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2화> 유인 (3) >
우왕좌왕하는 선원들, 슬며시 돌아가는 선수, 바람을 제대로 받지 못해 늘어지거나 펄럭거리는 돛까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힘들 거다.
“쯧쯧, 이제 와서 도주할 생각일까? 도대체 어디로?”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레슬리 함과 이제 막 백병전을 시작한 녀석이 더 똑똑했다.
만약 우리 앞에 있는 사략선이 뚝심 있게 우리를 격파하고 빠르게 지원했다면 아슬아슬하게 각개격파에 성공했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우리를 백병전으로 제압하는 것이 가능한지가 문제지만, 그것까지 저놈들이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갈고리!”
갑판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쪽이 싫다면 이쪽에서 달라붙어야지.
“어차피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할 것 같은 녀석들인데 차라리 레슬리 함을 돕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긱스 선장의 걱정스러운 말에 나는 우현에서 접근 중인 두 척의 선박을 다시 살펴보았다.
여전히 돛을 팽팽하게 해서 전속력으로 접근 중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제법 불리해졌는데도 우리를 공격할 생각인 거다.
뒤처졌던 네 척의 사략선은 조금 달랐다.
가장 동쪽에 있던 녀석이 슬슬 선수를 동쪽으로 트는 것이 보인다.
다른 녀석들도 살짝 속도가 느려진 느낌이다.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정신없이 신호기를 흔들어대는 꼴이, 서로 의견 충돌이 난 것 같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제 저들은 죽으나 사나 엘리시아와 레슬리를 최대한 빨리 제압해야 할 판이다.
뒤에서 접근하는 것은 무려 정규 군함, 수가 조금 앞선다고 해도 양면 전선을 펼치기에는 부담스러울 테니까.
물론 이것은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이고, 각각의 사략선들에게 최선의 선택은 다른 녀석들을 제물로 던지고 도주하는 것이다.
우리의 숫자가 더 적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먼저 도주하는 놈은 살아서 이 전역을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당연히 이탈하는 적의 수만큼 남은 녀석들은 불리해지겠지만 말이다.
“선장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저 녀석이 뒤쪽에서 마음을 바꿔서 반전하면 골치 아파. 놈들의 사기가 엉망진창이니 지금이라면 생각보다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도주하던 선박이 마음을 돌려서 뒤에서 들이받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데 혹시, 진짜 그러면 안 되지만, 적에게 지원군이 더 있다면?
그 지원이 남쪽에서 나타나서 도주하던 녀석이 그쪽에 합류한다면?
지원군이 나타나는 시점에서 이미 다시 불리해지겠지만, 도주하던 녀석이 지원군에 합류하는 것은 데미지가 두 배다.
심지어 이 녀석은 속도도 빨라서 견제만 하는 것으로도 한 척의 몫을 제대로 하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적의 수가 두 배가 넘는데···.”
“우리 애들이 보통 애들은 아니라서 말이지.”
여전히 불안감을 버리지 못하는 긱스 선장에게 나는 손가락들 한쪽을 가리켰다.
“잘 보라고. 국왕 폐하께서도 인정한 바다 위의 기사를.”
견시대에서 한껏 톤이 올라간 우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돌 대비! 셋, 둘, 하나! 충돌!”
드드드드!!
쿠우웅! 끼이이이!
약간 격렬한 애정 표현으로 인해 엘리시아의 우현 선수 방향, 사략선의 좌현 선수 방향에서 난간이 부서지고 나무 파편이 날아올랐다.
우리 쪽에서는 몇몇 선원이 나동그라졌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갈고리는 두 배를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사략선의 선원들은 몇몇은 줄갈고리를 끊어내다가, 몇몇은 바리케이트를 쌓다가, 대부분은 어쩔 줄 모르다가 충돌 시 발생한 진동에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지휘하는 놈이 없나?
“돌격!”
“우와아아아!”
진동이 가라앉자 단번에 대여섯 개의 널빤지가 놓이고, 성급한 선원 몇 명이 뛰어서 사략선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저것 보게. 개가 똥을 끊지···. 어휴.”
“앗! 각하! 저기 쇠뇌가···!”
긱스 선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이선이 급히 몸을 왼쪽으로 홱 젖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허공을 가른 쿼럴이 마스트에 턱하니 박히는 것도 보였다.
그 반대쪽에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손에 쇠뇌가 들려있는 것을 보니, 그가 쿼럴을 쏘아 낸 당사자인 듯했다.
“설마··· 피한 겁니까?”
“아마 그렇지 않겠나?”
긱스 선장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5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쏘아진 쿼럴을 피하다니, 나 같은 사람은 미리 알려주고 피하라고 해도 못 피할 거다.
뒷말을 이을 새도 없이 네이선의 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은 커틀라스가 반짝이고, 핏물이 허공을 수놓는다.
뒤이어 비명을 지를 수 있는 놈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대부분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절명하거나, 폐나 목을 다쳐서 비명을 지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네이선이 건너간 지 10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네이선 근처에는 동그란 원이 생겼다.
그 원 안에서 숨 쉬는 사람은 네이선이 유일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그렇게 기선을 제압당했으니 결과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백병전을 벌일 때 공격 측의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순간이 상대 선박에 교두보를 마련해야 하는 초반인데, 그걸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네이선 혼자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낯이 익은 선원들이 흉흉한 기세로 네이선의 뒤를 받쳤다.
사략선으로 넘어간 선원이 20명쯤 되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네이선이 뒤를 보며 뭐라고 하더니 앞으로 튀어 나갔다.
피보라가 몰아친다.
공포에 젖은 사략선의 선원들은 네이선이 근처에 오기도 전에 몸을 돌려 달아나기 바빴다.
다시 말하지만, 적의 수는 대충 잡아도 아군의 2배가 넘는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고 바다에 빠지는 것은 사략선의 선원들 뿐이었다.
네이선은 양 떼 사이에 풀려난 늑대처럼 날뛰고, 어느새 넘어간 갑판장이 대여섯 명의 선원과 함께 선교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보였다.
“이겼군.”
“이게 무슨···?!”
긱스 선장을 포함해 선교에 있던 모든 이들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배가 접현하기 전에 이미 저쪽의 기세는 꺾여있었고, 지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규격 외의 무력을 가진 네이선이 난입했으니 단번에 사기가 바닥나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만약 적의 지휘가 단단했거나, 네이선을 잠시라도 붙잡아 줄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이덴 항해사.”
“네, 제독.”
“가서 갑판장에게 전하게. 선교를 제압하고 키를 부순 다음 항해일지만 탈취해서 철수하라고. 여기에 계속 매달릴 시간이 없어.”
“알겠습니다!”
카이덴이 선교를 뛰어 내려가자 긱스 선장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저 사람, 아니, 저분은··· 혹시 폐하께서 각하의 호위를 위해 보내신 기사님이십니까?”
“기사는 무슨. 우리 갑판장일세.”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크으, 잘 키운 네이선 하나가 열 기사 안 부럽구나!
* * *
키가 망가져 당분간 항해 능력을 상실한 사략선에는 겨우 살아남은 선원들이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키를 철저히 망가뜨린 것도 아니고, 선박수리에 재주가 있는 선원도 있으니 어떻게든 수리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전투가 오래 지속되더라도 수리하는 시간보다는 짧을 테니까.
어느 쪽이 이기건 수리를 한다고 힘을 빼느니 그냥 승리한 쪽에게 예항당하는 편이 나았다.
“선장님! 견시 보고입니다! 우현 15도 방향에 새로운 선박 세 척 발견! 이쪽을 향하고 있답니다!”
전령의 보고에 멀어지는 사략선을 마지막까지 살피던 나와 긱스 선장이 동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세 척이라면 그들이 어느 쪽 편이냐에 따라 정황이 바뀔 여지가 충분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돛의 형태로 보면···.”
확신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말을 흘리는 긱스 선장에게 내가 확답을 주었다.
“아군이군. 3, 3, 2로 나누어 대기했던 모양이네.”
품질이 떨어지는 긱스 선장의 망원경으로는 못 봤겠지만, 내 망원경에는 손톱 반만 한 크기로 펄럭이는 프레티아 왕국 해군기가 보였다.
“그렇다면?!”
반색하는 긱스 선장에게 나 역시 씩 웃어주었다.
“유인 작전은 성공이야. 그래도 레슬리는 도와야 하니 서두르자고.”
“네, 각하!”
레슬리와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이던 사략선은 우리가 접근하자 결국 백기를 올렸다.
애초에 레슬리와 1:1로 싸우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텐데 자신들을 지원해야 할 녀석들은 생존자가 없는 유령선처럼 가만히 있고, 우리가 접근해 오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동쪽에서 맹렬하게 접근하던 두 척의 사략선도 선수를 남동쪽으로 돌리는 중이었다.
자기들이 가세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제일 불쌍한 것은 뒤처졌던 네 척의 사략선이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북북서부터 동북동까지 측후방을 점한 해군 선박이 6척, 뚫고 나가야 할 우리가 있는 남쪽부터 남서쪽은 4척이 남았다.
굳이 남은 퇴로라고 하면 북서쪽인데, 그쪽은 망망대해인데다가 육지를 찾겠다고 남쪽으로 가면 벨로키나 왕국의 케르빈 제도다.
한 마디로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말이다.
레슬리와 전투를 벌이던 사략선을 완전히 제압한 우리는 천천히 동쪽으로 기동했다.
어차피 북쪽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하니 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남쪽, 남서쪽은 역풍과 사투를 벌이며 다가온 두 척의 해군 함정이 틀어막았으니 우리가 막아야 할 곳은 남동쪽이었다.
“레슬리에서 신호입니다. 함장이 함교에서 퇴거하고 부함장이 조함한다고 합니다.”
“흠, 책임감인가.”
“······.”
내 혼잣말에 긱스 선장 이하 항해사들이 딴청을 피우며 눈을 피했다.
이유야 어쨌건 레슬리는 작전 지시를 어겼다.
우리가 그대로 레슬리를 포기하고 도주했다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오히려 우리가 전투에 가세하게 만들었으니 항명의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
함장은 그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리라.
“뭐, 어차피 전투를 마무리하고 결정할 일이지. 레슬리에게 남은 적 함선이 도주할 수 없도록 견제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해.”
“넷!”
콰과과광! 콰과광! 콰광!
“응? 뭐야?”
뜬금없는 포성에 내가 다시 긴장을 조이며 날카롭게 묻자, 전방을 주시하던 카이덴이 침착하게 보고해왔다.
“우측에서 두 번째 적 함선이 포를 쏘았습니다. 아군 피해 전무.”
“마지막 발악? 이 상황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던 네 척의 사략선 중에 우측의 두 번째 배가 앞으로 돌출하며 포를 쏘았는지 포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놈들의 선수는 이쪽을 향하고 있으니 아무리 현측포를 쏴봐야 우리가 위험할 일은 없기 때문에 차분하게 놈들을 살펴보았다.
콰과과과과과광!
잠시 후에 한 놈이 뒤로 빠져서 선수를 돌리더니 북쪽에서 접근 중인 아군을 향해 포를 쏘아댔다.
하지만 역시 피해는 전무.
물기둥을 보니 지근탄은커녕 탄착점도 중구난방이다.
“무슨 짓일까요?”
“그러게 말이야. 이제 와서 발악을 해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의 행동에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는 사이에 북쪽에서 접근하던 아군이 선회를 마치고 함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냥 백기를 올렸다면 몰라도 먼저 적대행위를 한 이상 가만히 맞아줄 리가 없지 않나.
조금 더 멀리 들리지만, 확실히 강력한 느낌의 포성이 울리고 적 함선들 사이에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 번째, 세 번째 포격이 이어졌다.
“명중입니다!”
결과가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포격전이었다.
적들의 대포는 단 한발의 유효타도 내지 못했지만, 처음에는 세 척이, 결국은 여섯 척이 측면을 드러내고 쏘아대는 강철의 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확하게 적을 타격하고 있었다.
“백기가··· 엥?”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카이덴이 요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슨 일이야?”
“제, 제독. 저놈들 자기 편을 공격하는데요?”
“뭐?”
어처구니없는 말에 망원경을 들어서 살펴보니 이제 막 백기를 게양한 두 척 중 한 척에서 포를 쏘고 있었다.
아직 백기를 올리지 않은 자기 편을 향해서 말이다.
아무리 대포를 못 쏘는 놈들이라도 고작 수십 미터쯤 떨어진 목표물은 맞출 수 있는 것인지 이번에는 물기둥 대신 나무 파편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냥 항복하면 될 텐데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물론 항복해봐야 해적으로 재판을 받을 테니 모두 사형은 확정이기는 하지만 말이지.
설마 정상참작을 바라고 저 지랄을 하는 건가?
또다시 포성이 울리고 이번에는 백기가 올라간 배에서 파편이 튀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배가 휘청하는 것이, 제대로 얻어맞은 모양이다.
“얼씨구? 아주 편을 갈라서 싸우고 있네?”
북쪽에서 접근하던 아군도 당황했는지 포격을 멈추고 이 난장판을 관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