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간 큰 도적들 (1) >
모두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첫째 날이 지나갔다.
사흘째에는 인적이 드문 산 옆에 난 길을 지나야 했기에 모두 긴장을 했다.
닷새째에는 피곤한 표정의 네이선이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면 후작이 손을 쓰기에는 너무 멀어지지 않았어?”
“그건 그렇지···.”
솔직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말이 좋아 닷새지, 이 정도로 물리적 거리가 벌어지면 후작이 우리를 상대로 뭔가를 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명령을 내리면 실시간으로 수행한다거나, 상대방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제 사흘 정도만 더 가면 벨로키나 왕국의 수도에 진입한다.
어느 나라나 수도 근처는 치안이 가장 안정되어 있게 마련이니 구린 일을 벌이기에는 더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이제 좀 안심을 해도···.
“아아악!”
“커억!”
“엄폐햇! 화살이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비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원래 사절단이라면 일반적으로 기사가 호위대장을 맡는다.
하지만 부단장 베일리조차 겨우 구했을 정도로 내 평판이라는 것이 엉망인데 기사라고 구하기 쉽겠는가?
심지어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없고 위험하기만 한 일이기까지 하니까.
페이트 후작과 블랑코가 나름 애를 쓴 모양이지만, 각국에 사절을 동시에 보내다 보니 그들도 사람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젊은 국왕은 민망함과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정예병을 붙여주겠다고 했었다.
실제로 국왕이 붙여준 30명의 병사들은 노련함이 절로 느껴지는 이들이었고.
내전을 겪으며 실전으로 다져진 실력자들이라고 했지.
군사훈련이 뭔지도 모르는 도적 떼 따위는 300명이 몰려와도 밀리지 않을 전력이다.
그런데 그런 병사들을 상대로 공격하는 놈들이라고?
내가 급히 마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네이선이 내 팔을 잡으며 막아섰다.
“내가 나오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마!”
우악스럽게 나를 밀어낸 네이선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자 비명과 소음이 더 크게 들려왔다.
쾅!
다시 문이 닫히고 엘리엇이 칼을 빼 들고 문 앞을 막았다.
“갑판장의 말이 옳습니다. 제독은 안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작전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분노가 나를 살렸다.
퍼억!
콰직!
내가 자리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내가 있던 자리, 정확하게 내 머리와 등이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화살이 솟아났다.
완전히 관통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10cm는 튀어나왔으니, 그대로 앉아있었다면 비명도 못 지르고 뒤질 뻔했다.
“으아악! 리안!”
깜짝 놀라는 우르타의 비명을 무시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떤 놈들이지?
튼튼한 마차의 벽을 이렇게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화살을 쏘아 내는 놈들이면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활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에 숙련되는 무기도 아니고, 제대로 된 활을 구하는 것은 더 힘드니까.
이미 완전 무장한 병사들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한 순간부터 말 다 한 거지만.
전투를 한두 번 치른 것이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선교에 서면 전황 자체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들려오는 소리로 상황을 짐작하는 것밖에 하지 못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와 우르타가 드문드문 벽을 뚫고 튀어나오는 화살촉을 피해 가운데로 몸을 피하는 동안 마차 여기저기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던 엘리엇이 쿠션을 집어 들더니 냅다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차 안이 더 위험한 것 같습니다! 제가 쿠션을 던지면 바로 뒤따라 나가서 병사들에게 합류하십시오!”
“뭐?!”
“윽, 시, 시간이 없습니다!”
마차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고 있던 엘리엇의 손에서 피가 튀며 붉게 물든 화살촉이 튀어나왔다.
“젠장. 던져!”
내 말에 엘리엇이 쿠션을 밖으로 집어 던졌고, 쿠션은 문을 벗어나기 무섭게 움직이는 방향이 바뀌며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화살에 맞은 거다.
나는 우르타를 챙길 여유도 없이 혹시나 해서 급히 집어 든 쿠션 하나를 던지며 밖으로 몸을 날렸다.
쿠션은 위로, 나는 아래로.
거친 바닥과 몸이 부딪히며 온몸이 아파 왔지만 정신없이 몸을 굴렸다.
“헉, 헉, 헉···.”
마차 밑에 엎드려서 빠르게 몸을 점검해보니 옷이 흙먼지에 더러워지고 조금 찢어졌을지언정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다.
“으아앗! 리안! 어디로 갔어?!”
우르타의 비명에 가까운 질문이 위에서 들려오고, 뒤이어 제법 낯익은 백인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온다! 모두 1조 정면, 2조는 우측, 3조는 뒷면으로! 마차를 보호해!”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좌측을 보니, 좌측은 아직 경작 전의 밭이었고, 사람이 숨을만한 곳은 없었다.
그리고 마차의 문은 오른쪽에 달려있고.
그는 일행에 없는 기사를 대신해 병사를 지휘하는 사람이었는데,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도 지휘가 꽤 괜찮다.
정예병을 붙여준다는 왕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사방에서 함성과 함께 발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화살 공격은 끝났고 적들이 직접 달려오는 모양이다.
이제 나가도 되겠지.
나는 바닥을 기어 마차를 빠져나와서 이미 죽어 나자빠진 말을 엄폐물 삼아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방패를 들어 마차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여섯 명이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내게 등을 보인 채 병사들 사이에 웅크린 네이선과···.
“아앗! 여기 있었구나! 다행이야, 안 다쳤어?!”
나를 발견한 우르타가 몸을 숙이고 다가왔다.
“상황은?”
“나도 잘 몰라. 마차 위로 올라가 볼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부석에 발을 들이미는 우르타를 기겁해서 뜯어말렸다.
지금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적이 화살을 쏠 수 없다는 보장이 없는데 무슨 짓이야?
“미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아아니, 난 리안이 궁금할까 봐···.”
의기소침해하는 우르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까짓 상황 좀 보자고 네 목숨을 걸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 엘리엇은?!”
“저기!”
피가 흐르는 손을 치료하지도 못하고 마차 뒤편에 있던 쇠뇌를 끌어내는 엘리엇이 보였다.
저 손으로 뭘 어쩌겠다고 저걸 꺼내는 거야?
“작전관!”
“네, 제독!”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른손이 이래서 칼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린 엘리엇이 얼굴을 찡그렸다.
“똑똑한 사람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해?! 당장 손부터 치료해!”
출혈 과다로 죽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저러다 상처가 덧나면 오른손을 영영 못 쓰게 될 수도 있었다.
우리 선단에 외팔이는 게론드 하나로 충분하다고.
네이선이 나를 힐끗 보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고, 내 목소리를 들은 백인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했다.
“백작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곧 적들을 소탕하겠습니다!”
병사들의 틈 사이로 보니 거의 30미터 앞까지 접근한 적들이 보였다.
통일되지 않은 복장의 남자들.
용병, 혹은 도적이었다.
뭐, 둘의 구분이 많이 모호하기는 하니까 둘 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짜 용병이나 도적이라고?
그럴 리가.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자살 희망자가 아닌 이상, 완전 무장한 병력이 호위하는, 귀족의 문장이 달린 마차를 공격하는 용병이나 도적 따위는 없다.
“한 놈은 살려두게.”
“넷!”
찬찬히 살펴보니 적의 수는 대략 50여 명, 무장과 훈련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니까 기습을 버틴 이상 아군의 승리다.
그런데 진짜 이상하네?
나도 알고,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것을, 저놈들은 모를까?
“모두 방심하지 마라! 저놈들, 숨겨둔 한 수가 더 있을 거야!”
내 말을 끝으로 방패를 때리는 각종 무기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 * *
예상했지만 병사들의 방어는 굳건했다.
고작 얄팍한 칼이나 짧은 도끼로 뚫을 수 있는 진형이 아니었다.
심지어 몸에 인이 박이도록 집단전을 훈련한 병사들이니, 착실하게 수가 줄어드는 것은 습격자들이었다.
“에잇, 비켜랏!”
콰앙!
“끄르륵···!”
진짜 정체가 의심스러운 놈들이 실력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단하게 쥐고 있던 방패가 강력한 힘에 살짝 밀려나는 틈으로 칼날이 들어와서 휘저었다.
전면에서, 우측에서, 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변.
수백 명이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면 후열에 있던 병사가 빠르게 빈틈을 채웠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가용병력이 20명 남짓이었다.
세 대의 마차 주위로 한 줄로 늘여 세우는 게 고작인 인원으로는 그 틈을 빠르게 메울 수 없었다.
“마, 막앗!”
각 조의 조장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다급한 명령이 들렸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있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내가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에 다시 대여섯 명의 병사가 전열에서 이탈했다.
단번에 무너진 진형.
하지만 백인장이라는 친구가 너무 뛰어났다.
“모두 2번 마차로! 백작님! 2번 마차로 이동하십시오! 모두 백작님을 중앙에 모셔서 보호한다!”
2번이면 베일리가 타고 있던 마차다.
나는 우르타와 엘리엇을 데리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우리가 마차 근처에 도착하자 마차 문이 열리며 창백해진 베일리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백작님! 이쪽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화살꽂이가 되다시피 한 내가 타던 마차에 비해 베일리의 마차는 꽤나 멀쩡해 보였다.
뭔가 억울한데?
베일리가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외면했다.
뒤질 때 뒤지더라도 마차 안에서 벌벌 떨다가 뒤지는 것은 사절이다.
“자네나 그 안에 있게. 아니, 여기 이 친구나 데리고 들어가.”
손에 대충 천을 감고 있는 엘리엇을 밀어 넣자 엘리엇이 완강하게 거부했다.
“마차로 기동이 불가능한 지금은 마차 안에서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저도 밖에 있겠습니다.”
“쯧, 고집은.”
다급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던 베일리는 갈등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저, 저도, 같이, 히이익!”
밖으로 나온 베일리가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보더니 다리가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성공적··· 나름 성공적으로 모여든 병사들이 다시 방진을 짰다.
하지만 그 수는 이미 열 명 남짓으로 줄어든 상황.
그에 반해 적은 아직도 서른 명이 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저놈들.
나는 선두에서 서서 숨을 고르고 있은 세 놈을 노려보았다.
다시 보니 복장이 다른 놈들이랑 비슷하기는 한데 분위기가 묘하게 다르다.
“퉤, 끈질긴 놈들이군.”
선두에 선 놈의 말을 신호로 해서 숨을 고르고 대열을 정비한 놈들이 슬금슬금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뒤로 처지는 몇 놈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보통 도적놈들이면 이미 도망가고도 남을 상황인데 말이지.
문제는 놈들은 도망갈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이대로 다시 붙어봐야 방금 전 상황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봐, 백인장. 다른 방법이 없나?”
“네? 아, 백작님. 걱정 마십시오! 저놈들이 백작님의 털끝 하나 손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의지와 의욕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라서 그래.
그런데 잠깐만,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커억!”
“으악!”
“뭐··· 끄르륵!”
갑자기 놈들의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앞장서서 다가오던 세 놈도 당황했는지 급히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도 뭐가 빠져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네이선?!”
네이선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뒤에서 일어나는 소란은 네이선 때문이겠지.
“백인장! 돌격, 돌격해! 당장!”
“네?”
지금이야 놈들의 뒤를 기습했으니 괜찮지만, 곧 놈들이 정신을 차리면 네이선이 죽는 것은 한순간이다.
아무리 네이선의 실력이 좋다고 해도 뒤에서 들이미는 칼까지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내 명령에도 불구하고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리는 백인장을 노려보다가 아까 집어 든 아밍소드를 치켜들었다.
“씨이발! 날 지키려면 돌격하라고 이 새끼들아!”
“으악! 리아안!”
“제독!”
내가 대열을 비집고 앞으로 나서자 우르타와 엘리엇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당황이 여실히 느껴지는 백인장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어엇?! 배, 백작···! 돌격! 돌격해! 백작님을 지켜라!”
“우아아아!”
한발을 뗄 때마다 더럽고 못생긴 놈들의 얼굴이 커진다.
몇 놈이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고 떠들었다.
그리고 선두의 세 명 중 한 사람이 나를 보고 뭐라고 명령을 내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한 놈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네이선 쪽으로 간 모양이다.
손에 익지 않은 아밍소드를 타고 강력한 충격이 내 손을 강타했다.
‘큭, 뭔 놈의 힘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예상해서 망정이지, 준비를 하지 않았으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전력으로 칼을 바위를 향해 내리치면 이 정도 충격이 올까?
아직도 칼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칭찬하고 싶을 지경이다.
“죽엇!”
하지만 이어지는 놈의 공격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팔목은커녕 어깨도 안 움직이는데 막기는 뭘 막아?
빗살처럼 내 옆구리를 향해 날아드는 칼을 커다란 그림자가 덮쳤다.
까앙!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보니, 언제 따라붙었는지 백인장이 흉악한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방패가 그렇게 든든하게 보였다.
“백작님! 이러시면 위험합니다!”
“고맙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목숨을 빚졌기에 일단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앞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고작 병사 놈이 감히!”
“도적 새끼가 감히!”
아, 나도 모르게 대꾸해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새끼 이거, 도적 아닌데?
그건가? 강도기사, 뭐 그런 거 있잖아.
붉으락푸르락한 그의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지만, 더 고무적인 것은 난전이 되자 오히려 놈들이 형편없이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눈치를 보는 놈은 물론이고 벌써부터 엉덩이를 빼고 도망갈 준비를 하는 놈들까지 보인다.
그리고 저 뒤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으아악! 괴물이다!”
“저런 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도망쳐!”
도적들을 지휘하던 놈이 이쪽을 한 번 노려보더니 다급하게 대열 뒤쪽으로 사라졌고, 나를 공격했던 놈은 씩씩거리며 다시 칼을 들었다.
“계속해보자고, 도적놈.”
내가 이죽거리기 무섭게 놈이 번개같이 칼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