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 - 48. 판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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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라고 하셨습니까.”
법황에게서 그런 문장이 흘러나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니 그러시겠지요. 들려주시겠습니까.”
이어서, 그런 말까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기색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
그럼, 뭐.
나도 내 할 말만 전달하면 되는 상황이다.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바닥에 쓰러진 클라인을 가리킨다.
“일단 이런 놈 보내서 성녀님 괴롭히는 것 좀 그만 하시지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그쪽이 자꾸 음흉한 생각하니까 하급자들도 다 목줄 풀린 개새끼처럼 여기저기 행패 부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주변 인물들의 입이 다시 쩍 벌어졌다.
대륙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 중 한 명한테 할 말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쪽에서 애타게 찾고 있는 물건 하나 있죠?”
유리아의 검을 말하는 거다. 성황국의 국보.
“그거 제가 가질 겁니다. 괜히 찾지 마세요. 아니면 큰일 납니다?”
단절의 저주를 만들어내는 그 물건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게 당면한 목표다. 앞으로 4일 남았지. 그래야 2챕터 클리어의 실질적 수단이 생기니까.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당장 이 녀석이 그걸 회수하겠다고 달려드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충고 고맙군요.”
다시 평탄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성하.”
씩 웃으며 말을 잇는다.
“이거 충고 아닌데요.”
“...”
사실 법황이 있는 자리에 참석할 정도의 인사들이면 다들 어느 정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인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인간들에게서 일괄되게 흘러나오는 반응은 전부 똑같다.
경악을 동반한 침묵.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실소를 흘리며 극대노한 목소리를 내뱉는 인간을 바라본다.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사제다. 법황의 보좌관이겠지.
“애초에 시비를 건 쪽이 당신이라 들었습니다! 결투야 모두 합의한 정당한 절차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런 폭거라니요! 성황국은 이를 절대로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요.”
한가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답변하자, 노사제가 입을 쩍 벌렸다.
“...뭐라고요?”
“묵과 안 하면 어쩔건데요. 나 죽이기라도 할 거야?”
“...”
노사제가 입을 쩍 벌린 상태로 몸을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그럭저럭 온화해 보이겠지만, 지금처럼 얼굴 전체가 새빨개져서 수염까지 파들거리고 있으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런... 이런 무뢰배를 결투에 내세우다니! 트리스탄 공작가나 제국 황실 모두 제정신입니까!”
“제정신이 아니라면 오히려 그쪽이 더 심하지 않나.”
내가 한 말이 아니다.
근처에서 묵묵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인간 한 명이 그런 말을 떨어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 전체가 오래된 암석이 연상되는 근육과 흉터로 뒤덮인 인간이다. 고대 야만 전사의 스테레오 타입이나 다름 없는 복장과 외모를 가졌다고 봐도 되겠지.
“그 성녀인지 뭔지하는 잘못도 없는 어린애 괴롭히는 거야 우리도 그냥 내버려 뒀어. 어차피 남의 집 사정이니까.”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서 떨어졌다.
“하지만 부족 연합에서도 저 꼬맹이가 뭐 하는 녀석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한지도. 아직 전사 딱지도 달지 못한 녀석을 상대로 훈련받은 군인을 내민 속셈부터가 음흉하다고, 네놈들.”
그렇게 말한 전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밑천까지 다 보여주면서 패배했으면 그냥 닥치고 있어. 저 녀석이 지금부터 한 짓은 내가 봤을 때 승자의 정당한 권리 행사니까.”
속으로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예상대로긴 한데.’
이런 식으로 내가 법황 쪽에 대놓고 시비를 걸면 누군가가 백업해줄 것이란 건 이미 예상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런 짓을 저질렀지.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이 말하는 ‘중요도’란 건, 내가 방금 악마의 힘을 페널티 없이 다루는 모습을 보고 막 생성된 것이다.
이유가 있으니까 편 들어주는 거라 그거거든.
“...”
바꿔말하면.
나는 이제부터 제국 황실, 그리고 부족 연합의 족장들까지 눈독을 들이는 ‘먹잇감’이 된거다.
앞으로 어떻게든 귀찮은 일이 꼬일 수밖에 없지.
그런 씁쓸한 생각을 곱씹고 있자니, 노사제가 그쪽을 향해 말을 던졌다.
“말을 삼가십시오! 법황 성하 안전입니다!”
“어쩌라고, 늙은이. 저 꼬맹이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나 죽이기라도 할 건가, 그래서?”
노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단순히 화 나서가 아니라, 하탄의 눈에 담긴 살기를 읽었기 때문이겠지.
그런 기운을 받는 대상도 아닌 근처의 인간들의 얼굴조차 새파래질 정도다.
“대족장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못 해. 다른 나라 인간들은 더 내 알 바가 아니지. 알아듣냐?”
“...”
어떻게 보면 나 이상가는 외교적 재앙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노사제는 침묵했다. 법황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하.’
왜 그런지는 나도 알 것 같다.
목 근처에 보이는 문양들의 개수를 센다. 부족 연합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혼자서 사냥한 괴물들의 개수만큼 이빨 문신을 몸에 새기니까.
‘10개.’
그리고 부족 연합의 사냥꾼들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종류는 드레이크나 바실리스크 같은 수준이다.
용족이나 4대 아신亞神같은 특급 괴물들에는 못 미치지만, 하나라도 풀렸다간 재앙 같은 사태가 펼쳐질 마수들.
즉.
이 인간은, 제국 기사단 안에서도 단장 정도 되는 인간이 아니면 상대할 엄두조차 못 낼 마수를 혼자 10개나 사냥했다는 소리다.
그 방면에서는 기드온이나 아탈란테같은 쟁쟁한 괴물들도 못 따라갈 업적이지.
“...”
누군지는 나도 알겠다.
하탄 우-줄.
부족 연합의 씨족 중 하나인 ‘푸른 용’의 족장이자, 세계관 최고의 마수 사냥꾼. 3챕터에서 얼굴을 자주 비치는 악역이기도 하고.
더불어 엘판테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교육 기관인 '투쟁의 용광로'에서 현재 교수 직을 겸임하고 있기도 하다.
이 정도 되는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 저런 깡패짓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수준이지.
정확히는 미친놈 건드리기 싫어서 피한다는 입장이겠지만.
“그리고, 너.”
이어서 그런 미친놈의 시선이 내쪽으로 쓱 돌아왔다.
“꽤 마음에 드는구만. 그 요사스러운 힘을 다루는 걸 제외하더라도, 좋은 전사가 될 자질이 보인다.”
[ 스킬: 치명적인 매력이 발동됩니다. ]
[ 악당이 당신의 패기를 마음에 들어합니다! ]
[ 기프트 탭에 보상이 추가됩니다! ]
“...”
흠.
미친놈답게 미친 짓을 저지르면 곧바로 마음에 들어 하나 보다.
“...감사합니다.”
사납게 웃고 있는 하탄에게 그렇게 말하자, 이어서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 한 번 투쟁의 용광로에도 놀러와라. 좋은 대접 해주지.”
그런 말과 함께 장신구 하나가 내쪽으로 날아왔다.
드림캐쳐 비슷하게 생긴 수수한 액세서리다. 다만 그걸 받은 내 눈은 곧바로 크게 떠졌지만.
[ 사자의 목걸이 ] [ 액세서리 ]
[ 등급: 레어 ]
[ 부족 연합에서 촉망되는 전사들에게 수여되는 목걸이입니다. 착용 시 신체의 활력이 상승합니다. 또한 운동을 통한 신체 단련의 효율이 올라갑니다. ]
‘이걸 벌써 준다고?’
말이 그냥 레어 등급이지, 이걸 ‘제국’의 인간인 내가 받았다는 건 꽤 많은 사실을 시사한다.
부족 연합은 모든 패권국들 중 가장 내부의 관습에 대해 보수적이다. 타국의 인간에게 이걸 주는 건 원래대론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얻으려고 하면 쎄빠지게 구르면서 하탄의 마음에 들어야 받는 물건인데, 난 이 자리에서 치명적인 매력이 터지는 바람에 곧장 수여받은 모양이다.
‘...미친 이득인데?’
이건 당장 큰 효과는 볼 수 없지만, 3챕터의 배경인 ‘아카데미 교환 행사’ 중 분기 하나를 통째로 뒤틀 수 있는 물건이다.
원래대로는 3챕터에서 무조건 죽는 인물을 살릴 수 있는 필수 조건이거든.
그러니까.
그 챕터의 핵심 인물인 리루 가르다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대상을, 내가 대신 구해줄 수 있는 실마리다.
“알아서들 해결 보라고. 좋은 구경은 이미 다 했으니, 나는 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하탄이 그 말만 남기고 하품하며 퇴장해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저 놈 대체 뭐냐는 시선으로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
그래. 원래도 저런 느낌이긴 하다.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인. 늘 마이페이스인 제멋대로 인간.
하지만, 저 녀석이 한 바탕 휘저어준 덕분에 내가 지금 한 말에 태클을 거는 녀석은 없다. 온전히 법황의 대답을 기다릴 뿐.
한숨을 내쉬며, 천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상대방의 실루엣을 본다.
지금까지 이어진 상황에도,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저, 말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할뿐.
지금의 상황에도, 이 녀석은.
조금도 감정의 동요 없이, 고요하게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그런 말이 법황에게서 순탄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딱히 뭔가를 건 결투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를 해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죠. 원하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에 이런 폭거를 저지른 사람의 제안을 역으로 들어주겠단 말이었으니까.
심지어 공개석상에서의 발언이다. 본인도 책임을 지겠단 소리지.
이 녀석은 이제부터 루시엔과 유리아를 건드리지 않고, 유리아가 가지고 있는 성황국의 국보 역시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거다.
물론 뒷공작으로 이런저런 일을 저지를 순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한 것과 안 한 것은 당연히 천지차이거든.
“성하!”
그 말에 보좌관이 식겁을 하며 그쪽을 돌아보았지만, 법황이 여전히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게 맞습니다, 보좌관.”
“허나...!”
“이게 맞다고 했습니다.”
노사제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평탄하던 그 목소리에 미미한 분노가 섞여있는 걸 감지해낸 모양이지.
“...”
실소를 흘린다.
이 녀석, 그냥 선선하게 이걸 내놓는 게 아니다.
지금 당장 나를 찢어 죽이고 싶은 분노를 억누르며 그런 제안을 수락한거지.
“...당신, 진짜 음흉한 사람입니다. 인정해드리죠.”
그리고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나로서는 좀 아쉽기도 하고.
차라리 이 제안을 거절한다고 뻐팅기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더 뜯어낼 수 있었거든.
-!
다음 순간, 천공에서 빛이 내려왔다.
순식간에 내려꽂힌 빛이, 여태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던 클라인의 몸을 감쌌다.
전송의 가호.
교단 본부로 이 녀석을 귀환시키는 목적이겠지.
“...교단 본부로, 전송을? 이 거리에서?”
“법황이라는 그 이름은 들어봤지만...!”
근처에서 어이가 없다는 투로 그런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럴만하지.
성황국의 교단 본부에서, 엘판테까지는 못해도 몇 천 킬로미터는 잡아야 할 거리다.
그런데, 거기까지 한 번에 사람을 전송시키는 건. 글쎄다.
진짜 용족이나 데리고 와야 볼 수 있는 신기 중의 신기일 것이다.
공간 이동 계열이 신성력으로 펼치기엔 대단히 어려운 능력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더욱 미친 짓이고.
‘...괴물 새끼.’
유저들에게서 농담 삼아 ‘인간 모양 악마’라고까지 불리던 인간이다.
그 뒤틀린 성품도 성품인데, 실제로 일신의 능력도 감히 악마에 비견될 정도니까.
역대 최강의 사제라는 이름은 그냥 달고 있는 게 아니라서.
“...나중에 또 봅시다. 다우드 캠벨.”
녀석이 내 이름을 똑바로 읊조렸다.
분명히 기억했다는 것처럼.
“우린, 분명 다시 만날 일이 생길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법황의 환영체가, 엘판테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
성황국 내부의 교단 본부, 그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
법황 크레도 바오르 2세는 미소를 띄운 상태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의자 옆에 붙여둔 셉터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선선히 입을 열었다.
“세라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옆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여성이 잔을 내밀었다.
교단 본부답게 성호가 가득 새겨진 잔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안에 담긴 것은 척 봐도 불경한 기운을 내뿜는 시꺼먼 액체였다.
“...”
조용히 그걸 들이킨 법황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궤를 벗어난 수준의 신성력은 양날의 검이다. 조금만 제대로 펼치려고 하면 인간의 몸이 버티질 못하니까.
신체에 잔류하고 있는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것들을 달고 살아야 한다.
이것을 만드는 데에도, 분명히 누군가가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목숨을 내놓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목적을 이룰 때 까지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매달려 온 ‘대업’을 완성시키기 전까지는.
이어서 흘러나온 명령도 그런 맥락이었다.
“전송된 전투 사제는 키메라 프로젝트에 처분하도록 하세요. 유용한 배터리가 될 겁니다.”
실패자는 필요 없다.
고위 전투 사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체한다고 해서 큰 일이 날 레벨도 아니고.
“예. 적당히 치료 중 사망했다고 발표하겠습니다.”
세라스라고 불린 여성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음을 표했다.
평소와 달리 곧바로 움직이지 않아서 법황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지만.
“세라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혹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시지요.”
별 일이다.
인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항상 그의 말에 복종하던 사람이 질문이라니.
“성하께서는, 어찌하여 그 놈의 말을 들어주셨습니까.”
“...아. 그레이하운처 자매의 안건을 말하는 건가요?”
법황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렇게 대놓고 패악질을 부리는 녀석의 요청을 선선히 들어주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협박 당하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죠.”
“...예?”
세라스가 멍하니 반문했다.
협박이라니?
오히려 그런 짓을 저지른 시점에서 본인들이 그 다우드란 녀석을 억누를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진 게 아닌가?
법황의 권위를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 놈의 ‘위치’는 당신도 알 겁니다, 세라스.”
하지만 법황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제국, 부족 연합, 그리고 우리도. 그 녀석이 ‘악마’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녀석이 결투 중에 그 능력의 일부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까지 봤죠.”
그것만으로도, 다우드 캠벨의 위치는 대체 불가능한 수준까지 올라간다.
역사상 그런 짓이 가능했던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실제로 부족 연합의 족장이 그 녀석의 편을 들어준 건 성향이 맞는 것도 있겠지만, 그런 사실이 꽤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겠지.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자신이 그런 존재란 것을 선언하자마자 녀석이 한 짓은, 곧바로 자신에게 들이받은 것이다.
“그렇게 대놓고 저한테 시비를 건 순간, 저와 그 녀석 간에 모종의 불편한 관계가 있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준’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그 녀석이 이긴 거고요.”
“...예?”
“녀석과 내가 불편한 관계라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 이후로,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 손해를 뒤집어쓰는 건 고스란히 저와 성황국입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세라스가, 문득 표정을 굳히며 법황을 마주보았다.
법황이 다시 쓴웃음을 걸었다.
그래. 드디어 이해한 모양이지.
“다우드 캠벨의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부족 연합과 제국은 가장 먼저 성황국이 벌인 짓이라 의심할 겁니다. 그걸 빌미로 온갖 종류의 공작 행위나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해오겠죠.”
“하지만 저희는 절대 그런 일을...!”
“사실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법황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국제 사회는 곧 힘의 논리입니다. 세력의 균형추만 맞춰진 상태라면, 진실이야 어떻든 상대방에게 잘못을 지울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다우드 캠벨의 신원에 관한 것은 대단히 강력한 명분입니다. 모두 자신을 귀하게 여기도록, 이번 결투에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줬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일부 첩보 인력과 공작 인원을 다우드 캠벨 근처에 배치하도록 하세요. 그쪽을 도와줘야 합니다.”
오히려, 성황국은.
대놓고 자신들에게 시비를 건 다우드 캠벨을 ‘지켜줘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쪽에 뭔가 일이 생기는 순간 제국과 부족 연합이 그걸 빌미로 성황국을 대단히 강력하게 압박하기 시작할 테니까.
협박을 한다는 것도 그런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우드 캠벨에게 강하게 나가봤자, 그 녀석은 오히려 이 상황 전체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뿐이겠지.
“...그렇다면, 성하.”
세라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싶습니다만. 엘판테에서 성하가 직접 참관하길 바란다고 언질을 보내온 것도...”
“녀석이 요청한 일이겠죠.”
법황이 차갑게 웃었다.
“처음부터 계획한 겁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
세라스가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팔로는 살짝 소름이 돋아있었다.
일부러 말도 안 되는 결투를 요청한 것도. 그 이후에 곧바로 법황에게 미친개처럼 들이받은 것도.
광인의 기행처럼 보이는 모든 일에는, 전부 철두철미한 계산이 깔려있었다.
이게 고작.
학생 한 명이.
대륙 최강의 국가 수반 중 하나를 상대로 벌인 일이다.
말 한마디로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이, 고작 학생 한 명의 수에 완벽하게 넘어갔다.
법황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느낌, 이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그 놈이랑 닮았단 말이지.’
약한 주제에 ‘갑자기 강해지는’ 그 능력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그가 만난 가장 소름끼치고 불쾌한 ‘것’과, 끔찍할 정도로 닮아있다.
“어느 쪽이고, 다시 만나게 될 거란 건 분명하지만.”
어쩌면, 그 두 명도.
조만간 서로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런 느낌이 든다.
법황이 한숨을 내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안광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우드 캠벨.’
그 이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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