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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88화 (388/420)

< <388화> 밀실 외교 >

눈앞이 번쩍하도록 뒤통수를 맞은 브라키오스 백작에게도 아픈 기억이겠지만, 나에게도 그녀와 결혼할 뻔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재미없는 주제였다.

그런데 내가 연기를 너무 잘한 것인지, 브라키오스 백작이 감정에 휘둘려 눈치가 없어진 것인지 몰라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걷는 내내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질문은 그녀가 자신과의 결혼을 피해 도주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확인성 질문, 아무래도 자기가 싫어서 예비 신부가 도망간 것은 아닌지 제법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물론 실제로 그녀가 늙은 예비 신랑이 싫다고 도망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젊은 여자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어 하겠냐고?

이 양반은 양심이 있는 건가?

브라키오스 백작을 상대하다 보니 섬에 있을 때 그녀에게 얼핏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나이 든 고위 귀족과 결혼이 결정된 상태였다고 했지.(201화 참조)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40대 정도 될 줄 알았지, 이런 할아버지일 줄이야.

그 귀족이 부인과 사별했다고 했으니, 그게 아마 브라키오스 백작이 맞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는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쪽으로 들어가지.”

불행 중 다행이랄까, 걷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복도를 몇 번 꺾어서 들어가서 사방이 막혀있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백작은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리블르앙 백작.”

예상했던 대로 그 안에는 발레리아 백작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파티는 핑계이고 이 두 사람은 따로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풀리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분명히 스코타 후작 측에서 격렬하게 견제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주 깨끗하다.

아마 나의 죽음을 확신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 내가 한 기대는 별것 아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상이랄까?

스코타 후작이 벨로키나 왕국 귀족 중 최고의 권력자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귀족들이 모두 후작의 눈치나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작가가 권력을 얻기 전에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던 가문들은 이를 벅벅 갈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후작에게 안 좋은 일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립박수를 칠 용의가 있을 것이다.

“리블르앙 백작도 무엇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는 알고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

“글쎄요, 내용을 듣기 전에는 미리 짐작하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죠.”

내 말에 두 백작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피식거리며 웃었다.

“농담에는 소질이 없으시군.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담담할 수는 없지. 쓸데없는 눈치 싸움은 관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어차피 리블르앙 백작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소?”

잠시 분위기를 살피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준비된 의자에 앉으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웃으면서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아사리판이 정치, 외교판이라는 것은 상식 아닌가?

아무리 상대의 의도가 좋은 것 같아도 함부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물론 두 분이 도움을 주시겠다면 거절하지야 않겠지만, 글쎄요, 제가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요?”

“다시 말하지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맙시다. 우연치 않게 좋은 자리를 마련했지만 스코타 후작의 귀는 크고 눈은 밝으니.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소. 게다가 이런 자리를 다시 갖기도 어렵고 말이오.”

발레리아 백작이 집주인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연륜의 차이가 있어서인지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브라키오스 백작이었다.

같은 백작이라지만 두 사람 간의 서열에 미세하게라도 차이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후우, 좋습니다. 두 분이 도움을 주신다면 저야 감사한 일이지요. 아시다시피 스코타 후작과는 농담으로라도 좋은 관계라고 하기는 힘드니까 말입니다.”

“우리도 대충 상황을 알아봤소. 증거를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사절단을 공격한 자들은 스코타 후작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오.”

브라키오스 백작의 담담한 눈이 쉴 새 없이 내 반응을 살핀다.

공격을 사주한 사람이 후작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으니 충격이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나라의 사절단을 몽땅 죽여서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고?

그런 식으로 일을 벌여 놓으면 수습을··· 아,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구나.

우리가 다 죽었다면 어찌 되었건 다음 사절이 파견되기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고, 그 사이에 주인이 없어진(?) 폰테 섬을 무력으로 점거할 생각이었겠지.

물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폰테 섬을 무인도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페리아 족이고 나발이고, 그 섬에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국력이 약한 프레티아 왕국에서는 이 일을 계속 밀고 나가기 힘드니까.

물론 그렇게 쉽게 후작의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겠지.

후작이 폰테 섬에 페리아 족이 있다는 것을 믿는지 안 믿는지 몰라도, 작은 섬이라고 만만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로키나 왕국의 특성상 후작이 동원할 수 있는 해상 전력은 뻔한 수준이고, 애초에 결계로 보호되는 페리아 족의 마을을 발견할 수도 없으니 뭐.

그리고 페리아 족의 섬뜩한 마법적 능력과 마을의 인원수를 감안하면 후작이 최선을 다해도 폰테 섬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일단 저를 안내한 관리에게 말했다시피 스코타 후작과 봉신 계약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하고 오는 길입니다. 두 분께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한 나라의 국서(國婿)가 되는 입장인데 계속 타국의 작위를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흠,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문제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

“그렇지요, 양국이 서로 불편하게 될 테니까.”

두 사람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레리아 백작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내게 의문을 표했다.

“잠깐, 고작 그런 이유로 후작이 사절단을 죽이려고 했다는 거요? 그건 백작이 스코타 후작을 너무 가볍게 본 것 같은데 말이오.”

“조반니 경(발레리아 백작), 잠시 리블르앙 백작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야.”

브라키오스 백작의 차분한 말에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면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지.

“원칙대로라면 귀국의 국왕 폐하께 친서를 올리기 전에는 그 내용을 함구해야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간단한 내용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친서에 적혀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두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래, 그런 일이로군. 스코타 후작이 극단적인 방법을 쓸만해. 후작의 준비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무사해서 다행이오.”

“하하, 그렇다면 사절단이 왔음에도 그가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되는군요. 분명히 리블르앙 백작 일행이 모두 죽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친서의 내용은 벨로키나 왕국 입장에서 그리 달가울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표정에는 거리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최대 피해자는 후작이니까 상관없다는 태도다.

“잊혀진 종족이라. 정말 좋은 핑계 아닌가. 누가 생각해 낸 계책이오?”

문제는 두 사람도 친서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를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말이지.

아니, 위험한 길에 굳이 그녀를 데리고 올 수는 없었겠지만···.

“친서의 내용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외모는 인간과 유사하여 저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만.”

“흠?”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벨로키나 왕국을 상대로 내가 사기를 친 꼴이 되니 말이다.

내가 정색하며 페리아 족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들에게 페리아 족이 섬에 있건 없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페리아 족이라···.”

작게 중얼거리는 발레리아 백작의 표정이 약간 묘해졌지만 이어지는 브라키오스 백작의 말에 그 표정은 바로 사라졌다.

“아마 조만간 국왕 폐하께서 알현을 받아주실 것이오. 스코타 후작이 뒤늦게 발악을 하겠지만 리블르앙 백작이 살아서 왕궁에 들어왔으니 이미 늦은 게지. 흐흐, 그 표정이 기대되는군.”

그의 말대로였다.

이제 와서 나를 죽인다고 해도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된 상황이다.

“폰테 섬이라, 사실 부담스러운 곳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해군 전력이 크게 상해서 고심이 많았는데 오히려 잘된 일 아닙니까?”

“그렇지, 경을 해군대신으로 임명하는 일을 서둘러야겠어. 그래야 발언의 무게가 이쪽에 실리게 될 테니까. 아 참, 리블르앙 백작.”

“말씀하시지요.”

브라키오스 백작이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어찌 되었건 본국의 입장에서는 귀국이 전하는 내용이 그리 달갑지는 않소. 그러니 우리가 쓸만한 무기도 준비해 두었을 것 같은데 말이오.”

“물론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율해야겠지만 무장함대를 제외한 귀국 선박에 대한 통행 허가와 일정량의 특산품에 대한 관세 면제 조건이 들어갈 것입니다. 또한 원하실 경우 섬 이북의 항로, 아마 노던테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항로에 대한 탐사 허가와 항로 공유에 대한 제안도 가능하지요.”

“하나만 더 붙이도록 하지. 어찌 되었건 폰테 섬에 처음으로 투자한 나라는 우리요. 그러니 그에 대한 보상이 있었으면 하는데.”

쳇, 깐깐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슬쩍 넘어가려고 했더니.

그래도 맥없이 피 같은 돈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단 한 번 튕겨보기로 했다.

“폰테 섬의 개발 수준은 이제 막 임시 거주지를 만드는 수준입니다. 인구도 보잘것없고요. 물론 페리아 족을 제외한 인원이기는 합니다만. 투자라고 하셔도 사실 대부분 제 사비로 충당한지라.”

하지만 브라키오스 백작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느낌을 피할 수 없소. 적당한 성의가 필요할 거요. 처음 이야기한 조건들이야 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적용되는 일이 아니오? 분명히 그대들은 ‘관리’만 한다고 했으니.”

쯧, 결국 돈을 뜯기는 것은 피할 수 없나.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귀국은 얼마나 지불할 수 있소?”

얄밉다.

가격 협상에서 ‘선제시’를 던졌는데 같은 수로 응수하는 건 반칙 아냐?

“백작께서도 아시겠지만, 본국은 긴 내전으로 인해 상황이 정말 여의치 않습니다. 또한 폰테 섬에서 최소한의 치안을 위한 병력을 투사해야 하니 이래저래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또 우는소리를 하자, 브라키오스 백작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천만 로스. 그 정도면 그럭저럭 그쪽도 받아들일 만한 액수인 것 같은데?”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생각하는 금액의 단위가 너무 커진 것 같다.

천만 로스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뭐 이리 쉽게 말해?

“그러시지요. 그 정도는 제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국왕이 그 정도는 지원해 주겠지.

그래도 한 나라를 운영하는데 천만 로스 정도가 문제겠어?

“아, 나도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소만.”

브라키오스 백작이 만족스럽게 물러서서 한시름 돌리나 했더니, 가만히 있던 발레리아 백작이 조건을 걸었다.

방금 전에 브라키오스 백작이 하나만 추가하자고 한 말은 못 들었나?

“백작,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어렵···.”

“아, 아, 그렇게 부담되는 조건은 아니오. 그 페리아 족 말이오. 정말 그들의 마을이 있다면 내가 한번 방문하고 싶소만. 겸사겸사 본국도 그 페리아 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맺고 말이오.”

의도를 알 수 없는 발레리아 백작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알기로 발레리아 백작이 론 항구를 쥐고 있기는 하지만 여느 대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직접 배를 탄 적은 없다.

그러니까 일전에도 나를 불러들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던가.

그리고 본토에서 폰테 섬으로 가는 항로는 빈말로도 쉬운 항로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험한 길을 굳이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굳이 백작이 직접 가시겠다는 말이오? 말씀드렸다시피 폰테 섬에는 딱히 볼만한 것도 없소. 게다가 페리아 족은 자신들의 마을에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편이기도 하고. 게다가 무장함대는 입항이 불가하니 위험하기도 한데···.”

“하하, 나도 군대를 이끌고 가겠다는 것이 아니오. 정 그렇다면 백작의 선단에 한 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내가 특이한 경우지, 백작씩이나 되는 대귀족이 움직이면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수행원에, 호위병에, 적어도 50명은 될 거다.

그들이 가지고 탈 어마어마한 짐까지 고려하면 배 한 척의 선적량 중의 절반은 그들에게 할애해야 할 테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렇다고 요청을 거절하자니 섬을 모두에게 공개하겠다고 해놓고 마치 뭔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는 어렵겠지.

“음, 그 내용은 페리아 족의 대표와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소만.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폰테 섬에 가시려는 목적은 그들이 아니오?”

“뭐, 일단 그 정도로 해 둡시다. 그래도 그 페리아 족의 대표라는 이와의 만남 정도는 주선해 주시겠소?”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각국의 대표들에게 그녀가 직접 나서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페리아 족이 건재함을 증명해야 하니까.

“조만간 본국에서 왕실의 혼사가 있을 거요. 페리아 족의 대표도 그 자리에 참석하기로 되어있소.”

하아, 내 결혼을 내 입으로 말하려니 뭔가 엄청 민망하구만.

* * *

나흘 후에 브라키오스 백작의 말대로 벨로키나 왕국의 국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예법에 맞춰 친서를 전달했고, 아무런 영양가 없는 의례적인 문답을 주고받았다.

알현실에 동석한 대신들 중에 스코타 후작이 매우 노골적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세상에 그 누구도 눈빛만으로 사람을 해칠 수는 없는 법이다.

친서의 내용이 공개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말이 오갔다.

개중에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국토를 강탈하려는 짓이라고 소리 높여 비난하는 자들이 꽤 있었는데, 아마 스코타 후작을 지지하는 파벌인 것 같았다.

반대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나를 두둔하는 쪽은 브라키오스 백작의 파벌··· 뿐만 아니라 다른 파벌들도 다 이쪽에 선 듯했다.

스코타 후작이 참 인기가 없는 편이구나?

“그만, 타국의 사신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인가.”

중년의 국왕이 살짝 짜증을 내며 언성을 높이자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귀족들이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문다.

모두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국왕이 나에게 말했다.

“친서는 잘 받았소. 아무래도 답서가 필요할 것 같군. 사신은 물러가서 기다리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알현실을 나오자 베일리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끄, 끝났군요. 이제야 잠을 좀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 같은 베일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살이 상당히 많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확연하게 드러나는 눈그늘을 보니 마음고생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끌려온 사절단임에도 나름 최선을 다한 베일리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었으니 조금 미안하기는 하다.

* * *

“여어! 아,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궁에 있는 객관에서 빈둥거리며 하루를 지내자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주변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약간 어색한 인사를 건네는 네이선.

움직임이 아직 어색한 것을 보니 상처가 다 낫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루 이틀 만에 나을 상처가 아니기도 했지만.

“음, 네이선 갑판장. 몸은 좀 어떤가?”

“어, 괜찮습니다. 아직 뻐근하기는 하지만.”

“무리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하게. 답서를 받아서 움직여야 하니 며칠 정도는 여유가 있을 거야.”

“네, 그···.”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계속 눈치를 보기에 나는 네이선에게 손짓했다.

“내 방으로 가지. 다친 병사들과 복귀에 대한 보고도 들어야 하니까.”

“네, 백작님.”

내 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네이선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엄살은. 특별하게 문제는 없지?”

“어. 치료를 잘 받아서인지 상처가 악화되거나 죽은 사람은 없어. 두 사람은 아무래도 더 이상 군대에 있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런가.”

더 이상 사망자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영구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 기분이 약간 씁쓸해졌다.

연금도 없는 세상이니 국왕이 따로 뭔가를 챙겨주지 않으면 두 사람의 미래는 암울하리라.

“너는 어때?”

“나야 뭐, 워낙 튼튼하니까. 몇 바늘 꿰매기는 했지만, 지금은 괜찮아.”

네이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이 세상에서는 몸에 바느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말하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지만···.

“한번 보자. 닥터가 아니면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진짜 괜찮다니까?”

내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상처를 공개한 네이선이 머쓱하게 코를 훔쳤다.

“진짜 괜찮아.”

“음···.”

바느질 실력은 형편없지만 내 눈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대충 5cm 정도가 찢어진 모양인데 칼이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잘 아물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항생제를 좀 먹여야 할 텐데.

혹시 몰라서 항생제 몇 알을 챙겨오기는 했다.

그런데 전투 중에 어디에 흘렸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라.

그렇게 뛰고 구르고 난리를 쳤는데 흘리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하기는 하지.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내가 물러서자 대충 옷을 추스른 네이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뭔데?”

“아무래도 우리를 습격한 놈들, 후작의 사주를 받은 것이 확실한 것 같아.”

이제 와서 무슨 뒷북을 치는 거야?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보거나 말거나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네이선이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타던 마차 있잖아, 딱 네 자리, 앉으면 네 등이 닿는 곳 말이야. 거기만 나무가 다른 것 같더라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춰놓기는 했는데, 내가 갑판장이잖아. 목재가 다른 건 귀신같이 알아보지.”

“그래?”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미 후작의 짓이라는 것이 확실해진 마당에.

“그래서 내가 딱! 그 녀석을 뜯어봤더니, 일부러 무른 목재를 썼더라고. 심지어 중간에는 비워놔서 세게 때리기만 해도 부서질 정도였다니까?”

음, 그래.

후작이 나를 죽이려고 아주 작정을 했었구나.

어쩐지 내 자리만 화살이 과하게 튀어나오더라니.

그런데 어차피 네가 세게 때리면 대부분의 나무판자가 부러지지 않냐?

전에 분명히 배의 난간도 주먹으로 부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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