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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63)화 (64/258)

Chapter 63 - 63. 켄드리드

 

 

골딕 자작은 타의에 의해서 본인의 집무실을 개방하게 되었다.

 

최대한 온건하게 표현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 그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문에 내려찍어 부숴버렸다고 하는 것보단 낫겠지.

 

 

“...”

 

 

골딕 영지의 행정관은 실신한 영주를 그렇게 ‘사용한’ 뒤에 쓰레기 버리는 것처럼 집무실 안쪽에 내던지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신한 것 기어코 질질 끌고 오시더니, 이러려고 들고 오신 거에요?”

 

“뭐, 적어도 주인한테 허락을 맡아야 할 일은 있으니까 말일세.”

 

 

그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도, 행정관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금거리고 있었다.

 

너무 어이 없는 광경에 뇌가 상황을 따라가질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모든 병력이 돌파당했다고? 농담이겠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아카데미 학생 세 명에게 영지의 경비 병력이 통째로 쓸려나가고, 영주성까지 무주공산으로 뚫린 지금 상황 말이지.

 

 

“그분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자 두 명 뒤에서 쫄쫄 따라들어온 남자가 대단히 유감이라는 기색을 섞어 그렇게 말한다.

 

적어도 이 자연재해 같은 여자 두 명을 상대하면서 도망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

 

 

그 말을 듣고 행정관과 체스터 백작의 시종장이 뭐라고 대답할 생각도 못 하는 사이, 골딕 자작의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백발의 여자가 거침없이 모든 서랍을 열어젖혔다.

 

 

“이건 가져가겠네.”

 

 

순식간에 영지의 인장이 찍혀있는 도장을 꺼내든 여자가 바닥에 누워서 꿈틀거리고 있는 골딕 자작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쪽에서 도저히 인간의 언어라고 보기도 힘든 웅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절대 안 된다, 어쩌구에 가까운 말이겠지만.

 

여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인도 고맙네. 영지의 인수 절차는 내 본가에서 적법하게 밟도록 하지.”

 

“자, 잠깐만요! 이게 무슨 폭거입니까!”

 

 

하도 얼이 빠져서 지금까지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있던 남자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전부 죗값을 치룰 겁니다!”

 

 

참으로 그러했다.

 

아무리 자작위에 불과하다지만, 골딕 자작은 엄연히 제국의 귀족이다. 법에 의해 그 신분이 보장받는 자에게 이런 폭거는 어떤 방식으로든 용납될 수 없다.

 

 

“귀족을 폭행하고, 영지에 침입해서 이런 불법 행위...!”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던 행정관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아마 엘노어가 자신을 서늘한 시선으로 쏘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몇 가지는 알려줘야겠군.”

 

 

엘노어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분명 적법한 절차라고 했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니란 말일세.”

 

“그게, 무슨?”

 

“후작위 이상에 해당하는 인물에 대한 가문 모욕은 충분히 분쟁 행위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이 되네. 하물며 사유를 제공한 자가 그런 것에서 패배한다면 영지 몰수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이어서 행정관의 얼굴로 명패 하나가 날아들었다.

 

트리스탄 공작가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신분증이 행정관의 이마에 툭 맞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트리스탄 공작가에서 해당 안건을 정식으로 처리할걸세. 불만이 있다면 제국 대법원에 항소하게나.”

 

“...”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걸 훑어본 행정관이, 이내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이게 틀림없이 진품이란 걸 곧장 알아차렸기 때문에.

 

 

“...”

 

 

그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골딕 자작과 이걸 던진 여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20년 동안 보필해온 그의 영주가 뭔가 대단히 큰 실수를 저지른 건 확실해 보였다.

 

그것도, 절대 얽히지 말아야 할 괴물들을 상대로.

 

 

‘...그렇다면, 영주님을...!’

 

 

결심은 빨랐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20년이나 쌓아온 유대가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행정관의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깃들었다.

 

 

“골딕 자작님.”

 

“...으어어.”

 

“그동안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행정관이 순식간에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자신은 그의 주인이 일으킨 사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대단히 명료하게 주장하는 행동이었다.

 

 

“...”

 

“...”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 충절이란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곱씹고 있는 사이, 엘노어가 종이를 하나 꺼내들어 뭔가를 슥슥 적어내렸다.

 

이내 거기에 영주의 인장을 쾅 찍더니, 그대로 다우드에게 내민다.

 

 

“다우드.”

 

“...예?”

 

“오늘부터 그대는 자작일세.”

 

“...”

 

 

마치 학급 반장이라도 뽑는 것처럼 자작령 하나가 통째로 위임되는 순간이었다.

 

 

 

 

< System Message >

 

[ 귀족 작위 ‘자작’을 수여받습니다! ]

[ ‘스탯: 권력’이 F에서 D로 상향 조정됩니다! ]

[ ‘던전 토벌’이 가능해집니다! ]

[ ‘마수 합동 토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

 

 

눈앞으로 그런 창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이마를 쓸어내린다.

 

 

‘...이거 초대박이긴 한데.’

 

 

메인 시나리오의 보상을 제외하면 게임 안에서 가장 굵직한 성장 이벤트인 ‘유물 탐색’은 모두 던전 토벌과 마수 합동 토벌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두 이벤트 모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에 한해서만 참석 조건이 주어지는 이벤트들이다.

 

얼마 전에 치천사의 결계까지 작살낸 선각자의 천공 분열기 같은 경우만 봐도, ‘강력한 유물’은 그것만으로도 거의 전략 병기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지고 있거든.

 

오죽하면 초반에 다른 거 다 포기하고 처음부터 황궁하고 호감작만 해서 아예 영지부터 수여받고 시작하는 루트까지 있었을까.

 

 

‘영지는 빨리 먹어두는 게 좋긴 하지.’

 

 

시나리오 후반으로 갈수록 ‘대형 집단’과 관련된 이벤트가 잦아지는 특성상, 그쪽이랑 드잡이질을 하게 될 내 세력 기반이 있고 없고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괜히 ‘권력’이란 스텟이 상태창에도 박혀 있는 게 아니지. 이게 높아야지만 해금되는 이벤트도 수두룩하거든.

 

당장 이어지는 3번째 챕터인 ‘뒤집힌 해일의 사도’와의 일전에서도 이건 엄청난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부족 연합이랑 얽힐 일도 많고, 그쪽이랑 ‘협상’할 일도 많은 챕터라서. 영주의 권한이 있어야지만 열리는 분기도 분명히 있다. 클리어 난이도를 대폭 낮추는 방향으로.

 

 

“...이런 거, 그냥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중요한 걸 이런 식으로 받을 줄은 몰랐다.

 

 

“그대가 하는 짓을 보면 어차피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그대를 낚아채서 줬을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

 

“그리고 법적으로도 작위가 너무 차이나면, 음. 가문끼리 교류에도 차질이 좀 생길 수 있으니 말이네. 적어도 후작위까진 올라와야 큰 불만이 안 나오겠지.”

 

“...예?”

 

“앞으로 그대가 차차 수여받게 될 작위 중 시작 단계라고 생각하면 된단 말일세.”

 

“...”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자작위를 던져주고도 그게 시작 단계라는 말을 하고 있다.

 

 

“...뭐, 선생님이 작위를 가지는 건 저도 동의하는 바인데요. 고작 남작위에 앉혀두기엔 사람이 가진 재주가 너무 말이 안 돼서.”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엘리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단 저것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엘리야가 가리킨 곳에는, 긴장한 표정으로 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골딕 자작의 일은 대단히 놀랍군요. 유감을 표하겠습니다.”

 

 

여태 잠자코 있던 남자가 간신히 침착을 되찾은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말했다.

 

트리스탄 공작가의 인장을 보고 어지간히 얼이 나갔던 모양이지만,

 

 

“체스터 백작을 모시는 시종장으로서, 본 백작가는 해당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립니다. ”

 

“...글쎄요. 너무 눈 가리고 아웅 아닌가?”

 

 

엘리야가 입꼬리를 비틀며 그렇게 답했다.

 

 

“애초에 믿는 구석이 없으면 아무리 위계 차이가 난다지만 남의 영지에 와서 그렇게 행패는 못 부려요. 본인도 본인 입으로 뒤에 누군가 있다 했고.”

 

“그게 체스터 백작가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심증만으로 제재를 가하는 건 명백한 위법입니다.”

 

“...”

 

 

엘리야가 표정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주변 영지에 행패를 부리는 건 체스터 백작가가 명백했지만, 꺼내놓는 말만큼은 틀림없이 정론이었으니까.

 

 

“만약 이 자리에서 저한테 물리적인 압박을 가하려고 한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그럴 수단도 있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시종장의 등 뒤로 기골이 장대한 강철의 거인이 새하얀 증기를 내뿜었다. 이내 위협적인 기색으로 무기를 이쪽으로 겨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야와 엘노어의 표정도 동시에 딱딱해졌다.

 

무시할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본인들도 알아차렸기 때문이겠지.

 

 

‘오토마톤?’

 

 

이전에 별의 심장을 두들겼을 때 봤던 오토마톤보다 훨씬 그 품질은 떨어져 보이는 물건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강력한 상대다.

 

그걸 수월하게 처리한 건 유리아가 있었으니까 가능한 거고, 원래 오토마톤 자체가 학생 선에서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괴물 같은 여자 두 명한테도 적용되는 이야기고.

 

 

“물증 없이 상대방을 즉결 심판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건 이단 심문소와 북부의 주인뿐이지요. 트리스탄 공작가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십니까?”

 

 

중년 남자가 내 얼굴을 보고 중간에 그렇게 말을 바꿨다.

 

내 측은하다는 표정을 보고 본능적으로 뭔가 느끼는 게 있던 모양이지.

 

 

“아뇨.”

 

 

한숨을 내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여기 안에 들어오면서 대체 언제쯤 ‘그 사람’이 등장하나 재고 있었는데.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상대방이 직접적으로 적의를 발하지는 않지만, 압도적인 기량 차이가 감지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B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이런 창이 떠오른 걸 보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 소리다.

 

아무런 적의도, 행동도 없이.

 

그저 ‘존재감’만으로 이런 창이 떠오르게 만들만한 인간은 별로 없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야와 엘노어에게도 손짓해서 뒤로 몇 발자국 물린다.

 

이래야 ‘피해 범위’에서 좀 안전하겠지.

 

 

“뭐든지 말이 씨가 된다는 점이 떠올라서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

 

 

시작은 그냥 저 멀리서 쿵, 하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멀리서 북을 치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죠?”

 

 

시종장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소리가 다시 울려퍼진다.

 

아까보다는 좀 더 크게. 건물 전체가 울릴 정도로.

 

 

-!!!

 

 

이번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처럼.

 

그 여파도 더 강하다. 건물 전체가 들썩이며 곳곳에서 흙먼지가 쏟아진다.

 

 

“...이게 무슨 일이죠? 공성 병기라도 가지고 온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안 가져왔는데.

 

그것보다 훨씬 심각한 인간이긴 하다.

 

 

-!!!!!!

 

 

고막이 멀어버릴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영주성의 벽면 한쪽이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주변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 한 명.

 

 

“흠.”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자신이 작살낸 벽 안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등 뒤로는 영주성 바깥으로 이어지는 모든 벽에 일렬로 사람 크기만한 구멍이 쭉 뚫려있었다.

 

 

“...이능의 운용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지금 저걸 전부 맨주먹으로 부수며 들어온 건가?”

 

 

엘노어에게서 그런 문장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자작령답게 아담한 사이즈의 성채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모든 영주성은 대형 마수에게 습격당해도 잠깐은 버틸 수 있을 만한 안전 규격을 표준으로 삼아 건축된다.

 

그걸 아무런 이능도 없이, 그저 ‘단련한’ 맨주먹으로 깨부쉈다는 건, 지금 이 남자가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것을 넘치도록 시사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 역시 그런 맥락이겠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변경백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사람들을 쓱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이 엘리야와, 엘리야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는 오토마톤에게 한 번씩 돌아간다.

 

 

“...”

 

 

이내 한숨을 한 번 내쉰 남자가 오토마톤 쪽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무, 무슨!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기겁한 시종장이 그렇게 말하며 오토마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

 

 

남자가 가볍게 쳐올린 어퍼컷에, 그 거대한 강철 오토마톤이 한 번에 산산조각 나버렸으니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잔해들이 영주성 천장을 모조리 박살내며 하늘 높이 치솟아 버린다.

 

거의 만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만큼 어이 없는 장면이었다.

 

 

“...!”

 

 

나를 제외한 전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종장은 아예 그 모습을 보고 한 번에 혼절해버린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이능조차 쓰지 않고 해낸 일이었다.

 

인간이. 못해도 몇십 톤은 나갈만한 오토마톤을 상대로.

 

 

“뭔데 남의 딸한테 무기 겨누고 있어. 죽을라고.”

 

“이, 이게, 무슨...! 체스터 백작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귀족의 사유 병력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건 제국법에...!”

 

“그래. 체스터 백작.”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름 말해줘서 고맙다. 찾을 수고를 덜었네. 내 가족한테 험한 짓 한 놈들은 죄다 싹을 뽑아야 직성이 풀리거든?”

 

“무, 무슨 권한으로 그런 협박을...!”

 

“난 딱히 누구 조지는데 허락 같은 거 필요 없어. 제국법이 그래.”

 

“...”

 

 

시종장이 얼이 빠져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지만.

 

아까도 말했지 않나.

 

뭐든 말이 씨가 된다.

 

 

“...변경백님?”

 

 

엘리야가 혼이 나간 목소리로 그렇게 흘린 목소리에, 시종장이 혼비백산하여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변경백? 무슨, 아니, 설마...!”

 

 

이 녀석이 말한 즉결심판권 보유자 중에서, ‘북부의 주인’ 어쩌고 했었지.

 

그거, 저 사람을 말하는 거다.

 

 

“아빠라고 부르라 했지, 임마.”

 

 

그렇게 말한 남자가 씩 웃었다.

 

가까이에 있으니, 이 남자가 얼마나 기괴할 정도의 존재감을 내뿜는지 더욱 확연하게 느껴진다.

 

아까 날아간 오토마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장대한 기골. 허름한 바지. 완전히 탈의한 상반신. 전신에서 생동감 있게 꿈틀거리고 있는 근육과 그 모든 몸을 가로질러 나 있는 무지막지한 흉터들.

 

겉모습만 보면 오랫동안 방랑해온 무도가나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나는 이 사람이 딱히 무도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안다.

 

오히려, 이건 이 사람 나름의 ‘신앙의 증명’이나 다름 없는 모습이다.

 

 

“...”

 

 

세라 세계관에서 성기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성기사라고 함은 보통 신들의 사자라고 알려진 천사들의 이미지를 표상으로 삼고, 거기에 맞춰 스스로를 단련하는 인간들이 대부분인데.

 

첫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사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르는 성기사들이다. 신실하고, 선량하며, 고결하고, 무엇보다 품위와 품행에 신경 쓴다.

 

이쪽 분야의 정점이 칼리반 같은 경우지. 압도적인 무력까지 갖춰 모든 기사의 귀감인 가디언으로 활약하는 경우.

 

기사단에서도 성기사라고 하면 이런 모습을 권장한다. 일단 보기 좋잖아. 인기도 좋고.

 

다만.

 

학계에서는 꽤 마이너한 취급을 받는 ‘천사들의 진정한 모습’을 믿는 놈들이 있거든.

 

매일매일이 극단적인 육체 노동이라 한계까지 단련된 천사들의 몸에 깊은 감명을 받고 매료된 부류들.

 

그 모습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과 고행에 정진하는 미친 헬ㅊ... 아니, 육체 단련파들.

 

그 분야의 정점이 저 인간이다.

 

전장에도 무기 하나 없이 맨주먹에 맨몸으로 튀어나가는 세계관 최고의 변태.

 

크라트 벨리움 라 켄드리드.

 

통칭 켄드리드 변경백.

 

 

“하지만, 그 체스터인지 뭔지 하는 놈은 일단 나중에 보자. 지금은 더 급한 게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시종장에게서 몸을 돌린 변경백이,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여, 여기는 어, 어쩐 일이세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엘리야가.

 

무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쳤다.

 

소년왕과 목숨을 걸고 대치할 때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녀석이라는 걸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울 장면일 것이다.

 

 

“편지 받아보니까 기색이 좀 심상치 않아서. 직접 구경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왔다. 우리 딸 괴롭히는 놈이 누군지.”

 

 

그렇게 말한 변경백의 시선이, 이번엔 내쪽으로 휙 돌아왔다.

 

 

“그래서.”

 

 

곧 이어.

 

 

“네가 다우드 캠벨이냐?”

 

 

현 세대 최강의 성기사가, 이빨을 다 드러낸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뒷걸음질 치고싶다.

 

맨몸으로 호랑이를 만난 사람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하지만.

 

 

“...”

 

 

그 모습을 보며, 단어를 고른다.

 

 

【Event: 첫 인상】

-켄드리드 변경백은 당신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안 좋은 쪽이지만, 변경백은 직접 본 것만 믿는 인물입니다!

-골딕 자작의 영주성 안에서 해당 인물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보세요!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 관련해서 떠오른 이벤트 창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지금 크라트는 딱히 나한테 호의적인 용건으로 접근한 건 아니다.

 

이어지는 말만 해도 그렇다.

 

 

“생각보다 더 뭣도 없는 놈 같은데. 말라비틀어진 작대기처럼 생겨가지고. 네가 우리 딸 마음 고생 그렇게 시키고 있다며?”

 

“...”

 

 

그거야 평가하는 사람이 당신이면 누군들 그렇게 안 보일까.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와중에도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간다.

 

이 사람을 만난다는 이벤트가 떠오른 이후부터 떠오른 ‘계획’은 있다.

 

 

“...저 하나 보자고 그렇게 먼 길을 오셨습니까, 변경백.”

 

 

다듬은 목소리로 간신히 그런 말을 떨림없이 꺼내놓는다.

 

양자 간의 격차를 생각하면 호기롭다고 봐도 될 만한 내용이겠지.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런 태도를 좋아할 거다,

 

실제로 이 말을 들은 크라트의 눈썹도 살짝 휜다.

 

‘이 놈 봐라?’하는 기색이 녹아있는 모습이다.

 

 

“새끼, 담력은 마음에 드네.”

 

 

그 웃음에 걸린 사나움의 농도가 더욱 짙어진다.

 

 

“그런데 난 친하지도 않은 놈이 객기 부리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전신이 찢어지는 것 같다. 이 사람이 뿜어내는 압박감이 그 수준이다.

 

 

“...!”

 

“...!”

 

 

옆에서 엘노어와 엘리야가 급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본다. 둘 다 몸짓으로 나를 말리려고 애쓰는 기색이다.

 

 

“...”

 

 

웬일로 둘 다 죽이 척척 맞는다.

 

그만큼 급하다는 거겠지.

 

아마 ‘제발 이 사람 상대로는 미친 짓 좀 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거겠지만.

 

 

“...그럼 친해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그 직설적인 태도 만큼이나, 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기드온에 비해 훨씬 간단하다.

 

이런저런 각을 만들어서 비벼야 했던 기드온과 달리, 이 사람은 이렇게 급작스럽게 만나도 바로 풀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당장 이벤트 창에도, 이 사람은 ‘보는 것만 믿는다’고 적혀 있다.

 

 

“길게 끌지 말고. 남자끼리는 빨리 친해지는 방법 있죠. 당신도 아실 것 같은데.”

 

 

그럼, 보여주면 된다.

 

이 사람이 좋아하는 걸.

 

 

“싸움 좀 하십니까, 변경백?”

 

“...”

 

“한 번 뜹시다.”

 

 

엘노어와 엘리야가 동시에 소리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기색이다.

 

 

“...”

 

 

너무 그러지 마라.

 

이거 생각보다 할 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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