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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74)화 (75/258)

Chapter 74 - 74. 교차 (2)

루시엔이 심호흡을 하며 말을 이었다.

“...예, 그렇게 해서 기도문의 순서를 조금 바꾸면 가호의 위력이 훨씬 좋아집니다. 조금 어렵겠지만 몇 번 연습하시다 보면 감을-”

“이렇게요?”

“...”

다우드의 눈앞에 떠오른 두 가지 색깔이 섞인 신성 보호막을 본 루시엔이 침묵했다.

속으로는 간신히 비명을 삼키는 중이었다.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듣자마자 곧바로 실현하는 다우드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그런 감상을 품을 것이다.

‘처음 해보는 거라며...’

그녀가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처음 교육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의기양양 했었지.

이 남자의 ‘태도’를 고칠 천재일우의 기회라 여겼으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성녀답게 존경을 담아 취급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자신과 유리아를 멋대로 부리고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그만두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이건 성녀가 아니라 숫제 하인을 부리는 취급이다!

‘분명히 이거 어려운 건데...’

모든 이능 중에서도, 신성력은 모든 이들이 보유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다변화가 심하고 변덕스러운 이능이다.

입문은 쉽지만 숙달은 어렵다고 해야겠지.

그래서 이 남자가 한 달 안에 자신의 3분의 1어치에 해당하는 수준까지 신성력을 키운다고 했을 때는 그냥 코웃음만 쳤었다.

실제로 첫 이틀까지는 그런 예상이 적중했었다.

기도문도 전혀 외우지 못하고, 아주 기초적인 가호조차 똑바로 구현시키지 못하는 다우드의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질렀었지.

‘이 사람도 완벽하지는 않구나!’

마침내 이 사람이 허술한 부분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을 도와줌으로서 이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고, 유리아를 내버려 두고 자꾸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것도 막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한테 의존하게도 하고...

그런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고 있었다.

그 모든 희망은, 오늘에 이르러 전부 사라져버렸지만.

“...”

빠르다.

배우는 게 빨라도 너무 빠르다.

정확히는 신성력 자체를 ‘다루는’ 아주 기초적인 면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초보가 맞는데, 그 방법만 한 번 맥을 뚫어주니까 스펀지마냥 모든 지식을 빨아먹고 있다.

오늘도 점심부터 저녁까지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어느 정도를 배웠는지 모르겠다. 

자신도 방금 가르쳐 준 ‘교차 기도문’을 익힐 때 못 해도 일주일은 애먹었는데!

‘이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구나...’

문득 그런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교육을 시작할 때 설정한 목표치 말이야.

본인은 진짜로 ‘될 거’라고 생각해서 건 게 분명하다!

‘이런 느낌이네.’

정작 괴물 바라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루시엔에 비해, 다우드 본인은 별 생각 없이 신성력을 굴리고 있었지만.

세이비어 라이징에 있는 스킬 체계를 A부터 Z까지 꿰뚫고 있는 게 본인이다. 단순히 이걸 ‘활용’하는 건 게임 안에서 수백 번도 넘게 해본 작업이니까.

유일한 난관이라면 신성력 자체를 ‘다루는 법’이 어렵다는 점이었는데, 그거야 루시엔과 며칠 몸을 비틀면서 돌파한 참이었다.

말하자면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우고 있는 게임에 컨트롤러만 못 꽂고 있던 상황이었겠지.

“그리고 이 다음으로 가르쳐 드릴 거어언...”

그녀가 반쯤 울먹거리며 준비해온 종이를 뒤졌다.

드디어 이 남자에게 항상 휘둘리기만 하다가 자신도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두근두근 했는데.

수업을 시작한지 겨우 며칠째인데, 벌써부터 준비해온 한 달 분량의 커리큘럼이 절반 이상 사라져가고 있다.

“가호 여러 개를, 그러니까, 복합으로, 발동하는...”

“어, 그건 이렇게 하는 느낌일 것 같은데.”

휘리릭, 하고 다우드의 주변으로 신성 방패 여러 개가 생성되었다.

“...”

루시엔이 부들부들 떨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냥 혼자 하세요.”

“...예?”

“안 가르쳐도 잘 하시잖아요! 초보자 전용 팁도 여러 개 준비해 왔는데...! 이, 멍청이가, 으, 으우우...”

“...”

이제는 울먹이는 걸 넘어 코까지 훌쩍거리고 있다.

다우드가 입을 다물고 있자니, 둘 밖에 없던 강의실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등장한 유리아였다.

교실 안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슥슥 둘러본 그녀가, 이내 졸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우드 씨, 또 언니 괴롭히고 있어요?”

“괴롭힌 적 없는데.”

“언니, 보는 것보다 마음 엄청 여리니까 신경 좀 써주세요. 맏이 노릇 엄청 하고 싶어하니까 의존하는 척이라도 하라구요.”

“...”

본인이 있는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자니, 유리아가 다시 하품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쯤하고 나오는 게 좋을 거에요. 오필리아 경이 그렇게 전달해달라던데요.”

그런 말을 마치고 교실 밖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유리아를 보고, 다우드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갑자기 상태가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목소리도 제대로 못 내서 글자를 공중에 띄우는 식으로 대화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즘은 근처에 루시엔이 없더라도 저렇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우가 꽤 많다.

겉보기로는 생활에 거의 지장이 없어 보일 정도로.

“요즘에는 단절자에서 올라오는 저주도 침식의 속도가 많이 느려졌더라구요. 다 당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루시엔이 훌쩍거리면서도 그런 감사 인사를 내놓았다.

역시 성녀랄까. 저런 상황에서도 몸에 익은 예의범절만큼은 잊지 않는다.

하지만, 다우드는 거기에 순순히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에 눈을 가늘게 뜨기만 했다.

“당분간은 잘 지켜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심하셔야 하니까.”

“예?”

다우드는 뭐라 설명하는 대신 쓴웃음만 지었다.

그야.

저런 식으로 ‘그릇’의 능력이 대폭 상승하는 경우라면 이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정화자 전 이후의 엘노어와 똑같은 현상이다. 조각과 그릇의 융합률이 높아져서 대상의 신체 스펙이 대폭 상승하는 현상.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이벤트도 하나 더 있지.

“...”

사실 루시엔한테 뭐라고 말할 것도 없다. 진짜 조심해야 할 건 다우드 본인이니까.

첫 번째 그릇인 엘노어의 조각 융합률이 높아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번째 그릇인 유리아가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그릇인 유리아의 융합률이 높아지고 있다.

즉, 저건.

또 다른 ‘그릇’이 나타난다는 징조다.

< System Log >

[ 성공적으로 신성력을 운용했습니다! ]

[ ‘특성: 신성력 운용’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

[ 숙련도가 일취월장했습니다! ]

[ 특성의 등급이 ‘기초’에서 ‘범용’으로 진급합니다! ]

< Mastery Info >

 

[ 특성: 신성력 운용 ] [ 등급: 범용 ]

[ 현재 숙련도: 0% ]

 

[ 신성력을 사용하여 각종 가호를 발현합니다. 사제들이 발휘하는 모든 기술의 근간이 되는 능력입니다. ]

 

[ ■ 똑같은 가호를 2개까지 펼칠 수 있습니다. ]

[ ■ ‘초급 기도문’에서 파생되는 모든 가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괜찮네.

며칠 동안 성녀님에게 수업을 받으며 얻어낸 성과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로 울트리마에 내장 되어 있는 가호 말고도 몇 가지 버프 정도는 내 손으로 발동할 수 있게 된 참이다.

물론 초급 기도문이라 단순 무식한 효과들 밖에 없지만.

공격력을 올리는 ‘적색 가호’, 방어력을 올리는 ‘청색 가호’, 민첩성을 올리는 ‘황색 가호’... 거의 그런 식이지. 1차적인 스펙 뻥튀기가 전부다.

효과 자체는 대단하다고 보기 힘들지만, 그런 버프의 효율을 몇 배로 뽑아먹을 수 있는 '절체절명'이나 '심상 세계' 같은 스킬들을 들고 있는 입장에선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럼, 이쯤해서 한 번 더 확인.

< Status Info >

「다우드 캠벨」

 

[통상]

 

근력: F ( 랭크 업까지 98% )

민첩: F ( 랭크 업까지 98% )

내구: F

행운: F

권력: D

며칠 동안 죽을 것 같은 전신 근육통에 시달리면서 탈리온과 밤낮으로 운동한 성과가 있는지, 교환 학생 선발 시험까지 하루 남은 시점에서 지금 랭크 업이 코앞이다.

‘일주일치곤 진짜 많이 오르긴 했네.’

원래는 넉넉잡아 한 달은 잡아야 할 성장치다.

사자의 목걸이 덕분에 단련 속도도 빠르고, 사경을 오가는 와중에도 몸이 계속해서 회복되서 가능했던 일이겠지.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되겠네.’

당장 시험이 끝나면 바로 ‘투쟁의 용광로’에 이동하게 되니까, 스텟 랭크 업에 버프까지 합치면 턱걸이로 ‘커트 라인’을 맞춘 셈이다.

내 기억이 맞으면, 그쪽에 이동하자마자 몸 거칠게 굴릴 이벤트가 널려 있으니까.

“...”

말없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돌린다.

[ 메인 퀘스트 ]〖 챕터 3 – 뒤집힌 해일의 사도 〗

[ 관련 이벤트가 곧 발생합니다! ] [ D-2 ]

이것 말이야.

스테이지의 주체인 발카서스가 언제 공격할 테니 대비하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2챕터와 다르게, 3챕터는 시작부터 플레이어에게 온갖 고난을 쏟아붓는 숨 가쁜 진행으로 가득 차 있다.

미리미리 대비를 해둬야지.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치마. 점심 맛있게 먹도록.”

그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교수가 그런 말과 함께 교단에서 내려왔다.

주변으로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학생들이 삼삼오오 갈라져 저들끼리 식당을 향해 흩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아마 학생 입장에서는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나한테는 적용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일단 제일 먼저 탈출구부터 찾는다.

처음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눈여겨 둔 근처의 쪽문이 제일 좋아보인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을 가장하며 그쪽으로 휙 돌아나간다.

“다우-”

다행히, 그런 말이 들리기 전에 재빠르게 교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인파에 섞여 복도를 통해 벗어난다. 그대로 쭉 걸어서 인기척이 없는 장소까지.

“...”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번에도, 살았다...!

“...괜찮으세요?”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튀어오른다.

옆을 돌아보자 엘리야가 어색하게 웃으며 쪼그려 앉아있었다.

“너도 나 쫓아왔냐?”

“전 원래 이 근처에서 제가 싸온 도시락 먹는데요. 이 근처 식당들은 영 맛이 없어서.”

“...밥 먹을 여유가 있다고?”

부럽다...!

“...선생님, 대체 요즘 뭐에 시달리시는 건데요?”

“...”

뭐긴 뭐야.

< 기프트 관련 인물 알람 >

♥ 엘노어 에리나리제 라 트리스탄

[ 친애 2단계 ]

[ 관련 이벤트가 대기 중입니다! ]

이거지.

다른 이벤트랑 다르게 ‘며칠 남았다’ 식으로 표기되지 않고 ‘대기 중’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게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마주치면 곧바로 내 손에 반지를 쑤셔 넣을 것 같은 느낌이라.

그리고 그거 받아주기라도 했다간...

“...”

상상도 하기 싫다.

유리아 안에서 폭주한 하얀 악마가 날 어떤 식으로 자근자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지 짐작도 안 간다.

“...뭘 그렇게 식은땀을 줄줄 흘리세요?”

“그런 게 있어.”

“...”

엘리야가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면서 나에게 뭔가 하나를 내밀었다.

“그래도, 잘 되긴 했네요. 안 그래도 곧 선생님 찾아나서려고 하긴 했는데.”

“너는 또 왜? 무슨 목적으로...!”

“...이 사람 대체 요즘 어떻게 지내는 건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그렇게 반문하니, 엘리야가 가늘게 뜬 눈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보자기에 차곡차곡 담긴 찬합이다.

“...드세요. 선생님 항상 밥 대충 먹고 다니죠?”

“어?”

“굳이 요즘 아니더라도 항상 바쁘게 돌아다니시니까 식사 거를 때가 더 많다고 들었는데. 제가 만든 거니까 드세요.”

“...”

어안이 벙벙해서 찬합을 받아든다.

아니, 실제로 이것저것 한다고 밥 굶을 때가 더 많기는 한데.

“...고맙다.”

눈을 끔뻑거리면서 그렇게 말하니, 엘리야가 배시시 웃었다.

“음, 숙제라고 할 땐 조금 그랬는데. 역시 말 듣길 잘 했어.”

“숙제?”

“그런 게 있어요~”

그렇게 말한 엘리야가 콧노래를 부르며 내 옆에서 본인의 찬합도 펼쳤다.

방금 나한테 도시락을 줬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많이 좋아진 모습이다.

“...”

나도 말없이 그 옆에 걸터앉아서 찬합을 펼친다.

도시락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멀쩡하다.

고기, 면, 채소가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몇 개 집어서 먹어보니 맛도 좋다. 

내공이 보통이 아닌데?

“야, 맛있네. 너 요리 잘한다?”

“...”

엘리야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화사한 웃음이다.

“에, 에헤. 에헤헤. 그, 그래요?”

“...”

그렇게 웃으면서 몸을 배배 꼬는 모습은 좀 징그럽긴 하다만.

한참을 그렇게 혼자 꼼지락거리던 엘리야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한데요. 숙제가 두 개라서.”

말하기 직전까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간신히 꺼내놓는 느낌이었다.

“뭔데?”

“...요즘 그렇게 밥 드실 여유도 없으시면, 제가 앞으로 전담해서 이런 거라도-”

엘리야가 뭐라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느닷없이 근처에서 굉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학생들의 비명과 함께 엘리야의 문장 뒤쪽이 거기에 파묻혔다.

“...”

엘리야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나도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타이밍에 일어날 이벤트라면 대충 뭔지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으니까.

층계참에 나 있는 창문으로 살피니, 건물 바깥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역시는 역시네.’

딱 내가 예상하고 있던 인간이 시야에 비춰진다.

“방금 뭐라고 지껄였냐?”

악귀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리루 가르다. 그리고 그 앞에 새파랗게 질린 남학생이 한 명.

방금 진동은 리루가 그 남학생 앞에서 발을 굴러서 일어난 현상일 것이다. 그 발 아래에 있는 바닥이 산산조각나서 크레이터라도 패인 모습이다.

“우와... 또 저 사람이네.”

내 옆에 선 엘리야도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저렇게 시비 걸어서 두들겨 팬 사람 수만 열 명을 넘어간다는데요. 질리지도 않나봐요.”

“...”

대답해주는 대신에 피식 웃는다.

아니, 시비를 건 게 아니다.

리루는 가치 있어 보이는 상대가 아니면 굳이 싸움을 걸지 않는다. 아예 관심 자체가 없지.

다만 평판이 최악인 이유라면,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녀석을 두들겨 팰 때는 상대방의 신분이나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후회 없이 전력으로 죽여놔서 그렇겠지.

덕분에 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겐 귀족적이고 오만하다는 평을 받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겐 천박하고 예의 없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을 것이다.

“...”

기가 막히긴 하네.

성질 좀 죽이고 살지.

“뭐라고 지껄였냐 물었다. 방금 내 가족에 대해 뭐라고 했지?”

“나, 나는 아무 말도-”

글쎄. 했을 텐데.

게임 안의 진행을 생각하면, 저 남학생은 리루에게 오만하게 굴다가 한 번 호되게 당한 놈일거다.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지금 한 번 더 저쪽의 신경을 긁은 거겠지.

리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주먹이 올라간다. 그대로 저 남학생을 초주검으로 만들어놓을 생각이겠지만.

그 남학생의 얼굴에 찰나지만 득의양양한 표정이 걸린다.

저거, 아마 ‘함정’을 파놓은 것이니 그럴 테다.

턱, 하고. 누군가가 들어올린 리루의 팔을 뒤에서 잡는다.

“그쯤해두지.”

저것도 아는 사람이다.

팔을 잡은 사람은 야만 전사 루카. 

그 뒤로는 밥 먹을 준비를 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그 동료들.

사수 팔코. 마법사 그리드. 사제 트리샤.

엘리야를 제외한 ‘용사 파티’ 전원이다.

아마 저 남학생은 저렇게 자신에게 무력 행사를 할 경우 그걸 막아설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저런 욕을 한 것이리라.

리루의 현재 평판을 생각했을 때, 그런 ‘불의’를 절대 참지 않을 인간들이 용사 파티니까.

“...어? 쟤네 저기서 뭐하지?”

옆에서 엘리야가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꺼내놓는 사이, 리루가 표정을 찌푸리며 루카의 팔을 뿌리쳤다.

“꺼져.”

“그쯤 해두라고 했어.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몰라도, 이렇게 주먹부터 나가는 건 좋게 보이진 않아.”

사실, 다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면 저건 정당한 폭력 행사다. 법 같은 건 차치해두고서라도, 저 남학생은 죽도록 얻어맞아도 싸다.

리루의 가족을 좀... 심하게 모욕했으니까.

저쪽과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가족’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

리루가 한숨을 내쉬며 루카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에서 살기가 끓어오른다.

“꺼지라고.”

“그럴 순 없어. 네가 학과에 있는 동급생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는 게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정도가 지나치-”

말을 이어가려던 루카의 얼굴에 리루의 주먹이 직격했다.

그래, 저 성질머리가 문제다.

조금만 알아듣게 설명하면 될 걸 항상 말보다 먼저 사람을 후려친다.

아마 시비를 건 남학생도 그걸 아니까 함정을 팠겠지만.

“저, 저! 미친 여자 아니야 저거!”

엘리야가 그런 비명을 질렀지만, 루카는 그 일격에 표정을 찡그리며 몇 걸음 물러설 뿐 별다른 피해를 받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 얼굴 앞으로는 주먹만한 신성 방패가 세워져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법구를 들고 있는 트리샤가 세운 것이다.

“그, 그만해! 왜 그렇게 난폭하게 구는거야!”

트리샤의 그런 비명에, 지금까지 멀거니 상황만 보고 있던 그리드와 팔코도 표정을 굳히고 무기를 꺼내든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얻어맞은 상황에서까지 가만히 지켜보는 건 그렇다는 판단이겠지.

“...해보자고?”

그 모습을 본 리루가 더욱 사납게 웃는다.

4:1, 그것도 신입생 중에서는 최강의 일각으로 소문이 자자한 4인조인데도.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좋아. 덤벼.”

“...”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루카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살 건가?”

리루가 동작을 멈칫했다.

“...뭐?”

“이역만리 떨어진 곳이라도 동향 사람 한둘 정도는 있는 법이야.”

루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하이룰 산맥의 루카 한-차이다. 부족 연합의 사정도, 네가 누군지도 알고 있어. 대족장의 딸. 위대한 우두머리의 마지막 핏줄.”

리루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난폭함 때문에 여기까지 망명했다고 들었다. 대족장의 얼굴에 그 정도로 먹칠을 하고도 아직 모자라다는 건가?”

“...”

리루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정곡을 찔렸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입에서 실실 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그것과 전혀 상반되는 감정이다.

저건, 리루의 역린 그 자체니까.

주변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근처에 있는 대기 전부가 불살라지는 것 같은 살기가 리루에게서 줄기줄기 새어나오고 있었으니까.

“하이룰 산맥의 루카 한-차이.”

감정이 일체 지워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리루에게서 흘러나왔다.

“기억했다. 넌 꼭 죽인다.”

“...이거, 좋게 풀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리루의 모습을 보고 그리드와 팔코가 한숨을 내쉰다.

“저, 저도 가서 도와주고 올게요!”

“내버려 둬.”

“...예?”

옆에서 그렇게 말하며 튀어나가려는 엘리야를 제지한다.

“쟤들도 약한 놈들 아니야. 4:1이면 저 정도는 이겨.”

조각 두 개 흡수한 엘노어의 전투력을 10정도로 두고, 엘리야의 전투력을 5정도로 둔다면, 저 4명이 합을 맞췄을 때 전투력은 대략 7.5정도 된다.

아무리 리루라고 해도 혼자 감당할 수준은 아니란거지.

‘...여기서 한 번 처절하게 깨지던가.’

그 이후로 어느 정도 심경의 변화가 생긴 리루가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용사 파티원들과 친해지고.

그런 스토리 진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그렇게 원작대로 굴러가게 내버려 두고 내가 챙길거나 챙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성질이 죽은 리루라면, 이번 교환 학생 행사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아마.

< System Message >

[ 악마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

[ ‘타천의 인장’이 반응합니다! ]

이딴 게 눈 앞에 떠오르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

등골이 싸늘해진다.

리루 쪽을 바라보자, 그 몸에서 '파란색 기운'이 뭉게뭉게 풍기고 있었다.

익숙하다. 이미 ‘비슷한걸’ 두 번이나 봤으니까.

악마의 기운.

“...”

장난하냐.

아무리 유리아한테서 새로운 그릇이 등장할 전조를 발견했다곤 하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튀어나온다고?

등골이 더더욱 싸늘해진다.

리루 가르다는 원작에서도 그릇의 주요 후보군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푸른 악마’를 품고 있는 경우라면.

용사 파티고 뭐고 전투로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 자리에서 4명 다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

그리고, 당연히.

그러면 안 된다.

용사 파티는 엘리야보단 한참 덜해도 스토리 핵심 파츠 중 하나다. 한 놈이라도 죽었다간 시나리오 전체가 막장으로 간다.

그럼,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뭐냐.

“...”

생각은 빨랐고, 결심은 더욱 빨랐다.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선생님?”

그리고, 옆에서 엘리야의 의아하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곧바로 창문 바깥으로 몸을 던진다.

꽤 높은 곳이지만, 당장 최대한 빠르게 저기까지 가야 하니까.

“...! 이 미친 새ㄲ...!”

뭐라고 욕을 하는 엘리야의 목소리가 뒤편으로 들려왔지만, 이미 내 몸은 창문 바깥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뒤였다.

쾅. 굉음과 함께 바닥에 착지한다.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깔아뭉개며 작살낸 참이다.

“...”

내 다리 한쪽도 작살났네. 골절이 심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이 정도 부상으로는 비명도 잘 안 나온다. 뭐 생채기 느낌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리루와 용사 파티 사이로 걸어간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인간이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대체 이 미친 놈은 뭐냐는 얼굴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니들.”

리루 앞에 선다. 이 사람을 내 뒤로 가리듯이.

이어서, 용사 파티를 향해 말한다.

“그러다 죽는다?”

“...”

리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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