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95화 (395/420)

< <395화> 너는 꼬아라, 나는 풀 테니 >

음···.

이걸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내 일상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의심을 해야 하나?

마을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나는 만나고자 하는 이를 만날 수 있었다.

“리안 님, 오랜만입니다.”

“아, 그러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더 소름 끼친다.

물론 내가 통역을 부탁하려고 이제 막 길을 나선 참이기는 한데, 그걸 어떻게 알고 벌써 여기까지 왔냐는 거지.

“물론 도움이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그걸 어떻게···?”

“그분께서 우리가 만나야 할 인연이 있으니 리안 님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 신탁이라는 게 그렇게 막 자주 내려오는 게 아니지 않았어?

“물론 신탁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을 빌리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아, 네···.”

신탁은 핑계고 그냥 나를 감시하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조금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의심만 가지고 불만을 표하기에는 상대가 영 좋지 않잖아.

거짓말이라는 의미조차 정립되지 않은 절대적인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던 이들에게 그런 의심을 하기도 그렇고, 상대가 무려 건물주, 아니, 땅 주인이다.

막말로 페리아 족이 ‘리안 저놈은 안 될 듯. 딴 놈으로 교체합시다.’라는 의사를 마법사 길드나 다른 왕국에 전달만 해도 나는 하루아침에 집 잃은 노숙자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종신 총독이라는 직함 따위, 쓸모가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거지 쓸모가 없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버릴걸?

떨떠름한 기분을 떨치기는 어려웠지만 나는 일단 페리아 족을 총독 관저 쪽으로 안내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어에게 데리고 가고 싶지만 일단 내가 생각한 것이 가능한지부터 확인해야 하고, 아무래도 낮에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주선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섬의 다른 주민들만 해도 인어를 보이는 것이 꺼려질 판인데 발레리아 백작에게 걸렸다가는···.

* * *

먼저 근위대 한 사람을 보내서 관저 근처에 발레리아 백작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페리아 족을 데리고 내실로 향했다.

응접실에서 맞이하는 것이 정상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보안이라는 측면에서는 우리 부부가 사용하는 내실 쪽이 더 나았다.

엘리안도 페리아 족과 꽤 친한(?) 사이이기도 했고.

“그런데 너는 어디까지 따라올 건데?”

“응?”

순진한 눈망울을 한 채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우르타를 보니 골이 지끈거린다.

내가 도대체 뭘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지?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침실?”

“후우, 거기에 엘리안이 있어.”

“앗! 그러고 보니 왕녀님 임신했잖아! 내가 선물도 사 왔는데, 잠깐만, 그게 어디 있더라?”

이 자식은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걸까, 그냥 모르는 척하는 걸까?

한참을 뒤적거리던 우르타는 뿌듯한 표정으로 뭔가를 주머니에서 꺼내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찾았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에 우르타의 손에 든 작은 물건이 반짝거렸다.

“뭐냐? 설마···.”

“짠! 이거 진짜 예쁘지? 엄청 비싸게 주고 산 거야! 이거 왕녀님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았거든!”

커팅이 잘된 루비를 중심으로 각종 보석 조각들이 장식된 화려한 금반지였다.

엘리안의 취향보다 과하게 화려하기는 했지만 대충 봐도 10만 로스는 훌쩍 넘을 것 같은 모양새다.

“잠깐, 그걸 누구에게 준다고?”

“왕녀님에게?”

“대상이 잘못된 것 같지 않냐?”

“어엉?”

상식적으로 저런 과한 반지를 왜 친구의 와이프에게 주냐고!

심지어 자기 여자친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너 솔직히 말해,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뭘?!”

“릴리도 아니고 엘리안에게 왜 네가 반지를 선물하냐고!”

“그거야 왕녀님은 반지를 받을 때 좋아했으니까?”

아니, 이 미친놈아, 그건 반지를 준 사람이 나라서 그런거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자 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페리아 족을 보며 나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 모양이다. 그냥 그 반지 그대로 곱게 싸서 릴리에게 가져다줘.”

“왜? 이거는 왕녀님 임신 축하 선물로 사 온 건데?”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다른 여자한테 선물이랍시고 반지, 목걸이 이런 거 주지 마라. 남의 여자에게 그런 거 주면 칼 맞아···.”

“엥?”

“그러니까 나한테 칼로 처맞기 전에 빨리 꺼지라고 이 화상아!”

“으아앗! 총독님 나빠요!”

우르타는 내가 손을 들자마자 번개처럼 뒤로 내빼며 소리를 질렀다.

하, 저걸 어떻게 사람으로 만들지?

* * *

“오랜만이에요, 렌피올라.”

“인간의 잉태는 정말 신비롭군요, 엘리안.”

응? 이름이 있었어?

“렌피올라라니? 무슨 말이야?”

“아, 내가 지어줬어. 우리와 ‘대화’를 할 때는 아무래도 이름이 필요하니까. 저들의 의미대로 말하면 ‘첫 발을 내딛는 사람’ 정도 의미랄까.”

여상스럽게 말하는 엘리안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기는 한데 저들의 외모가 구분이 된다고?

“그게 그러니까 페리아 족의 대표를 지칭하는 말 같은 거야?”

“무슨 말이야? 이름이라니까. 렌피올라만 우리와 대화하잖아. 다른 분들은 음, 아직 ‘말’에 익숙하지 않거든.”

···구분이 되는구나?

내가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였는데 말이지.

“크흠, 그럼 렌피올라? 일단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내가 상황을 정리해서 설명하자 조용히 듣고 있던 렌피올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의 종족이군요. 옛날, 우리가 섬으로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무래도 거주지가 달라서 큰 교류는 없었지만 아마 의사소통은 가능할 겁니다. 그쪽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다행이군요. 그럼 혹시 오늘 밤에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뜻인 것 같으니까요.”

흔쾌히 승낙하는 렌피올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바로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하나 더, 조금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만. 그 혹시···.”

나는 잠시 말을 끊고 고민했다.

나와 함께 페리아 족을 대표해서 각국의 대표를 만났던 이가 이 친구가 맞는지 모르겠네?

아, 어차피 서로 기억을 공유하니까 상관없으려나?

“인간의 왕국 중에 벨로키나 왕국의 대표였던 사람이 있는데, 기억이 납니까?”

“물론입니다, 조반니 발레리아 백작이라는 이름의 인간 남자 아닌가요?”

“네, 지금 그 사람이 섬에 와 있는 상황인데, 마을의 결계가 있는 곳과 차원문 지역, 그리고 트리토나를 숨겨둔 해상 동굴을 직접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무표정한 그녀의 고개가 살짝 꺾였다.

아마 ‘의문’을 표현하려고 한 모양이다.

“우리와 접촉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는 없습니다.”

마을 방문 요청 따위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도 고작 두 번 방문한 것이 고작인 마을을 공개할 리가 없잖아.

“저도 그 부분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트리토나는 문제가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트리토나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 숨겨야 하는 일이라··· 혹시 잠시 동안이라도 그 마을의 결계처럼 트리토나가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게 가능하다면 이번 위기를 넘기는 것은 물론 앞으로 트리토나를 운용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페리아 족이 협조를 해 줘야겠지만 말이다.

“결계는 불가능합니다.”

“아···.”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렌피올라의 입에서 바로 거절이 튀어나왔다.

하긴 그런 사기적인 기술을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겠지.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만 해도 이미 선을 많이 넘은 거잖아.

그럼 아쉬운 대로 발레리아의 정신에 간섭을···.

“하지만 잠시 동안 눈이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어? 가능하다고요?”

“네, 다만 우리가 그의 근처에 있어야 하죠.”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렌피올라 당신이 함께한다면 더 좋아할 인사이니.”

허, 이게 이렇게 쉽게 해결이 되나?

발레리아 백작이 좋아 죽겠군.

페리아 족의 마을을 가볼 수는 없어도 일단 페리아 족과 만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그의 허영과 자존심을 꽤나 충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용건이 끝나자 가벼운 이야기를 시작한 엘리안과 렌피올라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번트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총독 각하, 객실을 치워놓을까요?”

“음, 귀빈실에서 가장 먼 객실을 치워놔.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들은 갈수록 아름다워지는군요. 예전에 봤을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

인형처럼 무표정인 페리아 족보다는 엘리안이 몇 배나 더 예뻐서 말이지.

으헤헤헤, 첫 아이는 엘리안을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

“발레리아 백작은?”

“선착장과 광장, 섬 주민들의 주거지를 돌아보고 광산 마을로 출발했습니다. 아마 저녁까지 해서 농장까지 둘러볼 모양입니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

발레리아 백작쯤 되는 이가 볼 것도 없는 광산이나 농경지를 보겠다고 이 먼 곳까지 왔다고?

그 목적이 ‘금지’라는 곳에 대한 정보 획득이라고 해도 발레리아 백작이 직접 행차할 일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의 목적이 뭐야?

* * *

“다시 말해봐. 어디를 갔다고?”

뾰족한 내 질문에 번트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알렌 경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그곳에서 하겠다고···.”

“알렌은? 알렌은 허락했나?”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사전 조율도 없이 다른 귀족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예의에 조금 어긋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객관적으로 볼 때 손님의 신분이 더 높다면 더욱 그렇다.

발레리아 백작이 타국의 귀족이라고는 해도 어찌 되었건 일개 기사인 알렌이 신분으로 비벼볼 만한 상대는 아니지.

그러니까 발레리아 백작이 요청을 했다면 알렌으로서는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그런데 내게 언급도 하지 않고, 이렇게 뜬금없이?

“하, 그 집에 들어가 있는 사용인들은 우리가 따로 정보를 얻기에는 좀 그렇지?”

“네, 묘하게 섬에서 겉도는 사람들이라서 쉽지 않습니다.”

알렌의 집에서 알렌의 수발을 드는 사람들은 모두 알렌을 동경하거나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섬 출신도 아니고 죄다 본국에서 알렌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라 아무래도 나와는 접점이 적었다.

알렌이 무슨 명성이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알렌과 엘리안의 이야기를 각색한 소설들이 아주 인기 만점이라니까?

물론 폰테 섬에 그런 쓰레기 잡서를 가지고 오는 놈은 없다.

애초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식자층이 매우 빈약하기도 하지만, 총독인 내 눈치도 좀 봐야 하지 않겠어?

하여튼 이러니까 내가 알렌을 쫓아내기가 조심스러운 거다.

이렇다 할 증거는 없지만 아무래도 국왕이 나를 견제 혹은 감시하려고 일부러 알렌을 폰테 섬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

기사 작위를 다시 내려주고 지원금을 주는 정도야 엘리안을 보호해 준 대가라고 해도, 사용인으로 쓸 사람도 보내주고 이상한 소설까지 만들어 배포하는 것(물론 그냥 심증이지만···)은 좀 과하잖아.

예로부터 감시당하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감시를 치우면, 그건 바로 ‘의심’이 되어 돌아오게 마련이다.

* * *

발레리아 백작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온몸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마신 것처럼 보였지만 만취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몸은 비틀거릴지언정 말은 똑바로 하고 있었으니까.

“어어, 리블르앙 백작, 끄윽, 이런! 미안하오. 이거이거, 미안할 일이 너무 많구만. 그래도 이 섬에서 백작을 제외하면 단 한 명뿐인 귀족 아니오! 마침 지나던 길에 생각이 나더란 말이지.”

“괜찮소. 그보다 속은 괜찮으시오? 술을 많이 드신 모양인데.”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선수를 치고 들어오는 발레리아 백작.

은근히 돌려서라도 불편한 마음을 내비치려다가 그에게 선공을 내어주고 나서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이미 사과까지 한 상대에게 쫑알거려봐야 나만 치졸해 보일 뿐더러, 술 취한 사람이랑 무슨 진지한 대화를 하겠는가.

아마 여기까지 계산해놓고 행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번트, 백작을 안내해 드리게.”

“네, 총독 각하. 발레리아 백작께서는 이쪽으로.”

“으음, 그래 안내해 보거라. 그럼 내일 봅시다, 백작.”

발레리아 백작이 비틀거리며 번트를 따라가자 뻘쭘하게 남은 후작의 호위병들이 남았다.

“흠, 자네들은 식사는 했나?”

“네? 네, 뭐···.”

꼴을 보아하니 제대로 먹지는 못한 모양이다.

총독 관저나 저택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가정집 수준인 알렌의 집에서는 호위병들이나 시종들까지 챙겨주기는 어려웠겠지.

보통 사용인들은 집주인의 식사가 끝나면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니까 말이야.

“오펜, 내가 시켰다고 하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남은 음식이라도 좀 들도록 해줘.”

“네, 총독 각하.”

내 말에 호위병들의 얼굴이 피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호위병들이 오펜을 따라서 식당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옆에서 대기하던 하인 하나를 불렀다.

“술도 적당히 주면서 백작의 호위병들과 시종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확인하고,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지 감시해.”

“알겠습니다, 총독 각하.”

긴장이 풀리고 술이 들어가면 하지 말아야 할 말도 하게 되는 법이지.

* * *

발레리아 백작의 일행들이 모두 잠이 든 것을 보고받은 나는 바로 렌피올라를 호출했다.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합니다. 지금 움직이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리안 님.”

호위들까지 모두 물리고 따로 호출한 네이선, 아인델프를 데리고 어제 갔던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바다는 평온했다.

높이 떠오른 달빛을 반사하는 파도가 몽환적인 반짝임을 만드는 가운데,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묘한 정적.

낮에 아무런 보고도 없었던 것으로 봐서 누구에게 들키지는 않은 모양인데, 다시 오라는 말을 이해는 했으려나 모르겠네.

“저들인가요? 바다 쪽에서 많은 이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음?”

당연한 말이지만 눈에 힘을 준다고 해서 뭔가 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바다는 고요했고, 잔잔한 파도만이 쉴 새 없이 출렁일 뿐이다.

그렇다고 렌피올라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 종족이지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저들이 해안 가까이로는 못 오는 모양이니 배를 타고 조금 나가야 합니다, 이쪽으로.”

“네.”

아무리 횃불을 켰다고 해도 어둡기는 매한가지였기에 뒤를 돌아보니, 나를 따라오는 렌피올라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게 약간 경직되어 있다.

“렌피올라?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음, 역시 바다는··· 우리에게 두려움이니까요.”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구성원 간의 단합력, 놀라운 마법 능력까지 하면 굳이 나라는 사람이 필요하나 싶을 정도다.

예전처럼 거대 폭풍 지대가 섬을 감싸고 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들이 원하면 나보다 더 쉽게 섬을 통제하고 바다로 진출할 수 있겠지.

하지만 페리아 족은 서로의 정신세계를 공유한다.

내 기억이 나만의 기억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기억인 셈이다.

그것은 생이 다한 이의 기억이라도 마찬가지, 비록 죽은 이는 더 이상 없지만, 그의 기억은 모두에게 공유되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니까.

좋은 점도 물론 많겠지만 좋지 않은 점도 당연히 존재했다.

단적인 예가 바로 바다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두려움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석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으로 계속 재생산되니 떨치는 것이 쉽지 않은 거다.

그러니 그 거대 오징어 퇴치도 내게 부탁을 한 거고.

와, 진짜 그 거대 오징어는 어떻게 때려잡는담?

보트가 어느 정도 나아가자 뱃전에 불안한 자세로 앉아있던 렌피올라가 조심스럽게 상체를 바다 쪽으로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방문자여.”

그녀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리더니 인어들의 머리통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삽시간에 보트 주변을 반 포위하다시피 둘러싼 동그란 머리통들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얘들이랑은 친해지기 힘들 것 같아.

“왔어! 친구! 맛있다!”

저쪽 한 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미끄러지듯이 보트 쪽으로 다가온다.

“다행이네요, 저들의 음··· 왕, 대표자, 공주, 어머니··· 인간의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저분이 왔다면 의사소통이 수월하게 될 것 같습니다.”

렌피올라의 나지막한 설명에 말하는 인어(···)의 시선이 돌아갔다.

인어의 표정에 호기심이 감돈다.

워낙 인간이랑 똑같이 생겨서 표정도 읽기가 쉽다.

“으응? #[email protected]%*%^*#%@#%?”

소음처럼 들리는 음파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인어들의 언어인 모양이다.

기묘한 소리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데 차가운 손이 내 손을 잡아 왔다.

“?”

내가 의문을 담아 렌피올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약간 어색하게 말했다.

“물리적으로 접촉이 된 상태가 더 편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찔한 기분이 들며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우 씨, 맞아, 이런 기분이었지.

그래서 다시는 하기 싫었는데 말이야.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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