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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399화 (399/420)

< <399화> 반푼이 함대 >

정식 해군은 아니지만, 아니, 정식 해군이지만 군함은 아니··· 어휴, 하여간 무려 네 척으로 이루어진 선단, 심지어 오트라스와 피오렐은 군대에서나 사용하는 신형 대포로 무장한 무장상선이다.

아나시스와 캐틀린도 고작 8문씩이지만 최소한의 자위를 위한 대포 정도는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두 척에는 전문 포병도 없고, 화약과 포탄도 쥐똥만큼 싣고 있지만, 해적 놈들이 알게 뭔가?

무엇보다도 아나시스와 캐틀린은 굳이 대포가 아니더라도 그 덩치에 의한 위압감이 상당하다.

이름은 함대지만 함대도 아니고 상선단도 아닌 애매한 구성이 된 것은 단지 돈 때문이었다.

일단 정규급 군함을 살 돈이 없다.

해군 창설 권한을 받았으니 어떻게든 군함을 구하거나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 건조 중인 신형 군함 두 척도 진짜 영혼을 갈아 넣어서 건조를 시작한 거다.

그리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서 군함을 사도 문제다.

함대는 출항 할 때마다 전투를 상정한 준비를 해야 하고, 병력도 정수를 유지해야 하니 유지비도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훈련을 위해 소모되는 소모품들은 어떻고?

심지어 군대라는 조직이 다 그렇지만, 해군이라는 놈들도 생산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애초에 한 척에 백 명 이상 채워 넣을 사람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이고.

상선대의 선원들도 겨우 2교대··· 도 아닌 1.5교대로 돌리는 판에 무슨.

어찌 되었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상선단에 비하면 과무장이니, 어지간히 정신 나간 해적이 아닌 이상 감히 접근할 생각도 안 하는 것이 정상이다.

거기에 이 시대 최고의 해적 사냥꾼이 되어버린 폰테 섬 총독, ‘리안 리블르앙 백작’ 가문의 문장기까지 게양하면 해적이 아니라 해적 할애비라도 오줌을 지리며 튀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지.

그래서인지 전투를 준비하는 선원들에게서 여유가 묻어났다.

결국, 위에서 시키니까 전투 준비는 하지만, 어차피 전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지.

하루살이들을 철밥통으로 만들어 줬더니 이런 부작용이 있군.

우리 선단, 아니, 함대가 제대로 된 전투를 한 게 언제였더라?

다들 타성에 젖은 거다.

그나마 함교에 모인 항해사들은 조금 기합이 들어가 있는데, 이건 단지 내가 함께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이거야 원, 그렇다고 일부러 필요 없는 전투를 하러 다닐 수도 없고.

물론 나의 반푼이 2함대가 폰테 섬 근처의 치안과 방어를 맡고 있지만, 애초에 폰테 섬 인근은 그 어떤 국가의 군사력 투사도 금지된 중립지대다.

그래서 경계해야 할 적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다.

보통 이렇게 군사력 공백이 생기면 치안을 흐리는 해적들이 곰팡이처럼 생겨나지만, 망망대해에 기항할 육지라고는 폰테 섬 하나(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인 곳에서 영업(?)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나.

대륙과 이어지는 항로가 통행이 많은 항로면 또 모르겠다.

돌아다니는 배라고 해봐야 내 함대를 제외하면 가뭄에 콩 나듯이, 그것도 영업하기에 부담스러운 대선단이 움직이는 항로는 해적들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러니 전투는커녕 긴장감이 높아질 일조차 거의 없을 지경이다.

“전투 준비 끝난 거야? 아인델프 함장!”

“네, 제독.”

“전투 배치도 아니고 고작 전투 준비인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내 말투에 짜증이 묻어나자 당황한 표정의 아인델프가 크리스티앙에게 고갯짓을 한다.

“크리스티앙, 갑판장 호출해.”

“네, 함장님.”

하지만 함교에서 뛰어 내려가던 크리스티앙은 머쓱한 얼굴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네이선이 함교로 올라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갑판장.”

“네, 제독. 전투 준비 상태는 완벽합니다.”

네이선은 함교의 스산한 분위기에 잠시 움찔했지만, 곧 자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당당하게 보고했다.

순간 그 모습이 얄미워서 한 소리 하려다가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편한 친구 사이라도 지금은 공적인 자리다.

책임이 없는 자에게 책임을 묻는 모양새가 되면 네이선의 권위가 줄어든다.

어··· 갑판장이니까 약간의 책임은 있겠지.

하지만 꼴을 보아하니 이게 오트라스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까 내 실수, 크게 봐도 이전에 함대를 이끌었던 아인델프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후우, 좋아. 현 상태로 별도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대기하도록. 일등항해사, 다른 함선들은?”

“현재 피오렐 전투 준비 완료, 아나시스 전투 준비 완료입니다.”

“케틀린은?”

“그게 아직···.”

그때 전성관을 통해 느긋한 견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틀린에서 신호, 전투 준비 완료.”

순간적으로 함교가 조용해진 상황이었기에 견시수의 목소리는 함교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일등항해사 에반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함선 전투 준비 완료입니다···.”

사려 깊고 진중한 편이지만 베테랑 항해사답게 가끔은 내게 항해에 대해 조언을 하는 것도 거침이 없던 에반이 눈치를 볼 정도로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에반이 우리 일행에 합류한 이후로 내가 이렇게 분위기를 잡은 적이 없던가?

에반만의 문제가 아니겠지.

생각해보면 이번에 항해에 나선 선원 중 절반 정도는 경력에 상관없이 전투를 겪기는커녕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없는 애송이들이다.

그래서 이런 어이없는 추태가 발생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죽지 못해 사는 막장 인생들을 선원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이름은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해도, 내 선원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거기에서 나오는 충성심은 덤이고.

고된 노동 후에는 빵빵한 주머니와 휴식이 있으며,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고향, 내 집이 있는 삶.

그래서 지금은 내 함대의 정식 선원이 되기 전에 근 1년에 걸쳐 폰테 섬에서 훈련을 받게 하고, 섬 연안의 순시 항해 경험을 쌓은 후에야 정식 선원으로 함대에 편입하고 있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동안 내 선단에서 병으로, 사고로, 전투 중에 죽어 나간 소년 -수습 선원- 이 열 손가락으로도 다 못 꼽을 정도거든.

내가 기대한 긍정적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적지 않은 수의 기존 선원들이 폰테 섬에, 일부는 본토에 정착했음에도 항해에 관한 전체적인 선원 숙련도는 적당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선원 개개인의 나를 향한 충성도는 이전보다 오히려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선상 기술은 사전교육으로 가르치고 실습도 시킬 수 있지만, 전투까지는 아니지 않나.

물론 검술이나 쇠뇌 다루는 법도 적당히 가르쳐주고, 모의 전투도 시키지만 그런 ‘훈련’이 진짜 피가 튀고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대신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런 상태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옛날 네이선의 몸에서 피 냄새가 가시는 날이 없을 때보다 두 배는 넘는 사상자가 나올 것 같다.

해답 없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너무 길었을까, 아인델프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제독. 제독? 제독!”

“음?”

“쫓기는 선박 식별되었습니다, 쿠샤 왕국 국적기 확인, 600톤 전후의 플로디엄급 상선입니다.”

“쿠샤 왕국 선박? 뭐, 그럴 수 있지.”

폰테 섬이 쿠샤 왕국에서 먼 곳이기는 하지만 바다를 누비는 상선이 언제부터 본국과의 거리에 신경 쓰면서 장사를 했나?

얼마 전까지 굳게 손을 잡고 일레드 왕국을 상대했던 벨로키나 왕국과 쿠샤 왕국은 요즘 꽤나 소원해진 상태였다.

예전처럼 합을 맞춰서 일레드 왕국을 상대하기에는 서로 원하는 바가 너무 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동맹의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봐야겠지.

심지어 두 나라는 예전에 전쟁을 벌였던 역사가 있고, 지금도 국경의 대부분을 마주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위의 두 가지만 해도 서로 으르렁거리기에 충분한 조건인데, 벨로키나 왕국은 은근슬쩍 향료 제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중이고, 쿠샤 왕국은 내해의 물류에 숟가락을 찔러 넣는 중이니 사이가 좋을 리가 있겠어?

어찌 되었건 그런 쿠샤 왕국이니만큼 벨로키나 왕국과 약간 서먹한 사이가 된 프레티아는 꽤 괜찮은 사업 파트너였다.

두 나라의 물리적 거리가 엄청 먼 만큼 첨예한 이권이 부딪힐 일도 없고, 벨로키나 왕국과 안 친하고, 일레드 왕국과는 적대관계라는 것도 같으니 서로 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쿠샤 왕국 상선단이 폰테 섬을 목표로 오고 있다고 해도 특별히 이상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딸랑 한 척만 온 것이 좀 의아하기는 한데, 또 모르지, 선단의 다른 선박들은 나포되거나 항복하고 혼자만 겨우 도주 중일지도.

“추격 선박은?”

“현재까지 확인된 함선은 총 네 척입니다. 아직 국적과 선종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신호 가능 거리가 되면 쫓기는 쿠샤 왕국 상선은 함대의 좌현 측으로 빠지도록 유도하고, 추격 중인 선박들은 모두 정선 신호 보내.”

“알겠습니다.”

* * *

아인델프 이하 함교의 인원들은 모두 머리 위에 의문부호를 띄웠다.

추격당하던 쿠샤 왕국 상선은 이미 우리의 왼쪽으로 빠지라는 신호를 받고 침로를 변경하는 중이었다.

문제는 추격하는 선박들과의 거리도 그렇게 먼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망원경이 없어도 충분히 우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이니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도 우직하게 추격을 해오고 있다는 건데···.

“600톤급 커티스, 400톤급 슬루티, 550톤급 플로디엄, 700톤급 누벤테입니다. 모두 일레드 왕국 국적기를 게양하고 있습니다.”

“해군기도 없고, 개장 형태로 봐도 상선인데··· 정체가 뭐지 저놈들?”

선박 종류만 놓고 보면 제법 괜찮은 구성이지만, 군함이라면 몰라도 해적이라면 우리와 싸우기에는 애매한 전력이다.

이러니 나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의문이 들 수밖에.

해적이라면 진즉 선수를 돌리고 꽁지 빠지게 도망갔어야 정상이고, 상선이라면 다른 나라 선박을 저렇게 쫓아 올 필요가 없다.

저렇게 당당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선단이라면 해적이나 범죄자를 추격 중인 해군 정도인데, 해군기도 안 달려 있잖아!

“제독, 전투 배치를 할까요?”

조심스러운 아인델프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니까 선공을 할 수는 없지.”

전투 배치란 말 그대로 내가 ‘공격!’을 외치면 바로 포탄이 발사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 자체로 ‘선제적 적대 행위’로 간주 될 수 있는 행동이라는 말이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선량한 상선이 해적에게 쫓기고 있구나!’였지만 사실은 ‘해적을 추격 중인 용병 함대’라거나, ‘범죄자를 추격 중인 정의의 용사(?)들’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조금 신중한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발레리아 백작이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하고 있는지 걱정이군.”

“슬레어 일등항해사라면 잘 처신하지 않겠습니까?”

아인델프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슬레어라면 잘하겠지. 그런데 내가 걱정하는 쪽이 슬레어 같아?”

“아하하, 그레이그 선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레이그를 입에 담은 아인델프는 크리스티앙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쿠샤 왕국 상선 침로 고정, 잠시 후 본 함대의 좌현을 지날 것 같습니다. 현재 침로라면 본 함으로부터 200m 이상 떨어져서 통과합니다.”

“혹시 모르니 좌현 경계를 늦추지 말고.”

“···그런데 제독.”

보고하던 크리스티앙이 머뭇거리다가 다시 나를 불렀다.

시선을 돌리자 크리스티앙이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말을 이었다.

“쿠샤 왕국의 상선의 현측에 포혈(砲穴)이 8개나 있습니다. 최소 16문으로 무장한 무장상선입니다.”

확실히, 배수량이 고작 600톤이 될까 말까 하는 ‘상선’치고는 과무장이기는 했다.

1050톤짜리 상선인 아나시스도 고작 8문만 달고 있으니 말이다.

설마 우리를 상대로 그런 장난을 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경계를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실제로 언젠가 피해 선박을 위장한 해적 놈들을 역공으로 거하게 털어먹은 적도 있지 않던가.

“그래? 조금 신경 써야겠군.”

혹시 몰라 제일 뒤에서 따라오던 아나시스 호에게 쿠샤 왕국 선박을 경계하라는 신호를 전달한 뒤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추격 중인 네 척의 선박들은 여전히 기세 좋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거야 원, 해적이 아닌 모양인데?

그때 내 눈에 가장 뒤에 처져 있던 550톤급 누벤테의 선수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다른 배들을 살펴보니 여전히 침로는 이쪽을 향해 고정된 상태.

결국 개별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도대체 왜?

조함을 일등항해사에게 맡기게 하고 아인델프를 불러서 내 망원경을 쥐여주었다.

“자네도 한 번 봐. 한 놈이 변침 중이거든?”

“한 척만 말입니까?”

“그러니까.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아이델프가 이내 망원경을 내리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제독, 지금은 두 척입니다만.”

“응?”

“두 척이 변침 중입니다.”

망원경으로 다시 상황을 살펴보니 과연 아인델프의 말대로 누벤테에 이어 600톤급 커티스 선박도 급히 선수를 돌리고 있었다.

돌아갈 거면 다 같이 돌아가야지, 왜 한 척씩 변침하는 건데?

“이봐, 함장. 저 상황을 이해 못 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저도 무슨 상황인지 도대체···.”

하지만 곧 우리의 의문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네 척의 추격선들이 모두 크게 선회에서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이놈들, 도주하는 방향도 제각각이다.

추격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포기했다.

피오렐 정도나 추격이 가능할까, 오트라스만 해도 추격하기에는 속도가 애매했다.

다른 두 척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하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쿠샤 왕국 상선, 정선 신호 보내. 불응하면 강제로라도 세워.”

도움을 받았으면 내 궁금증 정도는 풀어 주는 게 도리 아니겠어?

* * *

“프레티아 왕국 제2함대 기함, 오트라스 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함장, 아인델프입니다.”

우리 선단에 반쯤 포위된 채 정선한 리든세이 호에서 단정을 타고 건너온 선장에게 아인델프가 절도있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선장 복장을 한 중년 남자는 뱃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사람이었는데, 분위기로 볼 때 항해사나 갑판장 출신 선장인 듯했다.

그런데 리든세이 호라면 어쩐지 좀 익숙한데?

“도움과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리든세이 호의 선장, 카이덴입니다···.”

아인델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카이덴에게서는 알 수 없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묻어나왔다.

보통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나면 기뻐하거나 안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리든세이 호를 다시 살펴보는데 애매한 깃발이 눈에 띄었다.

백기.

우리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겠다는 뜻으로 올렸다면 딱히 이상할 것이 없기는 한데, 굳이 올릴 필요가 있냐고 하면 글쎄?

“일단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만. 도주한 선박들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물론 얼마든지 설명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리든세이 호에 식수를 공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급히 물자를 파기하는 와중에 실수로 식수를 하나도 남기지 못해서 거의 반나절 동안 선원들이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식수를 다 버렸다고?

거의 목숨을 내걸고 주사위를 던지셨구만?

어쩐지 흘수가 지나치게 얕더라니.

만약 우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추격을 뿌리치더라도 모조리 탈수로 죽었을 거다.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식수 공급지가 폰테 섬인데, 사흘은 더 가야 하거든.

그것도 항로에 익숙한 우리 애들이나 되니까 사흘을 예상한 거지, 초행으로 보이는 저들이라면 빨라도 닷새, 최악의 경우 이레는 걸렸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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