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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92화 (392/420)

< <392화> 골렘(golem)의 용도 >

불청객이라고 해도 일국의 백작쯤 되면 대접에 소홀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대륙 최고의 항구로 꼽히는 론 항구를 지배하는 발레리아 백작이다.

원활한 내 사업을 위해서도 허투루 대할 수 없는 자였다.

“백작이 올 것을 예상하지 못해 준비가 미흡하지만 일단 관저로 갑시다. 번트, 지금 당장 가서 손님을 모실 준비를 하도록 해.”

“네, 총독 각하.”

미처 인사도 나누지 못한 간부들 사이에서 우르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향해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보였지만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참여하지 않은 항해의 보고는 반드시 들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발레리아 백작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백작, 그럼 이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 혹시 마차가 필요하다면 불러오겠소.”

선착장에서 총독 관저까지 거리는 고작 1km 남짓, 성인 남자라면 15분 내외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귀족이라는 놈들이 워낙 이상한 놈들이 많아서 말이지.

꼴랑 100미터쯤 걸어가는 것도 멀다고 인상을 쓰는 놈도 있더라니까?

“마차는 무슨! 혹시 저기 보이는 2층 건물이 총독 관저요?”

발레리아 백작이 손가락으로 총독 관저를 가리키자 살짝 부끄러워졌다.

총독 관저라고 나름 다른 건물들보다 크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2층 오두막 수준이라서 그렇다.

물론 진짜 통나무로만 지은 오두막은 아니지만, 대충 볼품이 없다는 뜻이다.

“아직 총독 관저를 크게 지을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개척 마을에 저만하면 훌륭한 관저 아니겠소? 고작 관저를 화려하게 짓는 데에 노동력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오히려 사람을 잘못 본 게지.”

“어··· 좋게 봐줘서 고맙소이다.”

확실히 이 녀석은 좀 이상해.

발레리아 백작 정도면 강대국인 벨로키나 왕국에서도 꽤나 실세인 고위 귀족이잖아.

그런데 이런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고위 귀족이 다 이상하다는 말이 아니고 보통 자라온 환경 자체가 그렇다 보니 실속보다는 겉치레에 신경 쓰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음, 발레리아 백작?”

그런데 이 사람 지금 어딜 보는 거야?

황당한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발레리아 백작을 살펴보니 행태가 약간 이상했다.

접안 시설을 염탐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선착장을 저렇게 열심히 살펴?

순간 발레리아 백작이 벨로키나 왕국의 해군대신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설마 이 자식,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곧 문득 든 우려를 떨쳐버렸다.

무엇보다 이유가 없었다.

방금 발레리라 백작이 말한 것처럼 폰테 섬을 완충지대로 둠으로써 벨로키나 왕국은 국방 면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폰테 섬이 막 금화가 쏟아질 정도로 수입이 좋은 곳도 아니고 말이야.

“아, 미안하오. 이렇게 급조한 접안 시설은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군.”

“크흠.”

아픈 곳을 찌르다니, 이 자식 팩트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재주도 있군.

당연한 말이지만 론 항구의 부두 시설에 비하면 폰테 섬의 부두 시설은 진짜 볼품없기는 했다.

규모도 규모고, 아직 생짜 통나무를 적당히 묶어서 만들어 놓은 투박한 시설이니까 말이다.

나도 배로 성공한 사람이라 항구 시설 증축은 꼭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리고 있다.

폰테 섬이 일반인에게 공개된 지 시간이 조금 흘렀다고 해도, 그래봐야 입출항하는 배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생산되는 물건 자체가 적은 데다가 무역의 중계지조차 아니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

언젠가 가칭, 동부 노던테라가 개발된 이후라면 모르겠지만.

“백작의 수행원들도 다 내린 것 같은데 이만 갑시다.”

“아, 그럽시다. 환대해 줘서 고맙소.”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던 입꼬리가 푸들푸들 떨리려는 것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내었다.

이 자식이 알고 있는 ‘환대’랑 내가 알고 있는 ‘환대’는 서로 뜻이 다른 모양이다.

그나저나 진짜 단출하게 왔구만.

보아하니 수행기사 한 명, 집사나 시종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 한 명, 하인 세 명이 발레리아 백작 일행의 전부다.

타국의 무장 병력은 폰테 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국제법(?)이 있지만 진짜 일국의 백작이자 해군대신이 호위 병력 한 명 없이 올 줄이야.

그것도 자기 배도 아니고 내 배를 타고 말이지.

* * *

“오오! 저기 저것! 그 유명한 골렘(golem)인 모양이군!”

끄응, 저걸 미리 숨기라고 했어야 하는데.

발레리아 백작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3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돌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페리아 족이 기증한 마법생물, 골렘이었다.

아니, 살아있는 것은 아니니까 ‘생물(生物)’은 아닌가?

몸통에 팔과 다리 역할을 하는 부분만 달려 있는(머리는 없다) 투박한 형태의 조각상인 골렘은 마법적인 처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법사들의 이야기로는 인간에게 마공학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던 마법의 잔재와 기원이 같다고 한다.

물론 그 수준은 이쪽이 훨씬 높아서 지금도 마법사 길드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들이 골렘 주변에서 열심히 뭔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 골렘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소?”

적극적이고 눈치 없는 발레리아 백작의 요청에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골렘이 움직이려면 마정석이 필요하오. 소모량도 어마어마하고.”

놀랍게도 밥도 안 먹고 지치지도 않는 골렘은 지구의 중장비보다도 더 효과적이었다.

복잡한 조작도 필요 없이 시전자(나)의 생각만으로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아주 복잡한 작업은 하지 못하지만, 중장비가 없는 세상에서 골렘은 말 그대로 공사 효율을 수십 배나 올려주는 멋진 놈이었다.

문제는 동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싸던 마정석은 마법사 길드가 생긴 이후로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오죽하면 내가 예전에 고급 마정석을 마법사 길드에 무더기로 넘긴 것 때문에 몇 번이나 이불킥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 골렘이라는 놈을 두어 시간 움직이려면 주먹 반 만 한 마정석 한 개가 소모된다.

물론 활동량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살살 움직일 거면 뭐하러 비싼 마정석을 쓰겠어.

그래서 요즘은 그냥 세워만 둔 채로 마법사들에게 연구하라고 하고 소소하게 연구 이용료만 받고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저 녀석을 받게 된 이유가 참 복잡한데, 가장 큰 이유는 경고였다.

폰테 섬이 공개되면서 내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섬을 찾아왔고, 개중에는 아주 위험한 생각을 가진 놈들이 없지 않았다.

납치, 이용, 정복, 노예··· 설명만 해도 뇌가 더러워질 것 같은 그런 범죄 행위들 말이다.

인간보다 월등한 미모,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미묘한 위치, 절대 소수인 숫자까지,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아주 공개적으로 페리아 족이 내게 선물을 준 것이 바로 이 골렘이다.

‘우리가 가진 마법의 힘은 이 정도니까 함부로 덤비지 마라.’ 정도 의미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나는 당연히 골렘을 토목공사에 사용했지만, 아주 멍청한 인간이 아니라면 다들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골렘이 전쟁에 사용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을.

한두 기면 몰라도 수십, 수백 기의 골렘이 움직이면 그 어떤 나라도 그걸 막을 수 없을 거다.

두 번째는 배움을 갈구하는 마법사 길드를 달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페리아 족은 여전히 인간과의 잦은 접촉을 꺼리는 편인데 주구장창 마법사라는 이상한 족속들을 상대해 줄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그냥 교보재를 내어준 것이다.

내가 소소하게 용돈벌이를 하는 것은 관리비 정도의 당연한 권리라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마법사들은 연구 이용료보다 섬에서 먹고 자는 데에 쓰는 돈이 더 많다.

그 외에도 섬의 보안 문제와 내가 해야 할 퀘스트(?)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한데, 이건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아 참, 이건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페리아 족도 이런 골렘은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다수의 마정석을 구할 방법도 없고 말이다.

“마정석 가격이라면 내가 지불하겠소!”

잘나가는 귀족 나으리답게 한순간의 호기심을 풀기 위해 거액을 쾌척하려는 발레리아 백작이었지만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거 잘못 소문났다가는 방귀 좀 뀐다 하는 귀족들은 죄다 몰려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안하오, 백작. 하지만 내가 마법사 길드의 요청도 계속 무시하고 있는데 백작의 부탁을 들어주면 마법사 길드에서 어떻게 나오겠소? 내 입장도 이해해 주시오.”

마정석이건 돈이건 일개 귀족 따위와 비교도 안 되게 보유한 마법사 길드의 요청도 계속 거절 중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낯선 것이지 익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골렘이 움직이는 것을 실제로 보기 전에는 두려움이지만, 그게 일상이 되면 그냥 움직이는 돌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페리아 족과의 탄탄한 관계를 망가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이런, 그건 좀 아쉽군.”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짓던 발레리아 백작은 자연스럽게 내 근처로 다가오더니 지금까지와 다른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생각에 저 골렘, 전쟁에서 더 유용할 것 같은데 백작의 생각은 어떻소?”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전기처럼 흘렀다.

어떻게 같은 사람의 말하는 톤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나는 어렵게 표정을 감추고 자연스럽게 한발 물러서며 대답했다.

“솔직히 전쟁에서는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일단 동력이 되는 마정석이 저 몸통의 중앙에 있으니 눈에 빤히 보이는 약점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느립니다. 보통 기사들 수준만 되어도 골렘으로는 단 한 번의 유효타도 내지 못할 정도죠.”

물론 마정석을 분리하지 못하면 골렘에게 유효타를 줄 수 있는 기사도 드물겠지만, 굳이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골렘이 무서운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섬에 접근하려면 당연히 배가 필요하고, 바닷속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소? 그렇게 느리다면 뭐.”

발레리아 백작은 실망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골렘을 훑고 있었다.

안일했던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하게 된 시간이었다.

단순하고 괴짜 같아 보이지만 저 발레리아 백작은 무려 전대 스코타 후작과 같은 시기에 정치질을 해봤던 놈이다.

평범한 놈일 리가 없지 않나.

* * *

관저까지 가는 길 내내 발레리아 백작은 골렘에 들어가는 마정석이 어째서 눈에 빤히 보이는 위치에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노출된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것만 아니면 군용으로 개발되었을 거라고 아주 난리였다.

아직 인간 마법사들의 수준으로는 골렘을 만들어 낼 방법도 없는데 망상이 아주 걸작이시다.

그런데 솔직히 좀 궁금한 주제이기는 하잖아.

그래서 나도 골렘을 받는 날 물어봤거든.

그런데 페리아 족의 대답이 매우 상식적이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먼저 마정석이 중앙에 위치하는 이유는 물리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골렘이 움직이려면 마정석에서 나오는 마력을 여러 가지 마력회로를 통해 힘을 변환해야 하는데, 그럼 당연하게도 마정석이 팔다리의 중앙에 위치해야 힘이 골고루 받게 된다고 했다.

마법이라면 뭔가 물리 법칙을 벗어나야 제맛일 것 같은데 너무 상식적이라서 당황했지.

그리고 마정석 결합부가 외부에 노출된 이유는 더 간단했다.

그래야 교체가 편하니까.

마정석이 먼지 좀 쌓이고 충격 좀 받는다고 성능이 나빠지거나 부서지는 것도 아닌데(경도가 돌과 비슷하다) 굳이 안쪽 깊숙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들이 전쟁을 하라고 골렘을 내게 준 것은 아니니 말이다.

“엘리안 전하, 이전에 뵈었을 때보다 미모가 더욱 돋보이십니다.”

이미 소식을 듣고 관저 앞까지 마중을 나온 엘리안을 본 발레리아 백작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좋은 말인데 외간 남자가 내 여자에게 저런 느끼한 멘트를 날리니 영 기분이 별로다.

아니, 그 전부터 기분이 별로였던 것 같다.

“어서 오세요, 발레리아 백작. 이런 외지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여기 리블르앙 백작의 소개로 페리아 족 대사와 접견할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제 호기심이 채워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전에 리블르앙 백작이 폰테 섬에 오면 페리아 족의 마을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 떠올라 이렇게 시간을 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페리아 족의 마을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는데?

기가 막혀서 발레리아 백작의 말을 반박할 타이밍도 못 찾아 어버버하고 있는데 차분한 엘리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럴 리가요. 페리아 족의 마을은 인간의 힘으로 찾을 수도 없고, 총독도 함부로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총독이 그런 약속을 했을 리가 없지요.”

오, 내 사랑.

내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은 당신과 결혼한 일인 것 같아.

“이런, 그럼 제가 뭔가를 잘못 기억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었고 시간도 오래 지나서 말이지요.”

“그래도 이왕 오셨으니 편안하게 쉬었다가 가시지요, 비록 겉보기에는 조금 수수하지만 제게는 왕궁보다 편안하고 멋진 곳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물 흐르듯 대화를 주도하는 엘리안을 보며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이제 내게 너무 익숙해진 사람이지만 왕년에 마굴(魔窟) 같은 왕궁에서 왕녀로 살았던 사람인지라 상황을 주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녀가 만약 남자로 태어났거나 다른 시대나 세상에 태어났다면 아마 뛰어난 군주가 되지 않았을까?

그녀에 대한 감탄을 하며 정신이 돌아온 나는 마치 제집에 온 듯 편하게 총독 관저로 들어가는 발레리아 백작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은 확실했다.

방금 전까지는 페리아 족이 목적인 것 같았는데 페리아 족의 마을을 보려는 시도를 바로 포기한 것으로 볼 때 그게 주목적은 아닌 것 같다.

염탐 따위는 진즉에 후보에서 지웠다.

고작 공개된 섬의 정보를 염탐하자고 백작이자 해군대신이 직접 오는 게 말이 되나?

그렇다고 처음 의심한 대로 페리아 족을 상대로 뭔가 수작을 부린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고.

아무래도 상선단의 간부들과 최대한 빨리 회의를 해 봐야겠다.

* * *

불편하고, 재미없고, 거북하기 그지없는 저녁 식사였다.

식탁에 앉은 사람은 다섯 사람, 나와 엘리안, 발레리아 백작, 백작의 수행기사인 매도우 경, 그리고··· 알렌 경이었다.

4년 전, 결혼을 하고 폰테 섬에 돌아올 때 솔직히 엄청나게 긴장했었다.

내가 엘리안과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된 알렌이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칼을 빼 들고 날 죽이려고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알렌과는 영 껄끄러운 사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는 사이라고 해야 할까?

알렌 얼굴을 우연히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도대체 이 불편한 섬에서 눈칫밥을 먹어가며 왜 꾸역꾸역 남아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렇게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고 그녀가 눈길 한 번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알렌은 지금의 국왕으로부터 작위도 다시 받고 근위기사단 재입단 권유까지 받았는데 다 거절했다.

모시던 군주를 지키지 못했으니 다른 군주를 모실 수 없다나 뭐라나.

내가 보기에는 다 헛소리고 그냥 엘리안 옆을 못 떠나는 거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섬에서 추방해 버리거나 아무도 모르게 쓱싹(?) 해버리고 싶다.

엘리안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 여자에게 집착하는 다른 남자가 주변을 맴도는데 ‘허허허’ 할 남자가 어디 있겠냐고.

그런데 일단 추방하려고 해도 핑계가 마땅치 않다.

겉으로 보기에는 섬에서 쥐 죽은 듯이 사는 다른 귀족을 무슨 핑계로 쫓아내겠는가?

소일거리인지 섬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장기계획인지 몰라도 성의 표시 정도만 하면 아이들에게 검술 지도를 해주고 있어서 주민들에게 인기도 좋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도 사회적 평판에 신경을 써야 하니 내 멋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지 않겠나.

깔끔하고 시원한 쓱싹(?)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알렌을 쓱싹하려면 네이선을 복사기에 넣고 서너 명쯤 만들어야 시도라도 해볼 텐데, 그게 또 조용히 되는 것도 아니다.

소란이 일면 사람들이 알게 되고,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냥 막무가내로 추방한 것만도 못한 결과가 나온다.

···망할.

“하하하, 그거 아시오? 요즘 알렌 경의 이야기를 각색한 소설이 아주 인기요.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다음에 몇 권 구해다 주리다.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보는 것도 재밌지 않겠소?”

후우, 발레리아 백작 저놈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애초에 눈치를 보고 살 필요가 없었던 건지 혼자서 아주 신이 났다.

그나마 태연해 보이는 것은 엘리안과 백작의 수행기사인 매도우 경 정도.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스테이크조차 바닷물에 닷새쯤 절여놓은 종이를 씹는 기분이다.

가축은 본토에서 가지고 오기가 힘들어서 스테이크는 진짜 먹기 힘든 음식인데.

자세히 보니 엘리안도 정상은 아니었다.

아주 우아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지만, 평소보다 나이프를 짧게 잡고 있다.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미우라프 가문의 나이트 알렌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던데, 저녁 식사에는 그도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 섬에 귀족이라고는 고작 다섯뿐인데 그만 빼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오.’

내가 예의상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자 발레리아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말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발레리아 백작은 나와 엘리안, 그리고 알렌의 관계를 대충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지껄였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것이겠지.

어떤 개수작을 부리고 싶은 거냐, 조반니 발레리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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