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 - 41. 시한폭탄
●
“...진심이십니까?”
엘노어가 당혹스럽다는 목소리로 질문했지만, 정작 그녀가 그런 반응을 꺼내게 만든 상대방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미 성황국과 엘판테 사이에 합의가 된 내용입니다.”
엘노어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자신에게 내밀어진 서류의 내용을 쭉 훑었다.
분명히, 그 끄트머리에 적혀 있는 것은 아탈란테의 서명이다.
‘총장님은 이런 미친 짓에 동의하실 분이 아닌데.’
그녀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돌아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클라인 게리슨. 그런 명찰을 착용하고 있는 성황국의 전투 사제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자색 견장을 차고 있는 전투 사제는 제국의 정규 기사 중에서도 소대장급에 준하는 무력과 권력을 가진 인간이다.
고작 사절단의 대표로 파견되기에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고급 인력이지.
그러니까 그런 인간이 꺼내놓는 화제가 더 당황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성녀님께서 그런 일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이건, 너무-”
비인도적이다.
도저히 종교 집단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학생회장님.”
분명히, 어투야 예의 발랐지만.
그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독기가 느껴질만큼 음험한 기운이다.
“이건 성녀님이 직접 ‘자원’하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이런 짓에 자원할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보다는, ‘자원하도록 시켰다’라는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겠지.
문득, 일전에 다우드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성황국에서 아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겁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지만, 걔네 법황부터 시작해서 미친 놈들 투성이인 곳이거든요?’
처음 들었을 때는 대체 이게 무슨 불경한 발언인가 싶었다.
대륙 최대의 종교 집단을 완전히 악당 취급하는 느낌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 직접 눈앞에 두니 정말 그런가 싶기도 하다.
이건 미친 놈들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요구할 수 없는 내용이다.
“...”
“학생회장님? 이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조속히-”
“예.”
눈을 감고 다우드의 말을 떠올리고 있던 엘노어가, 상대방이 뭐라고 재촉하자 그대로 도장을 쾅 찍어서 서류를 돌려주었다.
오히려 말을 듣지 않으면 뭐라 협박하려고 준비하던 상대방이 당황할 정도였다.
“뭐하십니까. 바라시는대로 처리해 드렸습니다만.”
“...감사합니다.”
미심쩍다는 기색으로 이쪽을 위아래로 한 번 훑은 전투 사제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학생회 집무실을 벗어났다.
요청해놓은 게 본인들임에도 ‘이게 이 정도로 쉽게 통과되나?’ 같은 기색에, 엘노어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 진행이 곧이다. 학생회장으로서 진행 요원을 겸하는 게 그녀니 조속히 시험장에 가야겠지.
“...”
머릿속으로는 방금 상황이 떠돌고 있었다.
물론 괴상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긴 하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겠지.
아마.
‘그거 통과시켜줘요. 뭐라고 요청하든.’
누군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죄책감 없이 사고를 칠 수 있거든요?’
거기까지 떠올린 엘노어가, 다시 실소를 흘리며 검을 챙겨들었다.
그 남자, 분명히 또 뭔가 꾸미고 있다.
이미 성황국이 엘판테에서 뭔가 벌일 것이라는 것조차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다면.
그녀가 할 일은.
-당신이랑 관계 있으니까요. 가족이잖아요.
“...”
문득, 그런 말을 떠올린 그녀가 동작을 멈칫했다.
“...그런 말까지 들으면, 안 따라갈 수가 없지 않나.”
하여튼, 치사한 남자다.
가족, 가족이라.
그거, 역시.
그거겠지.
흠.
확실하진 않지만,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다.
‘...이쪽도 나름 준비를 해둬야 할 지도.’
그녀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오는 베아트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시험 감독 준비하러 나가?”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서로 지나치려던 순간, 엘노어가 문득 뭔가 떠올렸다는 것처럼 베아트릭스를 돌아보았다.
“아, 참. 베아트릭스.”
“어? 뭔데?”
“반지를 맞추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은가?”
“반지? 무슨 반지?”
“...남녀가, 그, 약속의 증표로 남기는 것 말일세.”
서류를 옮기던 베아트릭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
유리아 그레이하운처의 어제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왜 오늘은 안 왔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옆에 누군가가 없는 바람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매일 아침에 와서 검을 맞대고 가던 사람인데.
‘...바쁜 일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인 선택지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쪽일 것이다. 자신과 같이 어딘가에 격리되어 살아가는 사람도 아닐 테고, 나름의 삶이 있을 것 아닌가.
아탈란테 총장이 직접 신경을 써서 관리할 정도의 인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란 사실은,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리 쉽게 통제되는 것이었다면 세상 사람 아무도 근심 걱정 없이 살겠지.
‘...만약 바쁘지 않았다면?’
불길한 생각이라는 것은 참으로 불현 듯 찾아와서, 마음 속에 끈끈하게 뿌리를 박고 자리를 잡아버린다.
‘그냥 나한테 질린 것 뿐이라면?’
근처 계곡물에서 옷을 빨래하던 손이 우뚝 멈춘다.
여름철임에도 시리디 시린 계곡물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그대로 비춰졌다.
꾀죄죄한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가끔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아카데미의 학생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는 초라한 사람이.
“...”
그녀의 눈꼬리가 축 늘어졌다. 시무룩한 표정이 얼굴 위로 뭉게뭉게 번져나갔다.
한번 돌아가기 시작한 부정적 회로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분명히 질린거야.’
가까이 다가오면 다짜고짜 문답무용으로 베어버리는 데다가, 말도 똑바로 못하고, 매일매일 야만인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 분명히 그런 것이다.
“...”
하지만, 잠들기 직전에도 그녀는 혹시 모른다는 기대감을 완전히 놓지는 못 한 상태였다.
혹시, 혹시라도.
내일 아침이 되면 와주실지도 몰라.
“...”
하지만.
그 다음날에도 그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 봐.’
질린 것 맞잖아.
유리아 그레이하운처라는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겐, 더 이상 볼 일이 없단 뜻이렸다.
“...”
처음부터 친구가 될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였는데. 지금까지 바보처럼 뭘 들떠있었던 거람.
자신은, 죽을 때까지 혼자일 텐데.
그리고 그런 사실을 깨닫자마자.
“...우.”
그녀의 눈가로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 우으, 흐으윽...”
단절의 저주로 제대로 된 문장은 형성하지 못 한다.
하지만, 도저히 억누르지 못한 흐느끼는 소리가 그녀의 악다문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시덥잖은 대화라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그럴 정도로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아플 정도면, 찾아오지라도 말지.
세상 치사하게 줬다가 뺏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아예 처음부터 그 느낌이라도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갑자기 찾아와서, 갑자기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버리고는,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잘 할게요.’
대체 누구한테 하는 건지도 모를 그런 맹세가 그녀에게서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지금 대체 무슨 말이 나오는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염없이 흐느끼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그런 문장만 얼기설기 떠오를 뿐.
‘다시 한 번만, 나타나 주세요.’
그때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아무나, 도와줘.
-그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건 그때였다.
-먼저 부른 건, 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불길한 목소리였다.
이에 유리아가 잠시 우는 것도 중단하고 멈칫했다.
‘...방금, 뭐였지?’
분명히.
방금 그걸로, 자신에게 뭔가가 바뀌었다. 그런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너 뭐하냐?”
그런 물음이 옆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유리아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틀었다.
“왜 울고 있어?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그리고 거기엔.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는 가면을 쓴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
그녀는 이전까지보다 훨씬 더 커다란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랑은 조금 다른 의미기는 했지만.
●
사실 유리아를 중간 고사에 데려가는 건 대단히 많은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일단 본인부터가 세 발자국 안에 어떤 사람도 들여서는 안 되는 데다가, 성황국의 국보를 ‘훔쳐서 달아난’ 입장이라서 성녀와 성황국 관련 인물이 등장하는 게 반쯤 확실시되는 중간고사 이벤트에 데려가면 어떤 방식으로든 마찰이 생기니까.
그래서 이건 내 말이라면 일단 뭐든 들어주는 아탈란테한테도 말을 안 한 내용이다. 반대할 게 뻔하거든. 그만큼 위험하단 소리다.
“...”
그럼에도, 이 녀석을 꼭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2챕터 공략은 이 녀석에게 걸린 단절의 저주를 해주하는 데 대부분의 비중이 몰려있거든.
그걸 어느 정도로 빠르게 하냐가 사실상 챕터의 클리어 여부를 단정짓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한 시간은 고작해야 오늘을 기점으로 세도 5일 정도.
‘그리고...’
2챕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어떻게든 성녀와 단 한 번이라도 접촉시킬 수 있다면.
그 난이도 전체를 대폭 낮출 수 있다.
‘그레이하운처 자매.’
법황이 주도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액막이’ 자매. 다른 모든 능력을 거세하는 대신 오로지 신성력만을 막대하게 이끌어낼 수 있도록 강제적으로 조작된 인간들.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성황국의 국보도, 원래대로는 성녀에게 돌아갔어야 할 물건이다.
저걸 훔쳐서 달아난 것도 그것과 관련된 이유고.
‘...아무튼, 성녀랑 유리아를 반드시 한 번은 접촉시켜야 하는 건 확실해.’
그리고 그럴 타이밍은 거의 중간고사밖에 없다.
성녀는 그 명성답게 항상 성황국 관련된 인물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테고,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하게 그런 것들이 허술해지는 건 이 시기뿐이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그렇지.
아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변수만 없다면 그럴 것이다.
“...”
낮은 확률이긴 하다만.
만약 그 변수가 튀어나온다면, 2챕터 난이도는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는다고 봐도 좋다.
유리아를 대하는 방법이 아예 달라져야 하니까.
그래도 그것만 없으면 꽤 솔리드한 계획이지.
[ ‘스킬: 치명적인 매력’이 발동합니다! ]
[ 대상 ‘유리아 그레이하운처’의 호감도가 급등합니다! ]
[ 호감도 단계가 ‘관심 1단계’에서 ‘관심 2단계’로 격상합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추가됩니다! ]
“...”
어째 이 녀석을 보러오자마자 내 예상이 빗나간 느낌이간 하다만.
눈앞으로 떠오르는 그런 창을 눈으로 훑으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린다.
아니, 요전에 뭔가 내가 말실수를 한 거라도 분명한 엘노어랑은 다르게. 얘는 진짜 뭐가 어떻게 굴러가서 이런 게 뜨는 건지 전혀 모르겠거든.
“...어. 그래. 코 풀어. 흥.”
나무 막대기에 헝겊을 이것저것 걸어서 상대방쪽으로 밀어준다. 내가 가서 저걸 닦아주려고 했다간 그 자리에서 칼부림 나니까.
“그래서. 진짜로 무슨 일 있던 건 아니고. 그냥 나 보니까 반가워서 운 거라고?”
“...”
유리아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붕붕거리는 소리가 날만큼 격렬한 움직임이다.
“...어제는 다른 일로 바빠서 못 온 거야.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
녀석이 천조각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다시 훌쩍거렸다.
눈동자에 담겨 있는 건 ‘진짜로?’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기색이다.
“진짜로.”
“...”
그제서야 유리아가 훌쩍거리는 걸 멈췄다. 건네준 천조각에 팽, 하고 코를 풀며 심호흡을 하는 걸 보니 이제야 정말로 진정한 모습이다.
무슨 하루 안 찾아왔다고 애가 이 지경까지 가냐.
워낙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외로움이 미칠 지경이라는 건 알겠다만.
“...”
그리고 이런 애 앞에서 곧바로 물어보는 것도 미안하긴 한데.
시간이 좀 촉박하다.
당장 내일이면 시험 시작이라서.
“...저기, 부탁할 게 있는-”
[할게요!]
눈앞으로 대문짝만하게 떠오르는 신성력 글자를 보니 그대로 말문이 막힌다.
본인딴에는 거의 고함을 치는 급으로 강렬하게 주장하는 거겠지.
[뭐든, 뭐든 할게요! 맡겨만 주세요!]
거의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기색에, 나까지 당황한다.
아니.
얘, 이런 캐릭터였던가?
원래도 조금 소심하고,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며, 교류가 끊기는 걸 무서워하는 성격이긴 했는데.
지금, 이건 뭐랄까.
나한테 버려질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바깥에 나가는 일인데. 괜찮겠냐?”
[괜찮아요!]
하물며 본인에게 있어선 명백하게 공포마저 느껴질 ‘외부 행사’인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승낙한다.
분명히, 뭔가 이상하다.
이어진 말도 그래서 일단 조금 진정시키려고 꺼낸 말이었지만.
“아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해도 괜찮-”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등골을 타고 냉기가 쭉 미끄러진다.
내 문장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리아의 눈빛에서 빛이 사라져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제가, 이제 싫어지셨나요?]
지금 난 이 녀석과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4발자국 이상.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요? 저, 정말, 뭐, 뭐든 해드릴테니까요-]
그런데.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이런 게 느닷없이 나올만한 상황이라면, 한 가지 밖에 안 떠오르니까.
이 녀석의 ‘검’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색’ 기운을 보고 있으니 더욱 확실해진다.
일반적으로, 저주와 관련된 모든 물건들에 통용되는 색깔은 ‘검은색’이다.
단절의 저주를 만들어 내는 이 녀석의 검도 마찬가지다. 본격적으로 이 녀석이 다루기 시작하면 검은색 기운을 뿜어내는 게 정상이지.
그런데, 저게 하얀색을 뿜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라면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악마.’
이전에도 말했지만, 악마의 조각이 어디에 어떻게 스며드는 진 순전히 랜덤 변수에 가까운 일이다.
인간에게 스며들 수도 있고, 물건에도 스며들 수도 있고.
그런데, 성황국의 국보에, ‘악마의 조각’이 스며들어가 있는 경우의 수가 있거든.
하얀 악마의 조각.
모든 악마 중에서 가장 ‘집착’이 강하다고 알려진 악마.
그리고 뭔지 모를 빌어먹을 ‘조건’이 터지는 바람에, 유리아가 그 ‘그릇’으로 각성하는 상황.
‘...좆됐네.’
이렇게 되어버리면, 클리어 방법이 극단적으로 좁아져버린다.
게임 진행할 때 이렇게 루트가 꼬여버리면 아예 리셋하라고 조언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었을 정도로.
왜냐고?
‘그릇으로 각성한 자는 그 악마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엘노어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한 번 그릇으로 각성한 자는 어떻게든 그쪽에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그쪽은 당장 신체 능력이 강해지는 정도밖에 티가 안 나지만 곧장 이런저런 영향들이 올거고.
문제는, 하얀 악마의 그릇이 받게 되는 ‘영향’은 대단히 빠르고 강력하게 대상에게 퍼진단 점이다.
[왜, 대답해주시지 않는 거죠?]
[ 대상 ‘유리아 그레이하운처’의 호감도가 변화합니다! ]
[ 호감도 단계가 ‘관심 2단계’에서 ‘관심 3단계’로 격상합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추가됩니다! ]
치명적인 매력 스킬은 안 터졌다. 난 이 녀석에게 아무 것도 안 했다.
그런데도, 느닷없이 이 녀석의 호감도가 급등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얀 악마’가 내린 집착의 저주는 그런 종류다. 상대방에게 끝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게 만든다.
감정도, 이성도, 모두.
자신이 온전하게 상대방을 소유할 때까지.
모든 ‘뒤틀린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될 때까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녀석을 바라본다.
이 녀석은 본디 남의 간격 안으로 들어오는 걸 극단적으로 꺼려야 정상이다. 자신이 남을 해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만, 지금은.
눈동자가 풀려있다.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닌 건 분명한 모습이다.
내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세 발자국을 넘어 그 안쪽으로 들어왔겠지.
물론 지금도 단절의 저주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세 발자국 이상으로 가까워지면 저 녀석이 나한테 검을 날린다.
즉.
[...왜, 저를 떠나려고 하시는 건가요?]
[ 대상 ‘유리아 그레이하운처’의 호감도가 변화합니다! ]
[ 호감도 단계가 ‘관심 3단계’에서 ‘관심 4단계’로 격상합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추가됩니다! ]
이 세 발자국 안에 들어오는 건 뭐든 썰어버리는 여자는.
이제부터 모든 걸 걸어서라도 나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예정이란 소리다.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아.’
아까부터 말했지만, 2챕터 클리어의 대전제는 이 녀석에게 걸려있는 단절의 저주를 5일 안에 해주하냐 마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나는.
지금부터 5일 안에.
이런 시한폭탄에게 달려 있는 저주를 해주해야 한다.
진짜.
‘...지랄났네.’
정말로,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