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 - 21.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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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가 용케도 그냥 보내줬네요. 당신 말 이상하게 해서 오해 자주 받죠?”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럼 그냥 당신 눈치가 더럽게 없는 거겠네요. 제가 봤을 땐 이미 그런 일 많았을 것 같은데.”
“...”
“입 조심 하세요. 제가 봤을 때 학생은 그것 때문에 온갖 재난에 엮일 것 같으니까요.”
말 한 번 심하게 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볼을 긁적거리고 있자니, 페르시가 한숨을 내쉬며 내가 작성해온 제작용 기안을 뒤적거렸다.
마도학부의 학장인 페르시 시스턴 레반틴은 마탑에서도 인정받는 유능한 연구자다.
세라 세계관의 인류가 기술발전의 대부분을 마공학으로 이뤘다는 걸 생각한다면, 그런 기술의 총본산인 마탑에서도 인정받는단 건 참으로 대단한 성과겠지.
마도학에서 이룬 그 정도 성취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도 반백에 근접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겉보기에는 겨우 20대 후반에 걸친 인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 아무튼.
“당신 또라이 아닌가요?”
“...”
“이딴 걸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 들고 온 거죠?”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꺼내놓는 것 자체가 조금 이질적인 상황이겠지.
“이거, 폭탄이라기보다는 대포잖아요. 애초에 처음부터 아카데미 전체를 날릴 위력으로 부탁하길래 그것부터 뭔 미친 소린가 했는데, 그걸 전부 일점에 집중시킬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요?”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
확실히 폭탄이라기보다는 휴대용 대포에 가까운 느낌이다.
광범위를 타격하는걸 목표로 하는 것보단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지점에 직격시키는 걸 목표로 하니까.
“실제작은 어차피 엘판테 제작학부의 내부 공방에 넘길 거니까 학장님이 할 건 아니고, 터질 폭발원이랑 그걸 제어할 외피의 설계만 만들어주시면?”
“그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잖아요. 그만한 화력을 준비하는 것도 일인데, 안쪽에서 터졌을 때 산산조각 나지 않는 강도의 외피까지? 학생은 제가 무슨 마공학의 신인줄 아시나요?”
“이미 비슷한 걸 만든 전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꺼낸 말에 페르시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이 마탑에 있던 시절 제작한 ‘병기’ 중에는 이미 비슷한 성능을 내는 물건이 실제 제작까지 들어간 바 있다.
모종의... ‘사고’로 양산 계획은 폐기되었지만.
잠시 침묵을 지키던 페르시가 어렵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어떻게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한참 전의 일인데.”
“마공학의 신이니 어쩌니 하셨는데, 이전에는 비슷한 명성까지 가지 않으셨습니까.”
실제로 아까 말한 사고가 아니었다면 마탑의 ‘계승자’까지 올라갔을지도 모르는 게 이 사람이다.
만약 페르시가 못 만든다고 하면 이 의뢰를 수주할 인간은 아무도 없겠지.
엘판테의 마도학부 학장 자리를 괜히 꿰차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건 조심스럽습니다만.”
“...뭔가요?”
“학장님이 제일 고생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
그렇게 직설적으로 팩트를 메다꽂자 페르시가 헛기침을 했다.
대신 근처에서 열심히 뭔가 연구하고 있던 대학원생들의 얼굴이 새파래졌지.
원래 어디든 랩실에 과제를 떠넘기면 거기서 제일 고생하는 건 일선 인력들이다. 총책임자가 아니라.
“그런데, 제작은 그렇다 치고. 이런 무기를 대체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건데요?”
페르시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타당한 질문이다. 아무리 소원권이 있다지만 학생이 다짜고짜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면 경계하는 게 당연하지.
쓰임새 자체야 간단하지만.
원래 세라 세계관에서 챕터 최종 보스들은 온갖 더러운 기믹을 덕지덕지 달고 나오는 경향이 있고, 그 스타트를 끊는 정화자의 경우는 그 역겨움의 정수가 마지막 페이즈에 몰려있다.
충분히 공략됐다 싶을 때 튀어나오는 온갖 패턴으로 유저들 엿 먹이는 걸로 유명했지.
그래서 내가 내린 해법이 뭐냐.
“한방에 터트려야 할 게 있거든요.”
“...”
“그, 뭐냐. 귀찮아지기 전에 터트려야 하는 그런 게 있어요.”
“...학생, 진짜 설명 더럽게 못하시네요?”
“...”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엉망진창이긴 해.
“그래도 거기에는 다 사정이...”
“있겠죠. 만들어 드릴게요.”
“...”
갑자기 쿨하게 수락해버리는 페르시를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어색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페르시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뭐, 어지간하면 당신한테 협조하라는 총장님 지시도 있고 하니까 그쪽이 말하는 건 들어줘야지 싶은데... 엄한 곳에다가 쓸 것 같지도 않구요.”
이 고평가는 또 뭐람.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페르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일반 학생들이야 모르겠지만, 교직원들은 당신이 저번 마수 사태 때 어떤 활약을 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꽤 있어요. 보통 용기랑 실력 가지고는 안 될 일이라구요, 그거.”
“...그렇습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총장님도 세계를 구하자는 것 치곤 무슨 청춘 치정극 같은 계획에 마음 놓고 당신을 올려놓은 거겠...”
한가롭다는 기색으로 문장을 꺼내놓던 페르시가 말하는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안색은 통째로 사색이 되어있었다. 마치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걸 말했다는 것처럼.
뭐라고?
“...청춘 치정극이요? 세계를, 네?”
“아, 아니, 아, 저,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 안 했어요! 학생도 잊어버리세요!”
뭔데 이렇게까지 당황한담.
캐릭터 성격이 원래도 좀 허당끼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허둥거리는 걸 보니 진짜로 말하면 안 되는 내용이었나본데.
“그보다 재료, 재료가 중요한데요, 이걸 만들려면!”
이어서 페르시가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화약 역할을 할 내부 폭발물도 그렇고. 외피는 강도, 접합성과 신축성, 마력 전도율까지 전부 괜찮은 재료가 필요해요! 그, 그것참 구하기 힘들겠네요!”
“...일단 진정하시고. 못 들은걸로 하겠습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런 말을 건낸다.
급격하게 화제를 돌리느라 튀어나온 말이긴 하지만, 일단 지적점 자체야 타당하다.
터질 재료랑 그걸 감쌀 재료, 둘 다 중요하지.
‘중점은 이거고.’
이전에 아탈란테에게서 받은 검은색 카드를 품 안에서 만지작거린다. 이계로 통하는 열쇠.
이 안쪽에 진입할 수만 있다면 페르시가 말하는 재료를 찾아오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쪽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고역이긴 하겠지만.
‘그걸 위해서는...’
물건 두 개만 있으면 된다.
나랑 같이 그걸 다룰 사람 한 명이랑.
“학장님, 이전에 소원권과 함께 주셨던 게 있었죠.”
“네, 네에?!”
“...비전 창고에서 물건 한 개씩 저와 용사 후보에게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전에 모의전에서 기록을 깸으로서 얻은 권한이지.
“반출할 물건 목록, 지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종이에 물건 두 개의 이름을 적는다.
따로 사용했을 때는 미묘하지만, 두 개를 같이 사용하면 극단적인 효과를 내는 장비들.
엘리야 것까지 내가 대신 부탁하는 모양새였지만, 애초에 모의전 때 내가 걔 몫까지 업어줬잖아. 불만 있으면 나도 할 말 있다.
“...”
그리고 그 물건들의 이름을 본 페르시가 마침내 침착을 되찾았다.
너무 어이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마 이 사람이라면 굳이 이 두 개를 꺼내가는 것의 이유 정도야 금방 알아차렸을 테니까.
“...당신 진짜로 또라이죠?”
“...”
여사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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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판테의 교과 과정은 사실 생각보다 그리 빡빡한 편이 아니다. 특히 신입생에게는.
어차피 공부 시켜봐야 할 놈만 열심히 하는 게 세상이니 억지로 붙잡아 놓는 것보단 학생에게 자율 학습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의미지.
‘...넓네.’
그러니까 이렇게 땡땡이도 칠 수 있지.
슬슬 시큰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복도를 걷는다.
찾는 녀석은 엘리야다. 아탈란테가 나한테 전달해준 ‘열쇠’를 사용할 일시는 당장 내일이고, 그 안쪽에서 내가 계획한 짓을 하기 위해서는 녀석의 협조가 필수니까.
‘아마...’
마수 연구학과의 동아리실에 박혀있겠지. 원작에서도 녀석은 마수 연구학과를 부전공으로 삼던 놈이었으니까.
진짜 더럽게 넓다. 다리가 아프도록 걷고 있음에도 목적지는 한참 남았다.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자니.
“아, 혹시 당신이 다우드 캠벨인가요?”
등골에 냉기가 올라오는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연미복으로 쫙 빼입은 남자 한 명이 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의 바른 미소, 선량함이 묻어나오는 이목구비, 정중한 행동거지.
성공한 젊은 사업가같은 인상이지.
“...”
하지만, 그 실체를 알고 있는 내 눈에는 보인다.
예의로 위장한 음흉함, 선량함으로 포장한 악의, 정중함으로 덮어둔 적개심.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지랄.
틀림없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을 거다. 주변에서 보는 눈 하나 없는 인적 드문 복도에서 느닷없이 마주칠 확률보다는 그편이 훨씬 설득력 있다.
“...저를 아십니까?”
“아,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전 갈디어 리버백입니다. 자선 재단 ‘정화의 집’을 운영하고 있죠.”
그렇게 말하며 내게 내미는 명함을 받아든다.
그래. 내가 아는 사람 맞다.
갈디어 리버백 후작.
1챕터의 최종보스인 ‘정화자’이자, 악마 숭배집단 ‘퓨리파이어’의 수장이다.
이 자선 재단은 그 집단을 굴리기 위한 자금 세탁용이고.
“...”
그래.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이 녀석이 갑자기 왜 튀어나왔냐는 게 중요하다.
나한테는 무슨 용건인데?
“다우드 캠벨 씨에게는 이전부터 지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한 번 연락하고 싶었습니다만, 기회가 안 되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리버백 후작을 말없이 마주봤지만,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방이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언제 한 번 식사라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말씀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아뇨. 단순히 자선 목적입니다. 정화의 집은 재능있는 학생들이 제약당하지 않도록 지원하고 있거든요.”
리버백 후작이 빙긋 웃으며 앞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불퉁스러운 내 모습에 비해 여전히 예의 바른 태도겠지.
“...저는 안 좋은 여론이 많은 걸로 아는데요.”
적어도 엘판테에서 그렇게 조장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일부 교직원이 아니면 아직까지 안 새어나간 건 확실하고.
하지만, 리버백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미소지었다.
“그 정도로 여론을 끌어모은 것 자체가 재주랍니다.”
“...”
“저희 재단은 다우드 캠벨 씨에게 반드시 좋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꼭 다시 생각해주시겠어요?”
대답하지 않고 명함을 손아귀 안에서 몇 번 돌린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안 좋은 여론이 끌어모은 것 자체가 재주라니. 좋게 평가할 여지가 없는건데.
이건 어떤 방식으로든 ‘나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 제안이거든.
‘이거.’
원작에도 있던 이벤트다.
리버백 후작이 누군가를 ‘포섭’하기 위해 던지는 이벤트. 원작에서는 여기에 엘리야가 엮였다가 그대로 챕터 중요 분기로 이어지지.
지금 그게 나한테 날아온거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볼게요.”
리버백 후작이 내 대답에 싱긋 웃으면서 목례했다.
“좋은 대답,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여전히 정중한 어투로 그리 말한 녀석이 멀어지는 걸 보며, 받은 명함을 뒤집어본다.
3일 뒤. 황혼의 눈동자. 학관을 벗어나면 나오는 시가지 내부에 위치한 고급 식당.
식당을 통째로 빌려버린 모양이지. 재력으로 유명한 리버백 후작답다.
“...”
조용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고른다.
이전에 있던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메인 시나리오와 엮인 이벤트를 피해 가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페널티가 부과된다. 내가 이걸 회피한단 선택지는 사실상 없지.
"..."
왜 항상 이런 식이냐.
진짜 온 세계가 나한테 악의를 가지고 달려드는 건가?
요즘 들어 자주 시달리는 편두통에 다시 머리를 감싸쥔다.
‘...준비해갈 수 있는 건 다 준비해야겠지.’
뭐, 그런 걸 지금 따져봐야 소용 없다. 지금까지 몇 번 그랬던 것처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여유 시간은 3일 뒤.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린다.
내가 아는 정보를 취합하고, 현재 상황에 대입해본다.
리스크를 산출한다. 리턴을 계산한다.
‘...불가능하진 않아.’
계획 자체야 큰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엘리야와 함께 당장 내일 이계로 가는 거고, 안쪽에서 재료를 채취하는 거다.
이후로 제작하며 강화할 것들도 착착 대기중이지.
하지만, 그 뒤에.
“...”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말 없이 진로를 돌린다. 엘리야에게 가기 전에 먼저 찾을 사람이 있었으니까.
도착한 곳은 의무실. 문을 노크한다.
“엘노어. 계신가요?”
“...다우드?”
안쪽에서 엘노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장이랑 싸우고 기절한 다음 하루 종일 이쪽에 뻗어있다고 들었다.
“...어쩐 일인가? 기다리게. 지금 바로 나갈테니.”
“아뇨. 힘들테니까 누워 계세요. 간단한 용건이니까.”
“용건? 무슨 일이라도 있나?”
“혹시 3일 뒤에 시간 비세요?”
“...응?”
“저랑 같이 어디 좀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황혼의 눈동자’인데요.”
안쪽에서 엘노어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동안 침묵한다.
이어서,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 유명한 데이트 장ㅅ, 아니, 대단히 비싼 식당 아닌가? 거긴 왜...”
“글쎄요. 꼭 당신이랑 같이 가야 하는 곳이라서.”
우장창창 콰당탕탕하는 소리가 안쪽에서 거나하게 울려퍼졌다.
“...”
이 사람 왜 이래.
“...괜찮으세요?”
“괜찮네.”
“...”
그래. 다행이네.
“그럼 3일 뒤에 뵐게요...?”
“...알겠네.”
뭔가 평소에 비해 굉장히 위엄이 무너진 옹알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물러선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사람은 포섭했고.’
나머지는 계획에 사용할 수단들을 모으는 것 뿐이다.
그래.
이제부터, 3일 동안 꽤 바빠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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