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05화 (405/420)

< <405화> 게론드의 자수 >

게론드의 침묵이 길어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 ‘게론드’의 입이 굳게 닫힌 조개마냥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가 하려는 말이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깨달을 만했다.

“뭐야?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심각해?”

재차 물으며 게론드를 살펴보니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게 최근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

회계사로서 게론드가 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는 아닐 텐데?

심지어 지금은 항해 중이잖아.

항해 중에 회계사가 할 일이 있어 봐야 얼마나 되겠어?

“···제독, 제독은 저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드디어 입이 열린 게론드가 듣기만 해도 심각함이 느껴지는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얼마나 큰 폭탄을 던지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분위기에 따라서 가벼운 농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유치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말을 골라서 대답했다.

“글쎄. 믿음이라는 것이 정량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집주인이 자기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사실이 그랬다.

물론 이제 폰테 섬의 재정에 관한 부분은 시니아가 대부분 관리하고 있고, 내 개인 자산은 집사장인 번트가 맡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함대 운용과 교역에 관한 부분은 게론드가 전담하고 있고, 모든 재정 관리를 총괄하는 것도 게론드다.

만약 게론드가 나를 배신한다면 아마 파산 직전까지 몰리게 될 거다.

연 30%에 육박하는 정신 나간 금리(그나마 양심적이라는 은행이 이 정도다) 때문에 빚은 없지만, 이제 내게 소속된 선원들의 저축 금액도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거든.

“후우···.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한다고 해 놓고도 한참을 주저하던 게론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본론을 꺼냈다.

“아무래도 공용 자금을 횡령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나는 심각한 분위기의 게론드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휴우, 난 또 무슨 큰일인 줄 알았네.

“으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게론드 회계사. 그런데 뭐, 그 정도야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의 계산이 완벽할 수도 없고, 밀가루 옮기는 사람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얼마가 비는 건데?”

만약 큰돈이 비었다면 게론드가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누가 부스러기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슬쩍 한 모양인데, 나는 굳이 그걸 탓할 생각은 없었다.

치안대장인 레건도 섬 주민들에게 약간의 선물(?)을 받거나 음식 또는 술을 대접받고 다니지 않나.

그러니 큰돈을 만지거나 관리하는 다른 간부들이 한두 푼 삥땅 칠 수도 있지.

“지금까지 파악한 금액은 대략 84만 로스 정도입니다.”

“···어?”

84만(약 8,400만 원 정도)이면 금액이 좀 큰데?

그걸 게론드가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하다.

이쯤 되면 그 괘씸한 녀석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적당히 해 먹으라고 한마디 해야지, 이건!

“84만이면 꽤 많잖아? 누구야 그 녀석이?”

설마 네이선이나 우르타는 아니겠지.

이 녀석들은 금고에 갈 일도 없고 장부도 안 만지니까 당연히 아니겠지만···.

확률이 제일 높은 사람은 아인델프나 발드 선장인가?

“그게··· 아무래도··· 으음··· 아무래도 저인 것 같습니다.”

“하! 내가 이 녀석을 그냥!”

“······.”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순간적으로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묻자, 게론드가 초췌한 표정으로 다시 중얼거렸다.

“장부를 확인해 보니 횡령한 사람이··· 접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럼 지금 자수라도 하는 거야?

자수할 게 아니고 그냥 횡령한 돈을 채워 넣으면 되는 거잖아?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개똥 같은 말이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맹세코 저는 의도적으로 횡령 따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야 제독이 늘 여유 있게 주시니까요. 배를 타면 딱히 돈을 많이 쓸 일도 없고.”

“그런데 왜 자네가 횡령을 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건데?”

“하지만 냉정하게 장부만 확인해 보면 제가 횡령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횡령을 하지는 않았는데 횡령을 한 증거는 있다는 건가?

이게 말이야 방구야?

오트라스에 회계사라고는 게론드 뿐이고, 회계 장부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게론드와 나 뿐이다.

함장인 아인델프도 장부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장부를 작성하거나 수정할 권한도 없고, 본인도 별로 관심이 없다.

“이거야 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그래서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는? 자네가 한 게 맞다면 그냥 그 돈 채워 넣고 입만 다물면 될 텐데.”

“절 정말 믿으신다면 제독의 회계 장부를 제가 조사해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 장부와 대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겼다.

내가 보관하는 회계 장부 역시 게론드가 대부분 작성하기는 했다.

언제부터인가 게론드가 회계 보고를 마치고 내 방에서 기록을 하고 나면, 형식적으로 대충 훑어만 봤으니까.

하지만 그 장부를 다시 ‘조사’하겠다라.

과연 그 ‘조사’가 단순히 눈으로 훑어보고 자신의 장부와 비교하는 것일지, 자기 입맛에 맞도록 고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

“필요하다면 그래야지. 자네가 횡령을 했다면 고작 84만 로스를 했을 리가 없으니까. 잠시만 기다리게.”

길게 갈등할 필요는 없었다.

방금 말한 대로 게론드가 정말 작정하고 횡령을 했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겠지만, 금액이 고작 84만 로스일 리가 없잖아.

내가 금고에서 회계 장부를 꺼내주자 게론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살짝 목례를 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독.”

“그건 그렇고, 일단 이 이야기는 자네와 나만 아는 걸로 하지. 누가 장난을 쳤건, 자네의 실수건 남들에게 굳이 알릴 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네, 제독.”

“자네가 내 방에 너무 오래 있어도 이상하니 이만 나가봐.”

“알겠습니다. 빨리 장부만 확인하고···.”

“그냥 들고 가. 어차피 자네 것과 비교해야 한다며? 아 참, 내 옛날 장부도 줘야 하나?”

장부를 들고 가라는 내 배짱 좋은 말에 깜짝 놀라던 게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옛날 것도 주시면 문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끄응, 그럼 몰래 들고 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누가 본다고 해도 그게 설마 회계 장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 뱃놈들 중에는 책에 관심 있는 놈이 없구나?

* * *

로제 항구에 입항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리든세이 호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배를 정리했다는 뜻은 아니고, 리든세이 호에 걸린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리든세이 호의 선주가 아니다. 마지막까지 함께해준 승조원들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항해 수당과 전별금을 받아 가도록.”

선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카이덴 선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들어 보니 부모님이 남긴 유산에 더해 본인이 선원부터 갑판장까지 뱃일을 하며 아등바등 모은 돈으로 마련한 배라고 했다.

감성적으로 말하면 리든세이 호는 카이덴의 부모부터 카이덴까지 한 가족의 인생을 갈아서 만들어 낸 결과라는 말이지.

그런데 유산을 도대체 얼마나 받은 거야?

이 친구도 흙수저는 확실히 아니네.

회사(리든세이)가 파산하고 다른 회사(내 함대)에 M&A 당하면서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린 선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리든세이 호 주변의 부두에서 쭈뼛거리며 돌아다녔다.

고용 승계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세상이니 누구에게 하소연할 길도 없었다.

전별금이라는 특별 수당을 받는 바람에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을 즐기러 가버리는 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아서 은근슬쩍 우리 눈치를 보는 놈들이 있었다.

선장이 내리라고 하지 않아도 수중에 돈이 많아지면 배에 복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보통 선원들이니, 저들이 바라는 것은 보나 마나 뻔했다.

어쩌면 여기에서 얼쩡거리면 내 눈에 들어서 선원계의 꿈의 직장, 내 함대에 소속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얄밉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기대에 부응해 줄 수밖에 없군.

리든세이처럼 쓸만한 배를 아깝게 팔아 치울 수야 없는 노릇이고, 내가 데리고 온 인원으로는 리든세이까지 채우기 어려우니 말이다.

“갑판장, 내가 말한 대로 선원 모집해. 폰테 섬에 복귀하면 그 기간 동안의 평가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꼭 알리고. 인원은··· 한 40명만 하자. 다른 배에서 조금씩 차출하면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알겠습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선원들의 시선을 신경 쓴 네이선이 정중하게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지금 눈치를 보는 놈들 중에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사람은 네이선에게 채용 제안을 받을 것이다.

물론 평생을 자유로운(?) 선원으로 살아온 자들이 빡빡한 교육 기간을 버틸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고.

“제독, 전 함대 입항 완료했습니다. 얼마나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아인델프, 혹시 왕궁에서 받은 연락 중에 언제까지 와야 한다는 말이 있었어?”

내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아인델프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오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왕궁에 한 번 들르라는 느낌이었으니까요.”

“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를 리가 없는데.”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서신을 남긴 것도 아니고, 마법사 길드를 통해 급한 연락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항구에 기항한 아인델프에게 구두로 국왕의 명령을 전달했다는 것도 좀 이상했다.

솔직히 명령도 아니고 그냥 요청 정도라고 해야 할까?

엘리안의 임신으로 갑자기 내가 항해에서 빠진 것이니, 어쩌면 원래는 내게 직접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수도 있고.

“전투를 한 것도 아닌데 사흘만 쉬었다가 가자고. 급한 일도 있으니까.”

“사흘입니까. 알겠습니다. 다른 함장들과 당직에 대해서 논의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아인델프도 선원 몇을 이끌고 배에서 내려가자 멀리서 딴청을 피우던 우르타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다 끝났어? 이제 나갈 거지?”

“그래, 가자, 가. 일단 옷부터 좀 갈아입고.”

나름대로 제독의 품격을 위해 입고 있지만, 귀족용 옷은 너무 불편해.

그리고 귀족 복장으로 선원, 상인들이 가는 식당이나 술집을 갈 수는 없잖아.

오랜만에 네이선, 우르타와 함께 옛날처럼 먹고 마시니까 기분이 꽤 좋았다.

돌격대장 행크가 세 명의 돌격대원들과 근처 테이블에서 두어 시간 째 맥주 한 잔을 붙잡고 홀짝거리는 것만 안 보이면 완벽했을 것 같다.

그래도 나를 호위하겠다고 저렇게 마시고 싶은 술까지 참아가며 눈에 불을 켜는 녀석들에게 괜한 짓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한동안 안 입던 일반 선원용 옷을 입어서 날 알아볼 사람도 없을 것 같구만, 뭘.

“어이, 형씨들. 반갑수다.”

“응?”

“누구?”

넉살 좋게 우리 테이블에 비집고 들어온 40대 남자가 직접 들고 온 맥주잔을 살짝 들며 앞으로 내밀었다.

술을 사달라는 것도 아닌 걸 보니 알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다.

“다른 게 아니고, 듣다 보니 리안 제독의 함대 소속인 것 같은데, 맞소?”

“뭐? 에이, 형씨! 내가 어딜 봐서 일개 선ㅇ··· 읍!”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우르타의 입에 커다란 닭 다리를 재빨리 욱여넣은 나는 약간 건방진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맞소, 우리는 리안 제독의 2함대 기함인 오트라스의 선원들이지.”

“오, 역시 그렇군! 그럼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우리 함대에 대한 평판을 들어 볼 기회로군.

“보다시피 술이 없어서.”

내가 바닥을 들어낸 잔을 보여 주자 그가 재빨리 우리 테이블에 있는 술병을 확인했다.

“젠장, 저건 질문 하나 하고 사주기엔 너무 비싸잖소?!”

“그럼 질문을 많이 하는 건 어때?”

능청스러운 내 태도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곧 손을 들어 여급을 불렀다.

“여기 맥주 세 잔 가져와!”

“에이, 여기 맥주 별로 맛없던데.”

우르타가 꿍시렁거렸지만 공짜 술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네이선이야 술은 주종을 안 가리고 다 마시는 편이니 딱히 불만이 없어 보였고.

“별것도 아닌 질문인데 대충 이 정도로 합시다, 엉?”

“하하, 뭐 잘 마시겠소. 그래, 질문이 뭐요?”

“오늘 그쪽에 새로 선원을 뽑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추가 고용에 대해 들은 것 없소?”

오, 입사 희망자인가?!

“아마 이번에는 없을 거요. 어차피 이번에 이상하게 얻은 배에 채울 인원이 필요할 뿐이니까.”

아쉽지만 다음에 채용해야겠다.

내일 카이덴 선장을 데리고 은행을 가서 망실한 미르다스의 배상금을 처리하려면 이번 운용자금은 좀 빠듯하거든.

무작정 선원들을 고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능하면 앞으로 섬에 연고가 있는 친구들을 선원으로 채용할 생각이니까.

더 이상 채용을 하지 않는다는 내 말에 실망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에게 한 마디를 더 던졌다.

“혹시 요즘 도는 소식 중에 재밌는 게 있소? 쓸만한 이야기가 있다면 내가 따로 추천은 한번 해 보리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던 남자가 내 행색을 노골적으로 훑어본다.

내가 뭐라도 되는지 궁금한 모양이지.

“보아하니 항해사는 아닌 것 같고, 아직 갑판장을 할 나이도 아닌 것 같은데, 뭘 추천하겠다는 거요?”

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술로 퉁 칠 수도 있고.”

“으음.”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곧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왕이면 둘 다 합시다. 추천도 하고, 술도 사고. 요즘 도는 소문이라면 내가 빠삭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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