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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15화 (414/420)

< <415화> 우연은 아닌 것 같아 >

“함장님, 이 정도면 명백한 방해 기동입니다. 의도가 뻔하지 않습니까?”

나름 용기를 내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항해사가 계속해서 나와 허쉬 제독의 눈치를 살폈다.

나도 나지만 까마득한 상관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뭐,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불길한 내 예감은 다 맞았다.

14척, 13척으로 나뉜 두 무리의 선단은 모두 일레드 왕국 2함대 소속의 전투함들이었다.

그리고 남쪽을 막아선 14척은 우리가 방향을 돌리기 무섭게 같은 방향으로 침로를 바꾸면서 노골적으로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왼쪽에서 접근하는 놈들도 당연히 사선진 형태로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었고.

아직까지 명백한 적대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전투 대형을 갖춘 것도 아니고, 6척의 사략선이라는 걸리적거리는 짐까지 있는 우리에게 27척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대형을 갖추고 동시에 화력을 투사하면 반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전멸당할 게 뻔했다.

“으음···.”

함장이 대답을 미루고 허쉬 제독의 눈치를 살폈다.

함선의 운용이야 함장 재량이지만, 함대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제독뿐이니까.

허쉬 제독이 고민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분명히 일레드 놈들이 거슬리게 나오는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포탄을 날렸다가는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놈들을 무시하고 근접하자니, 그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공격당하면 한 방에 분함대 전체가 그로기가 되도록 처맞게 생겼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고 되돌아가거나 멈출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함장.”

“네, 제독.”

“전 함대 현 침로 유지하면서 전투 대형으로, 속도를 절반으로 늦추고 본함이··· 선두에 선다. 교신 가능 거리까지 접근하도록.”

명령을 들은 일등항해사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제독! 재고해주십시오! 자칫하면 본함이 집중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명령이네. 함장, 전달하게!”

“···제독.”

함장마저 머뭇거리자 짧게 한숨을 내쉰 허쉬 제독이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네. 만약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면 대열 중앙에 위치한다고 한들 죽는 순서만 다를 뿐이라는 걸 알지 않나?”

“후우, 알겠습니다. 교신 가능 거리까지만 접근하겠습니다. 만약 상대가 교신에 응하지 않는다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함장을 대신해서 허쉬 제독이 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그때는 자네 판단대로 하시게. 우리만 있다면 몰라도 총독 각하께서 본 함에 승함 중이시니.”

나 때문에라도 다른 배들을 먹이로 던져주고 기함인 마들랜드만 도주하겠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전투에서 지휘체계조차 엉망이 되면 남은 배들은 변변한 반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전멸당할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나라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는데.

애초에 전력 차가 너무 컸다.

아주 작정하고 나왔는지 남쪽을 막아선 14척 중에 한 척은 일레드 왕국의 1급 전투함 엘베도라급 2번 함인 엘로이 같고, 마들랜드와 비슷한 체급의 2급 전투함이 여섯 척이나 된다.

저놈들을 상대하려면 아마 본국의 1함대 전체를 끌고 와야 할 거다.

* * *

당연하다는 듯 우리 함대를 반포위한 일레드 왕국 2함대는 다행스럽게도(?) 마들랜드가 보낸 신호에 응답했다.

한참 동안 긴 신호가 오가고, 부지런히 내용을 전달하던 전령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놈들이 우리를 막아선 이유를 가지고 왔다.

“엘로이 함에서 신호입니다, 불법적으로 나포한 일레드 왕국의 상선을 포기하고 포로를 석방하라고 합니다.”

일레드 왕국이 사략 선단의 움직임을 두 손 놓고 보고 있지는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이야.

이건 말 그대로 수틀리면 한 판 붙자는 거잖아?

프레티아 왕국과 1:1로 붙는 것이라면 저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도 이해가 되는데, 국제 역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일레드랑 붙는다고 하면 벨로키나 왕국도 기다렸다는 듯 참전할 거다.

“상선이라니, 상품 하나 없는 배가 무슨 상선이라는 거야?!”

“이 미친놈들이?! 해적질을 한 놈들을 석방하라고?!”

사략 선단이라는 것은 우리만의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니까 지금은 해적질이 맞긴 하다.

격하게 반응하는 항해사들에게 허쉬 제독이 한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전령, 엘로이 함에 전달하도록. 본 함대는 본국의 선박을 공격하는 해적을 나포했을 뿐이니, 의문점이 있다면 정식 절차를 거쳐 본국에 항의하도록 하고 길을 비키라고.”

“넷, 제독!”

명령을 받은 전령이 전력 질주로 함교를 내려간 뒤로 함교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제독의 말이 이치에 맞기는 한데, 놈들이 그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저렇게 노골적으로 우리 함대를 막아 세우지 않았을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제독, 전투를 준비할까요?”

“아직, 함대는 현 위치에 대기한다.”

“완전히 멈추면 전투가 벌어졌을 때 더 불리해질 뿐입니다.”

함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했다.

배가 멈추면 도주조차 어려워질 것이 뻔하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고 해도 솔직히 도주는 힘들어 보이지만.

“함장님! 견시 보고입니다!”

“음?”

헐레벌떡 뛰어온 전령에게 눈길이 모였다.

방금 지시한 신호도 아직 못 보냈을 시간인데 보고할 게 뭐가 있다는 거지?

“보고해.”

“본 함대의 우현 후방, 미확인 선단 발견!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최소 8척!”

“8척이라고?!”

“세 갈래로 나눠서 막았군!”

“미쳤군, 이 정도면 2함대 전체를 끌고 온 거잖아?”

잠깐, 여덟 척?

재편한 일레드 왕국 2함대가 34척인가 밖에 안 될 텐데?

물론 그사이에 새로 취역한 군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제독,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전 함대가 서남서 방향으로 일제히 도주하면···.”

다급한 함장의 말을 내가 벌떡 일어서며 끊었다.

“잠깐, 함장!”

“총독 각하?”

나는 일단 함장의 입을 막은 뒤 허쉬 제독에게 시선을 돌려 급하게 말했다.

“제독, 내 생각에 일레드 왕국이 이번 일을 아무리 중요하게 보더라도 1개 함대 이상의 전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소.”

“하지만 최대 1개 함대를 동원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니, 8척이 일레드 왕국의 함대라면 저놈들이 동원한 규모는 2함대의 모든 전투함을 합친 수보다 많소. 그리고 상식적으로 함대 소속의 모든 군함을 동원할 수 있는 함대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소?”

“네? 그게 무슨, 아···!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만.”

해군이라고 전쟁이 없을 때는 하릴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항로에 대한 순시 항해는 기본, 정기적으로 자국의 교역항에 돌아가면서 주둔하기도 하고, 훈련을 하거나 다른 임무를 맡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돌아가면서 조선소에 들어가 수리와 정비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임무 중인 함정을 불러 모을 수는 있지만, 수리 중인 배를 급하게 끌고 나올 수는 없는 일이잖나.

특히 이번 일은 매우 급하게 진행된 일이니, 일레드 왕국 놈들도 뭔가를 준비할 시간은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지금 접근하는 선단은 일레드 왕국 해군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내 예상이 맞다면 벨로키나 왕국의 함대일 거요.”

생뚱맞게 벨로키나 왕국이 나오니까 다들 표정이 기괴하게 구겨졌다.

벨로키나 왕국이 케르빈 섬과 제도를 손에 넣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운용하는 것은 케르빈 섬에 있는 항구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케르빈 섬에 주둔 중인 함대가 정찰을 나오기에 여기는 너무 멀다.

심지어 배도 별로 안 다니는 곳이고.

하지만 나는 얼마 전에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케르빈 제도에 있는 신규 항구 개발 지역을 두 눈으로 확인했었다.

물론 그쪽에서도 나오기 엄청 먼 거리인데다가, 그쪽에 주둔 중인 분함대의 1차 목표는 개발 지역의 방어이니 아닐 수도 있지만···.

발레리아 백작이 내게 했던 말도 그렇고, 왠지 느낌이 좀 그렇다.

“벨로키나 왕국의 함대라고 해도···.”

떨떠름한 일등항해사의 반응.

그럴 만도 한 게, 우리나라(프레티아)와 벨로키나 왕국이 막,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잖아?

그리고 그렇게 서먹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나다.

“미확인 선단 규모, 총 13척입니다!”

새로 출현한 선단의 규모를 확인했다는 전령이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전령이 엘로이 함의 대답을 가지고 왔다.

“엘로이에서 신호, 나포한 선박과 포로를 내놓지 않을 경우 자국(벨로키나)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하겠다고 합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제독, 시간을 조금 더 끌지. 새로 출현한 함대가 눈에 들어오면 저놈들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을 거야.”

“후우, 알겠습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허쉬 제독이 전령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엘로이에 신호, 잠시 의견을 조율할 시간을 달라고 해.”

“넷!”

이러면 한 30분은 벌었고, 30분이면 일레드 놈들도 새로 출현한 미지의 상대를 인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북쪽에 나타난 새로운 선단을 인지한 일레드 놈들이 결정을 재촉하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포로를 옮기고 예항 로프를 풀어야 해서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된다.

만약 새로 나타난 놈들도 일레드 놈들이면?

그럼 그냥 죽어야지 뭐··· 그때는 도주고 뭐고 생각할 필요도 없을걸?

* * *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고, 뒤늦게 새로 나타난 함대를 발견한 일레드 왕국 측에서 정신없이 신호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네이선, 우르타와 함께 선수까지 나와서 그 꼴을 보던 나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맨눈으로 봐서 무슨 내용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다급한 꼴을 보니 새로 나타난 함대가 확실히 일레드 왕국 쪽 함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역시 발레리아 백작인가···?”

“응? 그 뺀질이 말이지?”

“아주 뱀 같은 놈이야! 진짜 싫어!”

내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두 사람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털털한 사람 같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아주 그냥 백 년 묵은 구렁이가 따로 없다.

그런 사람이 전대 스코타 후작이 살아 있을 때는 쥐 죽은 듯이 지냈으니, 전대 후작은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었던 걸까?

내가 본 모습은 정말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뺀질이는 왜?”

“아까 말했잖아, 발레리아 백작의 수작 같다고.”

“어? 아, 그 사람이 해군대신이라고 했지?”

“진짜 뒤에 오는 함대가 벨로키나 왕국 함대야?”

“아마도? 그들 말고는 나타날 세력이 없으니까.”

물론 최고의 상황은 본국의 1함대 소속 전투함들이 합류하는 것이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첩자들의 눈속임을 위해 1함대는 대대적인 순시 항해에 나섰고, 지금 나와 있는 분함대 수준만 해도 무리해서 전력을 빼낸 것이니까.

이보다 더 많은 전력을 이쪽으로 뺐다면 첩자들의 눈을 속이기 어려웠을 거다.

“엘로이에서 신호, 즉시 본국의 상선을 석방하고 현 위치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견시대에서 신호를 받은 견시수가 아래를 향해 외치자, 내용을 확인한 전령이 함교로 뛰기 시작했다.

“난 함교로 가봐야겠다. 너희는 괜히 나대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 이 배에서 우리는 ‘손님’이니까.”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내려와. 함교 근처에 있을게.”

“무슨 일인지 꼭 알려줘야 해!”

두 사람에게 대충 손을 흔들고 함교로 걸어가고 있는데 견시수의 새로운 외침이 멀리서 들려왔다.

“우현 170도 방향, 벨로키나 왕국 1함대 확인! 현재 침로 서남서!”

서남서라면··· 아주 노골적이시군.

저대로 진행하면 벨로키나 왕국 함대는 우리 함대의 좌측을 틀어막은 일레드 왕국 함대의 후방을 잡게 된다.

그리고 그대로 우측으로 꺾으면 우리와 연계해서 일레드 왕국 해군 절반을 반포위하게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두 세력(일레드 왕국 vs 우리 함대 + 벨로키나 왕국 1함대)이 말굽 모양으로 서로의 절반을 포위하게 되는 거지.

숫자도 비슷하니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를 점치기 어려워진다.

가운데 끼인 우리 함대의 피해가 어마어마하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 *

“제독, 굳이 그대가 직접 가야겠나?”

“하하하, 총독 각하. 일단 책임자 회의라고 하는데 제가 그 자리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습니까?”

호탕하게 웃는 허쉬 제독의 표정이 한결 나아 보였다.

최악에서 ‘매우 위험’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그래봐야 위험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서 함대를 책임져야 할 허쉬 제독이 회의 자리에 참가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은데, 그의 말이 정론이기는 했다.

문제는 우리가 사령관을 보낸다고 해서 다른 두 세력도 사령관을 보낸다는 보장은 없는 거잖아.

‘책임자’라는 것은 사령관 본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니까.

벨로키나 왕국의 함대가 자리를 잡자 일레드 왕국의 함대에서는 난리가 났다.

다 잡은 고기를 풀어주게 생겼으니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자리 잡은 위치부터 노골적으로 우리 편을 들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벨로키나 왕국의 개입에 할 말이 매우 많은 것 같은 일레드 왕국 함대였지만···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신호기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결국 벨로키나 왕국 함대의 제안으로 ‘책임자 회의’가 개최되었다.

지루할 정도로 긴 합의의 시간을 거쳐 모든 세력의 포격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각 세력에서 단정 한 척씩만 보내 ‘대화’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다들 각각의 본국에서 훈령을 받기야 했겠지만, 그 훈령이 ‘전쟁도 불사’하라는 내용은 아닐 거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미묘해서 세 나라 중 어떤 나라건 전쟁을 시작하면 세계적인 공격을 받을 판이거든.

일레드 왕국 함대와 우리가 대치하고 있을 때와는 다르다.

그때야 우리 함대의 일방적인 패배, 심지어 탈출도 불가능한 수준의 대패가 확정적인 상황이었다.

근처에 상륙할만한 육지도 없으니 배만 파괴하면 생존자는 전무했을 것이다.

전투를 벌이더라도 아군의 입만 잘 막으면 전쟁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거지.

아무리 심증이 있어도 약소국인 프레티아 왕국이 일레드 왕국을 상대로 압박을 가하지는 못할 테니까.

심지어 1함대는 공식적으로 지금 다른 곳을 ‘순시 항해’ 중이지 않나.

이곳에 함대의 일부가 있었다는 것 자체에 의혹을 제시하면 오히려 프레티아 왕국 측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그런데 지금은?

물론 승패는 알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해서 지휘가 이원화된데다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개입할 필요가 없는 벨로키나 왕국의 함대가 포함된 아군이 꽤 불리하지.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졸전을 벌이고, 상대측에 천재 전략가가 있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도주하는 선박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포를 쏘면 그때부터 전쟁이다.

그 상황이 어떤 나라가 달갑겠는가? 고작 몇 년 전까지 다들 전화에 휘말려 상당한 타격을 입은 나라들인데.

일레드 왕국과 벨로키나 왕국은 대전쟁에서 서로 목에 칼을 겨누던 사이고, 프레티아 왕국은 비슷한 시기에 내전으로 박살이 났었다.

세 나라가 뒤섞여서 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전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쿠샤 왕국이나 몰로스 제국이 패권을 잡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프레티아 왕국은 몰로스 제국에 병합당할 수도 있겠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제국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지금도 처남이 상당히 곤란해하고 있거든.

* * *

엉겁결에 개최된 책임자 회의는 상당히 오래 걸렸다.

벌써 해가 지고 있는데 회의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세 척의 단정은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인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네? 아, 네, 그렇군요. 총독 각하.”

내 말에 함장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같은 함대 소속의 상관도 아니고 얼굴도 별로 본 적 없는 내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5년 전만 해도 장래가 촉망받는 해군 대령이라면 난 감히 그 앞에 앉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지.

새삼스럽게 격세지감이 느껴지네.

“아앗! 함장님! 제독께서 귀환하십니다!”

“뭐?! 당장 갑판장에게 제독을 맞을 준비를···!”

“잠깐, 함장.”

항해사의 보고에 기다렸다는 듯 다급하게 내게 멀어지며 명령을 내리는 함장을 부르자 그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제독이 완전히 복귀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게. 특히 이쪽으로 언제든지 포를 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함선들에 대해 최대 경계 태세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아, 알겠습니다.”

이 정도 조언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지 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항해사 한 명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더 지시하실 내용이 있으십니까?”

아무리 소속이 다르더라도 내가 1함대 사령관이니 예의상 묻는 거겠지.

“아니, 없네. 배려해 줘서 고맙네만, 이 배의 함장은 자네고, 허쉬 제독의 부재 시에는 그대가 사령관 대리가 아닌가. 굳이 내 의사를 물을 필요는 없다네.”

저들이 과도한 예를 표한다고 해도 내가 그걸 받을 수야 없는 일이다.

나중에 허쉬 제독에게 무슨 욕을 먹으려고 그런 짓을 하겠어?

함교에서 내려와 접근 중인 단정을 살펴보니 뱃전에 서 있는 허쉬 제독이 보인다.

노를 젓는 네 사람을 제외한 두 사람이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것으로 봐서 수병들이 뜯어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다.

수병 녀석들 입장도 알만하다.

아무리 파도가 거의 없다고 해도 보트 수준인 단정 정도 크기면 흔들림이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뱃전에 서 있다가 제독이 바다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어?

그 정도로 제독이 죽지는 않겠지만, 아마 괜한 징계를 피하기는 어렵겠지.

그래도 어렴풋이 보이는 제독의 표정이 좀 밝아 보이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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