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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45)화 (46/258)

Chapter 45 - 45. 결투

 

 

신성력은 여타 이능과 다르게 모든 이들이 몸에 품고 있는 능력이다.

 

이를 바꿔말하면, 몸의 ‘구성 요소’ 중 하나라고 봐도 된다는 뜻이지.

 

그래서 단순히 고갈되면 당분간 못 쓰게 되는 여타 이능들과 다르게, 신성력은 전부 다 끌어내서 쓰게 되면 그 반동이 좀 심하게 온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진, 글쎄.

 

눈앞의 성녀님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보여주고 있겠지.

 

 

“우...욱...”

 

 

장기손상, 근육파열, 체내의 세포가 괴사하고 다시 순식간에 재생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일반인이라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으로 신성력을 빨리고 있다는 의미다. 성황국의 성녀 정도 되니까 그나마 버티고 있겠지.

 

루시엔이 입에서 핏덩이를 한움큼 쏟아내었다. 바닥에 그려진 신성 결계 안쪽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

 

 

그리고 그 결계의 ‘의미’를 확인하자마자, 입에서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혼자서 이 대평원 전체에 신성력을 공급하고 있는 거야?’

 

 

이 넓은 곳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결계, 그리고 학생들 전원에게 지급된 목걸이에 걸린 가호에 대한 신성력 공급을 전부.

 

이 사람 혼자서 감당하고 있는거다.

 

평범한 사제라면 못 해도 수백 명을 필요한 미친 수준의 부담을.

 

 

“...잠깐, 금방 구해드릴게요!”

 

 

그리고 상식적인 인간이 봐도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광경이다.

 

나름 사람 구하는 걸 자기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녀석이라면 안 나서는 게 이상하겠지.

 

엘리야가 검을 뽑아들고 호흡을 집중했다.

 

바닥 전체를 깨부수면 결계도 파괴된다. 그걸 노리는 거겠지만.

 

 

“이런. 그러면 안 되죠, 학생.”

 

 

그런 목소리와 함께, 엘리야의 검에 묵직한 일격이 날아들었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천장에 날아가 박혔다.

 

 

“...!”

 

 

심지어는 검이 튕겨나가며 손바닥까지 찢어진 걸 확인한 엘리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런 광경을 연출해내려면, 분명히 양자간의 ‘실력 차이’가 꽤 나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적의 존재를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지만, 당한 본인이 정규 기사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용사 후보다.

 

즉.

 

지금 이 성황국 ‘전투 사제’의 장비를 전신에 착용 중인 인간은, 나라 단위로 뒤져도 쉬이 따라갈 인재를 찾기 힘든 실력자 수준이란 뜻이다.

 

고위 전투 사제. 가히 인간 흉기라고 불러도 될만한 전투력의 소유자.

 

 

“...”

 

 

그 가슴팍에 달려있는 명찰을 재빠르게 눈으로 훑는다.

 

클라인 게리슨.

 

 

‘...원래 여기서 만나는 놈이긴 하지.’

 

 

2챕터에 잠깐 단역으로 등장하는 악역. 그리고 그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강한 놈이다. 애초에 이 구간에서는 전투해서 잡는단 선택지가 없을 정도로.

 

엘리야가 한 방에 무력화된 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학생 수준에서 대적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니까.

 

이어서 녀석의 시선이 유리아를 한 번 훑었다가 다시 엘리야쪽으로 박히는 것도 확인한다.

 

이건 예상대로다.

 

아직 성황국에서는 유리아의 ‘정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성황국의 국보를 훔쳐서 달아난 액막이.

 

그것 자체가 2챕터의 하이라이트로 이어지는 단초니까, 이것만큼은 원작과 똑같다고 봐도 좋겠지.

 

 

“이건 성녀님이 자진해서 진행 중인 ‘봉사’입니다. 그 갸륵한 뜻을 봐서라도 끼어들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않겠습니까.”

 

“...저런 꼴이 될 일을 자진해서 했다구요? 말이 안 되잖아요!”

 

 

한 방에 무력화 당했음에도 전혀 겁먹지 않은 엘리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클라인에게 그렇게 반박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지만, 내가 아는 성황국이라면 그런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낼 미친 놈들 천지다.

 

당장 이어지는 상황만 봐도 그렇지.

 

 

“흐음. 흥미로운 견해군요. 그럼 성녀님에게 직접 들어볼까요?”

 

 

그렇게 말한 클라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엔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해보시죠, 성녀님. 누군가 강제하기라도 했습니까?”

 

“...”

 

 

루시엔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도 산채로 온몸이 해체당하는 수준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한테 뻔뻔스럽게 저렇게 대답을 요구하는 작태부터가 흉물스럽다.

 

 

“...아, 니요.”

 

 

하지만.

 

흘러나오는 대답은, 명백하게 그런 단어였다.

 

루시엔이 끔찍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도 입가 근처로 핏물이 떨어져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문장을 이어간다.

 

 

“이건, 제가, 바, 라서. 하는, 일입니다.”

 

“...”

 

 

엘리야가 기가 막히다는 기색으로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클라인이 여전히 미소를 얼굴에 건 상태로 말을 이어갔다.

 

 

“그것 보시지요. 본인부터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뒤이어 날아오는 말만큼은 묵직한 위압감을 담고 있었다.

 

 

“아니면, 성녀님이 하시겠다는 일에 반하시겠다는 말입니까? 그건 성황국 전체의 뜻에 반하는 일입니다. 용사 후보쯤 되는 사람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이, 쓰레기들이...!”

 

 

엘리야의 입에서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겠지.

 

확실히, 성녀는 대외적으로는 교단 전체의 의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뭔가를 ‘직접 하겠다’고 말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그것을 제지하면 그것 자체가 국제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하거든.

 

심지어는 지금처럼 누가 봐도 억지인 상황에서도 그런 논리는 통용된다.

 

 

‘...상종도 못할 쓰레기 새끼들.’

 

 

힘이 곧 깡패다. 3대 패권국 중 하나인 성황국이라면 진짜로 그런 외교적인 패악질을 부릴 세력과 똘끼를 동시에 갖춘 나라니까. 이걸 빌미로 무슨 미친 짓거리를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 다짜고짜 전쟁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이라서.

 

원래대로라면 이런 짓에 이를 악물고 반대할 아탈란테도 결국 이걸 통과시킨 걸 보면 알 수 있다. 황실이든 어디서든 그냥 하라고 압박을 넣었을 확률이 높다. 괜히 덜미를 잡히지 말고 어련히 알아서 넘기라고.

 

성녀가 성황국에서 가장 가치 높은 ‘소모품’이란 사실은, 패권국의 위정자들이라면 모두 공공연히 알고 있는 비밀이라서.

 

 

“...”

 

 

그런 것들 때문에, 원작에서도 분명히 성녀는 이 장소에서 성황국의 강요로 뭔가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좀 이상하다.

 

이 정도의 끔찍한 짓거리는, 내가 원작에서도 본 적이 없는 수준의 미친 짓이다.

 

 

“뭐, 그쪽이 조금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다면. 제가 성녀님께 한 번 ‘부탁’정도는 드려볼 수도 있겠지만요.”

 

“...뭐라구요?”

 

 

엘리야가 싸늘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클라인이 씩 웃으며 답했다.

 

 

“얼마 전의 ‘악마 관련 사태’ 말입니다. 법황께선 아주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선은, 똑바로 내쪽에 날아와서 박히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거라고 믿습니다만.”

 

“...”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퍼즐이 곧바로 맞춰지는 느낌이다.

 

악마는 법황이 세우고 있는 ‘대업’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게임 안에서도 녀석이 악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묘사가 지속적으로 등장하지.

 

얼마 전에 정화자 보스전 때 엘노어가 일으킨 회색 악마 강림 사건에 대단히 주목하고 있을거란 뜻이다.

 

그리고 분명히.

거기에 얽혀있던 '내 정보'도 좋건 싫건 어느 정도로 흘러 들어갔을 거고.

 

 

‘날 도발하는 거네.’

 

 

목 뒷덜미가 싸늘해진다. 속으로 욕지기를 중얼거린다.

 

일부러 협박하는거다. 네가 협력하지 않으면 성녀를 더욱 가혹하게 괴롭히겠다. 좋은 말 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 들어라.

 

그리고 이 녀석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 덕분에, 내가 원래 기억하는 내용의 메인 퀘스트와 진행이 한참 변질됐고.

 

 

‘폭주하는 그릇과 전투라...’

 

 

메인 퀘스트에서는 폭주하는 유리아를 막으라고 적혀있지만.

 

그거, 그냥 자살하라는거다.

 

리버백 후작같은 경우는 어떻게 근거라도 있었지, 악마의 조각까지 현현할 가능성이 있는 그릇을 여기서 제압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즉.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나도 훨씬 과격하게 나가는거지.

 

‘그릇’과의 전투도 피하고.

 

이 쓰레기들한테 한 방 먹이는 방향으로.

 

 

“...”

 

 

피식 웃으며 성녀 쪽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진 안에서 여전히 피를 토하며 신성력을 뽑아내고 있다.

 

 

“아, 그 이상 접근하면 제압할겁니다. 성녀님의 일을 방해하게 둬서는-”

 

 

클라인에게서 여유로운 목소리로 문장이 흘러나왔지만.

 

 

“해 봐.”

 

 

무표정하게 그리 대답한다.

 

그와 동시에.

 

 

“...”

 

 

넋을 놓고 있던 유리아의 눈이 크게 떠진다.

 

 

“...예?”

 

“해보라고. 그쪽이 무슨 지랄을 하건 알 바 아니니까.”

 

“...”

 

“난 이 사람 구할 거야. 막아보든지.”

 

 

클라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 될 겁니다. 감당할 자신 있으십니까?”

 

 

녀석이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성녀에게 다가간다.

 

기다리고 있던 건 세 발자국 정도 남았을 때 즈음이었다.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A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그런 창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스킬을 킨다.

 

 

[ ‘스킬: 검사의 집중’을 발동합니다! ]

[ 반응 속도와 정밀함이 상승합니다! ]

 

 

세상이 다시 느려진다. 절체절명과 중첩으로 다가오니, 나와 까마득할 정도로 스펙 차이가 나는 클라인의 공격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그러니, 나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며 그쪽에 맞댄다.

 

 

-!

 

 

클라인의 얼굴에는 다시 비릿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고위 전투 사제와 직접 손을 섞는 건 같은 위계에 있는 제국의 기사들조차 꺼리는 일이다.

 

검술의 기교나 신체의 강건함은 몰라도, 전투 사제들은 온갖 종류의 버프기를 무기에 덕지덕지 바르고 나올 수 있으니까.

 

단순히 합을 교환하는 걸로는 도저히 대처가 불가능하거든.

 

그걸 학생 수준에서 받아내는걸 보고 어리석다고 비웃는 느낌이리라.

 

하지만.

 

난 타이밍만 맞으면, 뭐든 데미지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스킬이 있다.

 

정확한 타이밍에 그 공격을 ‘튕겨내는’ 것과 동시에.

 

 

[ 완벽한 튕겨내기! ]

[ ‘특성: 이질풍’이 발동합니다! ]

[ 상대방의 공격 데미지 일부를 반사합니다! ]

 

 

그 검격에 발려있던 모든 ‘공격용 가호’가, 그대로 클라인쪽에 역으로 쏟아졌다.

 

 

-!

 

 

녀석의 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튕겨나간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벽 한곳에 처박힐 정도로.

 

 

“...”

 

 

물론 큰 데미지는 없다. 절체절명이 A로 뜬것만 봐도 그렇지만, 애초에 진심으로 날린 공격은 아니다. 그런 공격을 조금 돌려받는다고 쓰러질만큼, 고위 전투 사제가 만만한 인간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이 안 된다는 멍청한 표정이다.

 

고위 전투 사제가. 나라에서도 손 꼽히는 전투원인 자신이.

 

고작 아카데미의 학생에게, 일격을 허용했다.

 

그 사실 자체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기색이겠지.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소리 하는데, 너.”

 

 

기침을 계속해서 쿨럭거리는 루시엔을 부축해서 일어난다. 바닥의 결계 바깥으로 걸어나오자, 마침내 루시엔이 기침을 멈춘다. 피도 더 이상 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하얀색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한 유리아가 눈물 맺힌 눈으로 루시엔에게 다가간다.

 

그래. 일단 이쪽은 세이프.

 

그대로 루시엔을 내려놓고, 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든 상태로,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벽에 박힌 클라인에게 접근한다.

 

 

“국제적인 문제가 일어난다고. 그래서 그게 뭐.”

 

“...?”

 

 

멍하니 있는 클라인에게 씩 웃어준다.

 

이해는 할 만한 반응이다.

 

이건 고작 학생이 이렇게 가볍게 말해도 될만한 문제는 아니다. 대륙 전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는 사안이라서.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양피지를 휙 던져 클라인의 얼굴에 맞춘다.

 

 

“이게 무슨...!”

 

 

표정이 확 썩어들어가는 녀석에게 더 활짝 웃으며 답해준다.

 

 

“장갑이 없어서. 대충 이걸로 대체하는거야.”

 

“...”

 

 

썩어들어가던 녀석의 표정이 다시 멍해졌다.

 

장갑을 얼굴에 던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을테니까.

 

그래, 그거다.

 

결투 신청.

 

속으로는 기드온한테 살짝 사과한다.

 

나중에 고생 좀 해주시죠, 대공님.

 

조금 크게 벌일 거니까.

 

 

“면책 특서야.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일은 전부 제국 황실과 트리스탄 공작가가 책임진다.”

 

 

국제적인 권력으로 자꾸 배짱을 부린다면, 이쪽도 거기에 버금가는 권력을 소환해오면 그만이다.

그래, 성황국?

이쪽은 트리스탄 대공에 황실이다. 어쩔건데?

 

그리고 그런 권한도 써버린 김에 할 일.

 

나는 지금부터.

 

쓰레기들을 치울 거다.

 

 

“너, 좀 맞자.”

 

 

일단 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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