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 11. 오리엔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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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계의 법칙은 물질계와 다르게 적용된다.
1인분 어치의 음식을 번제로 통해 바치기만 해도 어떻게든 여기 있는 인간들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수 있다는 거다.
“아... 얼근하게 취하네...”
“알딸딸하이 좋네 이거...”
“...”
그 결과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천사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올라오려는 한숨을 꾹 참는다.
꼴은 이래 봬도 다 물질계로 풀리면 한 놈 한 놈이 군단급 무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괜히 불경한 짓을 할 필요가 없지.
그런 주제에 한 놈도 빠짐없이 인력사무소 십장 바이브를 풍기는 건 그것 나름대로 쉽지 않은 광경이었지만.
“야, 잘 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널브러져 있단 천사들 중 제일 얼굴이 붉은 천사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주천사였나. 지금 여기에 있는 천사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존재가 분명했다.
“덕분에 작업 중 호강을 다 해보네. 얼마 만에 뭘 먹어보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굴리면서 밥도 안 줍니까?”
“이면 세계에서 무슨 밥이야, 밥은. 우린 원래 생리적 욕구도 없어.”
“...뭐라도 다른 걸 챙겨주기는 합니까?”
“우리 상태를 봐라. 어떨 것 같은데?”
“...”
세상에.
그러면 사실상 전일 근무 무보수로 영원한 군복무를 이어가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설정 상 이 종족은 이면 세계 안에서는 사실상 불로불사니까.
이게 뭐가 천사야. 그냥 날개 달린 노예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그거나 줘봐.”
상대방에게 동정이 듬뿍 시선을 건네고 있자니, 주천사가 피식 웃으면서 뭔가를 가리켰다.
지금도 내 옆에서 향을 뭉게뭉게 피워 올리는 울트리마였다.
“예?”
“너 어차피 뭐 받고 싶어서 우리 찾아온 거잖아. 줄 테니까 그거 달라고.”
주변에서 이야~ 중대장님 화끈하네~ 살아 있네~ 어쩌구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사들의 입에서 혀가 잔뜩 꼬부라진 발음이 나오는 건 조금 어지러웠다.
“...”
뭐, 당장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울트리마가 단순히 이쪽의 모습을 밝히는 게 용도의 전부임에도 굳이 ‘생존용’ 아이템으로 분류되는 것은, 게임 안에서 이쪽을 만났을 경우 무조건 그 안에다가 가호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적당히 원하는 것 말해. 최대한 맞춰서 넣어줄 테니까.”
하지만 그걸 내가 협상하기도 전에 이렇게 자기들이 자진해서 넘겨주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 사람들한테 먹힐만한 협상 카드를 그래도 수십 개는 준비해 왔는데 말이지.
나한테 너무 잘 풀리는 전개에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주천사가 여전히 불콰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너 지금 뭔데 나 같이 쥐뿔도 없는 놈한테 이렇게까지 퍼주나, 생각하고 있지? 분위기 보니까 천사들의 계율이나 율법 관련된 것도 아는 모양인데.”
“...솔직히 그런데요.”
“나한텐 다 보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주천사의 눈동자가 온갖 색을 머금은 채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도 아는 능력이지.
통찰안.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련된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 상대방의 상태창을 아주 자세하게 읽어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너 분명히 크게 될 놈이야. 미리 투자하는 셈 쳐. 어차피 나중에 다 돌아올 테니까.”
“...”
“싹수가 보인다고, 싹수가. 지금은 아직 가진 능력을 티끌만큼도 개화 못 시킨 모양이지만.”
근처에 누워있던 다른 천사들에게서 아 뭘 또 그런 것까지 알려주십니까~ 어쩌고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로서도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고평가다.
‘이거 분명...’
기프트 얘기겠지.
‘악인에게 사랑받는다’는 특성을 가진 능력.
내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그거 말곤 떠오르는 부분이 없다.
“그거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한 재주야. 어떻게 다룰지는 네 선택 따라가겠다만.”
천사가 실소를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어지는 문장은 전혀 가볍게 말할 내용이 아니었지만.
“꼭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기도 하고.”
“예?”
“지독한 거에 물렸네. 형태가 다 보이지도 않는데 존나 끔찍한 거라는 건 알겠다. 네 능력 때문에 들러붙은 것 같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주천사가 머리를 긁적 거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또 웃긴 게. 존나 끔찍하긴 한데 그렇게 유해해 보이진 않아.”
“...대체 무슨 소립니까?”
“이상할 정도로 우호적인 느낌이거든. 적어도 널 해하려는 느낌은 아닌데? 도와주고 싶어 했으면 했지.”
“...”
뭐야 그게.
“당장은 형태도 안 보이니까 직접적인 영향이 오진 않을 텐데. 조만간 한 번 엮이는 건 각오하고 있어라.”
내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그런 문장이 얹어졌다.
“충고 하나 해줄게. 너 살아남을 수단이라면 네 몫 아닌 것까지 전부 가져갈 생각이지? 그 향로도 원래는 다른 사람한테 돌아갈 물건이잖아.”
“...알고 있었습니까?”
“말했잖아. 내 눈에는 다 보인다고.”
천사가 다시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뭐라고 간섭할 생각은 없어. 권장했으면 했지. 다른 놈이면 몰라도 너는 인정한다.”
“예?”
“그런 거 다 챙겨. 뭐든 좋으니까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모아둬라. 그런 흉물이랑 엮였으면 진짜 살아남기도 힘들 테니까.”
문장에 담겨있는 울림이 묵직하다.
이어지는 말은 가벼운 어투였지만.
“그래도 사실 큰 걱정은 안 해.”
“뭡니까. 방금 전까지 무거운 소리만 잔뜩 해놓고.”
“표정만 봐도 알아. 내가 봐 온 인간들은 이런 말 들으면 바로 겁부터 질리거든?”
사나운 미소가 그 얼굴에 걸렸다.
“근데 너처럼 그런 거 듣자마자 어떻게든 살겠다고 침착하게 계획부터 짜는 놈은 원래 명줄이 길다.”
“...”
“내 말 믿어. 보통 놈은 그런 거 못 해. 너 대성할 떡잎이라니까?”
이쪽도 다시 말하지만, 그건 그냥 부담스러울 정도의 고평가에 불과하다.
난 그냥 죽기 싫어서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다름 것도 아니고 천사의 경고니까 진지하게 고민해야지. 꽤 중요한-
“거 중대장님, 좋은 거 받아 쳐드시고 아직까지 헛소리 하십니까?”
“빨리 와서 삽이나 드시지 말임다.”
“씨발롬들 봐라? 야, 승천한 기수 까봐 이 개새끼들-”
“...”
중요할 것이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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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건 훌륭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들려있는 향로를 바라본다.
천사들에게서 받은 가호가 이 안쪽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 Item Info >
[ 신성의 울트리마 ] [ 아이템 등급: C+ ]
[ 오랜 세월 동안 제사에 사용된 향로입니다. 이면 세계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들에게 영향을 받아 특별한 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
◎ 내장 스킬 ◎
■ [ 고행 ] [ 스킬 등급: C ]
[ 잠시 동안 모든 스텟 추가분을 ‘내구’로 전환합니다. ]
[ 소량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
※ [ 진화가 가능한 스킬입니다! ]
진화시 스킬이 [ 신앙의 증명 ]으로 변경됩니다!
■ [ 수호 방패 ] [ 스킬 등급: C ]
[ 1회에 한해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내는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
[ 소량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
[ 보호막의 강도는 ‘내구’ 스텟의 영향을 받습니다. ]
[ 20초의 쿨타임을 가집니다. ]
※ [ 진화가 가능한 스킬입니다! ]
진화시 스킬이 [ 성흔 ]으로 변경됩니다!
당장 사용 가능한 효과만 봐도 꽤 쓸만하다.
스텟 중 ‘내구’는 주로 건강과 관련된 분야다. 신체의 회복력, 체력, 지구력 등을 담당하고 있다 보면 된다. 생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높으면 높을수록 방어구 계열 장비나 능력을 사용했을 때 그 효과를 제곱 시켜주는 효과도 지닌다.
그리고 절체절명으로 스텟 뻥튀기가 가능한 입장에서, 그걸 전부 ‘내구’로 치환할 수 있는 스킬과 그 내구로 강화되는 방어막의 존재는 당장 생존에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핵심적인 점은 이게 진화가 가능하다는 것.
진화시키려면 최대한 많이 써서 숙련도를 키우는 방법밖에 없으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능력을 점점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건 틀림없이 메리트다.
세라 세계에서 ‘성장’이 가능한 것들은 모두 단계가 올라갈수록 급격하게 성능이 올라가는 특성을 가지니까.
이런 걸 스토리 극초반부터 얻었다는건 엄청난 호재겠지.
역시 주천사의 가호다. 받기를 잘했어.
‘이 정도 성능이면 지금보다 한참이나 뒤에 받을 수 있는 축복 아닌가?’
물론 천사를 만나는 것 자체가 2챕터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주천사급과 직접적으로 교류가 가능한 건 그보다도 한참 뒤에 일이지.
그런 존재에게 공짜로 가호를 받아온 건 그것 자체로 엄청난 일이다.
문제는 이거지만.
[ 소량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
스킬 창에 그렇게 적힌 문장을 우울한 눈으로 훑는다.
기본적으로 마력이나 법력, 신성력 같은 이능은 관련된 특성을 익혀야만 다루는 게 가능한 스킬이다.
관련된 특성 하나 없는 나로선 이렇게 좋은 것도 당장은 그림의 떡이라는 거다.
문제는 이런 건 엘판테 학생쯤 되면 어린 시절부터 당연히 익혀오는 거라 아카데미에서 따로 가르치지도 않는 영역이란 거지.
“...”
내가 지금 이 장소에 와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당장 마력을 익힐 수 없다면 임시방편으로라도 이걸 써먹을 수단을 마련해야 하니까.
아마 여기서 그걸 바로 얻어가진 못 하겠지만, '단서' 정도야 얻어갈 수 있거든.
“자, 자! 제작학부 총기과에서 이번에 제련한 마총이야! 지금 오면 정령석을 갈아서 만든 탄환 10발을 무료로 사격! 잘 맞추면 경품도 뿌린다!”
“마도학부 연금술과에서 신입생 모집해요! 안내 행사 기간에만 자체 제작 시약 배부하니 많이들 오세요!”
그런 소리가 주변에서 시끌시끌 들려온다.
안내 행사라고 함은 며칠 뒤에 있을 신입생 환영회에서 학생들이 전공을 정하기 전에 학부에서 미리 영업을 뛰는 거다.
우리 학과가 이렇게나 즐겁고 유익한 곳이라고 약을 파는 거지.
그리고 그런 행사의 특징. 별것도 아닌 일을 시켜놓고 ‘와 정말 잘했어요!’라면서 이것저것 퍼준다.
어떻게든 신입생... 그러니까, 자기들 대신에 잡일 해줄 노예를 유치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이지.
지금 주변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 당근을 뿌리며 신입생들을 꼬시는 선배들은 속으로 시꺼먼 악의를 감추고 있단 거다.
세상 물정 모르는 병아리들은 껌뻑 속아넘어가기 십상이다. 삐약거리다 그대로 잡아먹히는 수가 있지.
“...”
내가 바라는 것도 그렇게 뿌려지는 물건들 중 하나지만.
내가 있는 곳은 기사학부 마수 탐구학과의 행사 부스다.
다른 부스에 비해 유난히 텅텅 비어있는 모습이지만, 그건 여기서 시키는 일이 안내 행사치고는 유난히 엄격한 일이라서 그렇다.
학과에서 자체적으로 준비한 기나긴 던전 코스 안에서, 마공학 섬유 다발로 마수의 실체감을 100퍼센트 재현한 더미 인형과의 모의 전투라니.
안내 행사에서까지 그런 빡센 일을 하고 싶어 할 신입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 한 명 있긴 해.’
그렇게 힘든 일을 시키는 만큼, 여기서 뿌리는 보상도 파격적이거든.
원래 입수 난이도를 생각한다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먹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물건이지.
이런 노다지를 놓치는 다른 신입생들이 불쌍할 정도로.
“너는 한 눈 파는 게 특기냐?”
“아니요.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뭐라 그랬는데?”
“2인 1조로 팀을 편성해서 대기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
내가 꺼내놓은 대답에 눈앞에 있는 안내원 선배가 언짢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2인 1조라는 뜻을 모르지는 않을 것 아니야. 파트너는 어디에 있어?”
“곧 올 겁니다.”
“이런 인기 없는 과에 올 녀석이 누가 있다고. 거짓말하는 거지?”
자조적으로 말하는 걸 보니 자기 학과가 기사학부 중에서도 유난히 비주류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제국의 주요 병단 중 가장 위세가 높은 건 기사단이고, 따라서 정규 기사가 높은 선망을 구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마수 탐구학과는 그중에서도 정규 기사가 될 확률이 극단적으로 낮다. 기껏해야 사무직으로 취업하는 게 그나마 잘 풀렸다고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두면 여기만큼 편한 사람들도 없는데.’
하는 일은 학과 이름답게 마수들에 대한 약점 정리와 생태 조사, 그리고 전반적인 ‘공략법’의 정립이다.
전혀 화려하지 않아서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쪽에서 물어오는 마수의 정보가 나중에 시나리오를 진행함에 있어 꽤 큰 차이를 만들어 내거든.
당장 시나리오의 첫 번째 챕터부터 엄청난 도움을 주는 인간들이니까.
물론 지금은 비주류 학과라 신입생 유치가 전혀 안 되어 낙담하고 있는 기색이다. 그러니까 격려를 좀 해볼까.
“파트너 온다는 거 거짓말도 아니고, 조금 있으면 여기도 엄청 붐빌걸요.”
“...뭐?”
“곧 올 녀석이 보통 유명한 놈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마공학 손목 시계를 체크한다.
그러니까, 슬슬 올때쯤 됐거든.
이런 학문이 겉으로 보기에는 수수하지만 실전에 있어서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험 풍부한’ 신입생이.
“안녕하세요! 여기가 마수 탐구학과 맞...나...요...?”
부스의 천막을 젖히고 들어오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아마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겠지.
그쪽을 향해 선선히 손을 흔들어준다.
“안녕.”
사실 원래대로라면 이 녀석하고는 엮이기 싫었지만.
최근 들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특히 천사 아재들이 해준 충고를 듣고 난 다음엔 행동 방침을 아예 변경하기로 했지.
“서로 좀 알아가 보자는 제안, 아직 유효하냐?”
엘리야 크리사낙스가 내 말에 대단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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