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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56)화 (57/258)

Chapter 56 - 56. 소년왕 (2)

 

 

석양이 진다.

 

그 광경은 항상 소년왕에게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현상은, 의식이 허락하는 기억 너머로 까마득하게 그런 광경을 봐온 지금도 여전히 유효했다.

 

가족, 형제, 친구, 지인.

 

모두가 함께 모여 왁자지껄하게 웃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는 석양과 이어 떠오르는 달에 축배를 들던 시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왕국 아르마다의 마지막 날.

 

모두가 ‘멸망’을 목전에 두고도, 웃으며 그걸 받아들였던 기억은.

 

몇 천 년의 시간을 넘어서도 여전히 그의 머리 속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와 죽음 사이에 놓여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봐도 좋겠지.

 

 

“...”

 

 

그가 눈을 감고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단단히 건조 되어 있는 석재 건물의 일부조차 썩어 문드러질 독기가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얼마 남지 않았네.”

 

 

그 독기의 근원은, 지금도 그의 가슴 안쪽에서 펄떡거리고 있는 ‘뭔가’다.

 

 

“이제, 조금만 더.”

 

 

그가 그쪽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약속’을 지킬 때까지.

 

 

“...”

 

 

문득, 그의 시선이 머나먼 곳에 잠시 머물렀다.

 

한 쌍의 남녀가 보인다.

 

발카서스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건 그 중에서도 남자 쪽이었다.

 

 

“...”

 

 

문득, 그의 얼굴로 미소가 걸렸다.

 

선각자의 말대로라면, 저 남자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일이 가능한지도. 어떤 ‘것’과 엮여서 이렇게 됐는지도.

 

그런데도.

 

 

-제가 당신을 구하겠습니다, 발카서스. 당신과, 당신의 왕국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나도 당돌하게.

 

 

“...진짜로 해낼 수 있다면 말이지.”

 

 

-제 부하가 되어주세요. 종신으로.

 

 

그런 이상한 부탁이라도.

 

 

“못 해줄 것도 없지.”

 

 

그렇게 말한 발카서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는 것이, 멀지 않았다.

 

‘종막’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너무 오래 끌지만 말게나.”

 

 

이어서.

 

 

“기다리는 거라면, 이미 질릴 정도로 했으니.”

 

 

그런 중얼거림이, 허공으로 쓸쓸하게 흩어졌다.

 

 

 

 

“그래서, 수단은 뭔가?”

 

 

엘노어가 나를 짐처럼 덜렁덜렁 들쳐 업고 움직이는 와중에 그런 말을 꺼냈다.

 

뭔가 인간의 존엄을 한참이나 내려놓은 것 같은 이동 방식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빨리 움직일 수만 있으면 장땡이지.

 

 

“상대할 수 있는 난이도가 보통이 아니네. 특히 시계탑 주변에 배치된 것들은.”

 

 

지금 발카서스가 소환해낸 진 내부에서는 온갖 언데드들이 다 쏟아지고 있었지만, 확실히 엘노어의 말대로 가장 강력한 것들은 본체가 있는 시계탑 근처에 있는 것들이다.

 

거의 중형급 마수를 온전히 토벌하기 위해서는 정규 기사 3~4명은 모여야 한다.

 

그런 것들 몇십 개체가 저 장소 하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한다면, 이 정도 되는 사람 입에서도 보통이 아니다란 소리가 나오는 게 당연하지.

 

 

“지금 저걸 일일이 다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30분. 그나마도 발카서스와 보스전까지 치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주어진 시간은 겨우 5분에서 10분 내외다.

 

그 시간 안에 저걸 뚫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해요.”

 

“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그럴 인력은 지금 없는 것 같네만.”

 

 

그 말대로, 아카데미 내부에 상주해 있는 정규 기사의 대부분은 지금 다른 곳을 습격하고 있는 언데드를 막는 것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다.

 

저걸 뚫는 데 도와달라고 할 만한 처지도 못 되지.

 

하지만.

 

 

“아니, 있어요.”

 

 

선각자는 분명히 이런 식으로 갑자기 일을 터트리면 내가 구비해놓은 수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일정을 하루 당긴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아직, 내가 쓸 수 있는 패는 하나 남아있다.

 

오히려 언데드를 상대로는 스페셜리스트에 가까운 인간들이.

 

 

“사람을 찾아주세요, 엘노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풍경이 밀려나가는 와중에, 그렇게 주문한다.

 

 

“일단 높은 곳으로 가야해요.”

 

“그러지.”

 

 

그 말과 함께 엘노어가 바닥을 몇 번 박찼다.

 

 

‘이 사람 진짜 괴물 아니야?’

 

 

한 번 발을 디딜 때마다 풍경의 고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정도다. 박찬 땅이 하나같이 다 산산조각 나있는 걸 보니까 더더욱.

 

아직 조각 하나만 모았는데, 대체 3개를 다 모으면 어디까지 강해진단 말인가.

 

 

“이만하면 충분하겠나.”

 

 

그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주변이 훤히 보이는 고도까지 도달한 엘노어가 그렇게 말했다.

 

 

“예. 충분해요.”

 

 

그렇게 답하며, 찾을 사람들의 특징을 말해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인간들의 인상착의를 토대로 하나씩.

 

 

“푸른색 머리카락, 일반적인 제국인에 비해서 조금 큰 키. 20대에서 30대 중반 남성. 못해도 3명 이상씩 뭉친 녀석들. 인상착의는... ‘지독할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놈들.”

 

“...뭐?”

 

 

괴상한 설명의 엘노어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반문했지만, 이게 진짜 최선의 표현이다.

 

의도적으로라도 인상에서 잊히기 위해 애를 쓰는 직종에 종사하는 놈들이라서. 뭐라고 인상착의를 설명하기가 참 뭐하거든.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데.”

 

 

이건 아마 엘노어밖에 탐지 못 하는 부분일거다.

 

이 사람한테 부탁하는 것도 그래서고.

 

 

“보자마자 당신이 심각할 정도로 기분 나쁜 놈들이 있을 겁니다.”

 

 

인상착의는 숨겨도.

 

지독할 정도로 갈고 닦은 ‘퇴마 의식’의 흔적은 못 숨긴다. 악마의 그릇이라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쪽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들이니 더더욱 그럴 거다.

 

 

“찾아보세요.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놈들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웬만해선 내 근처를 벗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내 지시에 긴가민가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엘노어가 이내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한 설명이군. 멀지 않은 곳에 있네.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놈들이.”

 

 

역시.

 

 

“가까이 가주시겠어요?”

 

“그러지.”

 

 

다시, 풍경이 쏜갈같이 밀려난다.

 

텅, 텅, 하고 뛰어다니며 건물 몇 개의 바닥재를 박살낸 엘노어가 이내 남자 몇 명 앞에 착지했다.

 

 

“히익-!”

 

“뭐, 뭐야!”

 

 

그 모습을 본 남자들이 식겁하며 뒷걸음질쳤지만, 이놈들의 정체를 아는 내 입장에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가증스럽다.

 

 

“연기는 됐고, 시간 없으니까 빠르게 용건부터.”

 

“뭐, 뭐라는...!”

 

“성황국에서 법황이 내린 지시야, 그냥 내가 너무 위험할 것 같으면 적당히 안 들키게만 도와주라는 거겠지만.”

 

 

남자들의 동작이 일제히 멎었다.

 

 

“우리 거래 좀 합시다. 상황이 좀 급해서.”

 

“...”

 

 

여기에 있는 인간들은, 원래대로라면 여기에 절대 없었을 인간들이다.

 

성황국 내부에서도 극비리 취급받는 고급 인재들이니까. 굳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아카데미에까지 출장 나올 이유가 없거든.

 

하지만, 기억을 좀 돌려보면.

 

일전에 법황과 드잡이질을 하면서 나한테 상황을 유리하게 돌려놨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 놈의 성향과 현재 상황을 같이 생각한다면 말이야, 내가 어떻게든 ‘안 죽도록’ 근처에 인원을 배치해놨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왜냐하면.

 

 

“나 죽으면 그쪽으로 책임이 돌아가잖아요. 그렇죠?”

 

 

남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안 도와주면 저 진짜로 큰일나는데요?”

 

“...”

 

“죽을 수도 있어요?”

 

 

내가 줄줄이 꺼내놓는 말에 본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연기’가 쓸모없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래. 이건 사실상의 OK사인이다.

 

이쪽의 협력을 받을 수 있단 소리지.

 

 

‘...좋아.’

 

 

따지자면, 이것도 나비 효과다.

 

원래대로라면 절대 없었을 인간들이, 내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

 

 

“...”

 

 

하지만.

 

원래 뭐든 빛이랑 그늘은 같이 가는 관계라고 했다.

 

나라는 존재에 의해서 시나리오의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섞였다면, 그 중에선 내가 분명히 ‘이용’할 수 있는 긍정적인 것들도 있단 소리다.

 

그러니까.

 

이번엔 그 꿀도 좀 빨아보자.

 

 

 

 

거래 조건은 간단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면, 나도 이쪽이 원하는 정보를 하나 넘겨준다.

 

 

“수지가 안 맞는 느낌이군.”

 

 

리더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명이겠지만, 이름도 들었다. 비즐라라고 하던가.

 

 

“고작 우리 네 명으로 저만한 숫자의 언데드들을 모두 돌파하라고?”

 

 

피식 웃으며 말을 받는다.

 

 

“아뇨, 세명이요.”

 

“...”

 

“한 명은 다른 곳에 가서 찾아와야 할 사람들 있다니까요.”

 

 

엘리야, 유리아, 그리고 루시엔.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셋은 데리고 있어야 보스전이 진행된다.

 

어떻게든 시계탑 최상층까지 이놈들을 올려보내야지만 클리어 최소 조건이 충족되지.

 

 

“그 중에 주황머리 여자한테는 따로 말 좀 전해주세요. 숙련자니까 인솔 잘 하라고.”

 

 

물론, 방법이야 어떻게든 준비해놨다.

 

어.

 

최대한 신속한 걸로.

 

 

“...”

 

 

뭐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는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상대방에게, 실소와 함께 말을 잇는다.

 

 

“퇴마사들이잖아요, 당신들. 여유롭게 할 수 있지 않나?”

 

 

퇴마사라고 한다면, 이능을 다루는 놈들 중에서도 특히나 ‘불경스러운 존재’들에 대한 배격에 특화된 존재들.

 

악마, 언데드, 뱀파이어... 온갖 종류의 ‘이물’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일당백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기량을 가진 놈들이다.

 

 

“...”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분명히 기밀일 게 분명한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냐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꿈틀거리고 있겠지만.

 

 

‘애초에 니들밖에 없다고.’

 

 

법황같이 음흉한 놈이 이런 임무에 투입할만한 건 ‘그 여자’의 세력밖에 없다.

 

그 속에 능구렁이 사육장을 차린 인간이 유일하게 믿는 놈들이니까.

 

 

“...최소한 정보가 뭔지는 미리 들어야겠어. 이런 위험한 일을 시킬거라면 그 정도 보증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결국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짐작하는 건 포기한 모양이다. 그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살은. 그쪽한테 이거 하나도 안 위험하잖아.

 

하지만 장단에 맞춰줘도 상관 없다.

 

 

“세라스한테 전해요.”

 

 

내가 들고 있는 정보는, 이쪽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물건이니까.

 

 

“그쪽이 찾는 물건의 소재, 내가 알고 있다고.”

 

 

세라스 드리무어. 위치로 따지면 법황의 오른팔에 가깝겠지.

 

이 놈들을 포함한 3개의 ‘암약 집단’을 혼자 총괄하고 있는, 세계관 안에서 손꼽히는 암살자이기도 하다.

 

그런 찬란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를 알고 있는 놈들은 세계관에서도 극소수지만.

 

 

“...너, 방금...?”

 

 

실제로 여태까지 격한 감정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던 비즐라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충격받은 목소리로 그런 문장을 흘리고 있었다.

 

굳이 뭐라고 대답해주는 대신 어깨만 으쓱여준다. 굳이 내 밑천을 까발릴 필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맹주님의 이름까지 들먹인다면, 물러설 수가 없군.”

 

 

얼마간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비즐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진 나중에 듣겠다. 지금은...”

 

 

그런 말이 이어지며, 주변으로 진 여러 개가 속속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본업으로 돌아가 보실까.”

 

 

이윽고, 비즐라의 몸에서 여러 개의 이능이 동시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

-!!

 

 

적대적인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이쪽으로 눈을 돌려, 사방으로 몰려드는 중형 마수들.

 

이만한 숫자라면 기사단 한 개 중대 정도는 튀어나와야 순조롭게 제압할 수 있는 숫자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의 인원 말이야.

 

하지만.

 

 

“승천하라.”

 

 

법력, 마력, 신성력이 골고루 섞어서, 이내 비즐라의 몸에서 ‘묵주’의 형태로 피어오른다.

 

그리고, 이어서 치솟는 불꽃.

 

오직 언데드만을 표적으로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윤회’의 불꽃이다.

 

시스템적으로 따지면, 언데드를 상대할 때 무조건 방어력을 무시하고 트루 데미지로 틀어박히는 미친 상성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위력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 하다.

 

 

---!!!!

------!!!!!

 

 

매캐하게 살이 타는 냄새, 끔찍한 비명소리, 괴성과 고통에 찬 비명만이 공간을 수놓는다.

 

저만한 숫자가 달려들고 있음에도, 비즐라와 똑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퇴마사가 두어명 더 붙자 이쪽으로 접근조차 똑바로 하지 못한다.

 

물론 잊혀진 술법에 의해 태어난 존재들답게, 아무리 불타도 끈질기게 이쪽으로 접근한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걸 연료 삼기라도 한 건지, 그 적의는 도저히 사그라들 기미가 안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죽는 속도를, 재생하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체력이 0까지 떨어져도 다시 100% 채우는데 10초면 될 정도로 미친 재생력을 가진 놈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재생된 체력 전부를 태워버리는데 3초밖에 안 걸리는 느낌.

 

설정에 의하면, 저거 조건만 맞춰지면 판데모니엄의 일부 고위 존재들까지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불꽃이다. 아무리 금술에 의해 태어났다지만 중형 마수급에서 대적할 건 아니지.

 

 

‘역시.’

 

 

세라스가 휘하에 두고 있는 암약 조직의 일원들이 무서운 점이 이거다.

 

다른 쪽에서는 대부분 평이한 대신에, 자신들이 ‘특수화’된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어질어질할 정도로 강력하다.

 

애초에 저거 하나 하겠다고 법력, 마력, 신성을 각각 ‘필요한만큼’만 정확하게 계량해서 어릴때부터 수련한 놈들이다. 편집증 수준이지.

 

 

‘...중립 NPC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세라스부터가 처음부터 법황에게 묶여있는 상태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보니까, 이 녀석들을 동료로 영입하는 건 원작에는 아예 없는 기능이었다.

 

어떻게든 우호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만 있었으면 참 좋을 텐데, 그건 아쉽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 대상 ‘세라스’의 현재 조건을 확인합니다. ]

[ 당신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세라스의 취향에 직격으로 꽂히는 모양입니다! ]

[ 직접 만난다면 첫눈에 반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

[ ‘스킬: 치명적인 매력’이 미리 발동됩니다! ]

 

“...”

 

 

이게 뭐시당가.

 

이 스킬, 이제는 얼굴 한 번 안 본 사람한테도 미리 터지네?

 

어이가 없어서 창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자, 문장이 어어서 속속들이 떠올랐다.

 

 

[ 새로운 분기를 개척합니다! ]

[ 대상 ‘세라스 에바트리체’의 관심을 얻을 확률이 폭증합니다! ]

[ 대상과 성공적으로 관계를 맺을 경우, 특수 퀘스트의 발현 조건이 충족됩니다! ]

 

 

< 특수 퀘스트: 최고의 흑막! >

 

[ ‘세라스 드리무어’ 관련 퀘스트가 개방됩니다! ]

[ 클리어 시 대상이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

[ 클리어 시 메인 시나리오에 막대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

[ 클리어 시 ‘초승달의 서약’의 주인이 됩니다! ]

 

“...”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니, 물론 내가 말한 물건이 세라스한테 좀 소중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나한테 ‘복종’하고, ‘초승달의 서약’까지 따라온다고?

 

 

‘...미친 것 아니냐?’

 

 

초승달의 서약이라고 하면 이 녀석이 관리하고 있는 암약 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즉.

 

이 특수 퀘스트라는 것 하나 깨는 순간.

 

이 녀석은 본인은 물론이고, 자기가 다스리던 집단까지 전부 들고와서 나한테 바친단 소리다.

 

여기 있는 퇴마사들도 내가 ‘부하’로 부릴 수 있단 소리거든?

 

 

“...”

 

 

뭐야.

 

뭔데 그거.

 

나 무서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위력이군.”

 

 

내 이성이 희미해지는 사이, 어느 순간 옆에 붙은 엘노어도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세 명이 저만한 숫자의 중형 마수를 전부 밀어내다니. 이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가디언들을 데려왔다고 해도 믿을걸세.”

 

“...”

 

 

그래. 그리고 난 지금 그런 놈들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는 퀘스트가 떠오른 참이다.

 

이 정도면 너무 퍼주는 느낌이라 오히려 내가 어지러울 정도지만.

 

 

“...그러면, 우리는!”

 

 

지금은, 그쪽에 신경 쓸 때는 아니다.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눈앞에 육편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곤봉이 내려꽂혔으니까.

 

 

-!

-!!

 

 

나와 엘노어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구르는 사이, 혐오스러운 살점과 힘줄이 얼기설기 엮인 끔찍한 형태의 거인이 괴성을 내질렀다.

 

 

‘왔구나.’

 

 

심호흡을 하며 상대방을 마주본다.

 

원작에도 있던 미니 보스전. 플래시 테어러와의 전투다.

 

 

“...만만찮아 보이는군.”

 

 

엘노어가 검을 천천히 뽑아들며 그렇게 말했다.

 

 

“특수형 마수라면... 전력을 다해 상대해도 모자라겠어. 다우드, 계획은?”

 

 

엘노어의 말에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굴린다.

 

경과된 시간 5분. 남은 시간 25분. 보스전에 들어갈 예상 시간을 계산하면, 이쪽을 뚫는데 투자되어야 할 시간은...

 

 

“1분 안에 처리하고 가야해요.”

 

 

그 안에, 이 녀석을 돌파해야 한다.

 

까딱 잘못하면 혼자서 도시도 궤멸시킬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진 데다가, 아무리 죽여도 되살아나는 괴물을.

 

 

“...”

 

 

문장만 놓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당장 옆에서 미쳤냐는 기색으로 쳐다보는 엘노어의 시선이 이를 증명하지만.

 

 

“사실 1분도 넉넉잡은건데.”

 

“...”

 

 

어.

 

알고보면,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일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이 녀석을 처리하는 사이 다른 놈들까지 달라붙는 거였는데, 그건 퇴마사들 덕분에 물리쳤잖아?

 

 

“...다우드.”

 

“예?”

 

“난 미친 인간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다네.”

 

“...”

 

“그대가 광인이라고 해서 딱히 핀잔을 주진 않을 테니 안심하게나.”

 

 

고맙습니다.

 

최근 들어 내려 꽂히는 제 평판 중에서는 가장 부드럽게 말씀해주셨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

 

 

살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인이, 이쪽으로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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