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화> 간 큰 도적들 (2) >
“어이, 계속해보자고, 도적놈.”
내가 이죽거리기 무섭게 놈이 번개같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급하게 칼을 들어 막아낼 수 있었다.
예상했다는 듯 내 칼과 부딪히기 무섭게 바로 반대쪽으로 날아드는 놈의 칼.
순수하게 실력만 놓고 보면 내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이길 녀석이었다.
“합!”
짧은 기합성과 함께 내 옆에 바짝 붙은 백인장이 그 칼을 방패로 막아낸다.
휴대하기 불편하고 둔해서 그렇지, 방패라는 거, 정말 효율적인 무기잖아?
물론 방패를 들고 멍하니 서 있다면 저 도적의 실력으로 볼 때 그 틈을 노려 칼질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위아래뿐만 아니라 앞뒤로도 한발씩 움직이며 팔이 움직이는 범위를 원천 차단을 하니, 도적놈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애꿎은 방패만 두들겨 댈 뿐이었다.
실력 차이가 워낙 나다 보니 그 상태가 지속될 수는 없었다.
욕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녀석에게 우리는 어느 순간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피하십시오, 백작님!”
끝내 그의 칼끝이 내 어깨를 스치며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균형이 거의 무너졌던 백인장은 애타게 소리를 질렀고, 나는 드디어 웃을 수 있었다.
고통은 나를 즐겁게 하··· 아니, 그게 아니고!
드디어 나의 전략 병기가 도착하셨다.
“받아랏!”
마음이 다급했는지 기습의 이점도 포기하고 소리를 지르는 네이선의 목소리에, 내 목을 거두려는 속셈으로 칼을 휘두르던 도적의 몸이 반 바퀴 돌았다.
이미 동작이 시작된 후였다는 점에서 볼 때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면 물리 엔진 고장 수준인데?
그리고 그가 몸을 비킨 좁은 틈으로 서늘한 은빛 섬광이 지나갔다.
타다닥!
빠르게 나와 거리를 벌린 도적이 기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실컷 대비했는데 네이선이 후속 공격을 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이제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네놈은···.”
“네 친구들 다 죽었는데 너도 이제 죽어야지?”
공격을 포기하고 내 앞으로 와서 든든하게 막아선 네이선을 살펴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온몸에 피칠갑이다.
물론 여느 때처럼 자기 피는 아니고 남의 피, 어?
왼쪽 허리춤의 붉은 빛이 유독 짙다.
그리고 옷이 잘렸어?
“뭐? 누가 죽었다고?”
도적이 움찔하며 눈동자가 흔들린다.
네이선이 다쳤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당황한 모양이다.
나름 친구들이라고 꽤 친했던 모양이네.
“뒤에 있던 네 친구들 말이야. 둘 다 죽었어.”
“네 이놈! 그럴 리가 없다! 멍청한 그놈은 몰라도 비셰 겨···!”
분명히 경이라고 하다가 말았지?
진짜 도적기사였어?
그런데 기사가 아무리 생활고에 시달려서 타락해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도적 떼를 이끌기도 하나?
“비셴지 비곈지 몰라도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겠어?”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네이선이 말로 이죽거리다니.
그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리라.
그래도 전황은 이미 개인의 실력으로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용병인지 도적인지 모를 다른 놈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해서 사방으로 도주하는 중이었고, 도주할 길을 찾지 못한 몇 명만 필사의 저항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저 도적기사도 이제 도주를 하겠지?
“젠장, 포위는 포기한다! 백작을 죽여!”
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보통 이 상황에서는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기고 튀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일단 국가 간의 사절이라는 것이 맨손으로 움직이기는 어려워서 세 번째 마차에는 부피가 작고 귀한 예물들이 쌓여있었다.
도적놈들이 눈이 돌아가도 이해가 될만한 것들이기는 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정규병의 호위를 뚫는 것도 쉽지 않고, 설혹 탈취에 성공해도 타국의 사절이 자기 영지에서 습격을 당하는 치욕을 겪은 영주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도적질을 하겠어?
그러니까 당연히 저놈들도 ‘인생 한 방!’을 노린 멍청이들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우리를 노려보는 그 도적기사(추정)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지자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병사들은 백인장의 명령에 따라 잡아 죽이던 도적들을 내팽개치고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남은 인원은 대충 열둘?
합류하지 못한 인원이 다 죽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꽤 심각한 피해였다.
그나저나 포위를 포기한다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을 동원한 거지?
심지어 저놈, 내가 백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순한 습격이라고 보기에는 묘하게 어색한 상황에 대한 고찰을 때려치우고 주변을 살폈다.
놈들이 매복해있던 자리에서 몇몇 인영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후우, 이거 정말 쉽지 않겠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잔뜩 성이 난 네이선의 등 근육이 꿈틀거린다.
“거,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언제 다가왔는지 내 옆에 바짝 붙은 우르타가 칼을 고쳐 쥐며 다부지게 대답했다.
···별로 믿음은 가지 않았다.
“뭣들 하나! 당장 이쪽으로···!”
“아, 아, 잠깐만. 이거 상황이 그쪽이 말한 거랑 다르잖소?”
몇 안 남은 도적들을 데리고 이미 단단한 방진을 만든 우리에게 달려들 용기는 없는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도적기사에게 매복조의 대표로 보이는 털복숭이 남자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오호라, 내분인가? 그러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달라진 것은 없다! 이놈들만 다 죽이면!”
“그러니까 다 죽이는 건 그쪽이 맡은 일이지. 우리는 화살을 쏘고 도망치는 놈들만 잡는 거였잖아? 우리는 굳이 정규병과 정면으로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 않거든.”
“네 이놈! 지금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냐?!”
도적기사, 아니 도적 두목(?)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털복숭이는 마음을 정한 후였다.
“약속을 어긴 것은 그쪽이고. 우리는 이번 일에서 손 떼겠소.”
그 말을 끝으로 털복숭이와 그 일행들로 보이는 이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이죽거렸다.
“그래, 이제 다음 수를 꺼내 보시지? 아니면 내가 당신 목을 들고 후작에게 돌아가서 이 일을 따져야 할 것 같은데?”
“후작?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네놈 실력으로 내 목을 어쩌겠다고?”
뭐야, 후작이 아닌가?
분노가 가득하기는 했지만 전혀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내가 살짝 당황하는 사이, 네이선이 칼을 크게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는 두어 발 앞으로 나섰다.
“잔소리 말고 덤빌 거면 빨리 덤벼. 시간 아까우니까.”
“이 노오옴!”
네이선의 도발에 도적두목이 다시 달려들 자세를 취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눈치를 보던 나머지 도적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에서 벌떡벌떡 일어서서 뛰는 놈들도 몇 놈이 보였다.
“잡아!”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된 도적두목을 본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타국의 사절단임을 알고도 공격하는 100명에 육박하는 도적 떼라니, 그것도 수도 인근에!
너무 냄새가 나잖아?
하지만 내 말에 앞으로 뛰어나간 것은 네이선뿐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몇 발자국 앞으로 가다가 따라오는 인원이 없자 걸음을 멈추고 바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 사이에 도적두목은 이미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이봐, 백인장?”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백인장을 돌아보며 뾰족하게 물었지만, 백인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백작님. 저는 폐하께 백작님을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백작님을 버려두고 저놈을 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놈을 잡아야 해!”
“죄송합니다. 저놈이 끝인지도 모르고, 먼저 사라진 놈들이 언제 다시 돌아오거나 멀리서 화살을 쏠지 모릅니다. 뭐하나! 백작님을 마차로 모셔! 너는 다친 놈들 챙기고!”
다시 한번 놈을 쫓으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나는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고개를 떨궜다.
확연하게 상처를 입은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네이선의 옆구리에도 잠시 시선이 닿았다.
아무리 네이선이라도 저 몸으로 추격은 무리지···.
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은 제대로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한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이다.
이미 죽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살려야 하지 않겠나.
저놈을 잡는다고 한들,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만, 내가 알아서 돌아가겠네. 백인장은 살아남은 이들을 최대한 수습하게. 죽은 이들의 시신도 챙기고. 첫 번째 마차에는 부상자들을, 두 번째 마차에는 시신을 태워.”
“그렇다면 백작님을 모실 마차가 없습니다만.”
세 번째 마차는 예물마차다.
빈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몸을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들어가기야 하겠지만, 애초에 사람이 타는 마차가 아닌데 그게 편할 리가 있나.
“마차를 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말이 다 죽었는데.”
심드렁한 내 말에 백인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투구를 긁적였다.
그렇게 긁으면 느낌이 나기는 하나?
“그래도 백작님을 걷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걷는 게 좋지는 않아. 하지만 계속 여기에 머물 수는 없잖는가. 빨리 안전한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하자고. 최대한 효. 율. 적. 으. 로.”
* * *
다행히 이후로는 별 탈 없이 다음 목적지였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습격으로 일정이 지체된 것은 물론 말이 죽어 나가는 바람에 마차를 사람이 끌고 와서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이미 한참 늦은 밤이었다.
다른 것보다 마차를 사람이 끌 수 있다는 것에 좀 놀랐다.
물론 바퀴가 달려있으니 못 끌 것도 없지만, 그, 좀 그렇잖아?
우리를 본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밤중에 찾아온 피비린내를 물씬 풍기는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라니, 난리가 날 만도 하잖아.
처음에는 우리를 뭘로 생각했는지 마을의 자경단이 총출동하는 웃픈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헐레벌떡 달려온 인근 성의 성주라는 양반과 촌장 집에서 어색한 자리를 가지는 중이다.
“여기에서 이러지 마시고 제 성으로 가시지요, 리블르앙 백작.”
“아니요, 자작. 내 병사들은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려우니 오늘은 여기에서 묵도록 하겠소.”
“하지만 이리 누추한 곳에서 어찌.”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뚱뚱한 체격의 자작은 좌불안석으로 연신 나를 자기 성으로 가자고 꼬셨지만 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실제로 병사들은 다친 사람은 다친 사람대로, 안 다친 사람은 과도한 체력 고갈로 실신 직전이었다.
여기에서 말을 타고 한 시간은 가야 한다는 자작의 성까지 이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지 마시고 자작의 제안대로 백작님만이라도 일단 성으로 가심이 어떠십니까?”
반나절 사이에 10년쯤 늙어버린 부단장 베일리도 조심스럽게 권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다친 병사들을 버리고 나 혼자 편하게 지낼 수는 없네, 아쉬가른 남작.”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네이선도 병사들도 없이 혼자 움직이기가 좀 무섭다.
혹시 저 뚱뚱보가 습격을 사주한 놈이라면 나는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꼴이잖아.
귀족인 베일리 정도는 나와 함께 가기야 하겠지만, 저 쫄보가 유사시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차라리 우르타가 낫지.
계속된 내 거절에 울상이 된 뚱뚱보 자작에게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보다 자작은 치료에 필요한 약재들과 의사를 보내주시는 것이 어떻소? 그게 우리에게는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자작이 전폭적인 도움을 준다면 국왕 폐하께서도 기꺼워하시지 않겠소?”
내 제안에 뚱뚱보 자작의 얼굴이 살짝 폈다.
제 영지에서 타국의 사절이 습격을 당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니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내가 국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작이 그래도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해주면 아무래도 면피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물론 내가 직접 언급한다는 말은 안 했으니까 기회가 되면 말해주겠다는 거다.
기회가 되면 말이야.
그런데 내가 공식적으로 전달할 내용이 폭탄이라서 기회가 될지는 잘 모르겠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을 보내서 성 내의 모든 약재와 의사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과하게 의욕적으로 덤비는 그의 흥분을 살짝 가라앉힌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그런 일은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자작이 직접 가서 지휘하는 편이 더 좋지 않겠소? 게다가 자작까지 굳이 이곳에 머물 필요는 없지 않소?”
“하, 하지만 백작께서 이런 곳에서 머무시는데 제가 어찌.”
“아, 나야 뭐 어쩔 수 없지만, 자작까지 머물기에는 이곳이 너무 좁은 것 같아서 말이오. 다른 집들은···.”
촌장의 집은 당연하게도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이다.
그래봐야 시골 초가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다른 평민들이 사는 움집 따위보다는 월등하게 좋은 곳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당연히 촌장의 집은 내가 묵어야 하니 자작이 가야 할 곳은 이곳보다 더 수준이 떨어지는 곳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 잠시 눈을 굴리던 자작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 백작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런 일은 제가 직접 나서야 하는 법이죠! 어차피 일을 살피려면 잠을 잘 시간도 없을 테니 제가 직접 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너 지금 네 성으로 가서 명령 한마디 던지고 잘 거잖아.
딱 눈에 보이는구만, 뭘.
황급히 예를 올린 자작이 떠나자 노크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향해 인사를 올리는 엘리엇과 우르타를 본 베일리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평민에 불과한 두 사람이 귀족들만 있는 곳에 들어오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두 사람에게 물었다.
“상황은?”
“자작은 기마병 몇과 함께 급히 떠났습니다. 데리고 온 병사들은 마을에 남았구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부상자들은 어때?”
“두 사람이 더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내일 아침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우리 일행은 원래 나와 네이선, 엘리엇, 우르타, 베일리 외에도 30명의 병사, 8명의 하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습격으로 하인은 전원 사망, 병사는 벌써 12번째 사망자가 나왔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13번째 사망자가 나오겠지.
거동 가능한 병사가 고작 11명에 불과하니, 마차가 없었다면 병사 두 명이 부상자 한 명을 감당해야 하는 꼴이다.
사실상 호위라는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구성이 되어버린 셈이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응?”
갑작스러운 엘리엇의 말에 내가 생각을 멈추고 반문하자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방금 나간 자작에게 수도까지의 호위를 부탁하는 겁니다.”
“무난하네.”
“다만 이번 습격과 자작이 연관이 있다면···.”
“목을 따 달라고 내미는 꼴이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엇.
치안이 좋다는 수도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습격이다.
당연히 해당 영지의 영주가 용의선상에 가장 먼저 오를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100명이지, 건장한 남자 100명이 남들의 눈을 피해서 모이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
실제로 100명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 참, 살아남은 도적놈들을 포상(편안한 죽음)을 걸고 심문한 결과는 별것 없었다.
대부분 뜨내기 용병들이었고, 고액의 의뢰비에 의뢰 내용도 묻지 않고 합류했다는 것.
내용도 밝히지 않고 고액을 제시하는 의뢰라면 거의 대부분 구린 일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면 용병 짓 못 해 먹지.
용병들을 모집했다는 세 사람은 기사 같아 보였다는 내용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라서 놀랍지도 않았다.
“두 번째 방법은?”
“제독과 베일리 경, 그리고 말을 탈 수 있는 최소 인원만으로 수도로 향하는 겁니다.”
“응?”
“마차로 이동한다면 사흘, 지금 부상자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닷새 이상 걸리겠지만, 말을 타면 하루면 충분합니다. 일단 왕궁에 들어서면 상대가 누구건 허튼짓을 벌이지는 못 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왕궁에 도착하는 방법이죠.”
“아, 그건.”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엘리엇이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남겨진 인원이나 예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독과 베일리 경이 무사히 왕궁에 도착만 한다면 남은 인원이나 예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무사히 왕궁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심지어 이곳의 영주인 자작이 이번 일의 원흉이더라도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내가 왕궁에 공식적으로 도착한 이상 일개 자작 따위가 왕실에 들어갈 예물을 꿀꺽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 두 번째 방법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저기, 작전관. 그 계획은 문제가 있어.”
“네? 무슨 문제입니까?”
“내가 말을 못 타···.”
홱 소리가 나도록 나를 돌아보는 베일리의 시선이 따갑다.
이거 괜히 억울해지네?
태어나기를 금수저로 태어난 귀족 놈들이야 어려서부터 망아지를 타고 놀았겠지만, 나는 흙수저 출신이란 말이다.
사람보다 비싼(?) 말을 타 봤을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