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유명한 해적 사냥꾼 >
<390화> 유명한 해적 사냥꾼
“저거 뭐야? 크리스티앙! 우현 110도, 확인했어?”
“넷! 오늘 정오부터 동일한 항로로 따라오는 중입니다.”
바짝 긴장한 크리스티앙이 대답했다.
그렇다고 솟아오른 짜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보니 곧 해가 질 시간, 그렇다면 최소한 5시간 이상은 우리를 따라왔다는 말이다.
“왜 보고하지 않았지? 거리는 어때?”
“보고는, 그게 그러니까···.”
“거리!”
“네넷! 우현 미확인 선박 현재 거리 1,200입니다! 최초 발견 시 우현 160도, 거리 3,000이며 이후 지속적으로 접근하다가 거리 1,000에서 계속 유지 중입니다!”
“보고는? 왜 누락했어?”
냉랭한 내 말에 크리스티앙의 얼굴이 검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 그게 위협적인 상대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판단해? 이상이 있으면 보고하는 게 정상 아니야?”
물론 우리를 따라오는 선박은 고작 350톤 정도 될 것 같은 중형 선박, 프레티아 왕국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대포부터 쇠뇌까지 모든 무장을 최신식 군용 무장으로 바꾼 오트라스가 위협을 느낄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저놈들이 해적이라면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일단 오트라스는 평소와 달리 선단을 구성한 상태가 아니고, 저놈은 저렇게 우리가 가는 방향을 확인하다가 일행들이 나타나면 합공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해적 놈들이 작업질할 때 별별 신박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배울 정도로 당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제독.”
그래도 늦지 않게 내가 발견해서 다행이다.
“후우,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고, 현재 이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인델프 선장, 앗, 일등 항해사에게 이미 보고했습니다. 임시 갑판장을 맡은 돌격대장에게도 상황은 전달했습니다.”
그럼 진짜 나만 빼고 다 알렸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아인델프도 이걸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니 좀 충격이다.
아, 아인델프는 당연히 크리스티앙이 나에게도 보고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지만 나는 망원경으로 미확인 선박을 다시 확인하고는 주눅 든 크리스티앙을 손짓으로 불렀다.
회의를 빙자해서 모두에게 보고의 중요성에 대해서 정신교육을 좀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 간부들을 모조리 소집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아직 신호 받은 거 없지?”
“넷.”
“국적은?”
“분명히 메인 마스트에 깃발을 걸어 놨었습니다!”
“아, 그냥 잘 안 보여서 그래. 바람 때문에 꼬였나 봐.”
다급하게 깃발을 확인했다고 변명하던 크리스티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확인했을 때 케이라 왕국 깃발을 달고 있었습니다. 소속 상단기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벨로키나 왕국 국적기를 게양 중입니다.”
“그래?”
어디 보자.
나는 다시 망원경을 들어 우리를 따라오는 선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날렵한 선체와 높은 두 개의 마스트, 전형적인 중형 고속 상선이다.
적재량 일부를 포기하고 속도를 높인 형태인데, 유통기한이 짧아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을 운송하는 데 유리했다.
다만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였다거나, 다른 상선에게 선수를 뺏기면 처음 정한 목적지에서 선적한 상품의 유통기한이 애매해진다는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형태였다.
물론 세상에 리스크 없는 사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문제는 저 녀석이 아주, 아주 높은 비율로 해적선으로 사용되는 녀석이라는 것이다.
적당한 적재량과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으니 내부만 조금 개장하면 해적선으로 쓰기 딱 좋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트라스 정도를 상대로 덤벼들 만한 스펙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사에 조심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스코타 후작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서 불안한 판국에.
아, 원래 오트라스는 벨로키나 왕국기를 게양하면 안 된다.
난 더 이상 벨로키나 왕국 소속이 아니고, 공식적으로 나는 프레티아 왕국의 사절단 소속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불안하잖아.
정석대로라면 프레티아 왕국기에 더해 왕명을 수행 중이니 왕실 문장까지 달아야 하는데, 만약 스코타 후작이 바다 위에서 수작을 벌인다면 타겟을 특정해 주는 꼴이 아닌가.
그래서 브라키오스 백작에게 살짝 부탁했다.
벨로키나 왕국기를 달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국왕이고, 브라키오스 백작에게 내 요청을 들은 국왕이 직접 승인했기에 당당하게 벨로키나 왕국기를 달고 있는 것이었다.
“제독, 무슨 일입니까?”
잠을 자다가 왔는지 머리가 엉망인 아인델프가 급히 선교에 올라와서 물었다.
내가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어떤 오지랖 넓은 선원이 선교의 일을 전달한 모양이다.
“후우, 자네도 저기 저놈들이 계속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네? 아, 네. 보고는 받았습니다만.”
아인델프가 살짝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가볍게 대답하는 것을 보니 뭐가 문제인지 이놈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지금 오트라스는 혼자 움직이고 있잖아! 자네까지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떡하나?!”
“네?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독.”
“쯧! 계속 주시하고 만약 상대가 거리를 좁히려는 기미를 보이면 바로 경계 태세 하달하고 날 부르도록.”
“네, 제독.”
죄송하다는 사람들에게 계속 잔소리를 하기도 그래서 나는 일단 선교를 내려왔다.
머리가 좀 식으니까 이게 이렇게까지 짜증 날 일인가 싶기도 하다.
막상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경계는 늘 만전을 기해야 하는 법이거늘!
“젠장, 생각하니까 또 짜증 나네.”
“아, 제독님. 나오셨습니까?”
지나가던 선원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길래 대충 손을 흔드는데 얼굴을 보니 반가운 녀석이었다.
“여어, 트레비스? 얼굴 좋아 보이네.”
델라 항구에 거점을 만들겠다고 하고 대기하게 했던 트레비스였다.
배에서 내리게 할 때만 해도 부상이 꽤 심해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낯빛이 괜찮은 것을 보니 다 회복된 모양이다.
“다 제독 덕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머물던 델라 항구 거점은 포기하는 겁니까?”
선원들에게 상황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눈이 있는 놈들이라면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델라 항구 거점을 지원하기로 한 오스팔트 가문의 인원들이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배에 탔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모르면 진짜 바보겠지.
“어, 뭐, 그렇게 됐어. 지금은 방법이 없네.”
“그렇습니까? 좀 아쉽군요. 델라 항구에서 꽤나 명성이 퍼지던 중이었거든요.”
“명성?”
갑자기 명성이라니까 호기심이 생겼다.
명성을 얻자고 한 일도 아닌데 무슨 명성이 생긴다는 거야?
“왜 아니겠습니까? 어느 배나 선원들은 소모품처럼 쓰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그런데 제독만 부상 당한 선원들을 치료도 해주고, 다시 배를 탈 수 있을 때까지 굶어 죽지 않도록 쉴 곳, 식사를 제공하고 간단한 일까지 알아봐 주는데, 선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지 않을 수가 없지요. 특히 저처럼 곧 죽을 것 같은 녀석도 받아주셨으니.”
듣고 보니 이 세상에 없는 파격적인 직원 복지 시스템이기는 하네.
이슈가 될 만도 해.
“너무 아쉬워하지 마. 어차피 다른 항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예전에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선원들을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으로 생각하지 않아. 내 밑에서, 내 배에서 더 오래 일한 녀석이 처음 본 녀석보다 일도 잘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니까. 나는 나와 오래 함께하는 선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물론입니다, 제독! 처음에야 좀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제독의 배가 아니라면 다른 배는 탈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순간 일부러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트레비스의 열정 넘치는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단순 무식한 녀석이 그런 고난이도의 심리 치료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나저나 저 녀석들 조금 신경 쓰이는군요. 뭐, 저놈들 입장도 이해는 됩니다만.”
“응?”
트레비스가 바라보는 방향은 내 짜증의 원인이 되었던 케이라 국적 상선이 있는 곳이었다.
일개 선원도 신경이 쓰일만한 일을 항해사라는 놈들이 신경을 쓰지 못했나 싶어서 왈칵 짜증이 다시 솟구쳤지만, 그의 뒷말이 마음에 걸렸다.
“저놈들 입장이라니?”
“저놈들도 혹시나 싶어서 은근슬쩍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거 아닙니까. 최근 잔챙이 수준이기는 하지만 해적질에 손대는 녀석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하니까요. 제 놈들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해적선보다는 빠르기 어렵고 무장은 부실할 텐데, 튼튼한 무장에 비해 속도가 빠른 우리를 만났으니 졸졸 따라오는 것도 당연하죠.”
“그, 그런가?”
생각해보니 옛날 고드실카 호를 탈 때도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아무래도 소형선박들은 자위 능력이 거의 0에 가깝다 보니 항로가 비슷하고 속도가 비슷한 괜찮은 선박이 있으면 은근슬쩍 따라가고는 했다.
너무 가깝게 붙으면 상대가 싫어하거나 돌변해서 해적이 될 수 있으니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소형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소형 상선이나 약탈하는 잔챙이들은 적당한 규모의 상선을 보면 먼저 설설 기며 피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상대가 열어주는 바닷길에 무임승차 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그 바닷길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 건가?
“그래도 긴장하고 있어. 저놈들이 뒤에서 쫓고 앞에서 저놈들 동료들이 길을 막을 수도 있잖아.”
“어? 그럴 수도 있군요! 알겠습니다, 제독!”
트레비스가 뭘 하려는 것인지 부리나케 다른 쪽으로 달려가고, 교대하듯이 네이선이 내게 다가왔다.
“리안, 여기에서 뭐 해?”
“그냥, 방금 뛰어간 놈이랑 이야기 좀 했어.”
“아, 트레비스? 괜찮은 녀석이지. 하는 짓이 단순 무식해서 가끔 짜증 나기도 하지만 시키는 일은 곧잘 해.”
“너는 여기에서 뭐 해?”
내 질문에 네이선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을 들어 바람을 잡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바람이 좋은데 갑판장이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리고 네가 몸 다 나을 때까지 행크에게 일을 맡기라며?”
“그래도 저기 저쪽, 저 배에 대해서는 신경을 좀 쓰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엉?”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던 네이선이 얼굴에 가득 의문부호를 띄웠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저놈들 행동이 수상해?”
“너도 저놈들이 계속 따라오는 걸 알고 있었다며?”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뭐야, 이쯤 되면 이제 내가 잘못된 사람 같은데?
“‘그게 왜’라니! 저놈들이 해적이면 어쩌려고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는 거야?”
“엥? 해적?”
생각도 못 했다는 듯 깜짝 놀라던 네이선은 곧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으히히히,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우헤헤헤!”
“뭐, 뭐가?!”
이 자식아, 어디가 웃음 포인튼데?
내가 발끈하자 네이선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어깨에 팔일 척 올리며 강제로 몸을 돌려 난간 밖을 보게 만들었다.
“이봐요, 리안 제독 백작 나으리. 지금 내해에서 가장 유명한 해적 사냥꾼이 누군지 알아?”
“알 게 뭐야.”
제독 백작 나으리는 도대체 어느 나라의 직함이냐?
내가 신경질적으로 녀석의 팔을 떨쳐내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모른다고? 그럼 내가 알려주지. 바로 외날의 라프나를 열다섯 번의 격전 끝에 물리치고 내해의 해적을 모두 모아 하룻밤에 100척의 해적선을 침몰시킨 리안 제독님이시다, 이거야. 그 엄청난 공적으로 귀족 나으리가 되신 분이시지! 무적의 오트라스 호가 그분의 기함이야. 크크크큭!”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기가 막혀서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네이선이 괜히 저쪽의 배를 향해 양손을 크게 들고 흔들었다.
어차피 이 거리면 보이지도 않는데 뭐 하는 거야?
“뭐, 걱정하는 건 이해해. 그런데 아직 저쪽이 엄청 접근한 것도 아닌데 미리부터 선원들을 피곤하게 할 수는 없잖아. 어차피 방향이 같아서 아무리 저놈들이 가속해도 우리를 따라잡으려면 반나절은 필요할걸?”
“그렇기는 한데···.”
“그리고 요즘 슬슬 보인다는 해적 놈들이라고 해봐야 잔챙이 수준이야. 그런 놈들이라면 열 척쯤 모여도 오트라스를 잡기는 힘들지. 음, 우르타가 없어서 약간 고전할 수는 있겠네. 어차피 해적 놈들은 우르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뭐지, 얘가 원래 이렇게 똑똑했었나?
뭔가 굉장히 설득력 있잖아?
하지만 나는 괜히 지는 기분이 들어서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선원들이야 자세한 내용을 모르지만, 항해사들이랑 너는 잘 알고 있잖아. 스코타 후작이 손을 쓸 수도 있다는 걸 말이야.”
“음, 그건 다른 백작들이 막아준다고 한 것 아냐?”
“그런 말은 했지만, 그들이 만약 실패하면? 왕궁에 오기 전에 후작이 먼저 손을 썼다면? 그냥 손가락 빨다가 당할 거야?”
물론 스코타 후작이 왕궁에 오기 전에 손을 썼다면 애초에 델라 항구에서 출항도 못 했을 것이고, 두 백작이 후작을 옭아매는 데 실패할 정도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후작의 마수(魔手)를 벗어나기는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 역정을 듣고 묵묵히 바다를 보던 네이선이 씩 웃으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무적의 리안 제독님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 * *
니파 항구가 눈에 보일 정도까지 접근한 후에야 나는 아인델프 이하 간부들을 불러서 사과했다.
아무래도 내가 과민했던 모양이다.
항해는 순조로웠고, 바람조차 마치 우리를 축복하는 것처럼 예상 도착일보다 이틀이나 빨리 도착하도록 배를 밀어주었다.
난리가 난 곳은 니파 항구였다.
우리의 접근을 눈치채기 무섭게 연안경비대 함정 네 척이 튀어나와 좌우를 호위했고, 우리가 들어갈 부두는 이미 진즉에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부두를 점거한 일단의 병력들이 외인들의 접근을 아예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난리람?”
“일단 수신한 신호는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입니다만.”
아인델프도 얼떨떨한지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신호 이야기를 또 꺼냈다.
“일단 적대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까 내려가지. 갑판장, 현문 설치해!”
“넷!”
미리 준비하고 있던 네이선이 선원들을 시켜 현문용 판자를 옮겨서 부두와 고정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일단의 병력이 현문 앞에 질서정연하게 대기하고, 내가 현문에 올라서자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엘리안···?”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리블르앙 백작.”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나는 구르듯이 현문을 달려 내려가 그녀 앞에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어찌 이런 곳까지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그냥···.”
민망한 듯 말꼬리를 늘리는 그녀를 보다가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었어요.”
뇌의 통제를 벗어난 입술이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냈고, 그녀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날이 따사로운 것을 보니 다시 여름이 멀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