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 - 55. 소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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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오늘도 끝났다-”
엘리야가 기진맥진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따라나오던 트리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들어서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야?”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엘판테의 기사학부 수업은 워낙 엄격한 걸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엘리야가 요즘 소화하고 있는 훈련 코스는 그야말로 살인적이기 짝이 없는 걸로 평판이 자자했다.
방과 후에도 따로 학장을 찾아가서 1:1로 추가 훈련을 몇 번이고 더 한다는 소식이 신성학부인 트리샤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니까.
저 정도는 해야 용사 후보 하는 건가, 싶은 평판이 나올 정도니 말 다 했겠지.
“...아니, 뭐.”
엘리야가 이에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서 계속 부족함을 느끼고 있으니까.”
“...부족함?”
트리샤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부족함이라니, 대체 무슨 부족함?
신입생들 중에서 이미 엘리야의 반절이라도 갈 수 있는 녀석은 아예 없는 걸로 판별된 지 오래다.
그나마 기대받던 탈리온도 엘리야랑 붙자마자 개박살이 나지 않았던가.
“...트리샤. 천계의 오토마톤 알아?”
“엥? 그게 갑자기 왜?”
알기야 알지.
이면계 내부에 위치한 천계에서, 물질계에 개입할 일이 있을 때 간간히 쓰는 병기라고 했던가.
대단히 단단한 외피를 뚫는 것에 난항을 겪기 때문에, 물질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인간이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대상이라고 들었다.
적어도 아카데미 학생 단위에서 그런 거랑 만날 기회는 없을 텐데?
“신입생중에 그걸 한 방에 잘라버리는 사람이 있더라고.”
“...”
그건 또 뭐 하는 괴물이야.
“그리고 공통적으로 또 선생님이랑 연줄이 있고... 그 인간은 자꾸 어디서 그런 여자랑 줄줄이 엮이는 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엘리야의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색’을 본 트리샤가 다시 화들짝 놀랐다.
또 시꺼멓다. 요즘에는 그래도 하얀색으로 유지되는 기간이 꽤 길더니!
“...그, 그래? 그래도, 다우드 씨랑 무슨 특별한 사이는 아니겠지. 그 사람, 학생회장님한테 이미 코가 꿰였다며.”
“아니, 그게 좀 묘해.”
엘리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사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는 많은데 본인이 누굴 좋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단 말이야.”
“...”
그거 그냥 바람둥이 쓰레기 아니야?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트리샤의 머릿속으로 떠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그런 문장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야가 무척이나 신경 쓰는 사람이다.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지.
“그래서 걱정이란 말이야. 어느 순간 되면 아예 나한테 신경을 끊어버릴까봐.”
“응?”
엘리야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어두워졌다.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린 것처럼.
“저번에 전투할 때도 나는 아예 빠져있으라 하더라고. 이거 좀 위험 신호 아니야?”
“...어?”
트리샤가 눈을 잠깐 끔뻑거렸다.
아니, 이건 뭐랄까.
묘하게 대화에서 핀트가 나가있다.
왜 자꾸 화제가 전투력 쪽으로 빠진단 말인가.
“...저기, 엘리야.”
“음?”
“우리 뭔가, 다우드 씨가 어떤 타입의 이성을 더 신경 쓰냐로 얘기하는 것 아니었어...?”
잠시 상호간에 침묵이 흘렀다.
“...아니.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세니까. 선생님이 나보다는 그쪽을 더 신경 쓸 확률이 높지 않겠어?”
“...”
음.
그녀의 친구는 항상 조금 이상한 부분에서 상식과 묘하게 어긋난 발언을 꺼내놓고는 한다.
언제부터 청춘 사업이 누가 누가 더 세냐로 순위를 매기는 투기장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 부분이, 뭐냐. 나한테서 유일하게 경쟁력 있는 부분 아닌가?”
“...그건 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엘리야가 입을 콱하고 다물었다.
괜스레 땅바닥을 몇 번 걷어차더니, 겸연쩍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을 꺼낸다.
“나, 나한테서, 싸움 잘하는 거 빼면 뭐가 남는 지 모르겠는데...”
몸을 꼼지락거리면서 그런 말을 꺼내놓는 엘리야를 본 트리샤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갈길이 멀다.
진심으로.
“...자신감을 가져. 너 은근히 남자애들한테서도 인기 좋다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
왜 이럴때는 단호하게 부정하는지 모르겠다.
진짠데.
‘...생긴 것도 이쁘장하고, 실력도 대단하고, 누구하고나 털털하게 지내고...’
솔직히, 친구된 입장에서는 그 여성 편력이 대단히 의뭉스러운 다우드란 사람한테는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괜히 팬클럽 같은 것까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걸 좀 알았으면 좋겠단 말이지.
“...뭐, 아무튼. 그래서 요즘 열심히 수련중이야! 그러면 선생님도 나랑 조금 더, 그, 많이 붙어다니시지 않을까...?”
“...”
하지만 발상 자체가 틀려먹었다.
트리샤는 설득을 포기하고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하늘 전체를 산산조각 내듯이 뻗어오른 ‘빛의 기둥’을 발견한 것은, 그 덕분이었다.
“저게 뭐야?”
“그, 글쎄?”
-...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카데미 전체를 펼친 결계에 그 빛의 기둥이 직격하고.
치천사가 펼쳐둔, 아카데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수호 결계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간다.
“...!”
엘리야와 트리샤의 얼굴이 동시에 새파래졌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수호 결계가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람은 이 아카데미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이 근처에, 악마의 ‘본체’들이 묻혀 있는 공허 지대가 있다는 걸.
저 수호 결계가 없다면, 이 자리에 틀림없이 재앙이 열릴 것이란 걸.
이어서.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저 멀리 공허지대에서, 빛의 기둥과 대비되는 거대한 어둠의 연무가 치솟아 올랐다.
마치 결계가 손상된 걸 바로 감지한 것처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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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결계의 틈새로, 시꺼먼 어둠이 비명을 지르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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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 퀘스트 ]〖 챕터 2 – 소년왕 〗
[ !!Alert!! ] [ 긴급 이벤트 작용 중! ]
[ ‘아카데미 습격’을 격퇴하세요! ]
[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 게임 오버입니다! ]
[ 긴급 이벤트로 루트가 개변된 퀘스트입니다. ]
[ 클리어 시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
[ 보상: 영웅의 파편 1개 ]
[ 보상: 악의 정수 1개 ]
[ 보상: ‘이단 심문소’와의 특수 상호작용 ]
[ 보상: 10,000pt ]
그렇게 떠오른 창을 읽을 틈새도 없이, 시꺼멓게 물든 하늘을 보며 이를 악문다.
"..."
주변을 둘러보자, 선각자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천공 분열기를 작동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취를 감춘 모양이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악령들과 악귀들이 잔뜩 깃든 연무가 결계의 틈새로 모여들어,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 계속해서 몸을 부딪히고 있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근처에서 학생들의 비명이 계속해서 터져나온다. 저게 깨진다면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테니까.
괜히 치천사까지 튀어나와서 이 근처에 결계를 쳐둔 게 아니다. 이 근처에 남아있는 악마의 사기死氣는 생명체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를 가진 것들이다.
"..."
원래대로는 저렇게까지 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안에는 저것들이 '탐낼' 것들이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지.
악마의 조각. 그리고 그 조각을 품은 그릇들.
아탈란테가 나를 통해 모든 조각들을 봉인하려고 모아놓은 것들이다.
“...”
이 빌어 처먹을 것도, 나비 효과다.
원래대로는, 저것들이 저런 식으로 결계를 깨부수면서까지 이 안쪽으로 들어오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존재에 의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
하지만, 아카데미 엘판테는 무슨 위협에도 순식간에 대처할만한 인력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곳으로 단박에 뛰쳐 올라가는 신형 하나가 있다.
어떤 종류의 이능으로도 대단히 난해한 기술 취급을 받는 ‘비행’ 기술을 순식간에 조립해낸 인간이다.
영속자 아탈란테. 1000년을 넘도록 살아온 그 세월에 걸맞게 수천의 재주를 가진 아카데미의 총장이, 순식간에 금이 간 결계의 틈새로 도달했다.
이어서 그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온다. 금이 간 부분을 보강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어서, 아탈란테를 지원하기 위해 그 뒤로 또 다른 인간들의 신형 역시 속속들이 도착한다.
신성학부와 마도학부의 교수진들이 분명했다. 마도학부의 학장인 페르시와 신성학부의 학장인 월터의 얼굴도 얼핏 보였다.
-!
그리고 그만한 인력이 달라붙자 임시방편으로도 효과가 있는지, 결계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려던 어둠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다.
대단한 위업일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인간들이 여러 명 달라붙었다지만, 저건 치천사의 결계다. 임시방편이나마 그걸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주변에서 환호성과 안도에 찬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런 사고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안 좋군.’
내가 알기로 소년왕 보스전은 저게 메인이 아니다.
저 인원이 저기 ‘전부’ 몰리는 것 자체가, 위험 신호라는 거다.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고급 인력이 전부 거기에 집중되는 사이, 또 다른 막대한 기운이 한 장소에 뭉치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시계탑이...!”
아카데미 정중앙에 박혀있는 시계탑.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은’ 건물. 그 위쪽으로 거대한 ‘상형문자’ 여러개가 박히기 시작한다.
고대의 언어로 이루어진 주술. 잊혀진 술법. 발카서스의 금술이다.
이어서 그 상형문자들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뿜으며, 주변에 온갖 종류의 ‘진’을 연성하기 시작했다.
그 안쪽에서 기어나오는 것은, 썩고 부패한 것들이 분명한 거대한 괴물들의 무리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수십 m 크기의 괴물. 육편 여러 개를 얼기설기 이어붙여서 만든, 지옥의 형상을 그대로 인체로 빚어낸듯한 모습의 거대한 골렘.
플래시 테어러Flesh Tearer.
제국 모험자 길드의 분류에 의하면, 단순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도시 단위로 비상이 걸리는 ‘특수형’ 마수다.
사상자 없이 안정적으로 때려잡으려면 기드온이나 켄드리드 변경백 정도는 데려와야 하는 괴물.
‘진짜 지랄도 작작...!’
그 모습을 보자마자 머리가 핑 돈다.
지금 이걸 깨라고 나한테 들이미는 거냐?
금술로 조립해낸 언데드들.
플래시 테어러를 제외한다면, 강력함으로 따졌을 때 내가 이전에 처리한 중형 마수와 비슷하겠지만, 저건 악독함에 있어서 훨씬 더하다.
저거, 안 죽는다.
처음부터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이미 시체인 놈을 어떻게 또 죽이란 말인가.
유일한 해법은 하나뿐이다.
금술을 통해 저걸 움직이고 있는 발카서스를 처리하는 것.
-!!!
-!!!!!!!!
진에서 괴어나온 언데드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온몸이 썩은 영향으로 성대도 부패한 모양인지, 바람 빠지는 소리와 끔찍한 쇳소리가 섞여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로테스크했다.
“히, 히이이익...!”
“도망쳐!”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나마 정신머리가 붙어있는 상급생들과 교직원들이 주변을 통제하려 애쓰고 있지만, 저걸 보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게 더 이상하겠지.
아비규환이, 주변으로 펼쳐졌다.
“...!”
상공의 아탈란테가 결국 이를 악물고 주변 교수진들에게 손짓한다.
이곳은 혼자서 버틸 테니, 지상으로 가서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통제하라는 뜻이겠지.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결계를 두들기고 있는 저 공허지대의 사기를 계속 혼자서 상대하는 건 무리다. 그렇게 판단한 교수진이 머뭇거렸지만, 아탈란테가 다시 급하게 손짓했다.
이대로 저 언데드가 통제불능의 학생들을 습격하게 둔다면, 결계가 문제가 아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대학살이 일어난다.
결국, 이에 납득한 교수진이 참담한 표정으로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
아탈란테 정도면, 혼자 30분 정도 버틸 것이다.
30분.
그 안에, 저 괴물들을 뚫고, 시계탑 꼭대기의 발카서스를 쳐야 한다.
아니면 결계가 돌파당하고, 저 어둠에 수많은 사람들이 휩쓸려서 메인 퀘스트가 실패하겠지. 게임 오버다.
동료도, 준비한 ‘수단도’ 제대로 모이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그걸 할 수 있을까?
“...”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문다.
원래대로의 진행이라면, ‘시간 제한’은 없어야 한다.
제대로 모이지도 못한 전력을 규합시키고, 불사의 괴물들을 뚫고 시계탑까지 진격해서, 그 최상층에 있는 소년왕까지 처리하라니.
시간만 있다면 어떻게든 하겠다. 단 하룻밤만 있다면.
하지만 그걸 전부, 30분 안에 하라면.
“...”
이가 갈린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내 계획을 벗어나 찾아든 초대형 변수에 평정심이 흐트러진다.
'...적절한 방법을, 떠올려야...'
이를 악물고 머리를 굴린다.
원래 계획에 비해 상황이 너무 극단적으로 압축되었다.
만약 여기서 떠올리지 못 한다면, 그 뒤에 따라올 일도 당연히 정해져 있다.
게임 오버. 다우드 캠벨 사망.
“그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엘노어가 검을 뽑아든 상태로 이쪽으로 달음박질 하고 있었다.
이 사람, 이 난리통에 자기가 피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나부터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학원을 뒤지고 다녔던건가.
“괜찮나! 어서 그대도 피해야...!”
“엘노어.”
그렇게 말하며 엘노어와 눈이 마주친다.
하지만.
“...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부터 해결해야 해요.”
지금은 이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
내 말을 듣자마자 엘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해결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이건 학생 수준에서 나설 일이 아닐세!"
"...방법만 떠올리면 할 수 있어요."
정확히는, 해야만 한다.
아니면.
"못 하면 제가 죽어요."
"..."
사실 앞뒤 다 자르고 결론만 말한 내용이지만, 지금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의 최선이다.
이를 악문다.
찾아보면 있다. 분명히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집중력이 계속해서 흐트러진다. 머리가 계속해서 핑핑 돈다.
그 때.
엘노어가 내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대."
"..."
"이유는 묻지 않겠네. 필히 무슨 사정이 있으니 그리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알아두게나."
엘노어가 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네.”
“...예?”
“두 명 목숨이 달려있다 생각하고 짜내게. 살아남을 방법을.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네.”
“엘노어, 무슨...”
“죽지 말란 말일세!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격양된 목소리에, 뒤통수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찾아든다.
이 사람,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알았던가.
그제서야 엘노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혀있다.
평소의 무표정이랑 너무 대비되는 얼굴이다.
이 사람에겐 내가 그 정도로 소중한 모양이지.
"..."
그런데, 그런 진지한 기색에 미안하지만.
진짜로 미안하지만.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얼굴 근육 전체를 어떻게 써야 하는 지 감을 못 잡고 있거든. 본인은 이런 표정 지어보는 게 처음인가 보다.
"...음."
느닷없이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이는 내 모습을, 엘노어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본다.
“...다우드?”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신히 웃음을 목구멍 아래로 걷어차서 내려보낸다.
하지만, 의식이 한 번 환기된 덕분에.
시야가 돌아온다.
정신이 다시 맑아진다.
여유를, 되찾는다.
“잠시만요, 엘노어.”
감사를 담아 살짝 미소 지어준다.
그 뒤로, 바로 눈을 감고 의식을 가라앉힌다. 사고를 한계까지 가속시킨다.
내가 가진 ‘패’를 점검한다. 현재 상황에 대입한다.
“...”
머릿속으로 스파크가 튄다.
있다. 방법이.
수가 번뜩였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본 엘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정리한 표정같군."
"...예. 역시 당장 상황을 해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긴 하네요."
"그럼, 도망칠텐가."
“아니요.”
한숨과 함께 엘노어를 바라본다.
피하긴 누가 피해.
저쪽은 작정하고 나한테 한 방 먹이려고 저런 걸 준비해왔다.
그럼 내가 할 일도 간단하고.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하진 않았어요."
정면으로 부딪혀서 분쇄한다.
앞으로 선각자와 충돌할 일이 많이 생기는 건 필연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이 따위 장난질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될 일이고.
“엘노어. 저 믿어요?”
“뭐?”
“저 믿냐고 물어봤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
이전에도, 한 번 나눴던 대화다.
정화자와 대치할 때 내가 했던 말과 똑같거든.
“...”
“...”
그리고, 돌아오는 반응도 그것과 똑같았다.
엘노어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나.”
그 말을 들으며, 씩 웃는다.
시간.
결국 시간이 중요한 거다.
저 녀석이 나한테 10분을 줬으면 난 죽었다. 20분이었어도 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30분.
“...갑시다, 엘노어.”
한숨과 함께 입을 연다.
“우린, 30분 안에 몇 천 년 묵은 괴물의 머리를 따야 하니까.”
내가 이 상황을 정리하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 주어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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