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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54)화 (55/258)

Chapter 54 - 54. 나비 효과

 

볼 일을 모두 끝내고 돔 바깥으로 걸어나오자, 성녀님이 잔뜩 찌그러진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손에는 불 붙인 담배가 들려있었다.

 

 

“...성녀님이 그런 거 피워도 됩니까?”

 

“스트레스 받으면 어쩔 수 없답니다. 이거 없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지도 몰라요.”

 

“...”

 

 

왜 갑자기 무서운 소리를 하고 계신대.

 

 

“지금도 힘들긴 하네요. 당신 때문에.”

 

“예?”

 

“그거 아십니까. 일정 이상의 신성력을 품을 수 있게 된다면, 이면 세계에 있는 존재들과도 가끔 의사 교류가 될 때가 있답니다.”

 

“...”

 

“머릿속에 징징 울리네요. 저 건물 속에 있는 천사 한 분이 당신이 쓰레기라고 아주 울분을 담아서 고함치고 계신데요.”

 

“...그렇군요.”

 

 

그래.

 

그건 이것만 봐도 알겠다.

 

 

[ 대상 ‘역천사 A1101’이 당신을 상종도 못할 쓰레기로 인식합니다! ]

[ 부정적인 영향이 각인됩니다!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 스킬: 악의 지배가 발동됩니다. 대상에게 사용 가능한 명령권 1회를 얻습니다! ]

 

“...”

 

 

요즘 들어 내 평가가 상당히 자주 바닥에 내려꽂히는 기분이 들긴 하는데, 뭐 어쩔 수 있나.

 

그보다는 이거다.

 

루시엔의 앞으로 팔뚝만한 금속 주괴 몇 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자마자 루시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건.”

 

 

아무리 취급이 박했다지만 그래도 성녀는 성녀. 뭔지는 바로 알아보는 모양이다.

 

당장 저 돔 안에 있는 ‘별의 심장’도 이거로 만들어진 구조물이긴 하지만.

 

 

[ 별철 주괴 ]

[ 재료: 무기 및 방어구 ]

 

[ 모든 종류의 이능에 대하여 높은 전도율을 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신성력과 상성이 좋으며, 별철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건 같은 별철이나 판데모니엄의 금속 밖에 없습니다.

 

▶ 장비 제작 시 모든 저주에 대해 강한 저항력을 가짐.

 

▶ 특정 재료와 조합할 경우 특수한 효과를 가짐. ]

 

 

그것 참 보기만 해도 휘황찬란하구나.

 

주인공의 핵심 무기를 구성하는 재료 아니랄까봐 온갖 종류의 유틸리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대체 이만한 양의 별철을 어디서 구하신겁니까? 이건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금속...!”

 

“저기 안에서 절 쓰레기라고 매도하시는 분도 따지고 보면 신화 속에서만 나오는 분 아닙니까.”

 

“...”

 

 

그렇네? 하는 기색으로 루시엔이 입을 다물었다.

 

 

“이걸로 유리아한테 선물 하나 줄 예정입니다.”

 

 

볼을 긁적거리며 그런 말을 이어가자, 루시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이어서 잠시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내가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천천히 반추하는 것 같은 모양새다.

 

이어서 성녀님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별철 주괴와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자, 잠시만요. 이거 별철입니다. 지금 주신 양의 반 정도 되는 양을 얻기 위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기는 하지. 이건 보통 값어치가 아니다.

 

하지만 당신 동생한테 걸린 저주도 보통 물건이 아닌 건 마찬가지고.

 

 

“뭐, 다 드리는 것도 아닌데. 제가 쓸 양은 따로 빼뒀으니까 그냥 받으세요.”

 

 

실제로도 그렇다.

 

이건 내가 역천사한테서 뜯어온 양의 절반이 채 될까 말까한 양이다.

 

나머지는 내가 다른 곳에 쓰려고 아낄 거거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거라도 안 드리면 큰일 납니다.”

 

 

단호한 어투로 그렇게 말한다.

 

내가 괜히 단절의 저주를 이 게임에서 가장 악독한 것 중 하나라고 하는 게 아니다.

 

천사를 직접 협박해서 얻어온 이런 성물에 가까운 재료도 완전 해주는 불가능하다.

 

 

“...그렇기는, 합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답한 루시엔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하지만, 이런 도움을 그저 받기만 할 수는...”

 

“아뇨.”

 

 

진지한 어투로 말을 자르고 들어간다.

 

 

“당신 둘은, 저한테 그만큼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별철 정도야 그냥 드릴 수 있으니까 받으세요.”

 

“...”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별철 장비를 받아야지만 곧 있을 2챕터 보스전에서 유리아를 활용할 수 있어진다.

 

소년왕 보스전에서 이 둘이 맡을 역할이 뭔지 생각하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게 겨우 시작인데요. 전 그쪽이랑 끝까지 같이 가려고 하는데. 성의 표시라 생각하세요.”

 

 

그리고, 뭐.

 

이쪽은 후반부 메인 줄기 중 하나인 ‘법황 공략전’의 핵심들이다. 별철 퍼주는 것 정도야 별것도 아닌-

 

 

 

[ 상대방이 당신의 여성 편력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 불신감을 가집니다. 유혹에 저항합니다! ]

[ 하지만 끝끝내 저항에 실패합니다! ]

[ 대상 ‘루시엔’의 호감도 단계가 소폭 변화합니다! ]

[ 호감도 단계가 ‘관심 1단계’에서 ‘관심 1.5단계’로 격상합니다! ]

 

“...”

 

 

이건 또 뭔 소리야.

 

뭔 유혹을 하고 뭘 또 거기에 저항을 해.

 

 

“...그러지 마십시오, 진짜.”

 

 

루시엔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파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

 

“예전에는 의심만 있었습니다만, 이젠 확신입니다. 당신 대체 몇 명을 이렇게 후리신 건데요?”

 

“...”

 

“오해하기 좋게 얘기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유리아가 저런 꼴이 아니었으면 나라도 끔뻑 속았어...”

 

“...그게 무슨...?”

 

“몰라요! 내 입으로 설명하게 하지 마세요, 이 파렴치한 인간이!”

 

“...”

 

 

다우드 캠벨, 두 번째 인생 업적.

 

성녀님한테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매도까지 받았다.

 

나 대체 어디까지 가는거야...?

 

 

“아무튼!”

 

 

헛기침을 몇 번 큼큼, 뱉은 성녀님이 여전히 붉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번에 절 도와줄 때도 공짜는 아니라고 하셨죠. 이번에도 저희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으신 것 아닌가요?”

 

 

얘기가 빠르군.

 

역시 성녀 역할 하면서 여기저기 굴러본 짬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지.

 

 

“예, 뭐. 별 건 아니고.”

 

 

단어를 고른다.

 

신중하게 고른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두 사람은 소년왕 공략전의 핵심이다.

 

덕분에 맡아야 할 역할도 좀... 기상천외하지.

 

그런데 내가 보통 이럴 걸 설명 할 때마다 오해를 좀 자주 사더라고.

 

그러니까, 침착하게 계획을 설명-

 

 

“아뇨. 표정만 봐도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괜히 고르지 말고 그냥 말 하시죠. 뭡니까?”

 

“...”

 

 

너무하네 진짜.

 

 

 

 

사실 모든 일이 언제나 ‘정사’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리란 건 나도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곱씹을 필요는 있었겠지.

 

나비 효과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더 씹새끼라는 걸.

 

 

 

 

[ 메인 퀘스트 ] 〖 챕터 2 – 소년왕 〗

[ ‘아카데미 습격’ 사건까지 1일 남았습니다! ]

 

 

눈앞에 떠오른 창을 읽어내린다.

 

 

‘이제 하루 밖에 안 남았나.’

 

 

이런저런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준비는 전부 다 해뒀다.

 

어떻게 보면 보스전 자체의 규모는 정화자 때보다 크지만, 그럼에도 그때보다 훨씬 수월할 가능성이 높지.

 

그때랑 비교하면 나도 이것저것 준비해두고 성장시켜둔 게 많으니까.

 

메인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축성의 메아리’를 통한 울트리마 강화, 별철을 통해 유리아의 저주를 통제할 장비를 제작. 그리고 그 장비를 통해 할 일을 그레이하운처 자매에게 전달.

 

문득, 엘노어가 전달해준 말이 떠오른다.

 

 

“제작학부의 불칸 교수님이 다음에 그대를 한번 보고 싶다는군.”

 

“그래요? 희귀 재료로 특이한 의뢰 여러 개 넣으니까 좋아하시나 보죠?”

 

“아니. 이딴 의뢰를 하루 안에 해달라고 요청받으니 그대를 죽여버리고 싶다 하셨다.”

 

“...”

 

“그러기 전에 식사 정도는 본인이 사고 싶으시다는군.”

 

 

친절하기도 해라.

 

하지만 그래도 엘판테의 제작학부. 실력은 확실하니 아마 지금쯤이면 완료된 작업물이 유리아에게 잘 전달됐을 거다.

 

당장 이게 나한테 전달된 것처럼.

 

 

< Item Info >

[ 신성의 울트리마 ] [ 아이템 등급: C+ → B+ ]

 

[ 축성의 메아리 1회 적용! ]

[ 내장 스킬에 변화가 있습니다! ]

 

◎ 내장 스킬 ◎

■ [ 고행 → 신앙의 증명 ] [ 스킬 등급: C → B ]

[ 잠시 동안 모든 스텟 추가분을 ‘내구’와 ‘신성력’으로 전환합니다. ]

[ 소량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

 

※ [ 진화가 가능한 스킬입니다! ]

진화시 스킬이 [ 순교자 ]로 변경됩니다!

■ [ 신성 방패 → 성흔 ] [ 스킬 등급: C → B ]

[ 일정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재생되는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

[ 소량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

[ 보호막의 강도는 ‘내구’ 스텟의 영향을 받습니다. ]

[ 보호막의 재생 속도는 ‘신성’ 스텟의 영향을 받습니다. ]

 

 

※ [ 진화가 가능한 스킬입니다! ]

진화시 스킬이 [ 얕은 무덤 ]으로 변경됩니다!

 

 

그렇지.

 

원래대로는 1년은 가지고 다니면서 우려먹어야 가능했을 스킬 진화가 아이템 한 방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신앙의 증명이나 성흔이나, 이전 스킬에서 한층 진일보한 성능들이다.

 

특히 신앙의 증명을 쓰면 ‘신성’ 스텟도 단기간이지만 뻥튀기가 된다는 점이 고무적이고.

 

절체절명은 통상 스텟은 다 올려줘도 이능까지 올려주진 않거든. 그게 높은 등급으로 적용됐을 때의 스텟 추가분을 생각하면, 그게 전부 신성력으로 적용됐을 때의 위력은 가히 어마어마할 것이다.

 

‘재생되는’ 보호막이 가지는 이점도 그렇고.

 

이거 한 번에 아예 산산조각 내지 못하면 방어막이 계속 남아있는단 소리거든?

 

실전에서의 방호력은 신성 방패와 단순 비교해도 몇 배 이상이겠지.

 

 

‘살아남는데는 엄청 도움 되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기지개를 쭉 킨다.

 

남은 건, 아탈란테에게 내일 있을 습격 사건에 대비한 개괄적인 대응책을 전달하는 것 뿐이다.

 

 

“...시간도 늦었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카데미 내부의 교사를 뚜벅뚜벅 걷는다.

 

근처로 땅거미가 지며 붉으스름한 빛을 주변으로 뿌리고 있었다.

 

이 시간대의 아카데미는 항상 일과를 끝내고 삼삼오오 흩어지는 학생들로 복작거리는 시간이다.

 

 

“...”

 

 

그리고 가끔 저런 모습을 보고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저렇게... ‘충실하게’ 학생 생활을 하는 건 무슨 느낌일까 꽤 궁금하다. 나 학교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거든.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다. ‘바깥’에서도 학교는 못 다녀봤다.

 

기껏 학원물 게임 안쪽에 빙의까지 했는데, 어째 수업 듣는 것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몸 비트는 시간이 더 많은 느낌이다.

 

 

“뭘 그렇게 빤히 구경하고 계세요?”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 쓴 여자가 한 명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는 수수하기 짝이 없지만, 어째 눈을 떼기 힘든 묘한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다.

 

 

“...”

 

 

이상한 느낌이군.

 

유해한 느낌은 전혀 안 든다. 이상한 가면에, 추가적으로 목소리도 변조되어 있어서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도.

 

오히려 푸근함마저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전달된다.

 

 

‘...흠.’

 

 

위아래로 상대방을 훑는다.

 

보통 이렇게 나한테 접근하는 인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되지만, 이 사람은, 글쎄.

 

단적으로 말해서, 약해 보여서 경계심이 잘 안 생긴다. 굳이 탐색안을 쓸 필요도 없이 그냥 알겠다. 나도 주변에 강한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익힌 감이 있어서.

 

절체절명이 터지지 않은 나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불과하겠지. 따지자면 일반인 평균보다 살짝 아래인 정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한다.

 

 

“저를 아십니까?”

 

“어, 아니요. 오늘 처음 뵙는데요. 뭔가 엄청 우수에 젖은 눈으로 다른 사람들 보고 계시길래.”

 

“...그 정도였나요?”

 

“그 정도였어요.”

 

 

여자가 낄낄거리며 내쪽으로 깡충깡충 뛰어왔다. 학장실로 걸음을 옮기는 내 뒤쪽으로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라도 있으셨나요? 그러면 여자친구분이 화내실 텐데?”

 

“...여자친구 없는데요.”

 

 

현재만 공석인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슬프게도.

 

 

“어, 정말요? 여자친구고 뭐고 아무것도 없으신가요? 인기가 없을 관상은 아니신데요.”

 

“...”

 

 

쓴웃음을 머금는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기는 한데.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인기가 있다면 있다.

 

뭔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대상들한테 있지.

 

 

“으-음? 뭔가 사정이 있어보이는 웃음이신데요.”

 

“딱히 사정이랄 건 없어요.”

 

 

사정이라고 해 봐야, 그냥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다 보니까 온갖 사람들이 다 얽혀들었다는 이야기다.

 

나비 효과처럼.

 

 

‘...사정은 없지만, 책임이야 있겠지.’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고 의도가 없었고 어쩌고로 얼버무려도, 눈앞에 호감도 단계라는 게 떡 들이 밀어져 있다. 그 마음을 아예 모른다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그래서 과정이 뭐가 어찌되었든 그렇게 해서 나 좋다고 달라붙는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책임은 져야지. 결착은 내야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자각은 나한테도 분명히 있다.

 

 

“어. 또 표정이 우수에 젖으신다.”

 

“...따지자면 두려움 쪽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만.”

 

 

그래. 책임을 지는 건 좋은데.

 

악마는 기본적으로 집착욕과 소유욕은 베이스로 깔고 들어가는 놈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만약 그런 놈들끼리 치정 싸움으로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한다면.

 

그건 단순히 치정 싸움이 아니라, 질척하고 끔찍한 파괴의 현장이 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

 

아마 나같은 혼의 체질을 타고났다는 인간들 대부분이 그런 이유 때문에 죽지 않았을까.

 

아탈란테의 말대로 궁극적으로는 악마의 그릇 전원을 꼬셔야 생존할 수 있다는 건 동의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생기는 리스크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건 결국 나다.

 

 

‘...힘내자.’

 

 

결국, 최우선은 살아남기 위한 스펙업이다.

 

농담이 아니고, 나 좋다는 여자들 사이에 낑겨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가능성이 꽤 높거든...?

 

마음을 받아주고 어쩌고 하는 것도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힘이 생긴 뒤의 일이다...!

 

 

“...”

 

 

그런 생각을 이어가는 내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던 가면녀가, 이내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재밌는 사람이네요, 당신. 혼자 뭘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심심하질 않아요.”

 

“...그렇습니까?”

 

“예. 생각보다도 더 재미있어요.”

 

“...”

 

 

고개를 갸웃거린다.

 

 

“...생각보다도, 라고 하셨습니까?”

 

 

이 여자.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일 확률이 높지.

 

나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래도 요즘에 어디가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정도로는 퍼진 모양이니까. 뭐라도 들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뭔가, 뭔가 걸린다. 

 

“음, 그러니까.”

 

 

가면녀가 음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 효과란 말, 혹시 알고 계신가요?”

 

“...”

 

 

어쩐지 익숙한 문장에, 걸음을 멈춘다.

 

 

“원래대로는 당신한테 관심도 없었고, 오늘 여기에 올 생각도 없었는데. 뭔가 하나 둘씩 당신이 눈에 밟히다 보니까 이제는 완전히 당신밖에 안 보이더라구요.”

 

 

이상한 느낌이 든다.

 

등골을 타고 섬찟한 기운이 흐른다.

 

 

“당신이 저지른 행동 전부가 제가 오늘 여기에 있다는 결과를 만들어 낸 거라구요. 그거 완전 나비 효과네?”

 

“...예?”

 

“솔직히 뭐든지 한발 앞서서 준비하시길레, 뭔가 딱 봐도 치밀한 책사 분위기라도 내고 계실 줄 알았는데.”

 

 

가면녀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전혀 안 그렇잖아. 생각보다도 훨씬 묘하신 분이네요. 평범해서 오히려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사람이 악마 단위랑 얽혀도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게 이상한데.”

 

 

이상한 느낌이 구체화된다.

 

내가 ‘악마’와 얽혀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전 대륙을 뒤져도 몇 안 되는 인간들뿐이다.

 

패권국의 수뇌 중에서도 극히 일부 인원에 불과하니까.

 

그런 정보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시점에서, 이미 상대방이 평범한 인간이란 가설은 머릿속에서 싹 지워진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이야기만 들었을 때보다도, 직접 보니까 훨씬 더.”

 

 

그런 말을 주워섬기는 가면녀의 분위기는 여전히 티끌만큼도 변화가 없었다.

 

담담하고, 묵묵하고, 전혀 유해해 보이지 않는 평범함.

 

 

“...너, 누구야.”

 

“다우드 씨의 팬 1호라는 사실만 알아주세요. 당신 좋다고 달려드는 그 악마 붙은 여자들보다도 훨씬 더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구요?”

 

“뭐?”

 

“그런 저주받은 년들이 당신 주변에 있는 것 자체가 불쾌하단 이야기야.”

 

 

그래서, 그런 문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왔을 때.

 

 

“죽여버리고 싶다구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당신한테 달라붙는 것 보면.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곧바로 식은땀이 흘러나온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풍기는 분위기는 여전히 똑같다. 여전히 평범하고 무해하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위협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판단이 되지만.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게 든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그 어떤 물리적인 압박도 없지만, 상대방에게서 풍기는 그 ‘비틀린 감각’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다.

 

 

“나만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나만이 당신의 ‘진짜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다구요.”

 

 

가면녀가 낄낄거렸다. 내가 물러서는 만큼 한 발자국 나한테 접근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오직 나만이. 당신과 대등하게 마주 볼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한 ‘악당’은 나밖에 없어. 악마들도 그건 안 돼.”

 

“...너.”

 

“다른 놈들은 하나같이 당신의 의도대로 휘둘릴 뿐. 체스판의 말들과 같아. 누구를, 어딜 어떻게 봐도 당신 같은 번뜩임은 안 보여.”

 

 

여자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평탄한 목소리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독기가 담긴 문장들이 쏟아진다.

 

 

“지루하고, 짜증나서, 전부 다 죽여버리고 싶어. 전부 다 죽여버리고 당신과 나만 세상에 남겨두고 싶어. 그러면 인생 사는 게 조금 재밌을 텐데.”

 

“너, 누구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다.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음...”

 

 

가면녀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씩 웃는다.

 

 

“정찰하러 온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당신, 아직 발카서스가 습격할 것에 대한 준비 전부 다 못 했지?”

 

 

뒤통수가 서늘해진다.

 

 

“그쪽에 대항할 ‘수단’이야 여러 개 준비해둔 것 같은데... 그것보다 중요한 ‘배치’가 아직 덜 되었네. 시계탑 근처에 못 해도 네 명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만 잘 됐으면 발카서스도 금방 제압할 수 있었겠네요.”

 

 

호흡이 얼어붙는다.

 

 

“계획은 완벽해요. 수단도 적절하고.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이 녀석.

 

 

“사건의 발생 시점이 ‘하루’만 앞당겨져도, 대부분이 무력화되는 계획이죠?”

 

 

내가 ‘적’을 향해 하던 짓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무슨 짓을 할지 전부 예측하고, 거기에 대한 카운터 펀치를 한 발 앞서서 찔러넣는 것.

 

 

“나는 당신한테 조금 더 기대를 걸고 싶어요.”

 

 

여자가 시선을 돌려 시계탑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지금부터 저지를 짓은요. 저라도, 당신 상황이었다면 이건 대처할 수가 없었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어서.

 

 

“당신이라면, 뭔가 보여줄 수 있죠?”

 

 

문장이 재차 쏟아져 나온다.

 

 

“제가, 당신에게 더 빠져들게 만들 수 있죠?”

 

 

그렇게 말한 녀석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생긴 건 조그마한 송곳 비슷하게 생긴 모습이지만.

 

나도 아는 물건이다.

 

 

“...천공 분열기?”

 

“어? 역시 아시네요?”

 

 

모를 수가 있나.

 

이거, 2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물건이다.

 

아카데미 전체에 둘러져 있는 결계를 무력화시킴으로서, 발카서스의 금술이 아카데미 전체에 침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물건이지.

 

대단히 강력하고 희귀한 유물이다.

 

악마 숭배자들의 수장이 아니면,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

 

 

주먹을 꽉 움켜쥔다.

 

그렇다는 말은.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이 누군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단서나 다름 없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자기 소개를 못 했네.”

 

 

가면녀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다우드 캠벨. 전 선각자에요. 이름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그렇게 불러요.”

 

 

선각자.

 

악마 숭배자들의 수장이.

 

 

“그런데 있잖아요, 혹시.”

 

 

나에게 그런 말을 주워섬겼다.

 

 

-나비 효과란 말, 알고 있어요?

 

 

이어서 곧바로.

 

천공 분열기에서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에 쳐져 있는 돔 형태의 결계에 그 빛이 직격하며, 그쪽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쩌적쩌적 가기 시작한다.

 

 

“...”

 

 

2챕터 보스전의 시작이나 다름 없는 모습을 보면서.

 

 

!!Alert!!

 

[ 시나리오 변동 발생! ]

[ 긴급 이벤트 발생! ]

[ 메인 퀘스트의 남은 기간이 대폭 축소됩니다! ]

 

 

나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비 효과를 알고 있냐고.

 

그래. 안다.

 

 

“...”

 

 

세상 뭐든 나한테 쉽게 가는 법은 없다는 걸 가르쳐 주는 참스승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안다.

 

 

[ 메인 퀘스트 ] 〖 챕터 2 – 소년왕 〗

[ ‘아카데미 습격’ 사건이 시작됩니다! ]

[ 아카데미를 지키세요! ]

 

 

정말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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