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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04화 (404/420)

< <404화> 패션 아이템 >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세 개의 시계를 보며 나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작’ 시계 따위를 받아서가 아니다.

시계라니, 얼마나 유용한 물건인가!

심지어 손목시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세상에 없는 ‘시계’라면 사실 총기 수준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물건이기도 했다.

···응, 바로 그게 문제다, 세상에 없는 것.

다이너마이트야 대충 특수 처리된 강력한 화약으로 만들어낸 어쩌구 하면서 대충 변명이라도 가능했다.

전열함도 페리아 족의 선물이라면서 얼버무릴 수 있었다.

항생제는 여전히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닥터 롱베르밖에 없지.

무전기는 마도구라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넘어갔고, 심지어 망가진 채로 내 방에 고이 모셔둔 지금은 관심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도대체 이 ‘시계’라는 놈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냐고.

물론 이 세상이라고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각국의 왕궁 같은 몇몇 거대한 성에는 해와 달의 위치와 각도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거대한 천체도구(차마 이걸 시계라고는 말 못 하겠다)가 있다고 한다.

아마 세계에 통용되는 시간의 개념은 그들에게서 흘러나왔겠지.

이걸 반대로 말하면 일반인은 평생 가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시점의 시간을 말할 때 ‘해 뜰 무렵’, ‘정오’. ‘저녁 식사쯤’, ‘아침 식사 후’ 같은 애매하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 주제에 ‘한 시간’이라는 기간을 의미하는 말은 가끔 사용하는데 이게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과 학습에 의한 ‘감’이라는 것이 문제다.

한 시간은 사회적 통념상 성인 남자가 평지 약 5km를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지 않나?

성인 남자라도 모두 걸음걸이가 다르고, 걷는 속도가 다르며, 지형 외에도 걷는 속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더 기가 막히는 부분은 1km라는 거리조차 경험에 의한 ‘감’이라는 것이다.

1km는 얼마만큼이냐고?

그건 아무도 몰라. 아마 모를걸?

태어나고 자라면서 부모에게, 주변 어른들에게 듣고 배워서 익히는 거다.

‘이 정도 거리면 1km다.’라고 그냥 경험적으로 아는 거지.

혹시 공부 많이 한 학자 중에는 정확한 개념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보통 사람들은 알고 있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각설하고, 이런 상황에서 시간을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도구라니, 그런 게 갑자기 세 개나 생긴 것을 어떻게 해명하겠어?

심지어 이번에는 마도구니, 뒷골목에서 구했다는 구차한 변명도 못 쓴다.

나 저번 항해에 불참했잖아.

그냥 확 내 비밀(?)을 밝혀버릴까 싶기도 한데 그 여파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예상도 못 하겠다는 말이지.

막말로 지고스 이 양반이 삐져서 앞으로 선물 안 주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 * *

“우와! 예쁘다!”

시계를 보여주자마자 우르타가 냉큼 손을 뻗는다.

탁!

“아얏! 왜 때려!”

“넌 도대체 언제 철들래?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라는 걸 좀 하면 안 되냐?”

“어차피 우리 줄 거잖아!”

···응? 왜? 어째서 나도 정하지 못한 시계 주인을 네가 보자마자 정하는 건데?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우르타를 바라보자 발끈했던 녀석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아, 아니야?”

“아닌 건 둘째치고, 왜 너에게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세 개니까?”

“응?”

“나랑 네이선이랑 리안이랑 세 개! 사이좋게!”

묘,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반짝반짝! 진짜 예쁘게 생겼다! 우정의 증표 같은 건가?!”

‘우정의 증표’라니, 그게 무슨 철부지 소년 같은 발상이야?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우르타를 바라보고 있으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던 네이선이 물었다.

“금속인가? 보석? 세공이 특이하기는 하네. 그런데 난 저런 거 필요 없는데?”

···아직 준다고 안 했거든?

한바탕 소란을 가라앉히고 내가 시계에 대해 설명하며 직접 손목에 시계를 착용하자 두 사람은 질세라 시계를 하나씩 집어 자기 손목에 걸쳤다.

“음, 무슨 금속인데 이렇게 가볍지? 신기하네?”

“네이선, 감탄해야 할 방향이 조금 틀린 것 같다만.”

시계가 아닌 손목 줄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하는 네이선과 달리 우르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시계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

“우와아아앗! 움직여! 움직였어! 내가 봤다니까?! 리안! 이거 진짜 움직인다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 설명을 듣기는 한 거냐?

현지 특화인지 시계에는 초침이 없었고, 숫자도 없이 딸랑 눈금만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우르타 녀석은 분침이 움직이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던 거다.

“뭐, 귀한 물건 같아 보이긴 해. 그런데 굳이 우리에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나?”

시계를 만지작거리던 네이선이 미련 없이 시계를 풀어 다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꼭 숨기려던 것은 아니고.”

“그럼 난 가져도 돼?”

“···풀어. 가지고 놀다가 고장 나면 한 대로 안 끝난다?”

“쳇.”

태엽을 감는 나사를 빼서 이리저리 만져보던 우르타도 내 명령에 군말 없이 시계를 제 자리에 놓았다.

의도치 않게 이 두 녀석에 시계를 공개하게 된 이유는 저녁 식사 후에 두 녀석이 기습적으로 방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들도 예전처럼 내가 있는 귀빈실, 아니지, 지금은 제독실인 내 방에 마구 들어올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우르타가 네이선에게 까불다가 문 앞에서 넘어졌고, 하필이면 내가 문 잠그는 것을 깜빡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도 기겁했지만 두 녀석도 의외의 예상치 못한 사태에 내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꺼내 놓고 고민하던 시계 상자를 보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쓸데없이 포장이 고급스러워지는 바람에 시계가 들어 있던, 내용물에 비해 과하게 큰 상자는 그 자체로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황한 내가 두 녀석에게 당장 나가라고 화를 내면서 급하게 상자를 치웠으니, 호기심 대마왕이 이를 그냥 넘어갈 리가 있겠어?

* * *

“대단한 물건인 건 알겠는데, 이걸 어디에다가 써?”

말로는 대단하다고 하는데 네이선의 표정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시계를 그냥 ‘쓸데없는 사치품’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이 녀석은 항해사도 아니고 항해술에 관심도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항해에 있어서 ‘정확한 시계’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지.

심지어 시계가 두 개 이상 있다면 전략, 전투에 있어서도 그 유리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별로 관심도 없는 녀석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대충 얼버무리고 진짜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쓸데야 많지. 그런데 너희들 이거 어디서 구했는지는 안 물어보냐?”

“응? 아, 어디서 구했어?”

“난 별로.”

네이선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술 창고를 뒤지고 있었고, 마지못해 물어보는 우르타도 딱히 궁금한 표정은 아니었다.

왜 안 궁금한 건데?

난 이런 걸 보면 출처가 제일 궁금할 것 같구만!

“관두자. 관두고, 하여튼, 내가 이것들 때문에 고민이 많아.”

“왜?”

“무슨 일인데?”

“이 시계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다른 녀석에게 맡겨야 하는데, 영 불안하거든.”

“누구에게 맡기려고?”

“나! 내가 맡아줄게!”

대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우르타의 얼굴을 밀쳐내고 네이선에게 말했다.

“뭐,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 대신 함대나 선단을 이끈다면 아마 아인델프겠지.”

내 말에 네이선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인델프 함장? 그라면 믿을 만하잖아. 고작 이런 거 하나 들고 도망가지는 않을걸?”

“어휴, 네이선 이 멍청이.”

내게 밀려나서 혼자서 쫑알거리던 우르타가 자기 좀 봐 달라는 듯 네이선을 비난했다.

쟤는 왜 맨날 맞으면서도 네이선을 도발하는 걸까?

“뭐? 너 이리 와!”

얘는 도대체 왜 매번 이렇게 화를 내는 거고.

“헹! 가면 때릴 거면서! 멍청아, 리안이 걱정하는 게 함장님이 도망가는 거겠어?”

“응?”

오, 확실히 우르타가 가끔은 핵심을 찌른다니까?

네이선이 내 표정으로 보고 주춤한 사이 기고만장한 우르타가 당당하게 외쳤다.

“망가질까 봐 그러잖아! 전에 그, 뭐지? 무좀비? 그것도 망가뜨렸으니까!”

하, 내가 뭘 기대한 거지?

그리고 무좀비가 아니고 무전기겠지.

“···그런 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네이선마저 어색하게 묻자 나 역시 폭발하고 말았다.

“이 자식들아! 도대체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출처를 물어볼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아, 출처.”

“출처를 왜 물어봐?”

당연히!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꺼내면 출처가 궁금한 거 아니야?

친구가 새 장난감을 자랑하면 ‘어디서 났어?’라고 묻는 게 국룰 아니냐고?

“그냥 그러려니 하지 않을까?”

네이선이 말했다.

“응, 리안이 신기한 물건을 처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이건 우르타.

우와, 둘이 동시에 말하니까 진짜 그런가 싶기도 한데···.

딱!

그때 손가락을 튕긴 우르타가 다시 특유의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으며 해답을 제시했다.

“그 발바리 백작이 줬다고 해! 선물로.”

“응?”

“어?”

이건, 좀 그럴듯하네?

내 말이 조금 의심스럽더라도 발레리아 백작에게 가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는 못할 것 아냐?

거기에 귀한 물건이니 내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벌레가 꼬일 수 있으니 비밀을 지키라고 하면 아인델프 성격에 잠꼬대로도 말 안 할 거다.

일단 이 두 녀석 입부터 좀 막고.

* * *

“정말 화려한 팔찌군요. 금속인 것을 보니 페리아 족의 솜씨는 아닌데, 어떻게 입수하셨습니까?”

“팔찌가 아니라 시계라니까.”

“네, 시계요. 이런 것을 제가 받아도 될지···.”

아무래도 오늘 시계 보는 방법, 태엽 감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평소에 이런 친구가 아닌데 내가 건넨 시계에 홀렸는지 자기 손목에서 눈을 떼지를 못한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녀석이 아닌데, 그냥 시계의 화려한 문양과 고급스러운 세공에 눈이 멀어버린 모양이다.

물론 금속으로 이루어진 시곗줄의 정교한 세공조차 이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기는 하지.

“어휴, 오늘은 설명하기 틀린 것 같고, 명심해야 할 게 있어.”

“네, 말씀하십시오, 제독.”

어렵게 시계에서 눈을 뗀 아인델프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아직 또렷한 것을 보니 완전히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군.

“자네조차 홀릴 정도로 귀한 물건이야. 자네에게, 내게 있다는 소문이 돌면 귀찮은 일이 생기겠지?”

“아, 걱정 마십시오. 평소에는 천으로 감아서 드러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봐, 아인델프 함장, 평소에 시계를 착용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영 불안하다.

지금 당장 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미리 아인델프에게 시계 하나를 준 이유는 좀 익숙해지라는 의미였다.

고작 시계에게 익숙하지 못해서 약속된 시간을 착각하거나 밥 주는(태엽을 감는) 것을 까먹어서 시계를 죽여 버리면 진짜 곤란하지 않겠어?

물론 시계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은 선박의 현 위치를 측정할 때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유용하고 강력한 순간은 바로 전투에서겠지.

하, 그나저나 시계가 있다는 것으로 고려해서 계획을 수정하려면 작전관 엘리엇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이 친구는 진짜 까다롭단 말이지.

“땡땡, 땡땡, 땡땡···.”

어렴풋하게 타종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육지를 발견했다는 신호일 것이다.

이제 내 함대에 소속된 모든 선박에는 전성관이 설치되어 굳이 종으로 상황을 함교에 전달할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타종은 좋은 상황 전파 수단이었다.

전성관은 구조상 두 개의 별도 공간밖에 연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성관으로는 함교로밖에 내용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 출현이나 전투 배치 같은 함 내 총원이 알아야 할 내용은 여전히 육성을 사용하고, 약속된 타종 신호로 상황을 전파해야 했다.

똑똑똑.

“누구야?”

“회계사입니다.”

“응? 게론드?”

당연히 함교에서 보낸 전령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 왔다.

게론드를 자주 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입항 절차를 마치고 나면 어차피 보급 계획이나 무역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서 다시 만나야 했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문을 열어주며 묻자, 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견시수가 로제 항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침 함교를 지나던 중이라 제가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흠, 아닌데?

아무리 함교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해도, 나에게 볼 일이 따로 있지 않았다면 굳이 전령이 할 일을 자청할 녀석이 아니야.

게론드 이 녀석도 나름 잘 사는 상류층 집안 출신이라 선원들 일을 대신해주고 막 그러는 편은 아니거든.

신분과 위치에 따라 할 일이 다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로제 항구야 나올 때가 되긴 했지. 고작 그 말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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