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85화 (385/420)

< <385화> 죽을 만큼 힘들지만···. >

크다.

말이라는 동물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그 크기를 실감하니 부담스럽다.

물론 마차를 타거나 할 때도 말이 큰 짐승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등이 내 눈높이에 있는 거다.

당연히 똑바로 서면 말의 머리가 내 머리 위로 한참 위에 있다.

이 정도면 저 말 등에 올라가는 것부터가 문제다.

담장 기어오르듯이 올라갈 수는 없잖아.

“음,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마차를 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리엇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제독. 제독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아아니! 내가 겁이 나거나 그런 게 아니고! 어차피 내가 지금 승마를 배워봐야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래? 그 인원으로 움직이는 게 더 위험하지 않겠어?”

“지금 시간이 지체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전투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생각해보면 가능성을 떠나서 용의자는 한 명뿐이다.

아무리 예물의 가치가 높다고 하지만 타국의 사절이라는 것을 알면서 완전 무장한 30명의 병사를 상대로 덤벼드는 도적 떼가 있다는 것부터 코웃음이 나올 일이다.

심지어 그 무리를 이끄는 놈들이 전직 기사쯤 되는 양반들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런 놈들을 세 놈이나 물리친 네이선이 확실하게 말했다.

세 놈 다 제대로 배운, 기사 특유의 힘과 속도에 치중하는 검술을 사용했다고.

셋 중에 하나라도 잡았으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아졌을 텐데.

포위하고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했던 것은 이해가 된다.

우리 중의 한 사람이라도 살아서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왕국에 전달하게 되면, 벨로키나 왕국의 국가적 위신 때문에라도 범인들을 어떻게든 잡아서 죽이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굳이 나를 노려서 죽이려고 했던 점이나, 도주하면서도 예물이 담겨 있던 마차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적 떼가 노린 것이 예물이 아니라는 답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사절단을 다 죽여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군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첫 공격이야 어떻게든 격퇴했지만, 우리 쪽 전력도 크게 상했다.

병사들은 대부분이 다쳤고, 최종병기 네이선조차 무리를 하는 바람에 부상을 입었다.

전력의 80% 정도가 날아가 버린 꼴이다.

그러니 괜히 저 쪽에게 시간을 더 주었다가는 더 치명적인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뚱뚱보 자작도 믿기 어려운 것이, 벨로키나 왕국의 귀족 중에 스코타 후작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이야 상황을 모르니 내게 협조하고 있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마을을 호위하는 병력들에게 우리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지도 몰랐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다행히 승마를 가르쳐주실 베일리 남작도 계시니 빨리···.”

“알아, 알았다니까? 나도 아는데··· 어휴.”

* * *

“허허, 괜찮으십니까, 백작님?”

“말 걸지 말게. 해가 지기 전에 익숙해져야, 으헛!”

“그래도 상당히 빠른 편이십니다. 저는 처음 말을 탈 때 익숙해지기까지 열흘도 넘게 걸렸습죠.”

위로하는 척하며 자꾸 말을 거는 백부장을 노려보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백부장을 노려보려면 몸을 틀어야 하는데 몸을 움직일 엄두가 안 나는 거다.

그리고 마차를 처음 탈 때 승차감이 쓰레기라고 욕했던 과거의 내가 미워진다.

마차는 엉덩이만 아팠는데 말은 허벅지, 엉덩이, 허리, 등, 어깨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게다가 마차는 그나마 자세를 바꿔가면서 어떻게든 최적의 자세를 찾기 위해 낑낑거릴 수나 있었지, 이건 숫제 고문이다.

왕궁으로 향하는 결사대(?) 인원은 나와 베일리를 포함해서 백부장과 승마에 능한 병사 둘, 길 안내를 맡은 마을의 노인이었다.

말은 뚱뚱보 자작에게 정중하게(?) 협박해서 빌렸다.

수도 근처의 영지를 가진 자작쯤 되니까 이 비싼 말을 여덟 마리나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체형을 볼 때 승마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아 참, 길잡이로 구한 촌 동네의 노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지금 꼴을 보면 말을 제일 잘 타는 사람이 저 노인이다.

젊었을 때 징집되어 전령 노릇을 했다더라.

징집병 출신 전령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는 수많은 불가능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랴! 이랴!’를 외치며 달리고 싶지만, 솔직히 지금 속도인 속보(trot, 약 13km/h)도 내게는 버겁다.

속성 과외랍시고 서너 시간만 교육받고 바로 출발했으니 뭐.

이 정도면 차라리 마차를 타는 쪽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인데, 베일리가 능숙하게 말을 몰아내 옆으로 다가왔다.

“백작님, 너무 늦기 전에 야영할 곳을 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야간 승마는 위험해 보이십니다.”

그러게 말이야.

가로등도 없는 세상에서 한밤중에 말을 타다가는 진짜 골로 가겠어.

“그러지. 어차피 말도 쉬어야 하니.”

내가 어색하게 말 핑계를 대자, 말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갑자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푸르륵거렸다.

“하하하···.”

베일리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멀어지고 나는 나를 태우고 경쾌하게 걷고 있는 덩치 큰 동료를 원망을 담아 노려보았다.

“푸르릉!”

이놈, 왜 기분이 좋은 것처럼 느껴지지?

* * *

“으으으, 진짜 어디가 잘못된 것 아닐까?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모닥불 앞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육포를 쥐고 뜯어먹으면서 중얼거리자 길잡이 노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일단 몸에 힘을 빼시고 말의 호흡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노인은 부족한 언변으로 열심히 말 타는 방법을 강의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애초에 전제가 틀려먹지 않았나.

“힘을 빼면 당장 낙마해서 뒤질 것 같은데 어떻게 힘을 빼나?”

“죄, 죄송합니다.”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는 노인을 보니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노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어디까지나 초보자인 나를 위해 나름 성의껏 설명한 것이 무슨 죄겠어.

그런데 나는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짜증을 그에게 풀어놓고, 그는 잘못이 없음에도 사과를 하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럽다.

계급사회라는 것이지.

나이가 자기 아들보다 어려도, 나는 무려 ‘백작 나으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다니, 내가 욕하던 귀족 놈들과 내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아니, 자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혹시 모르니 말들이 불편하지 않은지 확인 좀 해주게.”

“네, 네, 백작님.”

노인도 불편해 보이고 나도 괜히 또 다른 실수를 하기 싫어서 그럴듯한 핑계를 대서 그가 자리를 피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노인이 냉큼 자리를 떴고,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베일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작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마 내일이면 몸이 더 안 좋으실 겁니다.”

“으음.”

나도 예상하고 있다.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을 온몸에 힘을 준 채 흔들리는 말 위에서 시달렸으니 내일은 근육통이 얼마나 심하겠어?

아침에 몸을 일으킬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지구의 지식은 이럴 때도 소중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결국 근육통에 불과하다.

참으려면 참지 못할 것도 아니고, 아무리 아파도 죽거나 몸에 영구적 장애가 올 확률도 희박하다.

반대로 내 몸이 조금 괴롭다고 일정을 늦췄다가는 진짜 찍소리도 못하고 죽을 거다.

호위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수준으로 인원이 줄었으니, 내가 가장 취약한 상황은 바로 지금이었다.

게다가 후작이 습격 실패를 보고받고 뚱땡이 자작을 협박하거나 포섭한다면 우리의 일정이나 상황까지 다 알게 될 테니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그래도 가야지. 내일이면 왕궁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내 말에 지도를 살펴보던 백부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백작님 말씀대로 마차를 타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내일은커녕 사흘 후에나 수도에 도착할 겁니다.”

사흘 후면 마차를 타고 가는 거랑 비슷한 시간이잖아.

마차는 도로가 있는 곳만 갈 수 있다는 단점까지 감안해도 이동 시간이 비슷하다면, 차라리 이 인원만 마차를 타는 편이 더 나았다는 말이다.

“내일은 조금 더 빨리 움직여보지. 지금보다 두 배 정도··· 그 정도면.”

“백작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더 빨리 달리면···.”

베일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 싫으면 해야지. 괜히 나 때문에 자네들까지 위험하게 만들어서 면목이 없군.”

“아, 아닙니다. 그런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하하, 군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제 병사들도 백작님을 보호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았을 겁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본 적도 없는 나를 보호하겠다고 너무 많이 죽었지.

백부장은 그렇게 말을 했지만, 과연 하나뿐인 목숨을 허무하게 잃은 병사들도 그 말에 동의할까?

“이만 자도록 하지. 내일은 더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백부장은 이번 일이 끝나면 병사들에 대해서 서류로 작성해주게. 죽은 이들은 혹시 유가족이 있다면 꼭 써주고. 못난 자기 위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보답을 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백작님. 죽은 녀석들도 백작님의 아량에 감사할 겁니다.”

* * *

“멈춰랏! 웬 놈들이냐!”

한 나라의 수도이기에 병사들의 군기도 엄정했다.

우리 일행이 석양을 등지고 구보(canter, 약 20km/h)로 다가가자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방진을 구성했고, 입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흩어졌다.

성벽 위의 성가퀴(城堞) 사이로 활과 쇠뇌를 든 병사들이 우리를 조준하니,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고슴도치가 될 판이었다.

“으어억! 멈춰! 멈추라고, 이 말 새끼야!”

망아지도 아니고 말한다고 알아먹을 짐승도 아니지만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고삐를 힘껏 당기고 싶은데 마음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지금 말에서 내리면 나 아마 걷지도 못하지 않을까?

다행히 내가 화살꽂이나 장창방진에 걸린 고기 조각이 되기 전에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길잡이 노인과 백인장이 급하게 내게 따라붙어서 말을 진정시키기도 했고, 병사들이 들고 있는 나와 프레티아 왕실 문장기를 본 수비대장이 활을 쏘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한 나라의 왕성을 상대로 기병 6기로 돌격하는 정신 나간 인간이 있을 리가 없기도 하지만.

겨우 멈춘 말에서 내려오니 바닥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 살짝 휘청거렸다.

제, 젠장.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여!

“누구십니까? 여기는 벨로키나 왕궁의···.”

먼지가 뽀얗게 쌓이기는 했어도 내가 입고 있는 것은 고급 재질의 귀족 복장이다.

왕성의 성문 수비대장답게 별별 귀족을 다 겪어본 남자가 조심스럽게 으름장(?)을 늘어놓으려고 하길래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의 말을 막았다.

“알고 있다. 나는 프레티아 왕국의 사절단장, 리블르앙 백작이다. 오는 길에 대규모 도적의 공격이 있었으니 당장 네 윗선에 보고하도록.”

“네?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내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수비대장에게 다시 고압적으로 소리쳤다.

“타국의 사절이 이 나라 안에서 공격당했다는 말이다, 이 멍청아! 네가 책임질 게 아니라면 빨리 가서 보고햇!”

그제서야 당황하며 내 뒤에 도열한 병사들이 들어 올린 깃발을 다시 확인한 수비대장이 기함하며 방진을 유지하는 병사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당장 사절단 일행을 왕궁으로 모셔라! 그리고 부관! 당장 가서 프레티아 왕국에서 사절단이 오셨다고 전해! 어서!”

소리를 지르면서도 프레티아 왕실의 문장을 힐끔거리며 살피는 것이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다.

가짜 깃발이 아닌지 재차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하긴 수도의 성문을 지키는 책임자라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겠지.

십여 명의 병사들이 엄중하게 호위하는 가운데 급히 공수된 마차에 올라탔다.

다시 말을 타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타고 온 말들이 다 퍼져버렸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달리는 동물이라는 위명답게 진짜 죽기 직전까지 달려오기는 했지만, 이미 달리는 관성이 사라진 이상 다시 달리게 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길잡이 노인의 말에 의하면 이대로 다시 사람을 태우고 달리면 영구적인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내 것도 아닌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으니 급히 마차를 공수해달라고 했지만, 솔직히 다시 말에 오를 자신이 없었다.

어제 승마를 배웠던 내가, 오늘 무려 15시간에 걸쳐 200km를 넘게 주파했다.

이제 팔다리가 어디에 달려있는지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다.

* * *

“리블르앙 백작이시라고요?”

“그렇소.”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번 보고 다시 두꺼운 책을 뒤적거리던 관리가 재차 물었다.

“리블르앙 지역이 프레티아 왕국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곳은 왕실 직할령이 아닙니까?”

“그랬을 것이오.”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내 말을 이해한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백작으로 봉작되기 전에는 어느 가문에 속한 분이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처음 들어보는 가문의 성인데, 그 성이 왕실 직할지와 같다면 새로 봉작된 귀족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자기 직할령을 떼어 줘가며 백작으로 봉작한 인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은 아닐 테니 내 출신을 밝히라는 말과 같았다.

“귀국의 국방대신, 스코타 후작의 봉신이었던 스펜서 남작이었소.”

별것 아니라는 듯 평이하게 대답한 내 말에 관리의 표정이 기괴하게 바뀌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뭐라고···.”

“스코타 후작의 봉신이었다고 했소. 오는 길에 봉신 계약은 철회했고.”

봉신 계약 철회할 때도 계약을 맺을 때처럼 특별하게 무슨 의식을 해야 하나?

해봤어야 알지.

그런데 뭐, 이미 후작이랑 나는 서로 잡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사이가 되었으니까 굳이 그런 요식행위가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러니까 본국의 귀족이었는데 지금 타국의 사절로 왔다는 겁니까?”

“그게 중요하오?”

“······.”

귀족이 국적을 옮기는 것은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놈이 뻔뻔하게 옛 조국(?)을 사신으로 방문하는 경우는 처음 봤겠지.

그것도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배를 갈아탔으면서 말이다.

“아, 아닙니다. 리블르앙 백작님. 그럼 이쪽은···.”

“부단장을 맡은 베일리 아쉬가른 남작입니다.”

“아쉬가른 남작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억지로 당황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난 관리가 가볍게 예를 취했다.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저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당장 폐하를 알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방을 내어드릴 테니 여독을 풀고 계시지요. 최대한 빠르게 상황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중간에 들른 영지가 몇 개고 안면을 튼 귀족이 몇 명인데 지금까지 사절단이 온다는 것을 모르겠어?

전령들은 나 따위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니까 지금쯤이면 왕궁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왕궁에 들어왔으니 1차 목표는 완수했다.

나를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 이제 나를 남몰래 쓱싹한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내가 죽으면 외교적으로 엄청난 약점이 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 비웃음을 살 테니 후작도 그 정도 무리수를 두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벨로키나 왕실에서 그 꼴을 그냥 두고 보겠어?

그래, 이제 조금, 아주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조금만 쉬자.

진짜 엉덩이와 허벅지에 감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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