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 33.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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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온갖 특권층이 모여있는 장소답게 세 개의 아카데미는 항상 왕래하는 인원이 많다.
덕분에 황금의 삼각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역참 마을은 언제나 부산스럽고 활기차다.
심지어 성황국의 성녀가 묵는 고급 숙소조차 시끌시끌한 주변의 생활 소음에서 자유롭지 않을 정도니까.
“...”
성녀, 루시엔이 한숨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금색과 흰색이 투톤으로 뒤섞인 머리카락이 새하얀 법복 위에서 사르륵 미끄러졌다.
한숨을 내쉬자 허공으로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성녀와 담배. 독실한 신자들이 본다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 조합이겠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새로운 궐련을 하나 꺼내들었다.
“창문을 좀 닫아주시겠습니까?”
“응? 아, 방해했나?”
창문 근처에 앉아있던 ‘소년’이 그녀에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전신 갑주를 갖춰 입은, 겨우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미안하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네. 이 도시는 활기차서 기분이 좋구만.”
“소리는 괜찮습니다만, 빛이 들어오면 조금 거슬립니다.”
“요즘 시대의 성녀들은 빛이 있으면 거슬리나?”
“제 개인적인 버릇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어두운 예배당에서 보낸지라.”
“갑자기 그렇게 어두운 이야기로 빠지지 말게. 한 대 후려치고 싶어지니까.”
“...당신 일단 명목상으로는 제 호위 기사입니다. 말을 좀 고르시지요.”
대륙의 성녀에게 말하는 것치곤 대단히 불순한 어투였지만, 루시엔은 그것 외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남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이젠 겁 먹지도 않는군. 처음 만났을 땐 긴장이라도 하더니.”
“당신이 여자를 때린다는 말을 믿느니 차라리 법황이 성인군자라는 말을 믿겠습니다, 발카서스.”
소년이 낄낄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새삼 우리 둘이 너무 친해졌다는 생각은 드는구만.”
“그렇습니까.”
“그래. 악마 숭배자와 성녀치고는 너무 격이 없지 않은가.”
루시엔이 고개를 들어올려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
그러자마자 전신을 옥죄는 압박감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방금 창문을 닫아서 유일한 광원이 차단된 참이라, 어두껌껌한 방에서 소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일그러진 ‘형태’만큼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불가해한, 역겨운, 혐오스러운, 끔찍한.
빛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어둠이 드리우는 순간 이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곤 한다.
형용할 수 없이 일그러진, 억겁의 세월을 묵은 괴물.
교단에서 손 꼽히는 신성력을 가진 그녀조차, 제압하기는커녕 마주한 상태에서 혼절하지 않는 것이 고작인 이질적인 존재.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녀가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제 목줄을 쥐고 있는 인간보단 차라리 당신들이 나을 수도 있으니.”
실제로, 그러했다.
자신이 성녀라는 ‘구속구’를 성황국에게 받은 이후로, 루시엔은 자신이 이 인간들과 연을 튼 걸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 인간의 탈을 쓴 악마보다는, 진심으로 악마 숭배자들이 훨씬 나았다.
“그거 고맙구만.”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답한 소년이 하품을 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쪽도 결국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 협력하는 것 아닌가. 그, 뭐라고 했었지. 찾는 사람이 있다고 했나?”
“예.”
루시엔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소중한 사람이 엘판테에 있습니다.”
굳은 결의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반드시, 해줘야 할 것이 있어요.”
“그런가. 소중한 사람이라.”
그 말을 들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으로 희미한 안광이 몇 차례 점멸했다.
“나한테도 한때 그런 것들이 있었지.”
이어서 흘러나온 건.
과거의 기억 속에 파묻힌 자의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몸에서 썩은 기운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부정不正이, 범람한다.
루시엔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다.
“...”
“그런 시절이 있었어. 지금 저 창문 바깥의 인간들처럼, 활기차게, 웃고, 떠들고, 서로를 사랑하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전심으로, 전력으로 긍정하던 시절이.”
죽은 자의 기운이 가득한 날숨이 허공으로 뭉게뭉게 퍼져나갔다.
그 안에 섞인 독기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흘러나온다.
사자死者들의 망집이, 멸망한 자들의 갈애가, 끈적끈적하게 녹아 바닥에 늘러붙은 검댕처럼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그리고, 그 위로.
쓸쓸한 목소리가 덮어졌다.
“...그랬던 내 왕국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나.”
“...아, 그흑...!”
“어이쿠, 이런.”
소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쪽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루시엔도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죽었을, 수도...!’
성녀인 자신이, 그저 기운을 조금 드러낸 상대방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이 소년은, 그 정도의 ‘위상’에 있는 괴물이다.
“미안하군. 괜찮나?”
“...괜찮아, 보입니까...!”
“음, 진심으로 사과하지. 가끔 인간이라는 생물이 얼마나 허약한지 까먹곤 한다네.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더군.”
“...방금 전에 저한테 어두운 이야기 한다고 뭐라 하신 건 당신 아닙니까.”
“거, 사과한다고 하지 않았나.”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킨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다시 열어젖혔다.
이어서 햇빛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이 인간의 형태를 되찾았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답게 쾌활한 미소를 얼굴에 건 소년에게 다시 볼 멘 소리가 날아들었다.
“방금 전에 닫아달라고 했습니다만.”
“시끄럽네. 햇빛 받으면서 기도라도 좀 하게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당신은 성녀라는 직책에 좀 충실할 필요가 있어.”
“...”
“뭣하면 나도 같이 해주지. 어떤 기도문은 내가 그쪽보다 더 잘 외우지 않던가?”
“...”
도저히 악마 숭배자에게서 튀어나올 게 아닌 제안에 루시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자니, 발카서스가 낄낄거리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나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로 저 아카데미 안에서 이룰 것이 있다네.”
그렇게 말한 소년이 시야 너머에 걸린 건물을 바라보았다. 엘판테 아카데미.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장소였다. 그의 ‘목적’을 이루기에 적합할 정도로.
“그때까지는, 서로 잘 해보지. 알겠나?”
“...”
루시엔이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안다면, 전 대륙이 그야말로 발칵 뒤집힐 것이다.
악마 숭배자와 성녀가 협력해서 서로 뭔가를 이루려고 한다니.
“...예.”
하지만.
“잘 해봅시다, 발카서스.”
그녀는.
그냥 그렇게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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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아들아.
슬슬 여름이구나. 그 근방의 여름은 특히나 더 덥다고 들었단다. 건강 조심하라는 뜻에서 냉동석과 영지에서 생산된 과일 몇 개를 보냈단다. 친구들이랑 나눠먹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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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쯤이면 엘판테에서는 항상 본가에서 올려보낸 인원들을 참관시키는 행사를 진행한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곧 수확철이라 내가 직접 움직이기는 힘들 것 같단다.
대신 헤르만 집사를 보낼 테니 공식 행사는 그쪽을 대동하고 다니면 될 거란다. 필요한 게 있으면 그쪽에 부탁하렴.
영지는 평화로우니 걱정하지 말고. 너는 예전부터 영민한 아이였으니 우리도 크게 걱정하진 않고 있단다.
이만 줄이마.
추신.
혹시 친한 여학우가 있으면 방학 때 데리고 와서 소개나 좀 시켜주렴. 이 아비도 손자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니?
아르민 캠벨 발신. 」
“...”
칙칙한 표정으로 포도를 으적거리며 편지를 접는다.
역시 우리 동네 포도다. 품질은 일품이지.
지금은 그걸로도 완화가 안 될만큼 기분이 우울하지만.
‘친한 여학우라.’
아버지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농담으로 한 얘기겠지.
뭐, 데리고 갈 사람이 몇 명 떠오르긴 한다.
엘노어라든지. 엘리야라든지.
그런데 둘 중 하나라도 방학 때 영지에 데려갔다가는, 글쎄.
“...”
상상도 하기 싫다. 재앙도 그런 재앙이 없다.
문제는,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하면 그 둘만으로 끝날 가능성이 굉장히 낮다는 거다.
‘인류를 구원해달라고.’
얼마 전에 아탈란테에게 부탁받은 ‘과업’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악마의 그릇 후보들을 모조리, 그러니까.
모조리 다 꼬셔달라고 했던가.
“...”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다.
우리 총장님께서는 그걸 ‘부탁’이라고 했지만, 그건 사실상 내 입장에서도 강제성을 띄는 일이다.
악마를 품은 그릇들과 어떻게든 엮여 그것들이 내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 필연이라면, 어떻게든 그쪽을 내게 호의적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아버지.
처음 출발할 때 절대 눈에 띄지 않겠단 약속했던 건 아마 앞으로도 지키기 힘들 것 같아요.
‘...잘 모르겠다.’
원래 뭐든 복잡하게 생각하면 될 일도 잘 안 되기 마련이다.
당장은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결해야겠지.
< 기프트 관련 인물 알람 >
♥ 엘노어 에리나리제 라 트리스탄
[ 친애 1단계 ]
[ 전용 퀘스트 ‘저주의 대물림’이 생성된 상태입니다! ]
[ 전용 퀘스트 관련 이벤트 발생까지 D-7 ]
▼ 기드온 게일스터드 라 트리스탄
[ 호기심 1단계 ]
[ 전용 퀘스트 ‘저주의 대물림’이 생성된 상태입니다! ]
[ 전용 퀘스트 관련 이벤트 발생까지 D-7 ]
일단 이것부터 시작해서.
[ 메인 퀘스트 ]〖 챕터 2 – 잊혀진 왕국의 소년왕 〗
[ 관련 이벤트가 곧 발생합니다! ]
이것까지 줄지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주일 뒤라면 분명히.’
편지에도 적혀있지만, 이맘때쯤이면 엘판테에서 항상 일어나는 이벤트가 있다.
본가에서 보낸 인원들과 함께하는 참관 수업 이벤트.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원래는 별 것 아닌 일이지만, 그게 특권층이 엄청나게 모여있는 장소라면 그런 행사도 꽤 다른 의도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주눅들지 않기 위해서. 특권층일수록 얕보이면 안 되는 걸 중요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왜 이런 곳에 행차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인간도 가끔은 출몰할 정도로 체급이 꽤 커진 행사다.
그리고 엘노어와 기드온의 전용 퀘스트가 그때 동시에 생성되어 있다면, 뭐.
어떤 식으로 굴러갈지는 뻔하지.
‘...얼굴 한 번 뵙겠네.’
기드온 게일스터드 라 트리스탄.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접촉할 기회조차 없는 인간이다.
메인 시나리오에서는 항상 이미 고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
아, 그렇다고 엘노어가 이쪽 목을 딴다는 소린 아니고.
엘노어가 그쪽을 싫어하긴 하지만 패륜을 저지를 정돈 아니다.
다만, 그 둘의 관계가 복잡한 건 사실이지.
기드온은 그... ‘사정상’ 엘노어가 어렸을 때부터 냉대했을 거고, 엘노어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 이쪽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을 거다.
엘노어의 ‘어머니’가 관련된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는 완전히 관계가 틀어졌을 거고.
하지만 이 사람의 멘탈이 완전히 나가서 회색 악마의 그릇으로 각성하는 계기는 모든 분기에서 항상 기드온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완전히 남남으로 생각하는 건 또 아니라 그거지.
그런 정보가 주르륵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쉰다.
그래. 다 알겠는데.
‘확실한 건...’
이 사람과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거기서 반드시 ‘뜯어낼’ 것이 있단 점이다.
2챕터의 주요 적대 대상인 ‘소년왕’을 상대하려면 그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
제국 최강의 기사를 상대로 떠올리기에는 조금 불경한 생각이 아닐까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난 평탄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간 언제 무슨 일에 엮여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니까.
하물며 2챕터부터는 더욱 그렇지.
‘계시받은 자들.’
시나리오의 메인 악역인 악마 숭배자들의 간부들.
2챕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놈들이다. 소년왕은 그 중 하나고.
그 전투력은 정수를 삼킨 정화자를 ‘따위’로 만드는 녀석들이다.
“...”
애초에 정공법으로 이기라고 만들어놓은 보스전은 아니긴 하지.
소년왕이 뭐하는 놈인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건 그거고.’
결국에 그걸 풀어가기 위해선 당장 코앞까지 다가온 기드온의 이벤트부터다.
이쪽에서 내가 원하는 것만 제대로 얻어도 진행이 훨씬 편해지겠지.
‘일단 분류는 악역으로 되어있긴 한데.’
캐릭터 설정도 그렇고, 시나리오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실제로 어느 정도 궤는 맞지.
이 사람 설정을 생각하면 또 마냥 그렇게 취급하면 안 되긴 하지만.
그렇다는 말은 뭐냐.
‘치명적인 매력이 어느 정도로 발동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내 기프트는 상대방의 성향이 극단적일수록 강하게 작용한다. 그렇다면, 기드온처럼 뭐라 말하기 애매한 인간은 어느 정도 수준일지 확신이 안 간단 소리고.
‘그러면, 뭐냐...’
계획은 있다.
치명적인 매력 없이도 어떻게든 점수를 따서 나한테 도움이 될 것을 뜯어올 플랜이.
다만, 그걸 하기 위해서는 나로서도 키워야 할 게 있거든.
< Status Info >
「다우드 캠벨」
근력: F
민첩: F
내구: F
행운: F
권력: F
< Mastery Info >
[ 특성: 트리스탄류 검술 ] [ 등급: 기초 ]
[ 현재 숙련도: 58% ]
[ 검술 명가 트리스탄 공작가의 검식입니다. ]
[ ■ 무기를 가리지 않고 일정한 수준의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
[ 특성: 호흡법 – 부초敷草 ] [ 등급: 기초 ]
[ 현재 숙련도: 67% ]
[ ■ 오랫동안 단련하면 신체의 내구와 체력을 극적으로 올려주는 호흡법입니다. 특히 트리스탄류 검술과의 궁합이 좋습니다. ]
이걸 단련해야 한다.
내 계획에서 기드온과 직통으로 통할 수 있는 방법은 ‘검술’ 딱 하나뿐이니까.
갑자기 천재와 같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트리스탄류 검술을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만 보여줘도 되긴 하지만.
문제는 그걸 절체절명 스킬 ‘없이’ 해내야만 한다는 점이다. 스텟과 특성의 레벨이 어느 정도 받춰 줘야지만 할 수 있겠지.
‘...방법을 찾아볼까.’
다행히, 내 주변에는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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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엘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되물었다.
방과 후, 교실을 나오는 길에 내가 말한 내용에 나온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까지 신입생이랑 같이 수업을 듣는거지?’
엘노어가 모든 부상을 회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내가 듣는 수업에 끼어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학생회장이면 슬슬 원래 학군으로 돌아가서 수업을 받을 때 되지 않았나 싶거든.
주변에 눈치도 좀 보이지 않나?
“응. 그런 것 없네.”
“...”
“그대가 졸업할 때까지는 웬만해선 같이 수업을 듣지 않을까 싶군.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폼으로 학생회장을 달고 있는 건 아니니 말이지.
그렇게 말한 엘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치켜들고 가슴을 앞으로 쑥 내미는 게 엣헴, 하고 자부심이라도 부리는 것 같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지만.
“...”
그런데 그거 직권 남용이잖아.
뭘 그렇게 자랑스레 말하고 있어.
“아무튼, 검술 지도를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신성학부 지망이라고 하지 않았나. 곧 전공 수업도 시작할 텐데 그런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건가?”
“어차피 단기간에 빠른 성취가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오래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 방면에서 제가 가장 믿을만한 건 엘노어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것 관련해서는 가장 먼저 의지할 사람은 이쪽이다.
제일 익숙하기도 하고, 검술 솜씨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익히려고 하는 ‘트리스탄 검술’에 있어서 이 사람만큼 좋은 스승은 없겠지.
그래서 재차 그렇게 부탁하니, 엘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등지고 휙 돌아섰다.
“...뭡니까?”
“아니, 기분이 좋아서 그렇네. 그대가 나한테 의지해준다니.”
“기분이 좋은데 왜 저한테 등을 보이시는데요?”
“흠. 이럴 때를 위해서 기뻐하는 표정을 연습해두었네. 기다려보게.”
“...”
한참동안 꼼지락거리던 엘노어가 마침내 나를 돌아보았다.
눈썹이 평소보다 아주 살짝 모여있었다.
“...어떤가?”
“...”
그래서 검술 가르쳐줄거냐고.
대답을 해.
“어라,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느닷없이 옆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노어의 기색이 확 험악해졌다.
“...그대가 끼어들 일은 아니네. 물러서게나.”
“에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이 검술을 배운다는데 어떻게 그래요.”
엘리야가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게 답하자, 엘노어의 눈썹에 더더욱 험악한 감정이 깃들었다.
“...다우드는 내게 부탁했네. 그대가 아니라. 그쪽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
“어, 하지만 전 아카데미 들어오기 전에 검술 교관 노릇이라면 시간제로 여러 번 해봤는데요? 공녀님은 다른 사람 가르쳐 본 경험은 없을 것 아니에요?”
“...”
하지만 그렇게 험악한 와중에도 거짓말은 못 하고 입을 꾹 다무는 걸 보면 성격 진짜 여전하다 싶지만.
이 사람,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거든.
피식 웃으며 엘리야에게도 말한다.
“그럼 너도 와서 같이 배우던가. 솔직히 너보단 엘노어가 더 실력 좋잖아.”
뭐,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아직 둘 사이에 명확한 격차가 존재하니까. 엘노어가 지도한다고 하면 이 녀석도 배울 게 많을 것이다.
아무튼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엘리야의 성장은 그야말로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지.
“...”
내 말에 엘리야가 입술을 삐죽이고, 엘노어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음, 그래요?”
하지만, 엘리야가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씨익 웃었다.
“그럼 저기는 ‘혼자’ 교관이고, 우린 ‘같이’ 제자네?”
엘노어의 기색이 다시 우중충해졌다.
“...”
이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좀 마. 제발.
“...그냥 너도 교관해라, 그럼.”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다시 엘노어의 표정이 풀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야가 씨익 웃었다.
마치 자신이 노리던 뭔가가 걸렸다는 것처럼.
“어, 그래요? 그럼 경쟁이네요?”
“뭐?”
“저하고 공녀님, 둘 중 누가 더 선생님을 잘 가르치는지요.”
“...”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그런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자니, 엘리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더 잘하는 쪽이,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지도하는 편이 좋아보이는데요. 그렇죠?”
“...”
뭔 소리야.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
“...하.”
엘노어가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햇병아리 신입생 주제에 간도 크군. 지금 내게 싸움을 거는 건가?”
“어, 하지만 공녀님 그렇게 잘 가르칠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아니.
내 의견을 들으라고.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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