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흙수저 선원으로 살아남기-419화 (418/420)

< <419화> 개를 때리면 주인이···. >

“어서 오십시오, 총독 각하. 들으셨겠지만···.”

“제독, 긴급 출항을 준비 중인 것 같은데 일레드 왕국 함대를 저지할 생각이오?”

긴장한 느낌이 역력한 허쉬 제독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다.

함교에 오르면서 보니 이미 긴급 출항 준비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아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시겠지만 연안 경비대 수준으로는 놈들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해안포를 사용한다면 조금 낫겠지만, 그랬다가는 문제가 커지니 말입니다.”

제독이 아직 드문드문 남아있는 각국의 상선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제독의 말대로 해안포 사격은 진짜 최악의 상황에서나 꺼낼만한 패였다.

아무리 일레드 왕국 함대가 정박한 부두 근처에는 일반 상선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되었건 각국의 상선이 정박한 항구에 포격을 가한다면 항구의 평판이 지하를 뚫고 내려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신뢰할 수 없는 대포의 명중률 덕분에 진짜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일이고.

물론 저쪽이 먼저 포격을 한다면 상황이 다르지만,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적진 한가운데에서 먼저 극단적인 도발을 할 리가 없었다.

“잠깐! 제독, 내 말을 들어보시오. 굳이 그들을 저지할 필요가 있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놈들이 감히 본국의 항구에서 연안 경비대를 상대로···!”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오. 저들이 연안 경비대에 선제공격을 했소?”

“총독 각하! 본국의 항구에서! 그것도 타국의 군대가! 본국 관리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것 자체가 공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과도한 충성심인지 군인의 자존심인지 모르겠지만, 허쉬 제독은 평소와 다르게 꽤나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부딪히면 진짜 대형 사고가 터진다.

만약 우리 함대가 놈들을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제압하려고 들면, 심지어 그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전투의 승패가 문제가 아니다.

그런 상황 자체가 조미료만 잘(?) 치면, 우리가 비열한 방법으로 일레드 왕국 함대를 본국 항구로 불러들인 후 기습하여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제독! 다시 말하지만, 냉정을 되찾으시오! 정말 저들이 선제공격을 한 거요?”

“공격은, 후우··· 하지만 굳이 공격을 하지 않더라도 놈들이 덩치로 밀어붙이면 연안 경비대로서는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일레드 왕국의 전투함들은 평균배수량 800톤 정도의 대형 함선들이고, 연안 경비대는 고작 100~500톤 수준의 중소형 함선이다.

심지어 숫자도 일레드 쪽이 압도적이니 그들이 그냥 몸으로 밀어붙여도 연안 경비대로서는 감히 막아설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면 뭐가 달라질까?

물론 일레드 왕국 쪽에서 더 이상 몸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하겠지, 개별 체급이 엇비슷하니까.

그런데 이미 숫자에서 압도적이니 피해를 감수하면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가장 원론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니, 아니. 잘 생각해 보시오. 저들을 붙잡아 놓고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소?”

“그거야··· 어··· 오늘 협상 자리에서···.”

“그렇지. 협상 자리에서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목표요. 사실 포로들이 암살당한 순간부터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으음··· 그렇지요.”

“그런데 저놈들이 알아서 빈손으로 떠나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있겠소?”

“하지만 저놈들이 굳이 무리해가면서 떠나려는 이유가 있을 테니 일단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독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놈들이 재빨리 떠나려는 이유야 뻔하지 않나.

“저들 입장에서 이 항구에 들어온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미 달성했소. 더 있어 봐야 좋은 꼴을 보기 힘들지.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암살의 배후가 드러난다거나 하면 저놈들도 꽤 곤란해지지 않겠소?”

“그렇겠군요.”

“막아야 할 이유도 없고, 현실적으로 지금 아군 전력을 가지고는 저들을 피해 없이 제압하기도 어렵소. 물론 제압한다는 행위 자체가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전력이 압도적인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당연히 무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러면 놈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한다고 한들 전쟁의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

우리가 선제공격을 한 꼴이니 다른 나라들도 우리 편을 들어주기가 퍽 난감할 테고, 프레티아 왕국의 국력으로는 일레드 왕국과 전면전을 하는 순간 멸망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 특급열차를 타는 꼴이다.

“크윽, 그럼 각하께서는 놈들을 그냥 보내주자는 것입니까?”

이를 악문 허쉬 제독과, 차마 대화에 끼지는 못하지만 울분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함장 이하 항해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레드 놈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출항을 한다면 몰라도,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남의 집 안방에 흙 묻은 신발로 돌아다니는 짓과 같았다.

일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그것마저 없다면 해군 장교로 살기가 힘들다) 이들이니 지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지 이해가 된다.

나도 결코 기분이 좋지는 않고.

“제독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순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지 않소?”

“······.”

말없이 일레드 왕국 함대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던 허쉬 제독은 손짓으로 함장을 불렀다.

“네, 제독.”

“함장, 긴급 출항 취소하고 연안 경비대에 길을 열어주라고 하게.”

“제독!”

“분하지만 총독 각하의 말씀이 맞아. 지금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숙일 때이네. 우리는 비록 이렇게 분을 참아야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후배들은 이 모욕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고개를 떨구며 전령을 부르는 함장을 막아선 뒤 다시 허쉬 제독에게 제안을 던졌다.

“제독, 그러지 말고 출항은 하는 게 어떻소?”

“네? 방금 총독께서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까?”

“굳이 놈들을 막아설 필요는 없지만, 시위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소? 우리가 놈들이 나가는 길을 제한하고 해안포도 조준하고. 제멋대로 떠날 수는 있어도 뒤통수가 근질근질하기는 할 거요. 그리고 사실 내가 시간이 좀 필요하기도 해서 말이오.”

이대로 출항을 안 하면 방금 배를 떠난 그놈이 득달같이 달려올 것 같아서 그렇다.

최소한 적당한 대답이 생각날 때까지 시간은 벌어야지.

* * *

어차피 방해만 되는 연안 경비대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한 함대는 부두를 빠져나와 일레드 왕국 함대가 정박하고 있던 남쪽 부두로 향했다.

어차피 작은 곶 하나만 넘어가면 되는 곳이라 우리는 금방 북적거리는 일레드 왕국의 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려 27척의 전투함이 빽빽하게 정박하고 있었는데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쉽게 되겠는가?

꼴을 보니 미리 출항한 몇 척이 돛을 거의 내리고 서행하며 주변을 경계하고, 안쪽에 정박한 배들이 이제 막 슬슬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일레드 쪽도 미리 준비한 일은 아니었는지, 자기들끼리 몸을 빼는 것만 해도 혼잡했던 상황에 우리까지 끼어드니 아주 난장판이 벌어졌다.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사방에서 고함과 욕설이 난무했고, 견시수는 어디로 보내는지도 모르겠는 신호를 보내느라 정신없이 깃발을 휘두른다.

그 와중에 허쉬 제독의 지휘하에 우리 함대는 천천히 자리 잡으며 측면을 드러내 언제든지 포격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점했다.

물론 우리는 포격을 할 의사도 없고, 일레드 쪽도 우리가 포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하겠지만 그래도 뻔히 보이는 화망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함장님, 견시 보고입니다. 일레드 왕국 쪽 함선에서 적대행위를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흥,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견시수에게 본국의 통제에 따르라는 신호나 계속 보내라고 해. 아, 갑판장에게 말해서 함수에도 신호수를 배치하고 같은 신호를 반복하라고 하도록.”

“넵.”

전령이 함교에서 내려가자 망원경을 붙잡고 있던 함장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독, 해안 포대도 재배치 완료했습니다. 저놈들도 이제 슬슬 똥줄이 탈 겁니다. 흐흐흐.”

“그런가. 마음 같아서는 일제 포격 명령을 내리고 싶군. 최소한 대여섯 척에는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가벼운 허쉬 제독의 농담에 함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물론 첫 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강요할 수는 있겠지만, 놈들의 전력은 무려 27척이다.

놈들이 진형도 제대로 짜지 못한 초반에야 유리할지 몰라도 결국은 아군의 패배로 끝날 확률이 높았다.

뭐, 승패에 상관없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같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냉정을 되찾은 허쉬 제독이 공격이라는 미친 명령을 내리는 일은 없었다.

일레드 왕국 함대도 우리가 자리만 잡고 가만히 있자, 이전과 달리 기동할 공간이 충분한 바깥 쪽 함선부터 허겁지겁 항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허허, 마지막에 나가는 건가? 배짱 하나는 대단하군.”

헛웃음을 터뜨리는 허쉬 제독의 말대로 마지막까지 항구에 남아있던 2함대 기함 엘로이를 비롯한 세 척의 함선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이쪽을 경계하듯 비효율적인 동선을 감수하면서 선측면을 우리를 향한 채였다.

“전령, 포갑판에 포문 개방 후 예포 발사 전달해.”

“제독?!”

허쉬 제독의 돌발 명령에 함장이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말이 좋아 예포지, 지금 상황에서는 공격으로 오인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허쉬 제독은 어깨를 으쓱하며 심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본국을 방문한 타국 함대가 가는데 예포 정도는 쏴 줘야지. 손님이 매너가 없다고 해도 주인까지 매너가 없을 수는 없지 않나?”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위험? 저 밖에서 얼쩡거리는 놈들이 다시 돌아오려면 한 세월일 거고, 아무리 엘베도라 급이 강력한 함선이라고 해도 적은 고작 세 척이네. 예포를 오해해서 저놈들이 선공을 취하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겠지.”

“후우··· 알겠습니다. 저도 놈들이 놀란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주제에 너무 당당해서 아니꼽던 참이었습니다. 전령, 제독의 명령을 전달해.”

잠시 후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가던 일레드 왕국 함대의 함선 세 척이 분주해지더니 포문이 열리고 거무튀튀한 함포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렸던 돛도 급히 펼치려는 꼴이 우스웠다.

아마 우리 포문이 개방된 것을 확인한 것이겠지.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첫 포성을 시작으로 일정 간격으로 포성이 울리며 흰 포연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미리 망원경을 들어 놈들을 살펴보니 갑판 위에 있던 수병들이 엎드리고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끌끌끌, 전령, 함대에 신호. 전 함대는 손님들이 떠날 때까지 현 위치 유지.”

* * *

내 재촉 때문에 입항과 동시에 쫓겨나듯이 배에서 내린 우르타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누가 쫓아와? 왜 이렇게 서둘러?”

“쫓아온 건 아닌데 곧 쫓아 올 사람이 있지.”

대충 대답한 나는 제법 멀어진 마들랜드 호를 힐끔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쯤 벌써 왔을 수도 있고.”

“누구? 귀찮은 녀석이면 내가 혼내줄까?!”

“네 실력으로?”

“왜! 내 실력이 어때서!”

발끈하는 우르타를 일별한 네이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르타 녀석은 몸이 둔하기는커녕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편임에도 이상하게 칼질은 영 늘지 않는다.

강철의 의지를 가진 네이선이 가르치다 포기했을 정도면 말 다 했지.

기본적인 신체 스팩이 있으니 한 사람 몫이야 충분히 하지만, 딱 그 정도 실력이었다.

우르타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지나가는 행인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사람이 많을 길에서도 무장한 30여 명의 선원이 지나가면 알아서 비키게 되어 있지만, 여기는 분위기 자체가 좀 달랐다.

그리고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뱅가로쉬 주둔군 소속 지웰 대위입니다. 함대에서 나오셨습니까?”

“그렇소. 네이선이오.”

선원들을 지휘하던 네이선이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붙잡고 악수를 나눈 지웰 대위가 다시 물었다.

“혹시 소속과 계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어··· 나는 오트라스 호의 갑판장이오.”

“네?”

어리둥절한 지웰 대위의 반문에 잠시 고민하던 네이선이 겨우 생각났다는 듯 대답했다.

“아! 제2함대 기함인 오트라스 호의 갑판장, 네이선 소령이오.”

오, 다행히 기억하고 있었군.

우리끼리 있을 때야 옛날 상선단일 때처럼 대충 직책이나 이름으로 부르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해군에 소속된 정식 함대다.

당연히 내 부하들, 함선장들을 비롯해 말단 선원까지 계급을 부여받았다.

내 마음대로 연차와 직책에 맞게 대충 임명한 것인데, 평소에는 별로 상기할 일이 없다 보니 자기 계급을 잊어버린 놈들도 적지 않을 거다.

“2함대? 아, 그렇다면 리안 총독 각하를 모시는?”

“그렇소.”

“엣헴!”

옆에서 이상한 추임새가 나와서 돌아보니 우르타의 목이 뻣뻣하게 올라가 있었다.

···도대체 왜 네가 우쭐한 건데?

우르타의 헛기침 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을 살피던 지웰 대위가 나를 발견하고는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짓다가 네이선에게 물었다.

“혹시 총독 각하께서도 오셨습니까?”

“아, 그게···.”

딱히 숨길 일도 아니고 해서 내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리안이네, 대위.”

“헛! 총독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나오실 줄은!”

정중하게 군례를 취한 지웰 대위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각하께서 직접 가실만한 곳이 아닙니다.”

“하하, 재밌는 말을 하는군, 대위. 자네도 내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도 소싯적에는 자주 가던 곳이네. 안내만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뒷골목이라는 곳이 워낙 배타적인 곳이라 저도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어차피 다 박살 낼 생각이니 적당히 안내해도 괜찮네.”

“네?”

“원래 개를 때리면 주인이 나오는 법이야.”

나와 네이선, 우르타를 포함한 우리 함대 소속 선원 30여 명, 지웰 대위가 데리고 온 벵가로쉬 항구 해군 육전대 주둔군 30여 명은 말 그대로 파도처럼 뒷골목을 휩쓸었다.

의심스러운 곳은 일단 문을 부수고 시작했으며, 반항하는 놈은 두들겨 팼고, 무기를 뽑는 놈들은 칼침을 놔줬다.

이게 무슨 행패냐 싶겠지만, 뒷골목은 그래도 된다.

여기에 사는 인간들은 범법자가 아닌 놈들을 찾기가 더 힘들거든.

행정력과 치안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니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다.

불법 행위와 범죄는 숨 쉬듯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 하루에 살인 사건이 몇 건이나 나는지는 아무도 모를 지경이다.

빈민촌과 헷갈릴 수 있는데, 뒷골목에 ‘약자’ 따위는 없다.

불행한 사고로 ‘약해진’ 자들이 사냥당하거나 빈민촌으로 거취를 옮기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게 한 시간쯤 행패를 부리니 어디에선가 ‘잭’들이 우르르 뛰쳐나오더니 골목골목을 빼곡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대충 봐도 숫자가 적지 않다.

“하아, XX!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별꼴을 다 보는군. 항구경비대도 아니고 육전대 나으리들이 뭘 주워 먹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요?”

모여있는 잭들을 헤치고 한 중늙은이가 앞으로 나서며 걸쭉한 욕설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시선을 돌리니 다른 쪽 골목에서도 앞으로 나오는 놈들이 있었다.

다 해서 셋인가?

“다 모인 것 같네. 역시 개를 때리면 주인이 나온다니까?”

히죽 웃으며 중얼거린 나는 네이선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해준 말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제독.”

스릉.

국왕에게 하사받은 칼을 뽑아 든 네이선이 앞으로 나서며 네이선이 물었다.

“네놈이 대장인가?”

“카아악, 퉤! 하, 거 아무리 우리가 무시당하는 놈들이라지만 머리에 피도 안 마르신 분이 초면에 네놈··· 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스르르 흘러내리던 머리카락 한 뭉텅이가 흩날리며 떨어졌다.

“어, 어? 어?!”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는지 다급하게 머리 위에 손을 돌린 중늙은이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시원하게 밀려서 아무런 저항 없이 손길을 받아내는 정수리가 만져졌을 테니까.

그런데 나도 좀 놀랍네.

칼을 휘두르는 것을 모른 정도가 아니다.

지금 네이선과 중늙은이 사이의 거리는 대략 3미터가량, 발과 손을 뻗는다고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니까.

네이선이 소설에나 나오는 검기나 오러 따위를 사용한 게 아닌 이상, 더 앞쪽에서 칼을 휘두르고 그사이에 뒤로 물러섰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난 네이선이 물러서는 것도 제대로 못 봤어···.

잭들 사이에서 동요가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허, 왕실 문장이 박힌 커틀라스에 말도 안 되는 실력이라니. 당신이 바로 그 ‘진홍의 칼날’, 해적 학살자 리안 백작의 오른팔이라는 네이선이오?”

말이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린 네이선이 경고했다.

“말을 삼가라, 잭. 백작님은 네놈의 더러운 입에 오르내려도 되는 분이 아니시다.”

“크흠, 배운 게 없는 촌부라 예를 알지 못하오. 좀 봐주시구려. 그런데 그쪽도··· 하는 짓은 우리랑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군.”

제법 강단이 있는 녀석이군.

호기롭게 나섰다가 네이선에게 웃기는 스타일링 서비스를 받은 뒤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중늙은이와 다르다.

“네이선, 물러서.”

“네, 제독.”

내 말에 지체 없이 물러서는 네이선을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잭은 나를 보더니 이채를 띄었다.

“이런, 귀한 분이 직접 오신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리블르앙 백작 각하십니까?”

“그래. 잭.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어젯밤에 본국의 해군 함대에 암살 및 폭파를 시도한 놈들이 있었다. 알고 있겠지?”

“네?! 어젯밤에 항구 쪽이 시끄럽더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이선.”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하늘로 떠오른 검 한 자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보다, 막았어?!

어느새 나보다 한발 앞서 있던 네이선도 움찔하는 것을 보니 꽤 놀란 모양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나와 대거리하던 잭의 앞을 막아선 채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붙잡고 인상을 찡그린 남자가 있었다.

“허, 이거야 원, 듣던 것보다 성격이 급하신 것 같습니다. 각하?”

그 남자의 뒤에서 앞으로 나선 잭의 말에 네이선이 다시 나서려는 순간 잭이 재빨리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어이쿠, 항복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으니 그만 놀래키십시오. 저도 애들 앞에서 체면은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네이선의 어깨를 툭 쳐서 행동을 멈추게 한 내가 물었다.

“나도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네놈들을 다 죽이는 것도 귀찮고. 그놈들, 어디 있나?”

말이 잘 통하는 놈이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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