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 - 34. 수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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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노어와 엘리야는 둘 다 검술 영역에서는 고아한 경지에 닿아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한 쪽은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인간이고, 한 쪽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인데 자기 주 종목에서는 어련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가 이번에 뼈저리게 곱씹고 있는 교훈도 그런 사실에서 기인하는 거다.
본인의 재주와 남을 가르치는 재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러니까 거기서 백스텝이 왜 나오는데요! 아니 대가리 안에 처박혀 있는 뇌라는 걸 좀 쓰세요!”
“그대야말로 이딴 걸 검술이라고 부르나. 이건 싸운다기보다 교태를 부리는 것 같군. 적을 유혹이라도 하려는 건가?”
“...”
살벌한 기색으로 그렇게 치고 박는 둘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정확히는, 둘 다 내 ‘커리큘럼’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거다.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체력 단련실에 있는 전원이 대체 뭔가 싶어서 이쪽을 돌아보고 있지.
‘...처음에는 그래도 좀 화기애애하게 시작하더니.’
처음에는 그래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갖추고 시작된 토론이, 지금에 와서는 서로에 대한 인신 공격까지 내려온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시나리오에서도 항상 이런 식이었던가.’
이 둘은,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안 맞는다.
최근에는 그래도 나를 매개로 조금 어느 정도 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무리여도 한참 무리인가보지.
트리스탄 공작가와 용사.
이 둘은 결국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대립할 운명이다. 설정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정해져 있지.
“...”
그러니까.
내가 뭔가 그 중간에 끼어들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계속 그럴 거란 이야기다.
‘뒤로 가면 갈수록 이 두 명 다 필요하긴 할 텐데.’
정화자 보스전만 봐도 절대 지금 튀어나오면 안 될 물건이 튀어나온 참이다.
뒤로 가면 갈수록 뭐가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거지.
그리고 악마를 확정적으로 조질 수 있는 건, 같은 악마와 천사의 축복을 몰아받은 용사뿐이고.
가장 신뢰할 만한 아군이 바로 이 두 명이라 그거지. 시나리오 진행에 있어선 이 둘의 도움이 필수다.
‘...게임 안에서도 있긴 있었지?’
루트에 따라 이 둘의 사이가 꽤 괜찮아지는 수준까지 호전되는 경우가 있긴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된 ‘상황’을 내가 직접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내가 좀 위험해진다.
주로, 그러니까.
바람둥이가 여자한테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심지어 거기 걸려 있는 게 최종 보스와 주인공이시다?
들키면 죽는다. 진짜로.
“...”
아무리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하렘을 꾸려야 하는 입장이라지만 굳이 그런 걸 하고 싶지는 않긴 하다.
아마 곧 있을 ‘참관 수업’ 이벤트에서 그런 분기로 접어드는 선택지가 하나 나오긴 할 텐데.
‘절대로 안 해야지.’
응. 죽어도 안 한다.
“...”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이상하게 빠진 적이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안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옆에서 그런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 진짜! 이럴 게 아니라 그냥 각자 해보죠! 선생님!”
“...응?”
성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엘리야가, 느닷없이 내 손에 역날검 하나를 쥐어주었다.
철검이지만 날을 죄다 뒤집어 놓은 검.
눈을 끔뻑거리며 그걸 보고 있자니, 녀석이 조금 자리에 떨어져서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한 번 따라해보세요!”
그러더니, 녀석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 땅을 박찼다.
검식. 아마 스스로 독자적으로 개발한 종류일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실용적이며, 가볍고 경쾌하다. 하지만 그 공격만큼은 매섭고 묵직하다.
얼핏 보면 그냥 얼기설기 이어붙인 동작의 모둠이지만, 주변에서 자기 단련에 매진하던 기사학부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볼 정도로 번뜩이는 순발력이 그런 동작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자! 보셨죠?”
시연을 마친 엘리야가 땀을 닦아내며 내게 씩 웃었다.
“이제 해보세요!”
“...”
장난하냐.
“...가르쳐 준다며.”
“...전 이렇게 배웠는데요?”
“...”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주변에서 이쪽을 보던 기사학부 놈들의 시선에 어이가 털린 기색이 담기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겠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천재라고 자랑하냐. 검술 교관도 해 봤다는 놈이 무슨.
“...그대, 장난하나. 교육의 기본도 안 되어있군.”
실제로 그걸 보고 있던 엘노어도 한숨과 함께 그렇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더니 내 앞에서 검을 뽑아들고 자세를 잡는다.
“가장 중요한 기본 자세부터 시작해서 가르쳐주지. 일단 내려베기부터.”
그렇게 말한 엘노어가 내 앞에서 몇 차례 간단한 동작을 시연해주었다.
‘오, 오오...’
디딤발, 무게중심 이동, 디테일한 시선 처리와 상체의 구도까지. 자세한 설명까지 함께 곁들여서 가르쳐 준다.
이 사람도 엘리야랑 비슷한 과가 아닐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정석적인 가르침이다.
“한 번 해보겠나.”
“예, 이 정도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잡고 내려베기를 시도해본다.
하지만.
“...”
“...음.”
“...어...”
처참하게 실패했다.
아니,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데.
간단한 내려베기인 줄 알았더니, 현실은 진짜 휘청거리는 몸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잡는게 고작이다.
특히 나처럼 단련 하나 안 된 몸이라면, 절체절명 스킬이 없을 경우 철검을 계속 들고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연속으로 휘두르는 건 말할 것도 없지.
주변에서 쳐다보던 녀석들의 표정도 애매하다. 딱 봐도 초짜인 티가 나면 귀엽게 봐주기라도 할 텐데. 이 정도로 예술적으로 실패하니까 ‘이게 뭐지?’ 싶은 분위기다.
“...그, 이 정도면 검술 이전에 기초 체력부터 단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습이 의미가 없겠는데? 아니 마수도 그렇게 잘 때려잡으시던 분이 왜...?”
실제로 엘리야도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꺼내놓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아니, 잘했네.”
엘노어가 무표정하게 그런 말을 꺼내놓자 주변에 있던 전원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예? 저게 잘했다구요?”
“그럼. 나라면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네.”
“...”
대체 뭔 미친 소리냐는 문장을 표정으로 말하는 엘리야를 마주 본 엘노어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아들었다.
“잘 보게.”
훈련용 더미 앞에 선 엘노어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흡!”
곧바로 가벼운 기합과 함께 내려베기를 시도한다.
다만, 본인이 하는 것처럼 반듯한 자세가 아니라 방금 전에 내가 한 것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망인 동작이다.
솔직히 동작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겠지.
원래대로라면 형편없이 더미 앞에 닿은 검이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하고 튕겨나가겠지만.
-!
-!!!
-!!!!!!!
폭탄이 터지는 수준의 굉음.
더미가 거의 가루가 나는 수준으로 산산 조각나고, 바닥에 운석이라도 박힌 것처럼 크레이터가 패이며, 그 여파로 벽까지 쩌적쩌적 실금이 갔다.
“...”
“...”
체단실의 전원이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봤나.”
엘노어가 평탄한 목소리로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자세에는 아무 문제도 없네.”
“...”
그렇게 말한 엘노어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나에게 교육을 받는 걸로 하지. 알겠나.”
“...”
“다우드 캠벨은 훌륭히 해냈네. 교육 방침에도, 듣는 자의 자질에도 아무 문제 없지.”
“...저기요, 학생회장님.”
엘리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뭔가.”
“그냥 선생님이랑 매일 얼굴 보려고 억지 부리는 거죠?”
“아니네.”
“...맞는 것 같은데? 애초에 수준이 이런 사람한테 강의가 무슨 의미-”
“아니라고 했네. 반박은 결투로만 받지.”
“...”
엘리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다무는 사이, 내 시선은 여전히 엘노어가 만들어낸 잔해에 가서 꽂혀있었다.
‘...전보다 더 세진 것 같은데?’
원래도 신체 능력 수준이 가공할 수준이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 타이밍에 이 정도 용력을 보일 수준은 아니다.
세울 수 있는 가설은 하나 정도지.
‘벌써 조각과 어느 정도 융합했나?’
악마의 그릇이 이 정도로 급격하게 스펙이 올라가는 거라면 그 정도밖에 없다.
조각과 완전히 융합하여, 신체 스펙과 특수 능력이 갖춰지기 시작하는 것.
시나리오에서 내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강해진다는 건 호재지만, 마냥 좋아하기는 또 뭐하다.
특히 게임 내부의 이벤트들이 보통 어떻게 발생하는지 생각한다면 그렇지.
‘악마의 그릇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아마 엘노어가 이렇게 조각과 융합했다면, 다른 악마의 조각을 품고 있는 그릇 또한 거기에 영향을 받아 안쪽에 있는 악마를 현현시킬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단 거다.
즉, 이건 다른 ‘그릇’이 곧 등장한다는 걸 경고하는 신호지.
더불어 나가면, 메인 시나리오 전체가 더욱 가속되는 기폭제이기도 하다.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네.’
악마의 그릇은 보통 시나리오 진행에 맞춰서 등장한다.
그렇다는 말은, 2챕터의 진행 도중에 엘노어 말고 다른 그릇의 등장은 거의 필연이라고 해도 좋단 소리다.
요컨대.
나한테 반드시 집착하게 될 강력하고 위험한 여자랑 곧 만나게 된단 소리지.
목숨이 간당간당할 이벤트에도 여러 개 휘말리게 될 거란 소리고.
죽지 않기 위해서 더 빨리 강해져야 하는 건 사실상 필수 사항이다.
‘검술도 검술인데, 다른 것도 좀 같이 채워야겠어.’
급선무라면, 역시 신성 관련 능력이다.
아뮬렛의 성장도 성장이고, 전반적인 내 생존력과 대처 능력을 늘려줄 건 역시 그쪽이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니, 좀 우길 걸 우기세요!”
“흠. 분명히 반박은 결투로만 받는다고 했을 텐데.”
“...둘 다 못 가르치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한숨을 내쉬며 또 치고 박기 시작하는 두 명을 뜯어말린다.
가장 신뢰할만한 아군이고 뭐고.
일단 이 두 명한테서 검술을 배울 수 없다는 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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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결국 남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긴 하다.
검술과 신성을 동시에 수련할 수 있는 대상.
“...‘비품실’의 출입증을 달라구요?”
“예.”
내가 당당하게 그렇게 요구하자 아탈란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혹시 거기에 뭐가 있는 진 알고 있나요?”
“이미 한 번 만나봤습니다.”
울트리마를 꺼내올 때 한 번 마주쳤지.
세 발자국 안으로 들어오는 건 뭐든지 다 썰어버리는 검신병자.
유리아 그레이하운처. 2챕터의 최종 보스.
그리고, 성녀와 더불어 유력한 ‘그릇’ 후보이기도 하지.
“...”
그래. 2챕터의 최종 보스는 소년왕이 아니라 이쪽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소년왕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감당할 녀석이 아니라서, 사실상의 최종 전투는 이쪽과 이루어지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 건드리기에 좋은 사람은 아니네요.”
아탈란테가 한숨을 내쉬며 열쇠를 꺼내들었다.
아무튼 내가 말하는 건 뭐든 들어주는 양반답게 요청을 받아주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뭐라고 경고 한 마디를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모양이다.
“존재 자체가 제국과 성황국의 전쟁까지 격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에요. 엘판테에서 괜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둔 게 아니니까요.”
진지한 얼굴로, 아탈란테가 문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곧 있을 참관 수업은 당신도 알고 있죠?”
“예.”
“그 기간에 맞춰서 성녀를 포함한 성황국의 인원들이 엘판테에 체류할 거에요. 유리아 그레이하운처는 들키지 않기 위해 바짝 엎드려 있어야 할 기간이란거죠.”
아탈란테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유리아는 만약 그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갔다간 그것 자체가 재앙이다.
‘정확히는 그쪽이 들고 있는 검이 문제지만...’
자신의 간격 안으로도 상대방을 들이지 못하고, 자신도 상대방과 가까워질 수 없는 ‘단절의 저주’를 만들어 내는 성황국의 국보. 녀석이 한참 전에 훔쳐서 달아난 물건이지.
이전에도 말했지만, 녀석이 세 발자국 안으로 들어오는 건 뭐든지 베어버리는 미친 짓거리를 해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걸 지닌 상태로 유리아가 법황 눈에 띈다면 진짜 양국 사이에 지랄이 날 가능성이 높지.
그 정도로 성황국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건이다.
‘...그런만큼.’
그런 물건의 능력이니만큼, 상대방과 자신의 간격이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유리아의 전투력 역시 미친 듯이 폭등한다.
특히 거리가 두 발자국 안이라면 엘노어와 엘리야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지.
엘노어와 엘리야의 근접 전투 역량이 ‘최상위권’이고 ‘최강’이지 못하는 이유 자체가 유리아의 존재 때문이니까.
‘...’
문제는, 그 성황국의 국보는 소년왕과 맞물려 한 번은 반드시 아카데미에 대형 사고를 몰고 온다는 점이다.
2챕터의 핵심 아이템이기도 해서.
“그러니까, 그쪽에 무슨 용건이 있는지 정도는 들어야겠네요. 위험한 일이라면 저라도 이 요청은 반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탈란테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개인에게 걸린 저주 자체가 대단히 위협적일 뿐더러, 정치적으로도 존재 자체가 시한 폭탄입니다. 당신 같은 중요 인물이 함부로 접촉하면 안 되는 이유 투성이죠. 반드시 아무런 위험 요소가 없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아, 그런 거면 또 안심이죠.”
아무리 유리아가 그렇게 위험한 인간이라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쪽에 하러 갈 일이 그렇게 또 위험하진 않다.
그저 내 신성과 검술을 동시에 급속도로 성장할 방법일 뿐이지.
미소 지으며 대답을 꺼내 놓는다.
“대단한 건 아니고, 서로 칼부림 좀 하려구요.”
“...”
“앞으로 한 일주일 정도는 매일 그러려고 하는데.”
아탈란테의 표정이 급속도로 썩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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