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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0)화 (1/258)

Chapter 0 - 0. 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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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효과란 놈은 씹새끼다.

 

물론 이론이 함의한 현상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조건의 변화에 따라 결과가 달라 질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말은, 아주 조그마한 선택으로도 인간의 운명이 통째로 바뀔 수 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대여.”

 

 

따라서 나비 효과는 씹새끼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러니까, 간단하게 얘기하면.

 

지금까지 살면서 후회되는 선택이 몇 개 있었거든.

 

내가 지금 이 상황에 처하게 만든 선택들 말이지.

 

왜, 대표적으로는 그게 있지.

 

나는 그 게임을 했으면 안 됐다.

 

 

[ 세이비어 라이징 ]

 

 

줄여서 말하길 세라. 아카데미물. 파릇파릇한 남녀들의 오소독스하고 풋풋한 청춘 활극. 씹덕내 진하게 나지만 익숙하고 안정적인 맛의 캐릭터들.

 

괜찮은 게임이다.

 

내가 거기에 빙의 당해서 처박히지만 않았다면.

 

말이 되냐. 사람이 게임 좀 했다고 거기 안쪽에 처박냐.

 

하다못해 내가 작품을 욕하다가 신적인 개발자한테 찍혀서 빙의당한다던가, 주인공한테 엄청난 애착이 있어서 빙의한다던가, 그런 뚜렷한 이유라도 있으면 모르겠다.

 

평소처럼 끝까지 클리어 해서 엔딩을 보고, 재밌다고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취침했다.

 

그랬더니 다음날에 빙의. 짜잔.

 

 

“그대여. 듣고 있는 건가.”

 

 

대답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어. 제발 좀.

 

 

“안쪽에 있는 건 이미 알고 왔는데 말이지. 얌전히 문을 여는 게 좋을 걸세.”

 

“...”

 

“기숙사 사감인 오필리아 경에게 이미 여쭙고 왔네. 자네는 오늘 별다른 수업 일정이 없다지.”

 

“...”

 

 

진짜 스토커가 따로 없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떠올려야...

 

 

“좋아. 끝까지 무시할 생각이라 그건가.”

 

 

기숙사실 문 너머에서 한숨 섞인 문장이 이어졌다.

 

 

“그럼 자르고 들어가겠네.”

 

 

이런 미친 인간이.

 

그런 감상을 꺼내놓을 틈새도 없이, 주변의 빛을 모조리 빨아먹는 것 같은 새까만 검이 내 개인실의 문을 찌르고 들어왔다.

 

황립 아카데미 엘판테의 기숙사 시설은 성난 대형 몬스터가 난동을 부려도 안쪽의 학생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을 기준으로 마련된 것들이다.

 

적어도 인간 규격에서 이걸 부수는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뜻이지.

 

그렇다는 말은, 마치 마분지라도 되는 것처럼 문을 자르고 들어오는 이 아가씨가 존나게 무시무시한 사람이란 뜻이고.

 

 

“...이거 교칙 위반 아닙니까?”

 

“교칙 위반에 대한 처벌 절차를 집행하는 것이 학생회네. 우연히도 현재 학생회장 자리는 내가 역임중이군.”

 

 

상대방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평탄하게 직권 남용을 하겠단 소리를 지껄였다.

 

흑색 장검이 얌전하게 납도된다. 새까만 복장에 어울리는 새까만 검집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먼 제복이지만, 유일하게 위로 드러나 있는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새하얗다. 그런 강렬한 색 대비로도 모자라다는 듯한 새빨간 눈동자, 거기에 등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백발.

 

그리고 그런 톡톡 튀는 외모를 전부 조화롭게 붙잡고 있는, 특유의 ‘귀족적인’ 분위기.

 

기억에 남아있는 특징적인 외모다.

 

아니, 잊어먹을 수가 없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그대가 최근 들어 나를 계속 피해 다니지 않았나.”

 

“...”

"얼추... 32번 정도였나?"

"...그런 걸 왜 일일이 다 세고 계신 겁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으로 튀어 오르는 정보들을 그러모아 정리한다.

   

엘판테 아카데미의 학생 회장 엘노어.

 

문무재색 두루 겸비. 트리스탄 공작가의 영애이기도 하며, 전 학년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아카데미의 슈퍼 인싸.

 

태생이 반짝반짝 빛나는 인간이지. 어딜 어떻게 보아도 나같이 눈에 띄는 것 하나 없는 신입생이랑은 마주칠 건덕지가 없는 사람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랬어야 했다는 의미다.

 

 

“...”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것이 나한테도 훨씬 더 좋은 인간이기도 하다.

 

머릿속으로 이미지 몇 개가 더 흘러넘친다.

 

‘원작’ 안에서 본 일러스트와 CG 몇 개들이.

 

피투성이의 엘노어. 검은색 장검을 휘두르며 시체의 산을 쌓는 엘노어. 붉은 눈동자를 흉흉하게 빛내며 악마와 괴물들의 군세를 지휘하는 엘노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확실한 건, 어딜 어떻게 보아도 일관적인 인상을 줄줄 뿌리고 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나쁜 사람’으로 말이지.

 

그래, 무엇을 숨기리.

 

이 사람, 이 세라 세계의 ‘최종 보스’다. 주인공이 막지 않는다면 앞으로 결국 이 세계 전체를 불구덩이에 처박을 인간.

 

나 같은 엑스트라와는 그냥 눈만 스쳐 지나가고 끝났어야 할, 그런 인물.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진 그대도 잘 알 테지.”

 

 

그러나, 결국에는 전부 이미 늦은 것들이다.

 

나비의 날개짓들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 있었으니.

 

붉은색 눈동자가 나를 냉혹하게 쏘아본다. 검은색 장검의 손자루를 잡고 있는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안 그래도 두르고 다니는 묵직한 분위기가 더 진중해진다.

 

그리고 그 입이 다시 열리고.

 

 

“묻겠네, 다우드 캠벨.”

 

 

나비의 날개짓이 만들어 낸 ‘폭풍’을 토해낸다.

 

 

“나와 결혼해주겠나.”

 

“...”

 

 

진짜.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문장에 어질어질한 머리를 감싼다.

 

다우드 캠벨.

 

인지도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변방 남작령의 후계자. 아카데미의 신입생. 이 세계의 밑바닥 엑스트라.

 

그런 인간은, 지금.

 

몇 년 안에 세상을 멸망 시킬 여자에게 구혼을 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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