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7화> 눈은 뇌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법 >
“정말 신기하군. 이런 곳에 이런 동굴이 있다니 말이야. 보아하니 인간의 손이 거의 타지 않은 것 같은데, 나 같아도 어떤 식으로든 써먹고 싶었겠어.”
보안을 위해서라는 내 요청에 의해 호위 병력은 물론이고 시종들까지 모두 섬에 두고 혼자서 피오렐에 승선한 발레리아 백작이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혼자 타라고 했을 때 안 된다고 강짜를 부리면 양보하는 척하고 시종이나 호위 두어 명만 데리고 타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호위기사인 매도우 경까지 떼어 놓을 줄이야.
사실상 적진이라고 봐도 되는 피오렐에 호위 한 명 없이 탄 셈이니, 배짱만큼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거나.
적당한 바람이 불고 물때가 잘 맞으면 조류와 관성, 그리고 약간의 바람으로 범선도 천천히 동굴 안을 항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환경의 영향도 많이 받고 쉽지 않은 일이다.
배가 지나가기에는 좁기도 하고 심지어 곧지도 않은 동굴을 조함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난도가 높기도 하고.
그래서 제대로 섬 개발을 시작한 이후로는 퇴역한 연안 경비정을 두 척을 들여와 예인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단정보다 조금 큰 20인승 갤리선인데, 억지로 욱여넣으면 30명까지 타도되더라.
워낙 낡아서 전투에 쓰기에는 성능이 떠다니는 관짝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잔잔한 해상 동굴 예인용으로는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었다.
노를 젓는 인부들이 곡소리를 내지만, 다른 동력이 없는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다.
아 참, 지금 섬 곳곳의 위험하고 힘든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난 전투에서 항복한 일레드 왕국 포로들이다.
대부분은 3년 전에 본국으로 송환(당연히 배상금과 몸값을 받았다)되었지만, 일부는 섬에 남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특히 몇몇 항해 장교들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자칫하면 욕심이 얼굴에 드러날 뻔했었다.
받아만 준다면 기꺼이 섬의 주민이 되겠다는 그들에게 내가 그들에게 내건 조건은 4년의 의무 노동.
무보수로 최소한의 의식주만 배급받으며 4년간 내가 지정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기한이 있는 노예 계약과 다를 바 없지만,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지켰다.
노예나 소모품 취급하며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가는 환경에서 노동을 시킨 것도 아니고, 특별한 성과를 올리거나 하면 기간을 감해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정말 죽일 생각으로 일을 시키던(실제로 다 죽었다) 해적 포로들에 비하면 얼마나 관대한 처사인가?
“보시다시피 별 볼 일 없는 동굴이오. 범선 두 척이 지날 수 있는 지형도 아니고.”
“확실히 그런 것 같소. 이렇게 좁다면 아무리 확장을 해도 두 척은 어렵겠어. 괜히 기둥을 건드렸다가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고.”
“그렇소.”
“그런데 길이가 꽤 되는 것 같소만?”
“그거야 배가 느리고 비좁은 공간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걸게요.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
내 말대로 잠시 후에 시야가 확 트이며 거대한 공동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트리토나 함 역시도.
외부인의 눈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 아니라면 매일 사람을 보내 관리를 해준 덕분에 트리토나의 외관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미 아인델프를 통해 언질을 받은 선원들은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트리토나 쪽을 힐끔거리는 선원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것이 보인다.
상식적으로 저렇게 큰 덩치의 배가 특정 사람들에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 누가 그 말을 한 톨의 의심도 없이 믿겠냐고?
“호오, 꽤 넓은 공동이군. 여기가 동굴의 끝이오?”
“그렇소. 보다시피 중형 선박이라면 두 척은 충분히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이지. 저쪽은 좁지만 평평한 마른 땅으로 이어지는 곳이라 간단한 정비도 가능하고.”
쿵쾅거리는 심장박동 소리를 숨기려고 평온을 가장해서 한쪽을 가리키자 발레리아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이게 되는구나?
사실 내가 가리킨 방향은 트리토나가 있는 곳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트리토나가 가리고 있는 마른 땅이 있는 부분을 가리킨 것인데, 발레리아 백작은 마치 트리토나를 투시해서 보는 것처럼 내 말에 동의한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장비들을 이미 가져다 놓으셨군. 여기에 있던 배들은 이미 치우신 모양인데, 저 장비들은 왜 그냥 둔 거요?”
···어, 제발 도구에 대해서 묻지 마라. 나 지금 거기 보이지도 않는다고.
“여기에 어떤 배가 있는지는 굳이 공개할 필요가 없지만, 어차피 용도가 뻔한 곳인데 번거롭게 도구까지 치울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변명을 주워섬기자 백작이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소. 어차피 배를 숨겨두는 곳이라고 알고 왔으니 아무런 흔적이 없어도 저 지형을 보면 대충 어떻게 쓰일지 추측할 수는 있지.”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말과 다르게 동굴을 샅샅이 살피는 발레리아 백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이미 석양이 지는 시간이다.
통로와 달리 공동에는 자연광이 약간은 들어오기는 해도 지금 시간대에는 썩 도움이 될만한 밝기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의지할 수 있는 빛이라고는 횃불뿐.
하지만 횃불의 불빛이 비치는 범위야 뻔하지 않나.
당연히 저 멀리까지 자세하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만하면 호기심은 다 해결하신 듯하니, 이만 배를 돌리도록 하겠소.”
혹시라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까 봐 조금 빠르게 동굴을 떠나기로 했다.
심장이 벌렁거려서 미치겠단 말이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저쪽에 내려주면 안 되겠소?”
“···!”
발레리아 백작의 말에 등줄기로 차가운 땀이 흘러내렸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땅에 내려주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싶겠지만, 백작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은 명백히 트리토나 함이 있는 곳이었다.
공동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지만 상륙할 수 있는 땅에 배를 접안할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었고, 그곳은 이미 트리토나 함으로 거의 막혀 있는 것이다.
내 눈에는 트리토나 함이 멀쩡하게 보이는 걸로 봐서 발레리아 백작만 트리토나 함을 보지 못하는 모양인데, 배를 댄답시고 잘 서 있는 트리토나 함에 피오렐을 꼬라박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되면 트리토나 함을 숨기려는 계획이 다 어그러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걸 숨기려고 별별 꼼수를 다 썼다는 것까지 모두 들통나겠지.
“발레리아 백작, 분명히 여기가 군사시설이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소?”
일단 흔들리는 멘탈을 겨우 붙잡고 살짝 인상을 쓰며 강하게 나갔다.
제 놈도 억지를 부려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양심이 있으면 한 번쯤 양보해줄···.
“하하, 그러니까 괜히 아쉬움을 남기고 나가면 다음에 번거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겠소?”
···해주긴 개뿔, 이놈에게 양심을 바라다니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그때, 타이밍 좋게 오펜이 인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응? 오펜 항해사?”
“총독 각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늦어서 서둘러 복귀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해가 완전히 저물면 아무래도 위험해서···.”
크으, 나이스 서포트!
잘 키운 오펜 하나, 열 항해사 안 부럽구나!
“이런, 깜빡했군. 이보시오, 발레리아 백작. 꼭 상륙까지 해야겠소?”
일부러 살짝 짜증을 담아 발레리아 백작에게 재차 묻자,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와 오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보던 발레리아 백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번거롭지만 내일 다시 오도록 합시다.”
망할, 이 새끼 여기에다가 꿀단지라도 묻어놨나, 진짜!
내가 잠시 대답을 미루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오펜이 한 박자 빠르게 질문을 가장한 제안을 해 왔다.
“총독 각하, 상륙을 하실 겁니까? 그럼 단정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지금 막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진짜다.
실제로 트리토나 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오렐 정도 덩치를 접안 가능한 포인트에 정박시키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어려운 일이거든.
그러니 굳이 배를 육지에 붙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몇 사람만 땅을 밟으면 되는 일이라면 단정으로 움직이는 편이 확실히 효율적이다.
덤으로 작은 단정이니만큼 자연스럽게 트리토나가 없는 틈으로 진입할 수도 있고.
“음, 시간이 촉박하니 서둘러 줘.”
“네, 총독 각하.”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오펜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시선을 돌리자 발레리아 백작이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다가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일부러 보여준 건가?
“발레리아 백작.”
“하하하, 고맙소, 리블르앙 백작.”
승리감에 살짝 취한 것 같은 그를 보니 웃음이 비죽거리며 올라왔지만 나는 일부러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경이 고집을 피우니 잠시 시간을 주기는 하겠소. 하지만 오래 지체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너무 늦으면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이 힘들어지오.”
“나도 염치가 있는데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야 있겠소? 빨리 훑어보고 돌아오겠소.”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염치가 있다는 거야?
* * *
발레리아 백작이 먼저 줄사다리를 타고 단정으로 내려간 틈을 타서 손짓으로 아인델프를 불렀다.
“내가 다녀오는 동안 배를 돌려놔. 백작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 조용히.”
“알겠습니다.”
내가 조용히 속삭이자 아인델프가 이해했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아 백작이 배에서 잠시 내리는 편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배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지만, 배의 방향을 돌리는데 자신의 눈에는 텅 비어 보이는 트리토나 함이 있는 곳을 피해서 어색하게 움직이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뒷일을 부탁한 내가 줄사다리로 다가가는데 한발 먼저 줄사다리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응? 렌피올라? 그대는 왜?”
내가 의문을 표하자 입을 반쯤 벌리고 말을 하려던 렌피올라는 곧 입을 다물더니 내 머릿속에 직접 의사를 전달했다.
“아, 하긴 페리아 족도 볼 권리가 있지요.”
내가 짐짓 당연하다는 듯 단정까지 들리도록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렌피올라가 그대로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렌피올라가 빠르게 전달한 내용에 의하면, 마을을 가리는 거대한 결계까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 페리아 족에게 투명화 마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첫 만남 때도 그렇고, 매번 투명화 상태로 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건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고,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상대로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거대한 트리토나 함을 상대로 뭔가를 한 것은 아니고, 리블르앙 백작의 인식? 인지? 뭐 그런 부분을 살짝 비틀어 놓은 거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 효과를 안정적으로 지속하려면 렌피올라가 발레리아 백작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
그러니 별수 있나, 같이 가야지.
“하하, 대사도 궁금하기는 했던 모양이군요. 설마 페리아 족도 이런 동굴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겁니까?”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 참, 당신들은 늘 스스로를 ‘우리’라고 칭하는군요. 그렇다면 언제 개개인을 구별해서 부르는 거요?”
선원들이 노를 젓는 동안 지치지 않고 렌피올라에게 계속 말을 걸던 발레리아 백작은 단정이 뭍에 닿기 무섭게 가장 먼저 단정에서 뛰어내렸다.
“음? 이상하군. 원래··· 이랬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백작의 혼잣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백작의 눈에 뭐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아야 대응을 하지.
“발레리아 백작,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요. 먼저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맞겠지. 고맙소, 리블르앙 백작.”
그러고 보니 이놈, 단 한 번도 나를 총독이라고 부르지 않네.
“불편한 점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시오.”
“진짜 아무것도 아니오. 단지 배에서 보던 것과 여기에서 보는 것이 좀, 흠··· 꽤 다른 것 같아서 말이오.”
젠장, 이거 잘못하면 걸리는 거 아냐?
“크흠, 거기 너. 횃불 하나 더 켜.”
괜히 노를 저어 온 선원들에게 횃불을 하나 더 켜게 한 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좁은 공간에서 제대로 된 빛도 없이 뭔가를 보게 되면 사람의 눈은 많은 것을 놓치게 마련이오. 특히 갑판 위와 여기처럼 눈높이 자체가 달라지면 같은 것도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소.”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잠시 둘러봐도 되겠소?”
“그러시오.”
내 대답에 의심이 어느 정도 풀렸는지 발레리아 백작은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확실히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이지.
대략 30분가량이 흘렀을까, 이제 슬슬 긴장이 풀리면서 살짝 지겨워질 때쯤 허탈한 표정의 발레리아 백작이 항복을 선언했다.
“흠, 이만하면 호기심은 다 풀었군. 돌아갑시다, 리블르앙 백작.”
* * *
“수고들 했어.”
내가 씩 웃으며 아인델프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던지자 이 모습을 지켜본 선원들 사이에서 작은 환호성이 울렸다.
비밀 엄수와 연기를 위해서 고르고 고른 내 사람들이다.
내 사람이라고 해서 쉽게 일을 맡기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사람이 떨어져 나가는 법.
추가 근무를 시켰으니 추가 수당을 줘야지.
“감사합니다, 총독 각하.”
아인델프가 일행을 대표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넣었어. 이왕이면 좋은 걸로 먹고 마시도록 하고, 아인델프.”
“네.”
내 손짓에 가까이 다가온 아인델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비밀 엄수 알지? 그러니까 가능하면 술 마시고 노는 것은 백작이 떠난 후로 하라고. 그냥 머릿수대로 돈을 나눠도 되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응, 그럼 난 저 거머리 같은 놈 챙기러 가볼게.”
“후후, 알겠습니다.”
하아, 그래서 이제 볼일 다 보신 것 같은데 언제 돌아가십니까, 발레리아 백작 나으리?
내가 지금 당신 때문에 밀린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