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 - 61. 홈커밍 (2)
●
“좋아. 이걸로 끝.”
주변에 쳐 둔 성수를 닦아내며, 루시엔이 축성 작업을 마무리했다.
치천사들의 이름이 순차적으로 적혀 있는 원형의 결계 안에 조심스럽게 앉아있던 유리아가, 뽑아들고 있던 단절자를 천천히 검집 안으로 밀어넣었다.
‘...속도는 좀 줄어들었겠지.’
루시엔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별철 서클릿을 착용 중인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단절자의 검집에서 뻗어 나와있는 ‘하얀색 줄기’가 유리아의 손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것이지만, 단절자를 너무 오랫동안 몸에 붙여둠으로서 점점 그 저주가 몸을 침식하기 시작한다는 증거다.
그나마 이렇게 그녀가 붙어 매일매일 축성과 해주 작업을 반복함으로서 속도를 극단적으로 둔화시키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저 저주받은 유물이 동생의 몸에 질병처럼 뿌리를 박고 있는 건 여전했다.
“...”
단절자.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유물 중 하나.
그 저주가 끝까지 진행되어 사용자를 완전히 잠식한다면, ‘신의 기적’이 지상에 강림한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는 유물이다.
처음부터 저기에 잡아먹힐 의도로 법황이 만들어낸 인조 생명체가 그녀의 동생이고.
그래서 그녀의 몸에서 저걸 떨어트리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맨 처음 검을 잡은 시점부터 그러했지.
‘...만약.’
법황의 의도대로 유리아가 저기에 ‘잡아먹히고’, ‘액막이’가 되어 자신과 강제로 ‘융합’하게 되었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섬뜩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유리아가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별철 서클릿을 착용한 상태지만, 오랜 세월 동안 들인 버릇 때문에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드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행위였다.
“...”
혹시라도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접근한다.
만약 세 발자국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사고가 나기라도 했다간 안 되니까.
하지만, 위험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몰라 신성 가호를 준비하던 루시엔도 안심한 미소를 띄워올렸다.
“...!”
활짝 웃은 유리아가, 그대로 들이받듯이 루시엔의 품에 안겼다.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몇 번이고 그 몸에 머리를 부빈다.
“그래. 이제는 붙어있으니까 괜찮아. 언니도 도망 안 가.”
루시엔이 피식 웃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전에 그녀가 하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서로 이렇게 만질 수 있게 된지도 벌써 며칠째인데, 그럴 때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마치 오랫동안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가 재회한 강아지-
“...”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동생에게 떠올릴만한 문장은 아니겠지.
스스로가 떠올린 불경한 생각에 깜짝 놀란 루시엔이 습관적으로 성호를 그으며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언니?”
그 모습을 본 유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까보다 더 한 양심의 가책이 가슴을 쿡쿡거리며 압박한다.
루시엔이 파들파들 떨리는 입가를 가라앉히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유리아. 일단 그 목줄부터 푸는 게 어떻겠니...?”
솔직히 저런 걸 계속 차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제안에 오히려 유리아의 표정에 살짝 먹구름이 꼈다.
“...왜?”
“...”
그걸 왜 반문하냐고 오히려 이쪽에서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아니, 하지만. 다우드 씨가 준 선물인걸...”
양손으로 목줄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우물우물 대답하는 모습에, 루시엔의 머리로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들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다른 건 뭐든지 고분고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유리아라도, 이 주제 관련해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냈다간 이런 식으로 완강하게 나와버린다.
“언니는, 다우드 씨가 싫어?”
싫어하는 게 정상이지 않을까.
남의 동생한테 목줄이나 채우고,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걸 잡고 사람을 물건처럼 집어던지기나 하고!
“...”
그럼에도, 글쎄.
싫어하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도저히 그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 자매에게 헌신하듯 도와주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당분간은 아카데미에 그대로 체류하고 계셔도 될 겁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발카서스와의 일을 정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황국 쪽에서 가져온 공식 문서를 그녀에게 전달해주며 꺼낸 말이었다.
-이제 당분간은 성황국에서 그쪽 건드릴 생각도 제대로 못 할 테니까, 그동안은 유리아랑 붙어 계시면서 단절자가 더 이상 그쪽을 잠식하지 못 하도록 최선을 다해주세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이걸 받아왔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대체 법황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쪽은 그 남자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능한 선에서 허락해주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그렇게 능력도 있는데다가, 지금도 있는 힘껏 이쪽을 도와주려는 남자다. 싫어할 이유는 없지.
“싫어하지는, 않아.”
“그럼...”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아...!”
그녀가 씩씩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유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화를 내는 거야?”
“...”
사실 그녀의 말대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부정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그 남자를 좋게 보는 편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건 그것대로 뭔가 지는 느낌이다.
“...그런 게 있어.”
“음, 다우드 씨 얘기하니까 다우드 씨 보고싶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이 그리 마음에 걸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금방 그런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어째, 항상 이렇다. 반나절 정도는 그 남자랑 떨어져 있어도 별 말 안 한다.
하지만 하루 정도면 눈에 띄게 초조해지기 시작하더니, 이틀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전력으로 그쪽을 찾아나서기 시작하지.
오늘 중으로 어딘가로 떠난다고 했던 그 남자도, 이걸 생각해서인지 이틀 안에는 돌아온다 했었던가.
“그보다, 나가자. 여기서 할 일도 다 끝냈으니까.”
그렇게 말한 루시엔이,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복도로 나섰다.
이런 식으로 항상 작업을 완료하고 나면 이 방을 대실해준 아카데미 직원에게 사용이 끝났다 보고해야 했으니.
“어머- 오늘은 일찍 끝나셨네요-?”
“항상 신세지고 있습니다, 오필리아 경.”
루시엔이 풍성한 금발을 늘어트린 여기사에게 목례하며 그렇게 말했다.
항상 느긋해 보이는 이 신입생 기숙사 사감이, 항상 비는 방을 그녀들에게 빌려주어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뭘 하고 계십니까?”
루시엔이 오필리아 경의 손에 붙잡혀 있는 거대한 나무 문짝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색이 기사답게 저만한 크기의 물체를 혼자서도 영차영차 옮기는 모습이지만, 애초에 저런 게 왜 복도에서 운반되고 있단 말인가?
“아뇨- 기숙사 내부에 사고가 좀 있어서요-”
“사고요?”
“방 한쪽에 경첩이 나가버려서요- 그거 고칠 여분이에요-”
“...왜 그런 짓을?”
“여학생 두 명이 순례 귀향 때 동시에 가게 됐다는 말 듣고 어지간히 화가 났나봐요- 아예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네요- 그 남학생도 참 어지간하죠-”
“...”
이상하다.
이름은 하나도 듣지 못했는데 어째선지 누구한테 일어난 일인지 아주 느낌이 온다. 성녀의 직감이랄까.
“...그거 혹시 다우드 캠벨입니까?”
“어, 그 학생 이제 유명한가봐요-”
그럼 그렇지.
거 봐라.
자신이 그 남자를 꺼려하는 것도 이유가 있-
“어쩐지 대단하신 분들도 그 학생의 거취를 묻더라구요- 요즘 들어 갑자기 인지도가 올랐나-”
“...예?”
이번에도 성녀의 직감 덕분인지, 섬칫한 느낌이 루시엔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뇨, 이번에 그 학생이 캠벨 남작가로 돌아가냐고 물어본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
“...혹시, 그게 누구인지 저도 알 수 있겠습니까?”
“어, 딱히 대외비도 아니니 괜찮은데요-”
오필리아 경이 건내준 서류를 받은 루시엔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것들을 전부 정독했다.
이어서 그녀가 그걸 반으로 접어 오필리아 경에게 돌려주었다.
아까 전과 다르게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유리아.”
“응?”
“다우드 씨 보고 싶다고 했지?”
“으, 응? 그런데?”
“잘 됐네. 지금 당장 보러가야 할 것 같아.”
“...”
갑자기?
이렇게 느닷없이?
유리아조차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살짝 벌리는 사이, 루시엔이 고개를 휙 돌려 다시 오필리아 경에게 말했다.
“경.”
“네에-?”
“아카데미 내부에서 캠벨 남작가까지 직통으로 가는 교통편이 있습니까?”
“아마 중앙 광장에 가면 기차편이 있을 거에요-”
“고맙습니다, 오필리아 경!”
그렇게 말한 루시엔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달려갔다.
심지어는 손을 잡고 있는 유리아까지 당황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본 오필리아 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거긴 무슨 일로 가시나요-?”
“급한 일이 갑자기 생겼습니다!”
성녀 입장에서 확언할 수 있다.
이미 용사 후보와 트리스탄 공녀랑 함께 내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지러운데.
거기에 더해 이 서류 안에 적혀 있는 인간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이게 둔다면.
“잘못하면 캠벨 남작가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런 대답이, 열심히 달려가는 루시엔에게서 꼬리처럼 길게 흘러나왔다.
●
< Mastery Info >
[ 특성: 금술 – 기초 ][ 등급: 기초 ]
[ 숙련도: 0% ]
[ 매개를 희생하여 몸에 획을 새길 수 있습니다. 몸에 새긴 획의 모양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가진 진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
[ ■ 살아있는 생물만을 매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 ■ 현재 새길 수 있는 획은 최대 3개입니다. ]
[ ■ 획의 개수에 따라 진의 위력이 강해집니다. ]
[ ■ 숙련도를 높인다면 새길 수 있는 획의 개수와 형성할 수 있는 진의 종류가 늘어납니다. ]
진지한 눈으로 그런 창을 읽어내린다.
확실히, 세계관 최고의 금술사가 주는 특성이라면 이거밖에 없지만.
굳이 스킬이 아닌 특성의 형태로 날아온 게 조금 특이하다 싶었는데, 이런 이유였나.
획이 3개면 아마 진 한 개를 그리는 것이 한계일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만을 매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좀 걸리기도 하고.
‘이것만 해도 큰 수확이지.’
하지만 당장 나와 전투할 때 발카서스가 선보였던 금술의 위력만 보아도 그걸 내가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커다란 메리트다.
조합에 따라 효과를 내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지.
즉발로 꺼내쓸 수 있는 강력한 술식이라는 건 숙련자 손에 들어간다면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을 보이거든.
아직 한 개 밖에 못 쓴다지만 그거야 숙련도를 올리며 해결하면 되는 노릇이고.
‘이것만 충분히 쌓였으면 바로 숙련도부터 올렸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창을 전환한다.
< System Log >
[ ‘파티 멤버’에게 넣은 버프로 전투에서 준수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
[ AP가 지급됩니다! ]
[ AP를 통해 원하는 특성의 숙련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
이건 이전에 발카서스와 전투하면서 쌓였던 것들이다.
이전에 중간고사 때 학생들을 무더기로 상대하면서도 쌓였던 거지만, 지금은 그때랑 비교하면 반도 안 되는 양밖에 없다.
사실 힘들기로 따지자면 발카서스가 훨씬 힘들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전과’라면 보통 상대방의 강함보다 처리한 ‘숫자’로 결정되는 경향이 강하다.
당장 이걸로 숙련도 덕을 보려면 조금 더 많이 쌓아둬야-
“현실에서 도피하고 계십니까, 도련님?”
“...”
건너편에서 헤르만이 건내는 말에 의식이 다시 현실로 끌려나왔다.
항상 온화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노집사가, 어쩐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시선을 피하며 답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이게 수습 가능한 상황인지 의심이 들어서 말입니다.”
헤르만이 내 마차 양쪽으로 딱 달라붙어 따라오고 있는 두 개의 마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만큼 특이한 광경까진 아니다.
기차역에서 내린 이후로는 이렇게 마차로 이동하는 게 보편적인 상황이라, 근처로 보이는 영지민들도 마차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을 내놓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마차 양쪽에 새겨진 게 ‘켄드리드 변경백 가문’의 인장과 ‘트리스탄 공작 가문’의 인장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인간들이라면.
대체 이게 얼마나 기괴한 상황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겠지.
이 둘이 동시에 보이려면, 최소한 황궁의 중요 행사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도저히 남작가의 영지에서 볼만한 광경은 아니란 소리다.
“...”
아니.
진짜로 나도 어지럽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문이 작살나면서 엘리야와 엘노어에게 팔 한쪽씩 잡고 끌려나올 때부터 그랬지만, 진짜로 그 두 명이 ‘가문의 마차’까지 미리 대기시켜뒀을 줄은 몰랐다.
엘노어는 진작에 이 행사에 어마무시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만, 엘리야까지 그럴 줄이야.
‘...그거 진짜 장난 아니라고.’
가문의 인장이 박힌 물건을 꺼내서 다른 이의 영지에 방문했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히 진지한 의미다.
이건 단순히 교우 관계를 맺은 친구들끼리 상대방의 고향에 놀러갔다 정도로 퉁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란 소리지.
이건 ‘가문’끼리 ‘공식적인 교류’를 원하다는 의사 표명이나 다름 없으니까.
즉.
이 둘 다, 내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꽤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걸 원한다는 뜻이다.
“괜찮으시다면, 전 먼저 내려서 남작님께 준비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저분들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영주성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헤르만이 그런 말을 꺼내들었다.
“...그러세요.”
“도련님.”
살짝 고개를 돌려 헤르만을 바라보자, 노집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탓할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오래 보필한 입장에서, 도련님이 엘판테에서 눈에 띄지 않으며 생활하시겠다고 할 때부터 믿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길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죠.”
“...진짜요?”
“아마 영지민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눈만 마주쳐도 상대방을 후리시던 분이 쥐 죽은 듯이 지내기는 무슨...”
“...”
“물론 그걸 감안해도 상대 가문의 여식분들이 조금... 어마어마하시지만 말입니다.”
헤르만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느 쪽이고 상처 입히지 않고 잘 수습하려면, 고생 좀 하셔야 할겁니다. 도련님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시리라 믿습니다만.”
“...”
그렇게 말하고 마차에서 내려 영주성으로 향하는 헤르만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그래.
그건 나도 백번 동의한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순례 귀향 행사’는 시나리오 내내 티격태격 대는 이 두 명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다.
“...”
물론 그 내용을 생각하면 내가 고생을 좀 할 것이다. 헤르만의 말대로.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구수한 고향 내음이 비강을 타고 한 바퀴 돌았다.
엘리야도, 엘노어도, 타이밍에 맞춰 마차에서 함께 내린다.
“...”
“...”
“...”
냉기가 감돈다.
엘리야랑 엘노어도 평소에 그렇게 죽이 잘 맞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수준의 긴장감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문의 마차까지 꺼내서 끌고 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본인들도 잘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오죽하면 세 명 모두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걷는 상황이 영주성 안에 들어갈 때까지 이어질까.
“...”
죽을 것 같다.
분위기의 환기가 필요하다.
조금 난폭해도 좋으니까 뭐든...!
"이 벌레 같은 놈이, 내가 이거 진작 처리해놓으라고 몇 번을 말했냐. 응?”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골딕 자작님. 말씀하신 내용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
물론 그런 걸 바라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 난폭하길 바라진 않았는데.
아버지의 집무실 안쪽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어보자, 안쪽에서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와 그쪽에 대고 욕설을 퍼붓는 뚱뚱한 남성이 있었다.
‘골딕 자작이라면...’
나도 아는 사람이다.
이웃 영지에 있는 귀족. 광산업을 주력으로 삼는 골딕 영지의 영주다.
우리 영지 안쪽에 있는 철광맥을 눈독 들여 해당 영토를 판매하라고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다던가.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았던 걸로 안다.
“그럼 거기에 있는 영지민들은 어디 가서 생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뭣하면 남작위에 불과한 쓰레기 밑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탓해야 하지 않겠어?”
조용히 입을 다무는 아버지의 모습 위로, 비릿한 웃음을 지은 골딕 자작의 문장이 이어졌다.
"아니면, 진짜 내 손으로 그놈들을 강제로 퇴거시켜야겠나? 응? 내 뒤에 누가 있는 지 몰라서 그래?"
"...자작님. 그들 모두 아무 잘못 없는 선량한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는 그 정도가 꽤 심하다.
난폭하기는 해도 선은 지키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까지 경우 없이 나오는 지 모르겠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죠?”
그런 말을 내뱉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이런 난장판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는 기색이다.
“잘 왔다, 다우드. 여독이 심할테니 일단 조금 쉬고-”
“아니, 잘 됐네. 네놈 아들, 엘판테에 입학할만큼은 능력이 있다며? 차라리 이쪽이랑 이야기 하는 편이 더 빨리 풀리겠어. 네놈 하고는 답답해서 이야기가-”
그렇게 말한 골딕 자작이 내쪽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이내 그 앞을 가로막는 두 명의 신형에 눈을 찌푸렸다.
“...뭐야?”
“태도가 꽤 건방진데, 도저히 귀족의 양식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은가. 조금 진정하고 용건을 말하는 편이 좋겠군.”
“동의해요.”
엘노어와 엘리야가 살짝 찌그러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건 좋지 않은-”
“하. 기껏해야 남작가의 아들이 데려온 여자들이면, 분명히 대단찮은 가문 소속이겠지. 어이, 비켜.”
골딕 자작이 여전히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 아니라 거기 있는 쓰레기의 아들한테 볼 일이 있으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니. 딱히 나를 욕해서 화가 난 게 아니다.
아버지를 욕한 건 몰라도 내가 욕 먹는 건 아무래도 좋다.
다만.
방금 그 말을 듣고.
눈앞의 여자 두 명이 동시에 ‘화가 미친 듯이 났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져서 그렇지.
“...쓰레기의 아들에. 대단찮은 가문의 여식이라.”
엘노어가 피식 웃으며 말을 흘렸다. 엘리야도 어이 없다는 헛웃음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내 소중한 이를 모욕하고, 그이의 친지까지 모욕했으며, 내 가문까지 모욕했군, 자네.”
“아, 그럼요. 거의 똑같은 말이 저한테도 그대로 적용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엘노어도. 그쪽에 말을 얹는 엘리야도.
그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각오는 다 끝내셨다고 봐도 좋겠죠?”
냉기가 흐른다.
다만, 아까 전과는 달리. 딱히 서로에 대한 긴장감에서 비롯된 분위기는 아니다.
'감정을 쏟아낼 대상'이 지정된 적의에서 비롯된 냉기지.
"..."
나도 모르게 슬쩍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다.
이 뒤에 불 ‘파란’이, 직감적으로 느껴졌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