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98화 (398/420)

< <398화> 불길한 예감 >

해상 동굴에 다녀온 후 이틀이 흘렀다.

발레리아 백작은 작게나마 형성된 시장에 다녀오고, 채피 사제의 유골이 봉안된 교회 지하 묘실을 방문했으며, 조선소를 견학하고, 등대에 올라 한참 동안 해안을 살피고 내려왔다.

그런데 손바닥만 한 섬에서 더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심지어 섬 전체가 개발된 상태도 아닌데 말이야.

막말로 이틀 동안 한 일들도 일국의 백작이자 해군대신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발레리아 백작, 알다시피 본 섬은 원할 때 들어오고 원할 때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오. 보시다시피 선박의 출입 자체가 많지 않은 곳이라.”

“그런 것 같소. 이틀 전에 입항한 상선단 외에는 연안경비정만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자세히도 봤네.

이 정도면 반 첩자 아니냐?

딱히 숨긴다고 숨겨질 만한 일도 아니고, 해군대신이 직접 확인할 만한 기밀이 아니기는 하지만.

하여튼 점심 식사를 하며 내가 꺼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발레리아 백작에게 은근한 제안을 건넸다.

“입항한 그 선단도 아마 이 섬에서 열흘 정도는 머물다가 출발할 거요. 백작도 겪었겠지만, 본토에서 섬에 오는 항로가 쉽지는 않으니 말이오.”

“으음···.”

“그래서 말인데, 내일 본인의 함대가 출항할 예정인데 함께 가시겠소?”

말하는 중간에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발레리아 백작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지만(왜!),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없는 집에 객이 계속 머물 수는 없지. 고맙소, 리블르앙 백작.”

하, 드디어 이 거머리 같은 놈이 떨어져 나가는구나.

그런데 아직 엘리안에게 말 못 했는데 어떡하지?

* * *

“저기, 있잖아···.”

“음? 무슨 일 있어요?”

자꾸 봉긋하게 솟아오른 배에 눈길이 간다.

이제 임신 6개월 정도, 대략 100일 후면 아이가 태어나겠지.

지금이야 괜찮지만 두어 달 후면 거동도 힘들어질 거다.

내가 없어도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데보라(네이선의 아내)나 시니아(게론드의 아내) 등이 잘 보살펴 주기야 하겠지만···.

“그만 봐요, 창피하단 말이야.”

눈웃음을 치며 가볍게 내 팔을 때리는 엘리안의 손길에 겨우 상념에서 벗어났다.

하아, 만고의 죄인이 되는 것 같지만 상황이 참···.

“어, 그게, 사실은···.”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첫 출산을 앞둔 아내에게 장기 출장(?) 간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냐고!

“풋, 난 괜찮아요. 이번 항해 때문에 그렇죠?”

“어, 어? 아, 알고 있었어?”

진짜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나를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 웃음 가운데에 한 줄기 섭섭함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거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당신이 있어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걸요. 그러니 걱정 말고 건강하게 돌아오기만 해요.”

“응···. 미안해.”

“칫, 미안하다는 말은 잘한다니까.”

내 품에 고개를 파묻은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나왔다.

차라리 반대를 하거나 원망이라도 했으면 덜 미안했으려나.

“그리고 그 인어들 말이야.”

“응?”

“내가 없는 동안 당신이 좀···.”

짝!

다분히 감정이 섞인 그녀의 손바닥이 내 등짝에 작렬했다.

“진짜! 몸도 가누기 힘든 임산부를 혼자 두고 떠나는 것도 모자라서 일까지 맡겨요?!”

“하지만 당신이 페리아 족과 제일 친하잖아. 페리아 족이 없으면 그 물속 친구들은 대화가 안 통하는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도 아니고.”

도끼눈을 한 엘리안은 나를 확 밀쳐냈고, 그날 밤 내 등짝에는 그녀의 손바닥 무늬가 대여섯, 아니, 한 스무 개쯤 더 찍혔다.

헤헤, 그래도 허락받았다!

* * *

“번트, 내가 없는 동안 엘리안 좀 잘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총독 각하.”

“총독 관저 경비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겠습니다.”

내 말에 공손하게 대답하는 번트를 살짝 흘겨보던 레건 치안대장이 지지 않겠다는 듯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청하고 나섰다.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그의 차림새가 눈에 띈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고 치안대장이 신경을 좀 더 써 줘. 어차피 데보라가 총독 관저에서 돌봐주기로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총! 독! 각하!”

바짝 힘이 들어간 레건의 모습을 보니 무거운 마음이 조금 풀렸다.

“치안대장 복장은 돌아오는 대로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고.”

“하하하, 감사합니다, 각하.”

옷 이야기에 레건이 싱글벙글 웃는다.

정말 많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정말 괜찮겠소, 제독? 내가 여기에 남아 있어도.”

걱정스레 묻는 닥터 롱베르에게 약간 과장되게 웃어주었다.

“아히르도 이제 제법 쓸만하지 않습니까? 전쟁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물론 아히르가 약제술은 나보다 낫지만···.”

“가능하면 서둘러서 출산 전에 돌아오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엘리안을 잘 부탁합니다.”

“으음, 알겠소, 제독.”

“그리고 흠,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계세요.”

내가 살며시 건넨 물건을 본 롱베르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걸 전부 다?”

“비상용으로 몇 개 빼놓긴 했어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아끼지 말고 쓰세요.”

“으음, 알겠소.”

이제 20알도 채 남지 않은 항생제를 롱베르에게 건네고 나니, 발레리아 백작이 부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음? 내가 너무 일찍 온 거요?”

“아니요, 발레리아 백작. 이제 막 선적이 끝난 참이오. 그레이그 선장, 백작을 귀빈실로 모시게.”

“네, 제독.”

그레이그가 발레리아 백작을 아나시스 호로 안내하는 것을 지켜본 나는 새삼스럽게 부두에 정박한 배들을 둘러보았다.

이번 항해에 동원되는 선박은 총 네 척.(※ 본편 하단 표 참조)

기함 오트라스, 호위함 피오렐, 그리고 아나시스와 케틀린.

아나시스와 케틀린 모두 구형 겔로아르급 선박인데, 일레드 왕국과의 전투에서 나포한 녀석들을 수리 및 개장한 배들이다.

배수량이 각각 1,050톤, 950톤으로 대형함이지만, 너무 오래된 선박이라서 그냥 상선으로 개장해 버렸다.

일단 전체적인 구조가 좀 비효율적이고, 기본 내구성도 신통치 않았다.

무엇보다 항속과 선회력이 신형 전투함에 비해 너무 떨어져서 전투함으로 계속 쓰기에는 좀 그렇더라고.

나도 아쉬우니까 쓰는 것이지, 지금 건조 중인 신형 전투함이 나오기 시작하면 하나씩 폐선할 거다.

아니면 위장용이나 뭐··· 그런 쪽으로 활용하던가.

그 외에 베기어 함장이 결국 내게 매각한 드라이언 같은 경우 기본적으로 용병함이라 상행에는 효율이 좋지 않아 폰테 섬 수비 함대의 기함으로 쓰고 있고, 콘베르테는 이전 항해를 끝으로 예비함으로 쓰려고 건선거에 집어넣었다.

오랜 역사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리버티 호는··· 근해 순찰을 빙자한 신입 선원들 훈련용으로 사용 중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폰테 섬의 수비 함대는 드라이언 외에는 다섯 척의 배수량 200톤 전후의 소형 경비함밖에 없어 보인다.

해안 포대라던가 이런저런 준비를 해 놓았으니 언감생심 해적 따위가 덤벼들 수준은 아니지만, 정규 해군이라면 분함대 수준으로도 하룻밤에 찜쪄먹을 전력인 셈이다.

트리토나가 없다면 말이지.

“현문 걷고 출항 준비해. 선두는 기함 오트라스다.”

“네, 제독!”

섬의 다른 주요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트라스에 올라 지시를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돌격대장 행크가 크게 대답하더니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다시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제독.”

“사람, 새삼스럽게.”

* * *

“히히, 이렇게 있으니까 되게 오랜만인 것 같다, 그치?”

“고작 반년 전이잖아.”

“우르타 말이 맞아. 리안이 없는 배를 타고 항해한 건 여전히 좀 어색해.”

“그래?”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같다.

고드실카 호를 탈 때부터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늘 셋이 한 배를 탔었으니까.

최근에야 섬 개발 문제로 몇 번 항해에 불참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우리 셋은 붙어있었다.

이전 항해도 엘리안의 임신 소식이 아니었다면 함께 할 생각이었었고.

“그런데 이번에는 왕녀님 혼자 두고 와도 돼?”

“그게 되겠냐. 아마 리안도 욕 뒤지게 먹었을걸?”

약간 으스대듯이 말하는 네이선에게 한심하기 그지없는 허세가 느껴진다.

먼저 욕먹은 게 자랑이냐?

“너 욕 많이 먹었나 보다? 작은 리안 임신했을 때?”

“어? 넌 욕 안 먹었어?”

약간 당황하는 네이선을 보니 알 수 없는 우월감이 솟아올랐다.

“훗, 너랑 내가 같냐? 우리는 아주 애틋했지.”

“뭐? 그럴 리가 없는데?!”

“히히히, 그럼 네이선만 욕 먹은 거야?”

“웃냐? 웃기냐?!”

이제 서른을 눈앞에 두고 있거나 서른 줄에 들어선 녀석 둘이 여전히 투닥거리는 것을 보니 시간이 고정된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아니겠지.

당장 내가 있는 귀빈실만 해도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장소가 아닌가.

아, 내 손때가 묻은 오트라스의 선장실(이제 함장실이다)은 함장인 아인델프에게 양보했다.

함장이 함장실을 써야지, 암.

“그런데 진짜 이번 항해에는 따라가는 이유가 뭐야? 아무리 서둘러도 아이가 나오기 전에 돌아오기는 힘들 것 같은데.”

“진짜 아나시스에 탄 이상한 백작을 데려다주려고 가는 거야?”

“발레리아 백작 태우는 거야, 내가 굳이 따라갈 필요가 있겠냐?”

“그럼 뭔데?”

“누가 들으면 내가 매번 항해에서 빠지는 줄 알겠다, 이것들아.”

내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손가락을 접고 있는 우르타의 뒤통수를 가볍게 어루만져(?) 준 나는 할 말을 정리해 보았다.

일단 처남인 국왕 폐하께서 호출을 하기도 했고, 마법사 길드의 제먼 씨와도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멜라나인 항구 근처에서 인어와 관련해서 알아볼 것도 있고 말이야.

무엇보다, 발레리아 백작의 태도가 영 수상하다.

분명히 원하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니 내가 직접 발로 뛰는 수밖에.

물론 첫 아이가 나오는 순간에 엘리안과 함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금 정말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있다면 우리 가족 자체가 박살이 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뭐, 이것저것 할 일도 있고, 알아볼 것도 있고.”

“···응?”

“와, 진짜 성의 없는 대답이다. 리안, 변했어.”

김빠진 맥주를 마신 표정을 짓는 네이선과 삐진 척을 하며 입을 삐쭉이는 우르타.

꼴을 보아하니 제대로 설명해 주기 전에는 자기들 방으로 돌아가지 않을 기세다.

얘들아, 밤에는 우리 그냥 곱게 자면 안 될까?

* * *

“아, 제독, 나오셨습니까?”

“응, 방해한 건 아니지?”

“물론입니다.”

이제 제법 노련한 항해사의 향기가 나는 크리스티앙이 가볍게 대답하고는 망원경을 들었다.

아직 표정을 숨기는 것은 잘못해서 살짝 긴장한 기색이 느껴진다.

“어수선하네? 무슨 일 있어?”

“네? 아, 아닙니다.”

뭔가 있구만?

나는 크리스티앙의 표정을 보고는 그가 망원경으로 보던 방향을 확인했다.

딱히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없는데?

내가 크리스티앙을 힐끗 보자 표정이 조금 굳기는 했지만 내게 할 말은 없어 보인다.

아직 보고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내 망원경을 들어 다시 같은 방향을 확인하자, 수평선 근처에 돛대가 보였다.

“응? 배네? 방향을 보면 본토에서 오는 배인데, 지금 시기에 올만 한 상선단이 있었나?”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상선단이 올 시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가끔 호기심이나 큰 수익을 노리고 오는 상선도 있으니까요.”

“뭐, 그렇긴 하지. 혹시 모르니까 계속 주시하라고.”

“네, 제독.”

정식으로 함대 창설 권한을 받아서 제독에 취임한 이후로 선장(혹은 함장)직을 놓아버렸더니 배에서 할 일이 더 없어졌다.

함대라고 해도 실상은 소수의 연안 경비함과 무장 상선단밖에 없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프레티아 왕국 해군에서 소장 계급장을 받았는데 계속 선장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고 멀쩡하게 함장직을 잘 수행하는 아인델프에게 내가 타는 동안은 내가 함장을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아무리 어색하다고 해도 감히 제독을 함교에서 나가라고 할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망원경을 들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미확인 선박을 주시했다.

못 보던 상선단이라면 규모가 얼마나 되려나?

이번에 들어온 게브너 상단이 가지고 온 종이 물량이 너무 적다고 데보라가 한숨을 쉬던데.

그렇게 심심풀이 삼아 망원경을 보고 있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크리스티앙!”

“네, 제독.”

“저거 좀 이상하지 않아?”

“네? 잠시만···.”

내 말에 한참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척인 것 같군요.”

“어, 그것도 이상하지만 뭐랄까, 상태가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최근에 이 근처에서 태풍이라도 불었나?”

아무리 규모가 줄었다고 해도 ‘울부짖는 바다’의 악명은 여전하다.

그리고 폰테 섬 연안은 여전히 악천후에 자주 노출되는 편이기도 하고.

폰테 섬에 기항하는 배가 적은 가장 큰 이유였다.

“제 망원경으로는 그 정도까지는 보이지가 않아서···.”

“아, 그렇지. 그럼 이걸로 봐봐.”

“감사합니다.”

내게 넘겨받은 망원경으로 조심스럽게 미확인 선박을 살피던 크리스티앙이 곧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망원경을 내렸다.

“제독, 아무래도 해적에게 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지금도 해적에게 추격당하는 것 같습니다.”

“뭐?!”

거의 빼앗다시피 내 망원경을 돌려받은 나는 급히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크리스티앙의 말대로였다.

이제 두 개의 마스트가 확실히 구분될 정도로 다가온 미확인 선박 뒤로 다른 마스트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찢어져서 바람에 펄럭이는 돛과 어디가 망가졌는지 좌우 대칭이 이상하게 안 맞는 선체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티앙! 당장 함장이랑 일등항해사 호출하고 갑판장에게 전투 준비시켜. 교전기 올리고.”

이미 프레티아 국적기와 해군기, 리블르앙 가문의 문장기는 올라간 상태였다.

저 뒤를 쫓는 놈들이 해적이건, 사략 함대건, 해군이건, 감히 폰테 섬을 향하는 항로에서 내 함대를 보고도 깝죽대지는 못할 거다.

······.

음, 여기는 폰테 섬 인근 무장 금지 구역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니까 타국의 해군이면 조금 애매할 수는 있겠다.

특히 일레드 쪽이면 꽤나 골치가 아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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