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 - 49.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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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었다.
아무튼 사건의 당사자인 법황 자체가 왈가왈부하지 않고 넘어갔으니,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어서 뭐라고 하기 힘들어진 게 가장 클 것이다.
“...다만, 이번 일로 당신과 엮이고 싶어할 집단은 많이 늘어나겠죠.”
아탈란테가 한숨과 함께 그런 말을 남기긴 했지만.
“제국과 부족 연합에서도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의 거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거에요. 마음의 준비 정도는 미리 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건 저도 이미 알고 있어요, 총장님.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지만.’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하다 보면 좋건 싫건 그쪽들이랑 깊게 엮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주목을 끌어서 내가 판을 짤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지는 편이 낫지.
부족 연합의 족장들이나, 제국의 황실이나, 결국 자기 잇속 챙기려는 아귀들이 가득 찬 복마전이다. 성황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대체 불가능한 위치에 서는 것만으로도 날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시도의 대부분은 차단할 수 있다.
귀찮아질 일들은 나중에 이것저것 날아오겠지만.
“그보다, 자매쪽은요.”
뭐, 그것 관련된 것들은 나중에 일이 닥쳐서 생각해도 될 일이고.
2챕터 진행에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그쪽이다.
내가 성황국이랑 담판을 지은 것도 결국 그쪽 때문이니까.
“성녀 쪽은 아직 의식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 하는 상황입니다. 심각한 건 아니니 하루나 이틀이면 정신을 차리겠지요. 동생쪽은 그걸 간호하겠다고 붙어있구요.”
“그거 다행이네요.”
머리를 굴리며 답한다.
“그러면 사절단 일정에는 맞출 수 있죠?”
“...법황한테 들이받으면서까지 그쪽을 구해놓고서 하실 말입니까?”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지.
어이없다는 어투로 말하는 아탈란테에게 피식 웃는다.
원래 성황국에서 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사절단은 항상 엘판테 내부를 전부 훑으면서 ‘축복’ 작업을 실시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유리아의 검에 걸린 단절의 저주를 해주하는 첫 걸음이지.
그 이벤트 자체가 녀석에게 걸린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트리거가 되니까.
‘남은 시간도 별로 없고...’
기껏해야 3일.
첫 챕터의 정화자 보스전을 생각하면, 시나리오는 항상 최악의 최악으로 굴러가는 걸 가정하고 있는 편이 좋다.
그리고 3일 뒤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한다면, 소년왕 보스전 관련 이벤트는 무조건 그쪽에서 터진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즉.
유리아에게 걸린 단절의 저주를 그 안에 풀어놓지 못하면 사실상의 게임 오버다.
“성녀님이 정신 차리면 얼굴이나 좀 보자고 전해주세요.”
그러니까, 뭐.
성황국에게 들어올만한 견제도 치워놨겠다.
남은 건.
“...그쪽의 ‘숙원’에 대해 좀 이야기 해보려니까.”
그쪽을, 진정으로 구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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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
[ ‘축성의 메아리’ 1개가 지급됩니다! ]
[ ‘악의 씨앗’ 1개가 지급됩니다! ]
그렇게 줄줄이 떨어지는 창을 보고 턱을 쓰다듬는다.
일전에 루시엔을 구함으로서 클리어 조건은 진작에 충족한 퀘스트지만,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수령받는 건 지금이다.
[ 축성의 메아리 ]
[ 재료: 성장 재료 - 신성 ]
[ 성장시킬 수 있는 ‘신성’ 관련 아이템에 융합시킬 경우, 아이템의 등급을 한 차례 올릴 수 있습니다. ]
손아귀에 잡히는 푸른색 마석을 바라본다.
괜찮네.
보통 메인 퀘스트의 보상 아이템은 얽혀있는 퀘스트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같이 누가 보아도 신성 계열 능력자인 루시엔과 유리아가 얽혀있는 상황이라면 보상도 보통 그쪽 관련으로 지급되거든.
‘그리고...’
마침 난 이것과 딱 어울리는 물건도 있다.
코웃음을 치며 손에 잡힌 손바닥만한 향로를 살핀다.
아마 원작에서 축성의 울트리마를 성장시키면 강화되는 건 내장된 스킬들일 것이다.
추가 스텟을 모조리 내구로 돌릴 수 있는 ‘고행’ 스킬과 그런 내구도 스텟만큼 단단해지는 방패를 소환할 수 있는 ‘신성 방패’ 스킬.
둘 다 지금 상태로도 요긴하게 써먹었지만, 이렇게 성장 재료를 퍼먹일 때 통상적으로 강화되는 수준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강력하게 변할 것이다.
‘제작학부는 고생 좀 하겠네.’
아마 조만간 그쪽에 가서 이것저것 요구할만한 일이 생길 텐데, 그때 이걸 이용해 울트리마를 강화시키는 걸 같이 의뢰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창을 휙 넘긴다.
이것말고도 얻은 건 하나 더 있지.
[ 악의 씨앗 ]
[ 재화: 특수 ]
[ 포인트 상점에서 특수 스킬과 교환할 수 있습니다. ]
[ 현재 보유 개수: 4개 ]
이것 말이다.
이전에 엘리야와 탈리온에게서 얻은 것들에 더불어 이번에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함으로서 얻은 것까지 합쳐서 총 4개다.
원래대로는 이전에 정화자 보스전에서 활용하려 했지만, 적당한 걸 구할 수가 없어서 포기했던가.
‘하지만...’
4개쯤 되면 분명히 쓸만한 스킬이 있다.
예를 들어서.
◎ 탐색안
[ 스킬: 특수 ]
[ 가격: 악의 씨앗 4개 ]
[ 하루에 한 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런 것 말이지.
[ ‘특수 스킬: 탐색안’을 구매하셨습니다! ]
[ 오늘부터 하루 1회,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악의 씨앗 자체가 기프트 보상이나 메인 퀘스트에서만 튀어나오는 희귀 재화다보니, 그걸 퍼먹는 이 스킬도 대단히 심플하지만 강력하다.
기본적으로 정보가 많아서 손해인 경우는 절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 다우드.”
그리고 마침 이걸 시험해보기에 딱 좋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복도 끄트머리에서 나를 발견하고, 무표정하게 또각또각 걸어오는 엘노어를 바라본다.
[ ‘탐색안’을 사용합니다. ]
[ 대상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
[ 같은 대상에게는 24시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적용됩니다. ]
일단 이 사람에 대한 정보부터 얻어내는 게 가장 우선이란 말이지.
엘노어나 엘리야나, 그 성장 기준치에 따라 아예 앞으로의 내 행동 방침 자체가 달라지는 사람들이다. 시나리오 최중요 인물들이니까.
[ 엘노어 에리나리제 라 트리스탄 ]
[ 특징: 그릇 – 회색 악마 ]
[ 상태: 졸음을 밀어내기 위해 트리스탄 공작령과 캠벨 남작령간의 거리를 계산 중. ]
[ 특이사항: 72시간 동안 다우드 캠벨의 지시대로 누군가를 미행한 상태. 굉장히 피곤하지만 방금 다우드 캠벨을 봐서 기분이 좋아짐. ]
“...”
이런 정보까지 미주알고주알 뽑아내는 걸 보니 역시 악의 씨앗 4개짜리 스킬이다 싶긴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아래에 있는 거다.
< Status Info >
[통상]
근력: S
민첩: S
내구: S
행운: C
권력: A+
[이능]
마력: B
법력: F
신성: F
???: EX
< Misc. >
-현재 융합한 ‘악마의 조각’ 개수: 1개
-1단계 융합 진행: 80%
-타락 진행: 2%
‘...역시.’
눈이 돌아갈만큼 화려한 스텟은 일단 차치하고서, 맨 아래에 표기되어 있는 ‘융합 진행’과 ‘타락 진행’이라는 문구를 훑어본다.
악마의 그릇이라면 전부 공통적으로 표기되어 있을 항목이지.
‘융합 진행이 벌써 80%라고.’
이건 조각이 그릇 본체와 얼마나 ‘섞이기’ 시작했냐에 대한 척도다.
가장 눈에 띄는 영향이라면 인격과 능력치가 바뀌는 거다. 하얀 악마의 조각에 영향을 받아 의존증과 집착증이 심화된 유리아의 경우처럼.
이전에 강신 스킬을 일깨울 정도로 한 번 개빡친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이게 100%가 되면, 이 사람도 유리아처럼 성격에 뭔가 큰 영향이 올 거란 소리다. 당장은 ???라는 정체불명의 능력치가 추가된 정도로 끝난 모양이지만.
“...”
적어도 엘노어는 유리아처럼 무서운 쪽으로 변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창의 다른쪽으로 돌린다.
타락 진행은 그릇의 멘탈이 얼마나 안 좋냐에 대한 척도다. 이게 꽉 차면 안쪽에 있는 조각들이 폭주해서 난리가 난다.
조각이 1개만 있어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재앙 사태고, 조각이 전부 모인 상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글쎄.
게임 오버 직행이나 다름없지.
‘2%면 양호하네.’
원래 2챕터 시작 즈음의 엘노어는 적어도 이게 20%근처까지는 차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가장 큰 스트레스 원인이 되었을 엘리야와 기드온 모두 나 때문에 엘노어쪽에 관심을 쏟지 못 하는 상황이니까.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자니, 엘노어에게서 말이 날아왔다.
“그동안 죽고싶었네.”
“...”
당신 지금 2%잖아.
얼굴 보자마자 타락 진행 수치 92%같은 발언은 좀 삼가줬으면 좋겠다.
“...왜요?”
“그대가 미행을 부탁한 대상, 정말 보통 인간이 아니더군.”
엘노어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는건 정말 흔한 일이 아니겠지만, 대상이 대상이니 나도 이해한다.
“...그래도, 대략적인 행동 양식 정도는 파악했네.”
그러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란 것도 잘 안다.
“...정말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되묻자, 엘노어가 나한테 종이 한 다발을 내밀었다.
안쪽에 적혀있는건, 어떤 인물 한 명이 중간고사 기간동안 아카데미 안쪽의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다녔는지 전부 상세하게 정리된 것들이다.
‘...우와.’
이걸 진짜로 해냈네.
내가 부탁했지만, 사실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난이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최종 보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엘노어가 팔을 허리 양옆으로 짚으며 가슴을 쑥 내밀었다.
엣헴, 하고 젠체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무표정으로.
“조금 더 나한테 감사해도 좋...”
그리고 그런 엘노어를 콱 끌어안아준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기쁨에 저지른 일이었다.
“진짜, 진짜 고생하셨어요 엘노어! 나중에 꼭 답례 할테니까요!”
“...”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엘노어를 내버려두고 한 달음에 달려간다.
지금 당장 가서, 이 자료의 ‘대상’이 되는 인간을 만나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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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노어가 말 없이 자신의 제복을 내려보았다.
엄숙한 표정으로 외투를 벗은 그녀가, 이내 그것을 고이고이 접어 팔에 걸쳤다.
‘...이건 보관해야겠군.’
음.
적어도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빨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가, 문득 방금 전에 자신을 폭 끌어안았던 다우드의 ‘손’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조금, 크던가?’
그럼, 지금 제작중인 ‘반지’의 크기도 조금 크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전달해주면, 그 남자는 무슨 표정을 지어주려나.
당황하려나. 기뻐하려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승낙, 해준다던가.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거라.”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이내 다시 엄격한 동작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입꼬리는 살짝 비틀려있었다.
기대감을 도저히 감추지 못한 기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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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과거로 바뀌는 것을 몇 번이나 봐온 사람이 흔히 받는 착각은, 그가 절대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발카서스는 찰나의 순간조차,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풍경을 감상하는 고상한 취미가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고.
아카데미의 시계탑.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는 건물 안에 앉아있자니, 해가 하늘 너머로 넘어가는 것이 어떤 곳보다도 잘 보인다.
태양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슬슬 찾아들어오는 공간이 생겨난 덕분에,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위치한 그의 팔의 모습이 변했다.
모습이 변했다기보다,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윤곽이 녹아서 흘러내린다. 어둠 속에 동화되어 독기를 흩뿌린다.
영겁의 세월을 짊어진 대가. 세계의 법칙이 그에게 덧씌운 굴레.
“...”
잠시 그렇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으며 그쪽을 쓰다듬었다.
“...체력을 좀 단련하는 편이 좋겠군.”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계탑 꼭대기로 누가 헥헥거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를 뛰어올라오는 것쯤이야 신체 건강한 엘판테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힘 좀 들이면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지금 이 학생은 그야말로 사경을 오가는 수준의 체력 고갈이 눈에 띄게 관찰되는 모습이었다.
충혈된 눈에 거친 호흡을 보고 있으니 우스꽝스러울만도 하지만, 발카서스는 그걸 비웃는 대신 한 마디를 더 건내기로 했다.
“그대가 다우드 캠벨인가?”
“...저를, 허억, 알고, 계십니까?”
“숨 넘어가겠네. 일단 좀 앉게나.”
발카서스가 그렇게 말하며 시선으로 자리를 권했다.
비틀거리며 그의 옆자리에 앉은 다우드가, 이내 한참을 헐떡거리다 마침내 말을 이었다.
“저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선각자 놈이 각별히 당부해서 보냈는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내가 여기서 저지를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거라 하더군.”
다우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다우드도 그렇게 답하며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머릿속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쭉 떠올리고 있었다.
소년왕. 2챕터의 ‘배경’.
왜 최종보스가 아닌 배경인고 하니, 이건 도저히 대적해서 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천 년을 묵은 망자들의 왕.
존재 자체가 ‘인간’이기 보다는 ‘현상’이나 ‘개념’에 가까운 괴물.
백성 모두가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하고 따뜻한 염원을, 가장 끔찍한 형태로 돌려받은 지배자.
그런 인간이 여기서 저지를 일이라.
메인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이어서 흘러나온 문장도, 그것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염원하에 흘러나온 질문이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죽이고, 부활시켜서, 망자로 만든 다음 지배하는 거요?”
발카서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흘러나온 말도, 참으로 간단한 어조였다.
“3일 뒤에.”
“...”
다우드가 대차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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