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비밀리에 뭔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선원이라는 놈들이 입은 값싸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비밀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선원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뭐, 진짜 그 페리아 족이라는 놈들이 폰테 섬에 살았겠나? 어디서 숨어 살던 놈들을 발견해서 써먹는 것이겠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노엘은 마음속에 미심쩍은 부분이 남기는 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덮어두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추측과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내가 말해보지. 어떻게 그놈이 백작이라는 작위를 꿰찼냐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나도 그게 너무 이상해서 한참을 고민했지. 아무리 프레티아가 내전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지만 일개 뱃놈에게 백작위를 주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차라리 그자가 폰테 섬을 들어다 바쳤다면 억지로라도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그럴 수 없지. 폰테 섬은 그놈의 영지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서 놈들이 페리아 족이라는 억지까지 부리는 것 아닌가.”
“네.”
“후우···. 새로 국왕이 된 아이가 결정한 것은 아닐 테고. 페이트 후작, 그 늙은 너구리일 텐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돈이 좀 들더라도 자세하게 알아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용케도 깨지지 않은 술병을 찾아낸 후작이 거칠게 마개를 열고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크으. 더럽게 쓰군. 앞으로 이딴 건 넣지 말게.”
“네, 후작 각하.”
그 술은 후작이 평소에 자주 마시던 것이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노엘은 지적하지 않았다.
나중에 후작이 요구를 하면 그때 넣어 놓으면 될 일이니까.
“그래,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 것 같나?”
“왕실은 이 요청을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쳇, 아무리 그래도 이미 확보했던 영토를 눈 뜨고 빼앗기는 꼴이야. 그런데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물론 겉으로야 화도 내고 유감도 표하겠지만 결국 그렇게 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후작이라고 그것을 모를까.
괜히 짜증이 나서 심술을 부린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폰테 섬을 영토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왕실 입장에서는 딱히 이득이 없었다.
언젠가 일레드 왕국 본토로 진군할 때에 주요 거점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일레드 왕국 본토 진군이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니까.
결국 왕실 입장에서는 있으나 마나인 섬,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레드 왕국의 전초기지 역할만 하지 않으면 되는 섬이 폰테 섬이다.
어차피 일레드 왕국의 군대가 진주할 수 없다면, 프레티아 왕국이 가지고 있건, 멸망했다던 고대의 종족이 가지고 있건, 스코타 가문이 가지고 있건 왕실 입장에서는 별 상관이 없었다.
어떻게든 스코타 후작 가문의 힘을 줄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왕실에서는 웃으면서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노엘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아,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시간에 내분이나 일삼고 있다니. 아 참, 차기 해군대신에는 그 어린놈이 유력한 것이 확실한가?”
“지금으로서는 발레리아 백작을 지지하는 자가 상당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발레리아 백작이 차기 해군대신이 될 것 같습니다.”
“미치겠군.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놈이 해군대신이라고? 하!”
“아시다시피 발레리아 백작가의 세력이 적지 않은지라···.”
“여전히 그 늙은이가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겠지?”
“······.”
노엘은 말을 아꼈다.
후작이 말하는 늙은이라면 발레리아 가문의 노집사를 말하는 것일 터, 아무래도 그에 대해서는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당연히 발레리아 백작가를 쥐락펴락하는 그자와 자신은 달랐지만, 그의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언제 후작의 의심이 자신을 향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그냥 손 놓고 있자는 건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일단 후작 각하께서 직접 움직여서 남의 눈에 띄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
“하, 그러니까 그놈의 봉신 철회 요청을 그냥 받아 줘라?”
노엘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후작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봉신 계약은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의 서약이 아니다.
군주가 봉신에게 충성의 대가를 제공하는 거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 전해진 소식대로라면 스코타 후작가에서 리안 스펜서 남작에게 준 충성의 대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상황, 봉신 계약을 유지하려면 최소한 그와 비슷한 대가를 제시해야만 했다.
아무리 큰 대가를 제시해도 받는 쪽에서 거절하면 그만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덤이다.
물론 후작이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면 리안이라는 놈의 평판에 금이 가겠지만, 애초에 천한 출신인 놈에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후우, 그래, 봉신 계약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심지어 놈의 명분도 아주 적당하니 말이야.”
“타국의 귀족이 된 이상 보복도 쉽지가 않습니다.”
평온한 노엘의 맞장구에 후작의 눈이 번뜩였다.
“쉽지 않다?”
“네.”
“자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내가 움직이면 안 된다고.”
“그렇습니다.”
“하하하, 좋아. 아마 당분간 자네가 좀 바쁘겠군.”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의미를 이해했다.
쉽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후작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니 노엘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말이었다.
일이 잘되면 노엘은 결과만 짧게 보고할 것이고, 일이 잘못되면 독단으로 벌인 일이 되겠지.
후작은 정말 최악이 아니라면 노엘을 내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원래 전쟁에서는 대장을 살리기 위해서 병사는 물론 참모나 다른 지휘관을 희생할 수도 있는 법이다.
“보나후드 백작을 닷새 후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보나후드 백작? 아, 그 친구. 요즘은 새로 만든 정부에 빠져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빠서 내 초대는 받으려나 모르겠군.”
후작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빈정거렸지만 노엘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감히 각하의 초대를 거절하겠습니까?”
“후후, 그래, 미련한 돼지 같은 놈이지만 식사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백작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나마 낫군.”
* * *
- 그 시각, 스코타 성 리안의 방 -
“다 모였으면 그러지들 말고 앉지.”
어색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내가 일부러 밝게 말했지만 모인 세 사람의 표정은 영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이선과 엘리엇이야 내가 아닌 다른 귀족, 그것도 얼굴을 익힌 후로도 말 한번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불편해서 그럴 테고, 베일리야 뭐 소심한 것만 빼면 나무랄 곳 없는 완전한 귀족이니까.
평민 놈들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게 불편하다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에 힘을 주면서 사람들을 강제로 의자에 앉게 만들었다.
막말로 네이선은 내 최강의 전략병기고 엘리엇은 내 최고의 지낭이다.
베일리따위 열 트럭을 가져다줘도 안 바꿀 녀석들이라고.
그런 녀석들을 베일리가 불편해한다고 서 있으라거나 바닥에 앉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일단 상황 설명부터 하지. 방금 후작에게 봉신 계약 철회를 요구하고 왔어.”
이미 알고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에게서 긴장감이 돌았다.
이제 어떤 결과가 나오건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작이 순순히 요구를 받아주던가요?”
그나마 감정에 덜 휘둘리는 편인 엘리엇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당연히 대답은 No.
“아니? 열 받아서 꺼지라던데?”
가벼운 내 대답에 베일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네이선 역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탈출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기다려 봐. 후작의 상태로 볼 때 당장 날 죽이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 그래도 호위병들에게 겨, 경계를 강화하라고 전해야···.”
말까지 더듬는 베일리에게 안심하라는 뜻으로 약간 과장되게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하하하, 아쉬가른 남작.”
“네넷?!”
“어차피 호위병 몇 명이 경계를 한다고 상황이 바뀔 리가 없잖나. 이 성에 대기 중인 후작의 사병만 해도 백은 넘을 텐데.”
아, 말을 잘못 했나?
나는 더욱 하얗게 질리는 베일리의 얼굴을 보며 얼른 말을 주워 담았다.
“아니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그래! 지금까지 병사들이 움직이는 소란스러움이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이야.”
“그, 그런 겁니까?”
“물론이지. 아, 네이선. 시킨 일은?”
“마침 병사 중에 넉살 좋은 친구가 있어서 잘 해결했습니다. 지금쯤이면 성 내의 병사나 하인 중에는 이 칼의 유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네이선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마쳤다.
그러면서도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건드리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이 정도면 데보라 양이 저 칼을 연적(戀敵)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혹시라도 후작 측에서 무력 제압을 시도하면 무조건 각자 도주하는 거야. 특히 네이선. 너는 무조건이야. 엘리엇은 굳이 죽일 가치가 없어서, 나와 베일리 경은 귀족이니까 쉽게 죽이기 힘들어. 그러니까 무조건 너만 도망가면 돼. 단 한 명만 이 성을 빠져나가도 후작은 우리 일행을 죽이지 못해.”
최악의 상황에 대한 경고를 다시 반복한 나는 이후의 예상과 그 상황에서의 대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 * *
내 예상대로 밤사이에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병사는커녕 하인 한 명도 우리가 머무는 곳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다만 아침 댓바람부터 후작의 호출이라며 낯익은 집사가 나를 데리러 왔을 뿐이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소, 리블르앙 백작.”
“충분히 이해합니다. 후작 각하.”
후작의 집무실까지 간 나는 후작의 가벼운 사과를 받으며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무덤덤하면 안 되는 건데?
“어차피 서로 불편한 사이가 되었는데 귀찮게 빙빙 돌리지 말고 이야기하지. 먼저 그대가 내 봉신으로서 받았던 마지막 명령이 있었을 거요. 아무리 그대가 타국의 귀족이 되었다고 해도 아직 본국의 귀족이며 나와의 봉신 계약이 파기되지 않았으니 그 명령에 대한 대답은 들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물론 후작 각하께서는 제게 그 책임을 추궁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요런 얄팍한 수작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어차피 꿀릴 것도 없기에 내가 당당히 대답하자, 후작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궁은 무슨. 다만 백작이 타국의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의도적으로 내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퍽 실망스러울 것 같군.”
“애석하지만 채피 사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흔들려라. 내가 조금 있다가 큰 거 터뜨릴 텐데 그 전에 최대한 흔들려야지.
“돌아올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네. 채피 사제는 애석하게도 섬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뭐라?!”
쾅!
분노로 이글거리는 후작의 눈길이 나를 훑는다.
으, 짜릿하군.
“백작, 말을 가려서 해야 할 거요. 고작 이 자리를 모면하고자 채피 사제의 죽음을 거짓으로 말한다면···.”
“그렇다면 저는 교단으로부터 큰 항의를 받겠지요.”
“그걸 알면서 지금 채피 사제가 죽었다고 하는 거요?”
“네. 그게 진실이니까요.”
흔들림 없는 내 말에 후작이 분노를 거둬들였다.
이 정도면 내게도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대가 더 잘 알겠지만, 채피 사제는 더 이상 나이를 먹지도 않고, 웬만한 부상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소. 그런데 그런 그가 죽었다? 어떻게 죽었다는 말이오?”
“채피 사제는 폰테 섬에서 지고스 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다했고, 권능은 회수되었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늙었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다시 분노하는 후작에게 나는 준비한 서신을 내밀었다.
“여기, 채피 사제와 함께 있던 로쉬암 사제가 교단에 전하는 서신의 사본입니다.”
거칠게 내 손에서 서신을 낚아챈 후작이 서신을 읽어보더니 입술을 씰룩거렸다.
분명히 이게 정말 교단에 보내는 서신이 맞냐고 닦달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나도 귀족이잖아.
귀족이 한 말을 근거도 없이 거짓말로 치부하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는 일이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아마 조만간 교단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을 발표할 겁니다.”
“하! 하하, 하하하!”
잠시 기가 막힌다는 듯 웃던 후작이 돌연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서 끝내 봉신 계약을 끝내시겠다?”
“네. 후작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각하와 제 관계가 예전처럼 신뢰가 넘치는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사이에 신뢰가 있던 적이 있긴 했던가?
이제 와서는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야.
“백작, 그대를 밑바닥 생활에서 건져준 사람이 누군지 잊으신 거요?”
“제가 ‘선대 후작 각하’의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알지, 넌 아니잖아.
그나저나 이제 슬슬 막타를 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리고, 다른 상황이라면 몰라도 프레티아 왕실과 혼사를 올리는 입장에서 타국의 귀족 작위를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후작 각하께서 아무리 엘리안 전하의 혈족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
무슨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다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