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0화> 유인 (1) >
내 정체를 밝히고 난 후, 당연히 내 자리는 냄새나는 선실이 아니라 선장실보다 화려한 제독실(귀빈실)이 되었다.
문제라면···.
“나도오! 나도 개인실 달라구우!”
“어흠···.”
다섯 살 먹은 애새끼마냥 땡깡을 부리는 우르타와 평소와 다르게 딴청을 피우며 눈치만 보는 네이선.
그래, 이 두 녀석의 개인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없는 개인실을 만들어 줄 수도 없고, 멀쩡하게 잘 지내는 다른 간부들을 개인실에서 나가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개인실을 넉넉하게 만들지 않은 설계자를 욕할 수도 없는 게, 엘리시아 호는 목적이 뚜렷한 탐험선이다.
당연히 불필요한 공간을 최소로 하고, 가장 효율적인 설계를 택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노던테라를 탐사하는데 간부가 추가되거나 따로 개인실을 줘야 할 귀빈이 추가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당연히 개인실의 수는 간부들의 숫자와 딱 일치했다.
“아우, 정신없어. 네이선, 얘 좀 데리고 나가.”
“어? 아, 그, 그게···.”
네이선도 머리를 벅벅 긁으며 능청을 피우는 것을 보니 저놈도 이번만큼은 우르타랑 같은 편인 모양이다.
하긴, 저 녀석들도 선실에서 다른 선원들과 부대끼지 않은 지가 벌써 몇 년인가.
마음은 이해하는데 물리적으로 안 되는 일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다른 것보다 선실에 있기가 좀 민망해. 그나마 나는 좀 나은데 우르타는···.”
“진짜 안 주면 나는 앞으로 까마귀 둥지(마스트 꼭대기의 견시대)에서 잘 거야!”
비장한 표정으로 선언하는 우르타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 사람이 편하게 앉을 공간도 없는 까마귀 둥지에서 잠을 어떻게 자겠나?
졸다가 떨어져 죽는다면 몰라도.
“아무리 우겨도 선실이 없잖냐. 너희들 방을 주라고 엄한 항해사들보고 방을 빼라고 할까?”
심지어 선의는 의무실에 딸린 작은 의료실에서, 조리장은 조리실에 달린 쪽방에서 잔다.
진짜 인간의 편의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신념을 가지고 만든 배가 바로 이 ‘엘리시아 호’란 말이다.
선의 양반은 그나마 진료용 침대라도 있지, 조리장은 쪽방에 해먹 걸고 자더라니까?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그냥 여기서 자면 안 될까?”
말을 해 놓고도 쑥스러운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네이선과 다르게, 우르타는 언제 땡깡을 부렸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며 제독실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침대는 리안이 써! 우리는 저기에 해먹 걸고 자면 돼!”
벌써 위치까지 정해 놓은 거냐?
애초에 이 이야기를 하려고 땡깡을 부렸구만?
* * *
“이쯤이면 슬슬 나타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초초함을 감추지 못하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리자 긱스 선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각하, 속도를 더 늦추라고 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보다 약간 느리게 가는 중인데, 더 늦출 수는 없었다.
돛이 많고 운용이 복잡한데다가 선원들의 숙련도가 떨어져서 제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변명도 어느 정도껏이지, 이보다 느리면 누가 봐도 이상한 거다.
“아니야, 속도를 더 늦출 수는 없지. 유인에 실패하더라도 놈들에게 괜한 의심을 심어주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아직 해가 지기까지 시간이 조금 있으니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긱스 선장이 애써 나를 위로했지만, 그의 말은 오늘이 지나면 현실적으로 이번 계획은 성대하게 망했다는 말이었다.
동원된 병력만 1함대 소속 함선 10척, 무려 1,500여 명이 동원된 계획이다.
물론 간접적으로 동원된 인원과 자금은 훨씬 더 많고.
계획이 실패하면 처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듣는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역시 해군을 동원한 게 패착이었을까?”
“하지만 해군 호위도 없이 엘리시아가 혼자서 움직였다면 함정이 아닐지 분명히 의심하는 자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겠지···.”
무엇보다 사략선 놈들이 우리를 보았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자기들이 남긴 증거가 없으니 지금이야 우리가 눈치를 챘는지 긴가민가하겠지만, 우리가 조금만 의심스러운 짓을 해도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났다고 생각할 거다.
“별수가 없지. 이대로 폰테 섬으로 가는 수밖에. 어쩌면 돌아가는 길에 놈들이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폰테 섬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해도실을 나와 내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열심히 짱구를 굴려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인델프가 이끄는 2함대가 폰테 섬에서 공식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전력이다 보니 섬에 남은 전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작전 중인 1함대에게 새로운 계획을 전달할 방법도 없고.
* * *
“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
긴박한 타종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우당탕탕!
“아야야···.”
해먹에서 굴러떨어졌는지 소음과 함께 우르타의 신음성이 새어 나오고, 벌써 일어난 네이선이 재빨리 부싯돌을 튕겨 초에 불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 정도로 어둡다면 한밤중일 텐데 갑자기 타종이라고?
지금도 울리고 있는 타종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하나는 가까이,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멀리서 들리고 있다.
엘리시아 뿐만 아니라 호위 중인 레슬리에서도 타종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드디어 초에 불이 피어오르고, 우르타가 재빨리 몇 개의 양초에 불을 옮겼다.
“놈들인가 봐.”
“응, 그런 것 같네. 한밤중에 기습할 줄은 몰랐는데.”
우르타와 네이선이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라고 한밤중에 기습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 거다.
놈들 역시 우리 위치를 특정할 방법이 없으니 적당히 예상 경로를 확인하다가 이제야 걸려들었을 뿐.
조금 일찍 발견했다면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했을 수도 있지만, 내일 낮이면 폰테 섬에 너무 가까워진다.
목격자를 남기면 안 되는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한밤중이건 뭐건 지금 당장 공격을 해야만 했을 거다.
똑, 똑, 똑.
“제독, 일어나셨습니까?”
“카이덴인가. 지금 나가네.”
내가 눈을 돌려 네이선과 우르타를 보자 둘 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약속된 위치까지 도주만 하면 되니까 두 사람이 활약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이 든든해진다.
“가자.”
손목에서 풀지 않은 시계를 확인하니 지금 시간은 새벽 4시 30분 정도, 곧 동이 틀 거다.
우르타가 건네주는 코트를 걸치고, 네이선의 손에서 받아 든 트리코른(차양을 위로 접은 삼각모)을 쓴 나는 제독실의 문을 열었다.
“북북서 방향에 미확인 선박 세 척이 접근 중입니다. 지시등(충돌 방지를 위해 야간에 선박의 양현에 다는 등)을 켜지 않는 채로 접근해서 발견이 늦었습니다, 현재 거리 1,000 미만입니다.”
선원 둘과 함께 입구에서 대기하던 카이덴 선장(지금은 항해사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보고했다.
지시등도 켜지 않았다니 독한 놈들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들끼리 충돌할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래도 나름 성공적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하고 코앞까지 접근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작 세 척이면 안 되는데?
“일단 선교로 가지.”
“네, 모시겠습니다.”
* * *
“여전히 응답 없습니다!”
“관둬! 이 시간에 지시등도 끄고 오는 놈들 목적이야 뻔하지!”
긱스 선장이 타륜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갑판장! 화물 파기는 어떻게 되고 있어?!”
잠시 후 갑판장이 선교 앞까지 달려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헉, 헉, 말씀하신 대로 1차분 모조리 파기했습니다.”
“좋아. 그럼···.”
긱스 선장이 다음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견시대에서 달려온 전령이 내용을 전달했다.
“선장님! 레슬리 함에서 응전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뭐? 아직 각하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멋대로···!”
“아니야, 선장. 레슬리 함이 응전하는 것이 맞아. 고작 세 척을 상대로 해군 전투함이 바로 꼬리를 말면 의심스럽잖아?”
화를 내려는 긱스 선장을 막아서자, 선장이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내게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각하. 현재 북북서 방향···.”
“아, 보고는 이미 들었고, 현재 침로는?”
“계획대로 좌현으로 선회 중입니다만, 놈들이 나타난 위치 때문에···.”
“우현에 쇠뇌수 배치하고 충돌 대비시키게. 그리고 레슬리 함에 엄호하라는 신호 보내.”
“넷!”
당연한 말이지만 진짜로 최선을 다해 엄호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미 몇 가지 신호는 다른 의미라고 약속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두 척이 더 있을 텐데, 어디냐···?
꽈르르르르릉!
꽈과과광!
“얼씨구, 아주 대놓고 신호를 보내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낮에도 잘 안 맞는 대포가 밤에 맞을 턱이 없었다.
심지어 우리에게 접근하는 놈들은 선수를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저 상태로 대포를 쏴봐야 자기들끼리 팀킬이나 가능할 거다.
그러니까 포탄도 없이 소리만 요란한 공포(空砲)만 쏴대고 있는 거지.
봐라, 소리는 요란한데 물기둥 하나 치솟지 않잖아.
아, 정정하지. 레슬리 함에서 쏘는 포탄이 일으키는 물기둥은 몇 개 보인다.
제대로 붙어도 레슬리 함 혼자서 세 척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적들이 레슬리 함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우리를 쫓으니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웠다.
신형 함이고 뭐고 간에 한밤중에 급기동을 하면서 포격을 명중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선회 완료! 현재 침로 220도!”
긱스 선장이 급하게 타륜을 제자리로 돌리며 보고했다.
원래 선장이라는 자리가 막 남에게 보고하고 그런 자리는 아닌데 말이지.
좀 미안하네.
그래서 그냥 타륜은 조타수나 항해사에게 맡기고 내 옆으로 오라니까 말을 안 들어서는 참.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우현을 확인했다.
레슬리 함의 눈물겨운 분전에 방해를 받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한 미확인 선박의 선수가 보였다.
거리는 대략 300미터가량, 아슬아슬하다.
“네이선, 우르타, 너희도 가서 조범수들 도와. 잘못하면 따라잡히겠다.”
거의 150도를 선회하다 보니 엘리시아의 속도는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갑판장이 거의 갈라지는 목소리로 조범수들을 닦달하고 있지만, 아직 돛이 제대로 걸리지도 않았고.
지금 당장은 우리 꽁무니에 붙은 녀석이 엘리시아보다 확실히 빨랐다.
“카이덴 항해사, 선원 열다섯 명 뽑아서 선미로 가. 혹시 모를 적의 도발은 저지하고, 충돌이 발생하면 바로 전령 보내.”
“알겠습니다, 제독!”
카이덴이 선교를 떠나기 무섭게 전령이 달려왔다.
“견시 보고! 레슬리 함이 피격당했습니다!”
“뭐?!”
이런 젠장, 저놈들이 아까 전부터 포탄을 쓰기는 하던데, 레슬리가 먼저 얻어맞을 줄이야.
선교에 모인 사람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이기에 나는 소리를 질렀다.
“모두 정신 차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희들은 당황하면 안 되지! 이 정도는 다 예상 범위 안쪽이다!”
차갑게 일갈한 나는 전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피해는?”
“네?”
“레슬리 함의 피해!”
“아, 넷! 아직 시야가 좋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운항에 지장은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알았어. 견시수에게 앞으로 큰 피해가 없다면 보고하지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각하!”
망원경을 들어 레슬리 함을 확인하니 발악하듯이 포연을 내뿜는 레슬리 함이 시야에 잡혔다.
의외의 일격을 당했지만, 아직 전의(戰意)가 꺾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번 일을 마치면 함장에게 묵직한 주머니라도 하나 건네줘야겠다.
“레슬리 함에 신호, 철수한다!”
“넷!”
내 명령을 받은 전령이 달려 나가고, 잠시 후 땀으로 범벅이 된 전령이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왔다.
“견시 보고! 좌현 90도 방향에 미확인 선박 출현! 세 척입니다!”
“세 척? 확실해?”
“넷! 확실히 세 척입니다.”
폰테 섬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올 일이 없는 바다다.
당연히 다른 목적을 가진 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고, 놈들에게 한 척이 추가된 모양이다.
그래봐야 고작 무장상선 여섯 척, 함정에 제대로 끌고 가기면 하면 해군 전함 8척이 달려들 테니 낙승이다.
“물고기는 다 모은 것 같고, 이제 어망에 넣어야겠군. 긱스 선장!”
“네, 각하.”
“전속력으로 현 위치를 이탈한다. 선장의 판단하에 2차분 화물을 파기하도록.”
어느새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나 싶더니 왼쪽 바다에서 붉은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태양을 배경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장난감 크기로 보이는 세 척의 선박들 역시 눈에 들어왔다.
“네놈들도 꽤나 준비했겠지만, 속도로 우리를 이길 수는 없지. 그러니까 우리 꽁지만 잘 따라오라고.”
그나저나 1함대 놈들이 잘 해줘야 하는데.
설마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