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그녀의 과거 >
귀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특별히 귀족다운 일상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배 위에서 보내고 있는데 귀족 같은 삶이라니 가당키나 하겠는가.
물론 귀족들이 입는 평상복과 예복은 한 벌씩 마련해 두었지만, 그냥 옷장에서 썩어가는 중이다.
평상복조차 치렁치렁하고 불편해서 도저히 배 위에서 입을 것이 못 되거든.
심지어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찢어질 정도로 옷감이 연약하니, 돈이 아까워서라도 못 입는다.
“이해가 안 되는군, 이딴 옷을 도대체 왜 입는 거야?”
브라키오스 백작의 명령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내게 입힌 옷은 화려함을 과시하는 목적 외에는 의복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성능조차 가지지 못하는 옷이었다.
불편하고, 답답하며, 광대 같은 모습에 창피하기까지 하다.
여기에 비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귀족용 평상복은 매우 옷다운 옷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숨 막힐 듯한 갑갑함과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나와 비슷한 꼴을 한 베일리가 흐트러진 내 옷매무새를 잡아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차피 파티복에 익숙해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작씩이나 되었으니 앞으로 파티에 초대받을 일이 많지 않겠냐는 말이었지만, 그건 잘 모르겠다.
백작이 아니라 공작이 되었다고 한들, 다른 귀족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파티 초대장 따위가 날아올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번처럼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파티 따위 절대로 가고 싶지 않다.
“프레티아 왕국 사절단 대표, 리블르앙 백작이십니다!”
홀의 문이 열리며 나와 베일리의 등장을 알리는 외침이 퍼져나갔다.
홀 안에 있던 30명쯤 되는 인원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호기심, 비웃음, 의아함 등 가지각색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홀 안의 인원 가운데 가장 화려한 복장을 입은 이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하, 그대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아, 이제 예의를 갖춰야 하나? 오랜만이오, 리안 리블르앙 백작.”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초대장이라고 날아온 것이 브라키오스 백작의 명의가 아니었는데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지.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레리아 백작.”
“하핫,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스코타 후작에게 선수를 빼앗겨서 내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그래도 이렇게 백작이 스코타 후작의 그늘을 벗어나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니 참 좋소. 비록 본국이 아니더라고 말이오.”
서글서글한 인상의 발레리아 백작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도하게 반겨주었다.
원래 이런 사람인지, 정적인 스코타 후작이 나 때문에 빅 엿을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조반니 발레리아 백작.
벨로키나 왕국의 최대 교역항인 론 항구와 그 일대를 영지로 가진 대영주다.
영지의 입지도 그렇고 정치적 노선도 반대라서 스코타 후작가와 꽤나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유명하지.
그리고 내가 일개 평민 선장이던 시절에 무려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그때 아마 인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말이야.
호스트인 발레리아 백작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니 귀빈석 정도 느낌의 화려한 자리에 앉아있던 백발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가왔다.
“잘 어울리는군, 어서 오시게.”
“덕분입니다, 브라키오스 백작.”
“허허, 이렇게 갖춰 입으니 아주 훤칠하시군. 그래, 리블르앙 백작은 아직 미혼이신가?”
갑자기 왜 호구조사를···?
딱히 숨길 일도 아니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속 바다 위에서 지내다 보니 가정을 꾸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결혼식이 잡혀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역시 그런가. 하긴, 평민 출신의 타국 귀족에게 백작위까지 줘가면서 영입할 정도이니 당연히 혈연으로도 묶어두려고 했겠지. 혹시 상대가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물어도 되겠소?”
“국왕 폐하의 하나뿐인 누이이신 엘리안 전하십니다.”
그녀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광대가 승천하고 어깨가 으쓱거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반응이···?
갑작스러운 침묵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니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발레리아 백작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브라키오스 백작은 금이 간 쟁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뭔데?!
“지금 엘리안이라고 했소?”
살갑던 방금 전의 모습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묻는 브라키오스 백작을 보며 나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본국의 유일한 왕녀이시며, 고귀한 피를 가진 분이십니다. 호칭에 주의해 주시오, 브라키오스 백작.”
아무리 타국의 공주라고 해도 그렇지, 내 앞에서 경칭도 안 붙이는 건 좀 심하잖아?
“아, 아. 그렇지. 미안하게 되었소, 리블르앙 백작. 내가 실수를 했군. 프레티아 왕국으로 돌아갔다면 확실히 왕녀 전하시지. 결국 그리되었군.”
돌아갔다고? 엘리안이 후작에게 잠시 의탁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런데 자기 손녀도 아니고 엘리안 이야기를 한 것이 표정 관리도 못 할 정도로 놀랄 일인가?
어쩌면 엘리안과 인연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그녀를 편하게 불렀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간다.
“그럼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나중에 봅시다, 리블르앙 백작.”
내가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브라키오스 백작은 몸을 돌려 멀어졌다.
그냥 인사만 하려고 온 것이 아닐 텐데 이렇게 간다고?
내가 의도를 알 수 없는 백작의 태도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 있던 발레리아 백작이 뭔가 급히 수습하려는 느낌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브라키오스 백작과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일단 이쪽으로 갑시다. 내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많소.”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호스트인 발레리아 백작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기에 일단 의문을 접어두었다.
발레리아 백작을 따라 소개받은 사람들은 꽤 되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푸싱웰 남작이라는, 나처럼 직접 상단을 지휘한다는 중년 남자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말하는 것을 보면 거의 발레리아 백작의 가신 같은 느낌이었지만 내게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엘리안 왕녀 전하와 결혼을 약속하셨다고?”
주위를 물리고 단둘이 남았을 때 뜬금없이 꺼낸 발레리아 백작의 말에 나는 마시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백작위도 사실 전하와의 결혼을 전제로 받은 작위죠.”
내 대답에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린 그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던 부분인데 명쾌하게 해답을 주시는구려. 그나저나 엘리안 왕녀 전하라··· 경은 브라키오스 백작과 스코타 후작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소?”
당신이 주최한 파티에 주빈으로 올 정도면 후작이랑 그리 친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전혀요. 아시다시피 제가 스코타 후작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기간이 길었던 것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하긴, 전 후작은 수하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주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원래 브라키오스 백작은 정치적 노선이 뚜렷한 사람은 아니었소. 전 스코타 후작과도 꽤 잘 지냈었지.”
자꾸 전 후작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현 후작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국방대신에서 밀려난 것도 그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원인이거나.
“현 후작이 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내 말에 피식 웃은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정도야 경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 아니겠소? 문제는 그쪽이 아닌데···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그, 엘리안 왕녀 전하가 전 스코타 후작가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 있, 아니, 호오? 그러고 보니?”
발레리아 백작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이 남자도 몰랐던 모양이군.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압니다만,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더 큰 거물이 되셨군?”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그녀와의 일을 사실대로 밝힐 수도 없고 오해를 풀기도 귀찮아서 가만히 있자 그는 웃음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오, 백작. 전 스코타 후작이 브라키오스 백작에게 혼사를 제안한 적이 있소. 상대는··· 흠.”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꽃다운 처녀를 50 먹은 늙은이와 결혼시키려고 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저 노인네는 나이가 50이 되도록 결혼도 안 했다는 말인데···.
설마 그녀를 후처로 들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아냐?
“전 부인과 사별한 후로 결혼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던 브라키오스 백작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다고 하니 엘리안 왕녀 전하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오. 실제로 그 조건으로 몇 가지 정치적 문제도 협조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
아, 그럼 방금 전에 브라키오스 백작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가···?
“아, 아, 경을 탓할 일은 아니지. 진실이 어떻든 간에 경이 그녀를 빼돌린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집에 돌아온 왕녀 전하의 결혼 상대가 된 것뿐이니 말이오. 그렇지 않소?”
말을 그렇게 하면 마치 내가 그녀를 빼돌렸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 같잖아!
“···물론입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추고 내가 수긍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경도 브라키오스 백작의 입장도 이해해 주시오. 그의 입장에서는 지참금을 내놓았는데 신부 측에서 신부가 사라졌다며 결혼을 취소하고, 사라진 신부가 엉뚱한 사람의 결혼 상대가 되어 나타난 꼴이니 말이오.”
“하지만 브라키오스 백작이 화를 내야 할 상대는 죽은 전 스코타 후작이 아닙니까?”
“그렇소. 그래서 그가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기도 하지.”
아하, 대충 상황이 예상이 된다.
전 후작이 결혼을 빌미로 몇 가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양보를 요구했고, 브라키오스 백작은 그 요청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덜컥 전 후작이 죽어버린 거지.
그리고 엘리안은 탈출해서 내게 폰테 섬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했고···.
장례식과 후작 승계가 끝나고 현 스코타 후작에게 브라키오스 백작은 결혼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부가 없어진 걸 어쩌겠나.
게다가 꼴을 보아하니 현 후작은 전 후작처럼 국방대신인 브라키오스 백작의 협력을 받기보다는 자기가 스스로 국방대신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결혼 약속? 그딴 거 몰라, 헛소리 말고 그 자리나 넘기셔.’라고 나온 거지.
그래서 브라키오스 백작은 스코타 후작가에게 결혼 사기를 당한 것도 모자라 직업(?)까지 잃는 수모를 당한 거다.
와, 생각해보니 이건 부처님도 못 참겠는데?
* * *
파티의 호스트라는 자리는 참 바쁜 자리다.
파티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초대한 손님들이 파티를 잘 즐기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중요한 손님이라면 일부러 부르거나 가까이 가서라도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그런 고로 나는 혼자 남겨졌다.
발레리아 백작이 나만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배신자 같으니라고.”
나도 모르게 홀 한켠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베일리가 묘령의 여인과 춤을 추고 있었다.
파티에서 추는 춤이라는 것이 각국 공통인지 꽤나 익숙해 보인다.
처음에는 내 수행 부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잘 따라다니더니 발레리아 백작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저렇게 춤을 추러 나가더라.
그래도 발레리아 백작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손님들에게 갈 때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백작만큼은 아니지만, 나에 대해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는 귀족들이 몇 명 있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노골적으로 내가 가지고 온 국서(國書)에 대해 물어보는 무례한 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귀족이 된 배경(스코타 후작과 얽힌)이나 프레티아의 국내 상황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해줄 말은 정해져 있으니 그 대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겠나.
아는 게 있어야 대화도 하지.
“안녕하세요, 백작님?”
“음? 아,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호호호, 아가씨라니.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요. 레비라고 해요.”
“예법에 어긋났다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직 예법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만.”
혼자서 구시렁거리던 내게 말을 건 여자를 살펴보니 귀부인 몇 명을 끌고 다니며 연회장을 누비던 여자였다.
내 눈에 띌 때마다 혼자 있는 경우가 없었으니 제법 이름있는 집안의 여식이겠지.
“아니요, 특별히 예법에 어긋난 것은 아니에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까.”
“죄송하군요, 제가 이런 자리가 처음인지라. 지금 알려주시면 앞으로 잘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방금 알려드렸잖아요, 레. 비. 라고.”
레비인지 라비인지 하는 이름 말고 다른 것을 알려줘야 할 것 아냐.
귀족 사회에서는 본인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이 어느 가문의 누구냐는 것이니까 말이다.
“어느 가문의 영애신지···.”
“훗, 그건 저랑 춤을 추면 알려드리죠.”
장난스럽게 웃으며 살포시 손을 내미는 그녀를 보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여기에서 이걸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재수 없다고 싸대기 맞나?
“그, 그게, 아가씨. 사실은···.”
“레비, 여기서 뭐 하는 게냐?”
“앗, 아버지.”
어떻게 거절해야 이 상황을 최대한 무난하게 넘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낯익은 음성이 구원의 손길을 뻗어왔다.
“쯧쯧,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을 텐데? 백작을 그만 난감하게 하고 어서 물러나거라.”
“치잇, 그래도 춤을 배운 후에는 꼭 저랑 추는 거예요?”
하, 내가 춤을 못 추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춤추자고 한 거야?
살짝 흥분되었던 마음이 짜게 가라앉았다.
내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그녀가 내게 살짝 윙크를 날리며 멀어지자 담담한 표정의 브라키오스 백작이 다가왔다.
“어미 없이 키웠더니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자라고 말았소. 하지만 본성은 착한 아이이니 너무 탓하지 마시구려.”
“아, 따님이십니까?”
“그렇소. 그보다 지금 바쁜 일이 없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소?”
“물론입니다.”
그런데 잠깐만.
그러니까 엘리안이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딸이 있으면서 엘리안이랑 결혼하려고 했던 거야?
이 할아버지 이제 보니 순 도둑놈이잖아?!
* * *
내가 브라키오스 백작을 따라 홀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래도 자기 본분을 잊지는 않았는지 베일리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백작님, 어디 가십니까?”
“잠시 브라키오스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네.”
“그럼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내가 대답할 질문은 아닌 것 같아 브라키오스 백작을 바라보자 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베일리 경, 파티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오?”
“아닙니다, 브라키오스 백작 각하.”
“그거 다행이군. 혹시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 백작과 잠시 시간을 가진 후에 이야기를 들어봐도 되겠소?”
“아, 괜찮습니다. 훌륭한 파티로군요.”
이봐, 베일리.
호스트는 브라키오스 백작이 아니라고.
내가 아무리 예법에 무지하다지만 최소한 파티에 대한 칭찬은 호스트에게 하는 거 아닐까?
베일리가 물러나자 브라키오스 백작은 홀 뒤편으로 이어진 문을 지나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당연히 나는 그 뒤를 따라갔고.
시종 하나 없이 잘 걷는 것을 보니 이 저택에 꽤나 익숙한 것 같다.
“일전에는 내가 실수를 했소. 이 기회에 사과드리지.”
“아, 괜찮습니다. 백작의 상황은 발레리아 백작에게 들었습니다.”
“후우, 이해해 준다니 고맙군. 그녀는 건강하오?”
“···네. 다행히 지금은 매우 건강합니다.”
앞서 걷는 할아버지의 등이 어쩐지 좀 짠해서 나도 모르게 사족을 붙였다.
그러자 거침없던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춘다.
“‘지금은’ 이라.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군.”
“백작도 아시겠지만, 후작 저택을 몰래 빠져나오는 것이 쉬웠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죠.”
천천히 몸을 돌린 브라키오스 백작이 나를 보며 물었다.
“정말 그녀가 스스로 후작 저택을 나왔다는 거요?”
“물론입니다.”
“···혹시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아시오?”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할아버지 눈빛이 너무 애틋한 거다.
왜 내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그딴 눈빛을 하냐고!
“후작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싫어서라고 들었습니다.”
‘너 같으면 아버지뻘인 노인이랑 결혼하고 싶겠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후, 참자, 참아.
여자의 과거(?)를 가지고 질척거리는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