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화> 암살 >
뭐야,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시계를 잡았다.
이제 겨우 4시··· 제일 어두울 시간이다.
이 시간에 부두가 소란스럽다면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말인데.
재빨리 몸을 튕겨 일어난 나는 가장 먼저 칼을 잡았다.
그리고 문 확인, 아무 이상 없다.
옷을 챙겨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총독 각하, 일등항해사입니다. 별일 없으십니까?”
“기다려.”
긴장을 끌어올리며 잠금장치를 해제한 나는 한 템포 엇박자로 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칼날이 날아오··· 지는 않았다.
문 앞에는 사색이 된 일등항해사가 수병 세 명과 함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각하, 지금 함교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암··· 살입니다.”
“뭐?!”
이런 개 같은!
지금 상황에서 허쉬 제독이 죽었다고? 누가? 왜?
허쉬 제독을 죽여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내 부하들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함교로 가지.”
“넷! 모시겠습니다.”
* * *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허쉬 제독을 암살한다는 말인가?
“어서 오십시오, 총독 각하. 한밤중에 죄송합니다.”
“응? 제독?”
“네. 아무래도 상황이 조금 심각해서 부득이하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암살당했다고 들었는데?”
“네, 면목 없습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암살을 당했다는 허쉬 제독은 급하게 나왔는지 옷차림이 조금 망가져 있지만, 어딜 봐도 다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아, 암살 기도가 있었는데 허쉬 제독이 잘 피한 건가?
“휴우, 그래도 제독이 무사해서 다행이오. 다친 곳은 없소?”
“네? 저야 뭐, 다칠 일이 없었습니다만?”
내 말에 어리둥절하는 허쉬 제독을 보니 뭔가 내가 크게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선을 돌려 나를 안내한 일등항해사를 보았다.
“힉···!”
안절부절못하던 일등항해사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깜짝 놀란다.
뭐야, 이 자식?
“죄,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만···!”
“지금 거짓 보고를 했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아, 암살이 맞기는 한데··· 대상이 포로들입니다.”
이런 씨···.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내가 분명히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경계를 얼마나 허술하게 한 거야?
“제독, 어찌 된 일이오?”
“지금 파악 중입니다만, 포로 중 간부를 따로 격리한 선창이 공격당해 전원··· 사망했습니다.”
탁탁탁탁탁탁!
“뭐···! 어억!”
“막, 아앗?!”
급박한 발소리와 함께 함교에 올라선 네이선이 엉겁결에 그를 막아선 수병을 거칠게 밀어내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제독, 괜찮으십니까?”
언제든지 칼을 뽑을 수 있도록 손잡이를 잡고 있는 네이선의 근육이 극도로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지금 칼을 뽑지 않은 것만 해도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리라.
남의 함교에서 먼저 칼을 뽑으면 싸우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버티는 중이겠지.
“감히! 함교에 무단 침입하다니 제정신인가!”
허쉬 제독의 인상이 보기 싫게 찡그려지고, 함장이 네이선에게 삿대질을 하며 벌컥 화를 냈다.
이건 네이선이 잘못한 게 맞다.
그래도 내가 걱정되어 한달음에 달려온 녀석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네이선, 어서 사과드려.”
“네? 아니, 나는···.”
당황한 네이선이 버벅거리는 사이에 나는 재빨리 맞은편의 두 사람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네, 함장. 이렇게 경우 없는 친구가 아닌데, 암살이라는 말에 너무 흥분한 모양이군. 노여움을 푸시게.”
함교는 함장의 공간이다.
그래서 허쉬 제독도 먼저 나서지 않은 것이고.
하지만 군 계급으로도, 신분으로도 한참 상급자인 내가 먼저 사과를 하면 함장이 그걸 안 받을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후우, 총독 각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그··· 죄송합니다, 함장님. 암살사건이라는 말에 너무 놀라서 그만···.”
분위기를 파악한 네이선이 어색하게 사과하는데 함교로 통하는 계단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 안 된다니까요! 아악! 물지 마, 물지 마!”
“비켜어! 비키라구! 나는 리안, 아니, 제독, 아, 아니, 허쉬 제독 말고, 리안 제독! 총독에게 가야 한다니까?!”
“잡아! 잡아앗!”
네이선의 돌파로 긴장감이 200%쯤 상승한 수병들에게 우르타가 붙잡힌 모양이다.
머리가 다시 아파져 왔다.
“네이선, 우르타 데리고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어.”
“네, 제독.”
네이선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함교에서 내려가자, 허쉬 제독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평범한 선원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 가장 오래 나와 함께 한··· 친구들이오.”
“하하, 총독 각하의 친구라니, 정말 운이 좋은 친구들이군요.”
“어쩌면 내가 운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보다.”
적당히 분위기가 풀리자 나는 목소리에 살짝 날을 세웠다.
어딘가에서 나오지 않아? 패장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할 수 없다고.
“그나저나 제독, 내가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소? 경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입항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오?! 경계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총독 각하! 말씀이 과하십니다!”
내 질책에 함장이 발끈하며 나섰다.
뭐, 내가 못 할 말 했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경계도 제대로 못 한 놈들이 자존심만 세우네?
“함장, 그만두게. 그리고 총독께서도 말씀을 아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손을 들어 함장을 말리며 나를 보는 허쉬 제독의 눈에 불꽃이 튀는 느낌이 들었다.
“경계에 실패한 책임이 제게 있는 것은 맞지만,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간부 포로들을 감금한 선창을 지키던 수병 여섯 명을 포함해 열다섯이 죽었습니다.”
“제독께서 추가로 편성한 경계 인원이 아니었다면 화약고까지 폭파당할 뻔했습니다. 제독께서는 경계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사태를 막으신 겁니다!”
깊은 슬픔과 자책이 느껴지는 허쉬 제독의 설명에 이은 함장의 열변에 나는 살짝 민망해졌다.
팔다리가 묶여있는 포로들을 감금한 선창 앞에 경계 인원을 여섯이나 세웠으면 신경을 안 썼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 아무리 중요한 창고라도 평시에는 경계병을 두 명, 긴장 상황에서도 네 명 정도 세우게 된다.
경계 중인 네 사람을 동시에 아무런 소란 없이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음, 질책하려던 것은 아니었소. 그런데 제독의 말대로라면 여섯 명이 경고도 발하지 못하고 죽은 거요?”
내가 한발 물러서며 질문을 던지자 함장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전문적인 암살자들의 솜씨였습니다. 아무래도 일레드 놈들을 눈이 안 닿는 먼 부두에 정박시킨 것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으음···.”
이곳 에쉬노르 항구는 프레티아 왕국의 최북단 교역항이며, 일레드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이기도 했다.
일레드 왕국의 영향력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그렇지, 입항한 당일 밤에 암살자들을 동원하다니, 저쪽에 진짜 미친놈이 하나 끼어있는 모양이다.
“미치겠군. 전문 암살자라고? 혹시 그 외에는 피해가 없소?”
“이미 확인을 지시했습니다.”
타이밍 좋게 발소리가 들리더니 땀을 뻘뻘 흘리는 갑판장이 함교에 올랐다.
“함장님, 함 내에 외부인원이나 추가 피해는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포는 개방하지 말고 함 내 총원은 무장을 유지한다. 다른 배들에게도 전달해.”
“넷!”
갑판장이 떠나자 함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들이 노린 곳은 간부 포로들이 감금된 곳과 화약고입니다. 화약고를 폭파하기 전에 포로들을 확실하게 암살한 모양입니다. 경계를 맡은 감이 좋은 수병 하나가 피 냄새를 맡고 조기에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포로들은 모두 죽었다는 말이군.”
“네.”
“다른 포로들은?”
“이미 포로를 감금하고 있는 함선에 전령을 보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박한 함선들 모두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통 혼란한 게 아니었다.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애초에 일레드 왕국 쪽에서 파견된 암살단이 있었던 건지, 항구의 토착 암살단을 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뒷골목을 한 번 뒤집기는 해야겠소.”
“날이 밝는 대로 항구관리관과 치안관을 호출해서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허쉬 제독의 말대로였다.
마음먹고 헤집는다고 해결이 될 문제였다면 각 도시의 소위 ‘뒷골목’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어두운 지금 뒷골목으로 추격대를 보내는 것은 무모한 짓이니, 결국 날이 밝으면 엄한 뒷골목 하류 인생들 몇 놈이나 족치는 것으로 끝날 확률이 높았다.
암살단 놈들은 이미 몸을 뺀 이후일 테니까.
그나저나 이 정도 의뢰라면 금액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하긴, 지금 일레드 놈들 입장에서 돈 몇 푼이 중요할 리가 없지.
“시체 상태 보존하고, 날이 밝는 대로 일레드 왕국 함대 쪽의 책임자를 호출해주시오. 이왕이면 벨로키나 왕국 측도 호출하면 좋겠군.”
내 요청에 허쉬 제독이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총독 각하, 오늘 저녁에 이미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만. 아침에 추가 호출을 하면 분위기가 좋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라고 하는 것이오. 제독은 걱정 말고 내 부탁대로 진행해주셨으면 좋겠소.”
“후우, 알겠습니다.”
뒷정리를 부탁하고 함교를 내려온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우르타와 네이선을 만났다.
“리안! 음, 제독! 괜찮아? 요?”
매우 어색한 존댓말로 질문을 던진 우르타가 내 몸을 여기저기 만지며 호들갑을 떨었고, 네이선은 민망한지 눈을 피하며 어색한 헛기침을 해댔다.
“네이선, 날이 밝는 대로 엘리시아 호로 가서 우리 애들 데리고 와. 전부 다. 마들랜드 앞 부두에 정렬시키도록 해. 아, 무장도 시키고.”
“전부? 누구를 공격하려고 그러십니까?”
“···필요하다면.”
심상치 않은 내 분위기를 느낀 네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독.”
* * *
“흥,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을 불러내더니 한다는 일이 고작 시체 몇 구를 보여주는 거요? 보아하니 한밤중에 죽은 모양인데, 이걸 도대체 왜 보여주는 거요?”
일레드 왕국 쪽 대표라고 온 작자가 한껏 비웃음을 날리며 물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나는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보고 말했다.
“지난 새벽에 본 함을 상대로 암살 및 폭파 시도가 있었소. 지금 그대들이 보는 것은 어제 희생된 자들이고.”
“오, 그거참 안된 일이군. 귀국의 해군은 인기가 별로 안 좋은 모양이오? 입항하자마자 암살이라니. 그래, 그걸 자랑하려고 우리를 불러들인 거요?”
“자세히 보시오. 그대라면 아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 말에 시체들을 대충 살핀 그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아무리 본국에 속한 상선이라도 내가 그들의 얼굴까지 알 리가 없지 않소?”
“그렇군. 하지만 저들의 소속은 해군이잖소. 그런데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요?”
“해군? 누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요? 근거 없는 그대들의 주장일 뿐이잖소? 안타깝게도 준비한 거짓 증언을 해줄 인물들마저 다 저렇게 입을 열 수 없게 된 모양인데.”
자신만만하게 비웃음을 흘리는 그에게 시선을 뗀 나는 벨로키나 왕국의 대표에게 말했다.
“나는 저 시체들이 누구라고 한 적이 없소.”
“으음? 암살의 희생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지. 그런데 나는 저들이 우리가 잡은 ‘포로’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군.”
내가 말을 마치자 벨로키나 왕국 쪽 대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일레드 왕국 쪽 대표의 표정도 딱히 다를 게 없었다.
이 새끼, 이제야 네놈의 실수를 눈치챈 거냐?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우리 쪽 동정을 살피던 놈들이 있었을 것이고 지난 새벽에 난리가 났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심지어 날이 밝기 무섭게 우리 쪽에서 대표를 호출하더니 포로들의 시체를 보여준다.
우리가 당황과 분노에 휩싸여 무작정 자신들을 닦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간부급 인사들의 입을 다 막았으니 별 상관없다고 여겼겠지.
포로가 된 해군 소속 병사들이 남아있지만, 아무래도 간부(장교)급 인사들과 그 발언의 무게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크흠! 입고 있는 옷을 딱 보면 모르겠소? 어디를 봐도 상선의 간부들인데.”
일레드 대표가 다급하게 한마디를 던졌지만 이미 수렁에 빠진 다음이었다.
“겉옷도 아니고 내의만 가지고도 그게 파악이 된다고? 눈썰미가 대단하시군.”
포로들을 옷을 그대로 입힌 채로 감금할 리가 없지 않나.
당연히 시체들은 내의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일반 선원에 비해 재질이 조금 더 고급지기야 하겠지만, 밋밋한 내의를 눈으로만 보고 그 재질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형편없이 구겨지고 피까지 덕지덕지 묻어 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여튼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고···.”
“나는 저들이 포로 중 ‘간부’라고 한 적도 없소.”
“그거야 옷을 보면 다 안다고 하지 않았소!”
벌컥 화를 내는 녀석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
그리고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벨로키나 왕국 측 대표의 눈초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쓸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본인은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불안한 듯 연신 뒤를 힐끔거리며 떠나는 일레드 왕국 대표를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말꼬리를 잡기는 했지만,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쓸만한 패로 가공할 수 있었던 증인들이 다 뒤졌는데 어쩌겠냐고.
“흐음, 상황은 대충 알겠소. 귀국은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일단 서로 인사부터 합시다. 마음이 급해서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내 말에 벨로키나 왕국 측 대표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군, 이런 실례가 있나. 벨로키나 왕립 함대 대령, 이오시프요. 리엘라 함의 함장을 맡고 있소.”
“프레티아 왕국 제2함대 사령관, 폰테 섬 총독, 리안 리블르앙 백작이오.”
“헛? 당신이? 아, 귀하가? 이런··· 실례를 용서해주시길. 총독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