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 23. 이면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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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빛무리가 위협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이 이상 근접하면 큰일나요! 라는 말을 웅변적으로 하는 것 같은 모습이지. 실제로도 저기에 직격하면 그냥 튕겨나간다.
그러니까 여기서 총장이 준비해준 검은색 카드를 꺼내든다.
포탈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그걸 던지자 이내 빛무리가 꿈틀거리면서 공간이 찢어졌다.
그와 동시에 시계를 맞춰서 세팅한다. 정확하게 2분.
‘...아탈란테의 출입증으로는 이게 한계지.’
본래 이면 세계는 ‘영속’의 권한을 따낸 플레이어에게만 주어지던 엔드 컨텐츠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검은색 카드는 그런 영속자에게 주어지는 신분증 개념이고. 이게 있어야지만 이계로 넘어갈 때 ‘검역’에 안 걸리지.
생각보다 꽤 빡빡한 녀석들이 관리하고 있어서 말이야.
“...”
그리고, 그거 바꿔서 말하면.
이면 세계는 아탈란테 정도 되는 영속자라도 2분밖에 출입 허가가 안 날 정도로 미친 동네란 뜻이다.
가끔 진행하는 루트에 따라서 DLC가 아닌 메인 시나리오 도중에도 다시 이쪽에 들어올 일이 생기긴 생긴다만.
‘...절대 싫은데.’
진짜.
절대로.
그런 일은 안 생겼으면 좋겠거든.
그렇게 안 되도록 노력도 할 예정이다.
“우와.”
포탈 안쪽으로 접어들자마자 엘리야의 입에서 그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면 세계라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지옥도 일줄 알았는데, 이렇게...”
“그렇지. 이해해.”
사실 이 안쪽이 워낙 지옥도라서 그렇지 당장 겉만 보면 꽤 이쁘거든.
현실 세계의 지형지물 위쪽으로, 사진 위에 온갖 필터를 덮어 씌워둔 것처럼 형형색색의 물체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영체. 잊혀진 고대의 물건들. 사념체들.
하나같이 다 강력하지만 위험한 것들이다.
“함부로 건드리지는 말고. 위험한 것들 많으니까.”
내 말에 근처에 떠다니던 흰색 아지랑이를 건드려보려던 엘리야가 흠칫하면서 손을 뒤로 뺐다.
위기 상황에는 뭐 천사들의 가호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싶기는 한데, 그래도 이면계의 물체와는 최대한 접촉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 거에요? 얼마나 높이 쐈길래?”
“좀 더 높이 가야 해.”
사실 그냥 단순히 포탈 안에 출입하는 것이라면 비전 창고에서 이런 ‘투석기’가 아니라 적당한 비행 아이템을 들고 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쓴 건 ‘그레고리관 최상공’에 존재하는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다.
“...이렇게까지 높은 곳에 오니까 옛날 생각 나네요.”
나와 같이 자유 비행중인 엘리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좀 익숙해보인다?”
“오빠가 선생님만큼 미친놈이어서 어릴 때부터 절 아무 장비 없이 산꼭대기에서 집어 던지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보면 선생님이랑 조금 닮았나?”
“...”
“항상 구해주긴 했지만요. 담력 길러준다면서 그런 짓 자주 했어요.”
“...”
어쩐지 애가 이런 상황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다 했다.
“그 멍청이도 높은 곳을 유난히 좋아하긴 했죠.”
엘리야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뭐하고 있으려나.”
틀림없이, 그리움에 젖은 말투였다.
“...”
당연하겠지.
12년전, 적야赤夜 사태.
‘붉은 악마’를 추종하는 악마 숭배자들의 분파인 ‘묵시의 후예들’이 일으킨 테러 사건.
엘리야의 가족은 그때 몰살당했다.
“...”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평화로운 농가의 딸로 자라났을 엘리야가, 본인은 1도 관심이 없을 차기 용사 후보로 추대된 데에는 그 ‘실종된 오빠’의 존재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엘리야의 오빠는 유일하게 적야 사태에서 살아남았지만, 완전히 실종되어 그 정보조차 들을 수 없는 혈육이니까.
자신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다면 틀림없이 자신을 알아보고 찾아와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매달렸을 터다.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농가의 딸이 이 위치에 이르기까지, 대체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세웠을지는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
“어, 뭔가 있는데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엘리야가 눈앞에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물체들이 가득한 주변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순백으로 빛나는 ‘연기’.
일반적으로 말하는 ‘혼령’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일 것이다.
아스라이 연기를 피워오르는 게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외양이다.
‘그레고리관의 유령.’
원래대로는 본편의 한참 뒤에나 이스터 에그로 등장하는 녀석이다.
아까 말한 ‘이면 세계 출입 루트’에서 물질 세계로 한 번 튀어나오거든.
“...”
그리고 그때 그걸 만나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 하나.
이거, 빨리 입수하면 빨리 입수할수록 사기인 아이템이다.
당장 유저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먹어보겠다고 악착같이 데이터마이닝을 해서 원래 있는 위치까지 찾아냈을 정도니까.
“읏차.”
품속에서 미리 챙겨온 자루를 주섬주섬 펼쳐 든다.
물론 단순한 자루는 아니지.
[ 마법의 자루! ]x3
[ 가격: 500pt ]x3
[ 아이템: 잡동사니 ]
[ 어떤 물건이든 안쪽에 붙들어 들 수 있는 자루입니다. 지속시간은 하루입니다! ]
[ 남은 포인트: 1,000pt ]
아이템 취급받는 물체는 뭐든 안쪽에 하루 동안 챙겨둘 수 있는 자루.
일단 이 유령도 아이템 판정을 받는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포획이 불가능하더라도 이게 있으면 그럭저럭 가능하지.
가격도 500이나 퍼먹지만 그 정도 값은 하는 녀석이다.
그걸로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유령의 위쪽을 덧씌운다.
남은 두 개 중 자루 하나는 엘리야에게 전해두고.
“이거 들고 있어.”
“이걸로 뭐 어떻게 하라구요?”
“도망칠 때 근처에 있는 건 뭐든 먹어두라고. 아무거나 좋으니까.”
“...예? 도망치다뇨?”
그렇게 말한 엘리야에게 말 없이 위쪽을 가리킨다.
이에 녀석이 표정을 찌푸리며 그쪽을 바라본다.
“뭐에요. 그냥 하늘인데?”
이어서 말없이 그 하늘 중앙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거대한 점 하나를 가리킨다.
“저거 보이냐?”
“네.”
“저게 눈동자야.”
“...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기색으로 반문하는 엘리야를 내버려두고, 시계를 확인한다.
남은 시간 1분.
‘그럭저럭 맞추겠네.’
내가 딱히 과학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게임 시스템 위에 기반이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옳다는 걸 수차례 증명한 바 있다.
이 정도면 세이프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저게 눈동자라니-”
그렇게 질문하려던 엘리야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늘의 색깔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직접 봤기 때문이겠지.
아마 어떤 생명체가 눈을 감았다 뜨느라 일어난 현상일 것이다.
즉.
지금 저 하늘처럼 보이는 게 어떤 생명체의 ‘흰자’ 부분이고.
거대한 점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이런, 미친-!”
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포효와 함께, ‘하늘’이 밀려나갔다.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정확히는 우리를 감지한 ‘이면 세계의 짐승’이, 머리를 뒤쪽으로 뺀 이후 이쪽으로 그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까 이면 세계가 지옥이지.’
저게 이쪽 세계의 ‘잡몹’이다.
먹이사슬 최하위권의 생물.
“서, 선생님, 이, 빌어처먹을!”
엘리야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 눈가에는 눈물도 대롱대롱 맺혀있다.
“제, 제 뒤로 오세요!”
“...그쪽으로 가면 안전하냐?”
“저번에 한 번 저 구해주셨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그...!”
“...”
그래. 마음은 알겠다. 고마워.
상대방이 누구건 일단 싸울 생각부터 하는 그 용기와 정신력도 대단하다. 박수 칠만 하지.
하지만 애초에 지금 우리 스펙으로는 저거랑 전투하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거든.
“진정해. 애초에 저거랑 싸우려고 온 것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녀석에게 아까 쥐여준 자루를 다시 상기시켜준다.
마침 끝도 모르고 위로 치솟아 오르던 우리들의 몸도 상승세를 멈추던 참이다.
남은건 아래쪽으로 자유낙하 하는 것 뿐.
“이제부터 쏟아지는거 뭐든 다 받아둬.”
“쏘, 쏟아지는거라뇨?!”
“저거.”
이면 세계의 짐승이 벌린 입 안쪽에서 쏟아지는 흰색 덩어리들을 가리킨다.
“최대한 많이 담아둬. 쓸 곳 엄청 많으니까.”
“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데에요?!”
하지만 내 지시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그런 비명을 내질렀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그런 걸 어떻게 신경 쓰냐는 기색이지.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꼭 필요한데.’
그러려고 1,000포인트를 갈아서 자루를 두 개나 더 사왔다.
저게 보통 유용한 게 아니라서.
애초에 내 계산이 맞으면 지금 죽는 상황도 아니다.
‘아, 그렇지.’
이럴 때 써보면 되나.
[ 스킬: 악의 지배를 사용합니다. ]
[ 대상 ‘엘리야’에게 명령권을 발휘합니다. ]
“진정해. 괜찮아.”
그렇게 말하자 녀석의 떨림이 뚝 멎었다.
“...어?”
방금 전까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무서워하던 녀석의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본인도 갑자기 본인이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게 되자 당황하는 모습이다.
‘효과가 생각보다 좋은데?’
‘명령’이라는 단어가 조금 애매해서 망설이긴 했는데, 그냥 내가 진정하라고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공포까지 지워질 정도다.
구체적인 행동 지시는 어디까지 될지 모르겠지만, 강제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진정했어?”
“...어, 네, 네. 어떻게든. 어라? 뭐지?”
“그럼 저거 떨어지는 것 담아.”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자루를 쥐여준다.
“꼭 필요한 거니까. 알겠지? 우리 지금 의외로 안전해.”
“...”
엘리야가 뭐 이딴 녀석이 다 있냐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대답 대신 계속 시계를 확인한다.
남은 시간 10초.
짐승의 입이 점점 다가온다. 그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라서 우리가 낙하하는 속도보다 빠르지만, 그 덕분인지 거기에서 같이 떨어지는 흰색 덩어리들도 덩달아 빠르게 떨어지는 느낌이다.
“...모르겠네, 진짜. 이 사람 뭔데 이 상황에서도 침착해?”
녀석이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자루를 벌려 떨어지는 흰색 덩어리들을 받아낸다.
그렇게 산보다 더 커다란 생물이 자신을 잡아먹으러 오는 와중에, 거기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자루로 받아내고 있는 기묘한 광경이 잠시 이어졌다.
대략 9초 정도.
“그래서, 계획이 뭐에요! 이제 코앞까지 왔는데!”
이중적인 의미겠지.
위로는 짐승의 쩍 벌린 아가리가, 아래쪽으로는 지상이 보인다.
아래로는 물리 에너지로 죽음. 위로는 잡아먹히는 죽음.
그래도, 뭐 계획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발목 조심해.”
삐면 안 되니까.
주인공 아닌가. 귀한 몸이거든.
“예?!”
마지막 1초.
시계가 알람을 토해내는 것과 동시에, 필터로 가득 찬 것처럼 형형색색이던 세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면 세계 안으로 입장하게 해준 ‘출입권’의 기한이 다해서 강제로 내쫒긴 거지.
“읏...차.”
그와 동시에, 코앞까지 다가온 바닥에 ‘살포시’ 착지한다.
이런 식으로 이계에서 시간을 꽉 채워서 내쫒기면 해당 좌표에서 ‘새롭게 생성된’ 취급을 받는다.
즉, 지금 상황에서 나와 엘리야에게 적용되는 건 이 한 2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수준의 물리 에너지 밖에 없단 소리다.
쿵, 쿵.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
“...”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엘리야는 일단 내버려두고, 자루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 그레고리관의 유령 ]
[ 아이템: 에픽 ]
[ 전설적인 인물의 영혼이 깃든 사념체입니다. 장비에 부여하면 해당 인물과 접촉할 수 있습니다. ]
[ 엑토플라즘 덩어리 ] x3
[ 재료: 특수 ]
[ 이면 세계의 생물체에서만 분비되는 정체불명의 물질입니다. 촉매에 따라 일정 성질을 극대화 시킬 수 있습니다. ]
그렇지.
그레고리관의 유령은 내 전용 장비의 재료로 사용될 물건이고, 엑토플라즘 덩어리는 페르시에게 의뢰한 ‘대포’의 재료로 사용하면 될 것이다.
‘...괜찮네.’
위험천만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수확이다.
“선생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옆에서 부들부들 거리던 엘리야가 그런 말을 꺼냈다.
“...설마, 이거 처음부터 다 계획하신건가요?”
“어? 뭘?”
“그러니까, 이면 세계로 올라가서, 그 정체불명의 뭔가를 입수하고, 뭔가에 쫒기고, 이렇게 안전하게, 아니, 원리를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렇게 될 걸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나요?”
“...그렇지?”
알았으니까 하지 않겠냐?
세라 고인물들 사이에서는 ‘그레고리관 유령 얼리 파밍법’이라고 해서 꽤 유명한 기술이다. 조건만 갖춰지면 생각보다 꽤 쉽게 할 수 있거든.
거기에 최고급 재료인 엑토플라즘까지 추가로 얻을 수 있어서 널리 애용되는 방법이다.
“그럼 왜 저한테 처음부터 말씀 안 해주셨어요?”
“...아마 말 했으면 네가 안 따라오지 않았을까?”
응.
미안하긴 하지만 진짜로 그렇다.
안전할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스펙타클한 경험을 한다고 하면 누구나 안 올 것 아닌가.
“...그럼 애초에 제가 왜 필요했는데요?”
“손이 모자라서.”
“예?”
“이 하얀 것 최소 3자루는 채워야했는데, 나 혼자서는 손이 모자랐-”
[ 대상 ‘엘리야’가 당신의 영향을 받아 대상 ‘다우드’에게 격렬한 분노를 가집니다! ]
[ 부정적인 영향이 각인됩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 스킬: 악의 지배가 발동됩니다. 대상에게 사용 가능한 명령권 1회를 얻습니다! ]
“...”
음.
명령권이 쓰자마자 리필이 되네.
버근가?
“고작, 겨우, 그딴 것 가지고, 이런 지옥 같은 일을, 후, 후후...”
부들거리면서 그렇게 말한 엘리야가 내쪽을 노려본다.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무섭다.
“미안하다. 사과할게.”
“사람이 말로 사과해서 다 해결될 것 같으면 세상에 법이 왜 필요-!”
“네가 부탁하는 건 뭐든지 하나 해줄게.”
이전에 이 녀석이 나한테 사과한다고 했을 때 했던 약속이다.
나도 한 번쯤은 돌려줘야지.
실제로 이 말을 듣자마자 왈칵 화를 내려던 엘리야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뭐든지요?”
“뭐든지.”
녀석이 멋쩍게 볼을 긁적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나한테 새끼 손가락을 내민다.
“그럼 약속해요.”
“응?”
“엄지검지 걸고. 약속.”
“...”
어린애냐.
하지만 하자고 하니 말 없이 해준다.
새끼 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찍어주니, 녀석이 활짝 웃었다.
‘...이런 것 가지고 그냥 봐주네.’
단순하다고 해야할지.
“...헤. 역시 닮았네요.”
“응?”
“옛날에 오빠랑 자주 했었거든요. 이런 거.”
그렇게 말한 엘리야가 나한테서 휙 멀어졌다.
얼굴은 여전히 활짝 웃는 채였다.
“...선생님만 보면, 괜히 이런 거 해보고 싶다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문장만큼은, 틀림없이.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
‘...진짜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야.’
갈 곳이 있다면서 자루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사라지는 다우드를 바라보던 엘리야가,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다우드와 걸었던 새끼손가락이다. 아직까지 그의 온기가 남아있다.
괜스레 그 부분을 만지작거린다.
“...”
그녀가 말없이 아까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괴수가 자신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다가오던 때를.
‘한 번에, 진정됐어.’
그렇게나 무서웠는데.
그렇게나 죽을 것 같았는데.
저 남자가 진정하라고 하니까, 괜찮을거라고 하니까.
정말로 그렇게 느껴졌다.
마음 안으로 문장이 콱 파고 드는 느낌.
‘이상해. 이상해이상해.’
겉만 보기엔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말도 그냥 대충대충 내뱉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옆에 있어본다면, 항상 남들은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일 때마다, 사람 마음에 콱콱 박히는 짓을 자주 하기도 하고.
‘조금, 닮았나?’
그녀 마음 속에 남아있는 오빠는, 언제나 빌어처먹을 혈육으로 남아있었다.
짖궂고, 무신경하고, 평소에는 시덥잖은 장난밖에 못 치는 데다가, 가끔 보고 있으면 이런 둔탱이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동시에.
무슨 역경이 있어도 반드시 일어서서 극복하는.
상대방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그녀가 무슨 위험에 처할때마다, 반드시 달려와서 그녀를 구해주는.
세상에서 유일한 그녀의 영웅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런 말을 했던가.
‘진정해. 괜찮아.’
라고.
“...”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까 전 상황을 겪은 뒤로는, 저 다우드란 남자에게서 묘하게 그 사람이 떠오르는-
“아아아아-!”
엘리야가 괴성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미쳤지, 미쳤어!’
어딜 그 오빠랑 저기 저 사람을 비교하는가!
애초에 남의 남자다! 저 사람은 트리스탄 공녀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 빌어먹을 집안이랑 엮인 사람에게 이런 엄한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오빠한테 실례다!
“짜증나! 선생님, 개짜증나 진짜!”
그래. 저 사람은 짜증난다!
-진정해. 괜찮아.
“...”
아까 전에 자신의 귀로 꽂히던 그런 목소리가 떠오르자 잠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도 엘리야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다시 목청 높여 소리질렀다.
“선생님 진짜 개싫어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로 엘리야가 내지르는 소리가 주변으로 고래고래 울려퍼졌다.
마치 자신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밀어내려는듯한 모습이었다.
●
“아아아아-!”
“짜증나! 선생님, 개짜증나 진짜!”
“선생님 진짜 개싫어요-!”
“...”
자루를 끌고 가고 있자니 저 멀리서 그런 메아리가 울려퍼진다.
‘얼마나 빡친거야...?’
다음에, 응. 제대로 사과해야겠다.
아니면 진짜 죽을수도 있겠는데...?
[ 대상 ‘엘리야’의 호감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
[ 호감도 단계가 ‘관심 4단계’로 격상합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추가됩니다! ]
[ 선善 성향 인물이므로 보상이 축소됩니다! ]
“...”
와중에 이건 또 왜 뜨는지 모르겠다.
아니.
너 진짜 왜 뜨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