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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53)화 (54/258)

Chapter 53 - 53. 해주 (3)

 

 

사실 머릿속을 뒤져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거, 생각해보면 꽤 웃긴 능력이다.

 

말하자면 무력만 안 쓰는 전투 행위에 가까우니까.

 

상대방의 정신 공간에 침투해서 대결로 상대방을 쓰러트린 다음, 대충 상대방에게 ‘항복’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짓을 반복한다.

 

그래서 특정 행동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신성력으로 그걸 강제하는 순간 그대로 상황 종료다.

 

 

‘이런 식으로 구현된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을 둘러본다.

 

이게 내 정신 공간인가보다.

 

이렇게 둘만 똑 떨어져서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방식인가보다.

 

 

“...어.”

 

 

그리고, 역천사님께서도 나와 같이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무척이나 얼빠진 기색이긴 했지만.

 

 

“이, 이거 뭐야? 왜 아무 것도 없어?”

 

 

이어서 그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피식 웃는다.

 

확실히, 지금 내 상황이 조금 특이하긴 하다.

 

 

‘...정신 공간은 업보Karma에 그대로 영향 받는다고 했던가.’

 

 

머리를 긁적이며그런 생각을 떠올린다.

 

왜, 그 악행 카운터 말이다. 사람의 성향을 악이나 선으로 규정짓는 기준.

 

카르마 수치는 당연히 살인뿐만이 아니라 기타 악행으로도 쌓이는 수치고, 이와 반대로 일반 도덕 기준으로 착한 일을 하거나 정신 수양을 통해 그 수치를 점점 떨어트릴 수 있다.

 

카르마 수치가 높은 놈일수록 뭔가 지옥도가 펼쳐져 있거나, 카르마 수치가 낮은 놈은 목가적이고 화목한 광경이 펼쳐진다거나 한다.

 

그러니 지금 내 경우처럼 아예 ‘아무것도 없는’ 모습은, 꽤 괴상한 편이긴 하지.

 

착한 놈도 나쁜 놈도 아니란 뜻인가?

 

 

“뭐, 뭐! 조금 특이한 모습이긴 해도! 천사는 괜히 천사가 아니야! 너, 실수한 거라고!”

 

 

역천사님께서 그렇게 말하며 당당하게 몸을 곧추세웠다.

 

 

“상대방이 뭐라도, 고행과 절제를 통한 정신력 수양은 천사들이 제일이야! 상대가 누구라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방금 전에는 세게 당황하셨잖아요.”

 

“...그런 적 없어!”

 

 

흠.

 

고행과 절제가 아니라 뻔뻔함이 제일 아닐까.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성격이긴 했지.’

 

 

천사 중에 여자는 극히 희귀한 존재며, 따라서 ‘엘판테’에 있는 여자 천사, 그 중에서도 역천사라면. 그 신원을 좁히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저들이 일컫기를 덤벙이.

 

빡빡하고 제대로 숨쉬기도 어려운 규율이 가득찬 천계에서 특히나 이질적으로 허술한 천사다.

 

 

“무슨 생각으로 천사를 정신 공간으로 끌어들였는진 모르겠지만, 분명히 후회할거야, 너!”

 

 

그렇게 말한 덤벙이가 날개를 쫙 펼쳤다.

 

그리고 이어서 그 주변으로 무지막지한 기색으로 흰색의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확실히, 압도적인 신성력이다.

 

이전에 법황과 직접 마주한 입장에서 느꼈던 신성력과 대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

 

물질계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게 제한되는 천사라 하더라도, 이렇게 정신 공간 안에서는 온전히 자신의 힘을 다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런데, 그거 뭐냐.”

 

 

머리를 긁적이며 상대방을 마주본다.

 

 

“지금이라도 미리 대비해두시는 게 좋을 거에요.”

 

“...뭐?”

 

“정신 공간은 영靈이랑 연계된 공간이잖아요.”

 

 

기억해보면 설정 상 분명히 그렇다.

 

영혼에 저장된 정보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공간이라 했던가.

 

덤벙이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서 그게 뭐? 그러니까 네가 더 불리하잖아. 물질계 생물들의 능력 대부분은 육肉에 귀속되어 있으니, 정신 공간에서는 정신체인 천사가 무조건 우위-”

 

 

그런 설명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는다.

 

 

“내 영혼이랑 ‘연결된’ 공간을 만들면, 미친 듯이 달려들 놈이 있으니까 하는 소린데.”

 

 

아탈란테가 이전에 했던 설명을 좀 떠올려 보면.

 

내 ‘영혼의 성질’은 뭔가를 아주 잘 끌여들인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대상을.

아마 물질계에 있는 내 본체 근처에도, 하나 있던 걸로 기억하지.

 

 

“아, 왔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덤벙이의 표정도 빠르게 굳었다.

 

뭔가가 이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다는 걸 곧바로 느꼈기 때문이겠지.

 

물론, 이걸 그냥 ‘오고 있다’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긴 하다.

 

 

-...

 

 

이건 그냥 ‘등장’한다기보다.

 

 

-...!

 

 

‘강림’한다는 쪽에 가깝지.

 

아무 것도 없던 내 정신 세계의 풍경이 ‘새하얗게’ 물든다. 너무 빠르게 잠식되어서 오히려 폭발한다고 봐도 될 정도다.

 

하지만, 그 색깔에서 풍겨져 오는 느낌은 결코 순결하다거나 정갈한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맑아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만큼의 ‘질척함’이 느껴진다.

 

저런 색깔로 불쾌감을 일으키기도 쉽지 않겠지만, 그게 가능한 대상이 하나 있다.

 

 

“...”

 

 

덤벙이의 날개가 툭, 하고 바닥으로 쳐졌다.

 

입이 쩍 벌어진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악마...?”

 

 

그런 중얼거림이 퍼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공간 안으로 한 명의 소녀가 공간을 ‘찢어버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 공간 전체가 요동친다.

 

 

“이, 히이이익-!”

 

 

근처에 본인이 펼쳐냈던 신성력이 일거에 모조리 다 흰색의 마기魔氣에 잡아먹히는 것을 본 덤벙이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라도 풀린 모양이지.

 

원래대로는 본인이 열어제낀 이 정신 공간을 닫으면 물질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주도권이 저쪽에 넘어간 이상 그것도 힘든 일이다.

여길 열고 닫는 것도 완전히 저기 마음이라 그거지.

 

 

“...마, 말도, 말도 안...! 왜 악마가 여기에...!”

 

“...”

 

 

상대가 누구건 당황하지 않는다며.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안쓰러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거 봐. 말했잖아.

 

처음부터 대비하고 있으라 했는데.

 

 

‘...이해는 한다.’

 

 

실소와 함께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악마의 조각 정도면, 다수가 아닌 1:1로 대응하기 위해선 치천사까진 아니더라도 그 바로 아랫급 정도는 데려와야 할 레벨이다.

 

역천사도 낮은 위계는 아니지만 상대한다면 그대로 마분지처럼 찢겨나갈 격차지.

애초에 위계부터 안 맞는다. 악마는 판데모니엄의 지배자들이고 역천사는 기껏해야 조금 강력한 천사에 불과하니까.

 

 

 

[ ‘스킬: 치명적인 매력’이 발동합니다! ]

[ 대상 ‘하얀 악마의 조각’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

 

 

이어서 떠오르는 그런 창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본다.

 

 

‘시스템이 뜯겨나가진 않네.’

 

 

회색 악마의 조각이 나올때랑은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그땐 창이고 뭐고 다 작살나서 아무것도 못 읽었는데.

 

악마들 사이에서도 확연하게 ‘힘의 차이’가 난다는 뜻이겠지.

 

실제로 당장 절체절명이 안 켜지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찾았다.]

 

 

하지만.

 

 

[내 반려.]

 

 

그런 목소리가 눅진하게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등골에 소름이 쭉 돋아난다.

 

공간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소녀가, 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유리아의 모습이다. 조각은 그릇을 매개로 활동하니, 그 모습에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하겠지.

 

다만, 언제나 작은 동물 같은 분위기를 품고 있는 그쪽과 다르게 이쪽은 확연하게 ‘위험한’ 느낌이 든다.

 

 

[계속, 계속 만나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그 작은 소녀의 얼굴임에도, 얼굴에 녹아있는 건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뇌쇄적인 분위기다.

 

 

[너도, 그랬지?]

 

 

공기가 달콤하다. 그대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고 싶어진다.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그 발에 입 맞추며 선언하고자 하는 욕망마저 들 정도다.

 

온몸에 불꽃과도 같은 정욕이 치달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소녀를, 나의 것으로-

 

 

[ ‘권능: 유혹’과 ‘스킬: 치명적인 매력’이 충돌합니다! ]

[ 효과에 저항합니다! ]

 

“...”

 

 

일순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주먹으로 내 턱주가리를 돌린다.

 

조금도 절제하지 않은 일격에, 이쪽으로 걸어오던 소녀와 바닥에 쓰러진 덤벙이의 얼굴에 동시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난 죽다 살아난 기분이다.

 

 

‘...진짜 위험하네.’

얼얼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고개를 흔든다.  

회색 악마의 기본적인 권능이 주변의 시간과 공간에 그 영향력을 퍼트리는 ‘침식’이라면, 하얀 악마는 정신에 직접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주입하는 ‘유혹’이다.

 

하얀 악마를 인지한 지성체는 무조건적으로 저쪽에 아득한 수준의 호감을 가지게 된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이 정도다. 다른 인간이라면 진짜 눈을 마주치자마자 저쪽의 노예가 되었겠지.

 

 

‘효과가 상충되는 스킬이 있어서 다행이지.’

 

 

저쪽이 나를 유혹하는 만큼, 나도 저쪽을 유혹할 수 있는 스킬이 달려있다.

 

게임 시스템을 생각하면, 이런 게 서로 교환되면 효과가 반감되거든.

 

그런데, 바꿔 말하면.

 

 

[...왜 거부하는 거야?]

 

 

이 녀석은, 효과가 반감된 치명적인 매력을 받았음에도 이런 상태다.

 

하얀 악마의 눈동자에서, 그대로 빛이 사라졌다. 초점도 여기저기로 흔들린다.

 

내가 그저 자신의 ‘노예’가 되는 걸 거부했다는 것만으로도,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린 기색이다.

 

 

[나는, 나는 널 가지고 싶은데. 왜 너는.]

 

“...”

 

 

뒤틀린 소유욕. 집착. 상대방을 향한 맹목적인 애정.

 

하얀 악마를 상징하는 키워드들이다.

 

 

[너는 왜? 응? 어? 나, 싫어? 어?]

 

 

마치 고장난 라디오처럼. 단음으로. 짧게.

 

광인과도 같은 기색으로, 말을 내뱉으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주변으로 요사스럽게 꿈틀거리는 하얀색의 마기가 해일처럼 쏟아져 내린다.

 

 

[나, 뭐든지 줄테니까. 네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뭐, 뭐를 가지고 싶어? 세상을 네 손에 쥐여줄까? 황제가 되고 싶어? 다른 인간들을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힘을 원해? 나라면 뭐든지 가능-]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접근하던 하얀 악마가, 문득 발에 뭔가가 채인다는 걸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호달달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덤벙이다.

 

 

[천사.]

 

 

하얀 악마가 그런 말을 무감각하게 중얼거리는 것에 이어.

 

그 눈동자에 빛이 확 돌아왔다.

 

 

[...이거, 선물로 줄까? 먹을래?]

 

“...”

 

 

무슨 역천사를 동네 구멍가게 간식처럼 말하고 있다.

 

 

[천사, 뜯어서 먹어치우면. 꽤 강해져. 너도, 너도 분명 좋아할...]

 

“와아아아악-!”

 

 

말을 듣자마자 덤벙이가 날개를 펼쳐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곧바로 번개처럼 움직이는 하얀색 마기에 그 발목을 붙들린다.

 

 

[어떻게, 먹을래?]

 

 

그렇게 말하는 하얀 악마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덤벙이를 바라본다.

 

 

“그렇다는데요.”

 

“뭐, 뭘 그렇다는데야! 도, 도와줘! 너 이쪽이랑 아는 사이 같은데에-!”

 

“그걸 누가 맨입으로 해줘요.”

 

“...”

 

 

덤벙이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욕설을 토해내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차마 입 바깥으로 못 꺼내는 기색이다.

 

 

“뭐, 뭘 원하는데! 뭐든지 줄 테니까-!”

 

“단절의 저주를 조건부로 완화시킬 성물.”

 

“...”

 

 

덤벙이가 입술을 더욱 심하게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는 이거 본인이 직접 결정할 사안은 아니다. 단절의 저주는 세라 전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악독한 저주다. 그걸 약화시키려면 천계에서도 꽤 귀중한 물건을 가져와야겠지.

하지만.

 

 

“줄, 줄게! 줄테니까!”

 

 

그렇지.

 

이쪽엔 선택 권한이 없거든.

하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라다.

 

 

“맹세까지 하세요. 날개 한 쪽 걸고.”

 

“너, 천사들 규율은 또 어떻게 알고...! 이, 이이익-!”

 

 

결국 미친 듯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덤벙이는, 내가 말한대로 맹세까지 꺼내 놓고 말았다.

 

아니면, 뭐.

이 자리에서 죽는거지.

정신 공간에서의 '사망'은 본체까지 영향이 간다. 꽤 치명적으로.

 

[...안 먹어?]

 

 

하얀 악마가 불만스럽게 그런 문장을 토해내었다.

 

 

“미리 말하는데.”

 

 

심호흡하며 말한다.

 

 

“그쪽 건드리면 그냥 안 넘어가.”

 

“너, 너 무슨 소리 하는거야...! 악마랑 싸울 수 있을 리가...!”

 

 

그렇게 답하는 덤벙이의 모습에 피식 웃는다.

 

누가 싸운대.

 

당연히 못 싸우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어 내 목을 겨눈다.

 

 

“말 안 들으면 나 자살한다.”

 

“...”

 

[...]

 

 

뭐, 진짜로 할 생각은 없지만. 어쩔건데?

 

하얀 악마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 녀석은 내가 ‘그렇게 할 수도 있다’라는 생각만 들어도 미칠 녀석이다.

 

나 좋아한다는 녀석한테 너무한 처사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애정을 들이밀면 나도 이 정도 가스라이팅은 해야 한다 그거지.

실제로도, 내가 그런 말을 꺼내놓자마자 녀석의 눈동자가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다. 입술을 깨문다. 누가 봐도 초조해 보이는 표정으로.

 

하얀 악마와 역천사가 동시에 조용해지는 사이,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그쪽 풀어주고 정신 공간도 해제해. 너하고는 나중에 상대해줄 테니까.”

 

[...상대해준다고?]

 

“무슨 말인지 알잖아. 우리 또 만날 걸?”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담담히 말해준다.

 

뭐, 이 녀석과 나는. 결국 다른 악마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본체 대 본체로 ‘대면’하게 될 운명이다.

 

악마라면, 이 녀석도 그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겠지.

 

 

[...]

 

 

한참을 조용히 있던 녀석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약속?]

 

“약속.”

 

 

고개를 끄덕인다.

 

약속이고 뭐고, 반드시 일어날 일이니까.

 

 

[...알겠어.]

 

 

그렇게 말한 하얀 악마가 입술을 삐죽이며 덤벙이를 턱, 하고 내려놓았다.

 

겍, 하는 소리와 함께 덤벙이가 바닥에 엎어지고.

 

이어서 유리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하얀 악마의 조각이,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곧바로 내 얼굴에 씌워져 있는 가면 바깥쪽을 쓰다듬는다.

 

유리아와 같이 있을 때마다 항상 쓰고 있던 물건이다. 오늘도 쓰고 왔지.

 

 

“...”

 

 

하얀 악마의 손이 닿는 부분이, 통째로 녹아내리는 것 같다.

 

회색 악마보다는 못 하지만, 그래도 악마는 악마다 싶다.

 

 

“...”

 

 

아, 그렇지.

 

유리아와 만날 때 항상 가면을 쓰고 있던 이유, 드디어 기억났다.

 

정확히는, 그쪽이 지금처럼 하얀 악마의 '그릇'일 경우를 대비해서 쓰라는 거였는데.

 

[얼굴.]

 

 

이거.

 

하얀 악마의 ‘폭주’ 트리거다.

 

이 녀석이 내 얼굴을 인식하는 순간 일어나는 이벤트가 있거든.

 

악마 관련 이벤트 중에서도, 순위권에 들어갈만큼 개같은 이벤트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꼭 보여줘.]

 

“...”

 

 

절대.

 

절대로 보여주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는 것과 동시에.

 

내 정신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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