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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18화 (417/420)

< <418화> 미안, 지금 좀 급해서! >

“프레티아 왕국 제2함대 사령관, 폰테 섬 총독, 리안 리블르앙 백작이오.”

“헛? 당신이? 아, 귀하가? 이런··· 실례를 용서해주시길. 총독 각하.”

말은 놀랍다고 하는데 진짜 놀란 것 같지는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의외이기는 한데 말처럼 깜짝 놀라지는 않은 느낌?

“별로 놀란 것 같지 않군. 이미 알고 있었소?”

심드렁한 내 말에 이오시프 대령은 몸을 바로 하고 살짝 웃었다.

“정말 총독 각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분함대를 대표하기에는 너무 젊으셔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만.”

“······.”

처음부터 알아봤던 것 같기는 한데, 내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옷을 입은 것도 아닌지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뭐··· 대충 상황은 알겠습니다. 총독 각하가 어떤 심증을 가지고 계시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범인을 사로잡은 것도 아니니 딱히 손을 쓸 방법은 없겠군요.”

“일단 뒷골목을 뒤져볼 생각이오만.”

“하하, 부디 성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웃으며 예를 취하고 돌아서는 이오시프 대령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발렌시아 백작과 무슨 관계요?”

“발렌시아 백작 각하라면 본국의 해군대신이 아니십니까? 저야 해군 소속이니 그분이 제 상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뒤를 돌아보며 미리 준비한 것 같은 답을 내놓는 그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이놈이 대리인이구나.

“이왕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는데 잠시 이야기나 나누는 게 어떻겠소? 대령도 내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예전부터 총독 각하의 위명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으니까요. 각하의 장쾌한 일대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군요.”

나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승낙하는 그를 데리고 귀빈실로 향했다.

* * *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이리저리 말 돌리는 것을 싫어하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여유로운 표정의 이오시프 대령을 잠시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발레리아 백작에게 무슨 명령을 받은 거요?”

“뭐, 저희가 받은 명령이야 특별히 다를 건 없었습니다. 일레드 왕국에서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순시 항해였을 뿐이죠.”

“순시 항해라. 상선 한 척 보기 힘든 곳에 말이오?”

“못된 짓을 꾸미려면 보통 남들 눈이 닿지 않는 곳을 노리지 않겠습니까?”

무슨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아직 인간은 바다의 주인이 아니고, 배를 띄우지 않는 이상 바다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일레드 놈들이 아무도 안 다니는 공백 해역에 와서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겠어?

하지만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해 이오시프 대령은 열심히 입을 놀렸다.

“놀랍게도 저 비열한 놈들이 사략질을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이러니 본국이라고 손을 놓고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군. 그러면 우리는 그대들의 도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되겠군.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니 말이야. 아니면, 처음에 그쪽이 주장했다는 대로 이웃 국가들의 ‘평화’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면 되겠소?”

한 마디로 빈손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이쪽이 요청하지도 않는 ‘호의’를 베풀었다면 그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되는 것 아니겠어?

“흐음, 저 역시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대로 입을 닦겠다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지 않는 이오시프 대령은 말을 늘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 입장도 조금 생각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히 두 함대가 싸우는 것만 말리고 떠났다면 몰라도, 지금 저희는 상부에서 내려온 작전 명령을 어긴 상태니까요. 순시 항해에 여기 벵가로쉬 항구에 입항하는 일정은 없으니 말입니다.”

말 더럽게 돌려대네.

결국 똑같은 말이잖아.

이 자식은 군인이야, 외교관이야?

전투함 함장이라는 자리가 막 정치질 잘하고 줄 잘 선다고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닌데?

“후우, 그래서 원하는 게 뭐요?”

“일단 그 나포한 사략선들 말입니다. 저희가 없었다면 나포한 배들을 지금처럼 온전히 끌고 오기는커녕 적지 않는 전투함까지 잃으실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절반 정도는 저희에게 양보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말을 정정해야겠다.

이놈은 외교관이 아니라 강도임이 틀림없다!

대포 한 번 안 쏜 놈들이 전리품의 절반을 달라니, 이게 말이야 망아지야?

심지어 그게 ‘일단’이란다.

‘일단’이면 다른 조건이 또 있다는 말이잖아.

내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같잖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병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느니, 보급물자를 새로 보급해야 한다느니, 무리한 항해로 파손된 함선을 수리해야 한다느니, 징계를 피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느니, 감봉은 피할 수 없으니 용돈 정도는 챙겨야 한다느니 뭐··· 그런 내용들 말이다.

가만히 놔두면 하루 종일이라도 변명을 만들어 낼 기세라서 나는 적당히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두 척. 거기까지가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요. 그대들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실제로 우리는 전투로 인해 사람이 죽고 배가 망가졌소. 최소한 손실을 보전할 정도는 남아야 할 것 아니오?”

“이것 참, 물론 각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솔직히 저희가 여섯 척을 모두 달라고 해도 수긍할만한 상황이 아닙니까?”

계속 그렇게 간을 보시겠다?

“좋소. 그럼 포로만 우리가 데리고 가고 나포한 여섯 척을 모두 드리지. 그럼 그것으로 이번 도움에 대한 계산을 끝내면 되겠소?”

사략선 여섯 척이면 엄청난 가치가 있지만, 어차피 내 것도 아니잖아.

허쉬 제독은 물론이고 1함대 전 인원에게 한바탕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꿍꿍이를 모르는 이상 제일 싸게 먹히는 것은 결국 물질, 즉 돈이다.

“하하하, 저희도 양심이 있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총독 각하의 말씀대로 두 척으로 하시지요. 다만 저희는 먼 길을 가야 하니 가장 온전한 녀석으로 골라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고작 나포한 선박 몇 척 얻겠다고 이런 장대한 계획을 실행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온전한 녀석을 골라가는 게 아니고 가장 비싸게 팔릴 녀석을 가지고 가겠지.

하지만 이미 말한 대로 물질적인 부분은 정말 사소한 부분에 불과했다.

진짜 중요한 내용은 이다음에 나올 말이고.

“마음대로 하시오. 그리고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된 것 같은데. 밖에서 보신 것처럼 부하들을 밑에 대기시켜 놓아서 말이지.”

“오, 제가 각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모양입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과장되게 너스레를 떠는 녀석을 보니 점점 짜증이 치솟았다.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하다.

꼬투리를 잡기는 애매하게 속을 살살 긁어서 내가 격양된 감정으로 인해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로 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만하고 백작의, 아니, 귀국의 요구를 말하시오.”

모두 숨기지 못한 마음이 섞여 약간 퉁명스러운 내 말을 들은 대령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후후, 총독 각하도 아시다시피 본국은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몰랐소만.”

너희 나라 당면 국책 사업이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이런 건 알아도 모른다.

“아하하, 모르셨군요. 분명히 신규 항구 건설지에 다녀가셨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 그 이야기인가? 내가 깜빡한 모양이군.”

이오시프 대령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헷, 한 방 먹인 듯?

내게 한 방 먹은 것에 대한 보답(?)인지 벨로키나 왕국의 노던테라 항로 개척 사업에 대해 장황하게 떠들어대던 이오시프 대령은 한참이 지나서야 본론을 내뱉었다.

“···그래서 귀국의 노던테라 탐사선단에 본국의 탐사선을 포함시켜주셨으면 합니다.”

“하, 그러니까 본국의 노던테라 탐사 계획의 과실을 나눠서 드시겠다?”

“저런,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당연히 본국에서 진행되는 탐사에서 발생하는 성과도 공유하게 될 겁니다. 서로 주고받는 ‘공정한’ 계약이지요.”

공정하긴 개뿔이.

아직 항구도 제대로 못 만들었고, 폰테 섬보다 노던테라에서 한참 멀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서 하는 탐사 활동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심지어 항로조차 [프레티아 본토 - 폰테 섬 - 노던테라 개척지]와 전혀 다를 것이 분명한데다가 그쪽을 통과하면 프레티아 왕국에서 거리도 훨씬 멀어진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그 부분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군. 본국의 국왕 폐하께 그대의 제안을 아뢰도록 하겠소.”

옳다구나 싶어서 바로 책임회피 스킬을 사용했지만, 그게 바로 놈의 함정이었다.

“흠, 역시 그 부분까지는 총독 각하라도 결정이 어려우시겠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폰테 섬에서 본국이 탐사선단을 운용하는 것을 허용해주십시오. 어차피 탐사선 몇 척이라고 해봐야 무장상선과 다를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폰테 섬의 안보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겁니다. 탐사에 대한 허용이라고 해봐야, 그저 과할 것도 없이 물과 식량만 충분하게 지원해 주시면 충분합니다.”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 내었다.

어떤 일이건 동등한 조건이라면 국력이 몇 배나 되는 벨로키나 왕국이 프레티아 왕국보다 더 유리한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폰테 섬에서 두 나라의 탐사선단이 동등한 조건을 가지고 경쟁한다?

그렇게 했다가 벨로키나 왕국에서 먼저 노던테라를 발견하고, 가장 좋은 거점을 선점해버린다면···.

국운을 걸고 나를 영입해서 폰테 섬을 가져오고, 폰테 섬을 기반으로 노던테라 서부로 진출한다는 프레티아 왕국의 장대한 계획은 반쪽, 어쩌면 그보다 못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걸 거절하기도 애매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국제 협약에 의해 폰테 섬에 입항할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국의 무장 함대일 뿐, 탐사선이 아니니까.

내가 여기에서 ‘싫은뎁?!’이라고 외치면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독점하기 위해서 타국의 탐사선에게는 크고 작은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언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게 프레티아 왕국의 노던테라 탐사 계획의 주 내용이란 말이야.

만약 타국이 폰테 섬을 베이스캠프 삼아 노던테라로 향하는 항로를 탐사하려는 계획을 세우면, 그 탐사선단을 내가 은근슬쩍 견제하는 것 말이지.

어떻게 견제하냐고?

나는 폰테 섬의 총독이고, 실제로 폰테 섬에서 내 허가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예를 들자면 섬의 식량, 식수 부족을 핑계 삼아 보급물자의 양을 제한한다든지, 북쪽으로 향하려는 선단을 경비대가 막아서 위험 해역이니 퇴거하라고 한다든지, 남몰래 함대를 파견해 쓱싹··· 흠, 한다든지 뭐 그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않나.

그런데 여기에서 저놈의 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약속을 어기고 놈들을 방해하거나, 그게 아니면 본국의 탐사선단과 비슷한 지원을 제공해야 한단 말이다.

거짓 약속을 하느냐, 본국의 대형 프로젝트에 똥물을 끼얹느냐인데···.

“하하하, 고민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상식적이지 못한 불이익이 없도록만 해달라는 것이니 말입니다. 폰테 섬의 총독으로서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이 아닙니까?”

쾅, 쾅, 쾅!

“총독 각하! 빨리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외침에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큼은 해적 놈들이 쳐들어왔다고 해도 웃으면서 그놈들을 바다 깊은 곳에 처박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실례하겠소. 무슨 일이냐?!”

굳어진 표정의 이오시프 대령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지금 일레드 왕국 해군이 항구를 떠나겠다고 하면서 연안 경비대와 대치 중이라고 합니다!”

“뭐?!”

나는 깜짝 놀라며 급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사실 진짜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일레드 놈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마들랜드 함의 폭파에는 실패했지만 해군 출신 장교들은 다 죽였잖아.

장교들이 다 죽은 것도 확인했고, 다시 마들랜드의 폭파를 시도할 상황은 아니니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맞다.

저녁에 약속된 회의? 어차피 자기들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게 뻔한데 뭣 하러 그때까지 기다리겠어?

문을 열자 얼마나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는 선원이 보였다.

“지금 허쉬 제독이 함교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장 각하를 모셔오라고···!”

“알았다!”

급하게 대답한 나는 이오시프 대령에게 정중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대령, 미안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소. 그대도 들었다시피 지금 한가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니구려.”

“···알겠습니다. 총독 각하. 상황이 수습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대령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담담하게 내 축객령을 받아들였다.

집주인이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지, 자기가 어쩔 거야?

“그럽시다. 거기 수병! 이오시프 함장을 현문까지 모시도록. 나는 알아서 갈 테니.”

“네? 하지만 제독께서는···.”

“어허! 아무리 본국 소속이 아니라지만 여기 이오시프 대령은 함장이다. 본함에 방문한 타 함선의 함장을 안내하는 이도 없이 내보내라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함장을 잘 안내하도록.”

“넷! 총독 각하!”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방을 나서기 전 내게 정중하게 예까지 취한 이오시프 대령이 수병을 따라 멀어졌다.

아까 인사할 때 이가 부드득거리는 것 같았는데, 잘못 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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