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8 - 78.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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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익의 베일은 자랑스러운 방랑자 소속의 암살자다.
특기는 쌍검에 더해 염동력을 이용하여 주변에 띄워둔 2개의 검을 더해 총 4개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쾌속의 검술.
일반적인 검사에 비해 4배에 달하는 공격 루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란한 참격은 상대가 누구건 순식간에 다진 육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
그리고 그 4개의 검은 지금 모조리 부러져 있었다.
베일이 멍한 눈으로 자신의 애검들을 바라보았다.
스스로를 역전의 용사라고 칭해도 될만큼 수많은 전장을 거쳐오며 항상 자신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동반자들이었다. 어디에 가도 절대 취급 못 받을 일은 없는 명검들이었지.
그리고 그런 검들을 무슨 수수깡 부수는 것처럼 ‘맨손’으로 작살낸 인간이 눈앞에 있다.
“음.”
엘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하며 내려다보았다.
방금 베일이 마력까지 전부 쏟아부어 전력을 다해 내려친 검을 건틀릿 하나 착용하고 그대로 ‘잡아 부숴버린’ 참이었다.
“...”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트리스탄 공녀가 그 나이에 비해 대단한 솜씨를 가진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건 고작 그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수준 차이가 한 단계도 아니고 두세 단계는 나야 가능한 일이 틀림 없었으니까.
“...어이가 없군.”
그가 신음처럼 그런 말을 흘렸다.
“나이에 비해 신기에 가까운 무용을 선보인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과연 천재라는 명성이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야.”
주변으로는 이번 ‘습격’에 미리 동원되었던 동료들의 유해가 널려있었다.
신체 곳곳이 터지고, 뽑혀나가고, 기괴하게 뒤틀린 시체들.
이게 전부 검도 뽑지 않고, 맨손으로, 이 여자 혼자서 이뤄놓은 광경이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공녀.”
분명히 자신들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냥, 목표물이 겹치는 것 같은 인간들이 있길래.”
베일이 꺼낸 질문에 엘노어가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답했다.
“목표물이 겹친다고?”
“최근 다우드가 나를 피하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래서 작정하고 뒤를 밟아봤지.”
“...”
“그러다 보니까 나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 꽤 있지 뭔가.”
글쎄.
피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피하는 것 아닐까.
그러면 보통 상대방의 심정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할 텐데, 대체 망설임 없이 뒤를 밟는단 선택지는 어떻게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어진 베일이 침묵하고 있자니, 엘노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좀 알아봤네.”
다음 순간.
베일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지척으로 다가온 엘노어가 그의 팔을 틀어쥐었다.
“...!”
고통의 비명을 지를 틈새도 없이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른다. 반대쪽으로 풀 스윙된 몸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팔은 분쇄기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잡힌 부위가 갈려있고, 바닥에 박히면서 내부 장기도 진탕이 난 데다가, 갈비뼈도 몇 대 나갔으며, 척추도 마비되면서 뇌진탕까지 따라온다.
1초도 되지 않아, 그 정도 되는 수준의 강자가 치명상을 다중으로 입은 것이다.
그 시점에서, 베일은 진정으로 아까 떠올린 문장을 곱씹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천재는 개뿔이.
‘...이건, 그냥 괴물...!’
사전에 들었던 역량을 한참을 상회하는 용력이다. 마치 단기간에 무슨 사건이라도 있어서 폭발적으로 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생체 전차나 다름없다는 켄드리드 변경백 정도는 되어야 스펙을 비슷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공녀는 ‘검술 명가’의 후계자지, 그쪽처럼 신체를 이용한 무투술이 특기인 인간도 아니다!
“일단 이렇게 해놓고 질문하면 어지간한 답변은 거의 나오더군.”
“...”
그래.
어떻게 이쪽의 정보를 알아냈는지는 아주 넘치도록 이해했다.
이런 괴물이 상대라면, 아무리 버텨봤자 결국 목숨이 날아가는 결말밖에 없을 테니까.
암살자라고는 해도 결국 비즈니스 관계. 결국 자기 목숨이 제일 중요한 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전부 죽었나?”
“그럼 다우드를 죽이려고 했는데 안 죽이나?”
해가 뜨면 세상이 밝아진다는 말을 할 때처럼 평탄한 어조다.
무슨 그런 당연한 걸 질문까지 하냐는 듯 어이가 없다는 감정마저 섞인 느낌이다.
“...”
그러면 그렇지.
지금 이 여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긴, 그런 협상이 씨알도 먹힐 게 아니다.
뭔가가 비틀려도 아주 단단히 비틀린 인간이다. 마치 세상의 중심을 그 남자로 잡아놓고 생각하는 느낌.
그럼, 여기서 베일이 맞이할 최후도 자명하다.
“...처자식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갈 줄은 몰랐군.”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직업 특성상 언제나 목숨을 내놓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다. 각오야 늘 해두고 있었지.
그래서.
“...?”
아무런 충격이 한참동안 느껴지지 않자, 오히려 베일 본인이 당황할 정도였다.
슬쩍 눈을 밀어올려보니, 그쪽엔 턱을 쓰다듬으며 뭔가 고민하고 있는 엘노어가 있었다.
“...”
“...”
“...뭐지?”
한참을 이어지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결국 베일이 입을 열자, 엘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대, 기혼자인가?”
“...”
이건 또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베일이 말문이 막혀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니, 엘노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그럼 됐네.”
이내 그녀의 다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그대로 베일의 머리를 짓밟으려는 게 분명한 동작이었다.
“...기혼자 맞다. 맞다고.”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그 부분이 그의 생존에 지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단 걸 깨달은 베일이 급하게 입을 움직였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은 엘노어가 흠, 하면서 다리를 다시 내렸으니까.
“그럼 뭣 좀 물어보지. 프로포즈는 누가 먼저 했나?”
“...”
미쳐도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닌 게 틀림 없다.
베일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엘노어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리를 들어올렸다.
“대답하기 싫으면 됐네.”
“...아내가 먼저 했지.”
다리가 다시 스르륵 내려간다.
“좋아. 조금 더 자세하게.”
“자세하게라니?”
“경과나 진행 같은 걸 더 말해보란 말이네. 그걸 듣자마자 바로 받아들였나?”
“...”
베일이 심호흡을 했다.
당장 전신에 몰아치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대화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감각을 어떻게든 가라앉혀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대답부터 해본다.
“아니, 내가 거절했지.”
“이유는?”
“암살자라는 직업 자체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까. 나 같은 놈도 좋아 해주는 여자를 미망인으로 만들 순 없지 않은가. 소중하게 대한다는 건 그런 거라 생각했지.”
엘노어가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과연, 그런건가.
‘그 남자도 그런 과일 수도 있겠군.’
항상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뭔가를 떠맡고 있는 느낌은 늘 받고 있었으니.
조금만 정신을 떼놓고 보면 늘 어딘가에서 새로운 위협에 휘말리고 있는 인간 아닌가. 당장 또 어디서 암살자들이 마구 튀어나와 그 남자를 노리는 것을 보라.
그녀를 싫어해서 지금 이렇게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를 배려해서 그런 것이라 판단해야겠지.
딱히 그녀가 뭘 준비하고 있는 지 알아서 그렇다기보다, 그냥 그럴 시기기 때문에 피해다니는 것이다.
“...”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다.
괜히 화를 쏟아내기 위해 겸사겸사 이 암살자들을 죽여놓고 다닌 게 아니다.
만약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이 품 속에 가지고 있는 ‘반지’를 거절하기라도 했다간...
“...흡.”
베일이 숨을 들이삼키며 엘노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몸 근처에서 공간 전체가 수축되는 수준의 살기가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는걸 봤으니까.
차라리 방금 전에 나누던 정신 나간 화제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느낄 정도로.
“...그런데, 그런 게 왜 궁금하지?”
“...”
엘노어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베일을 내려다보았다.
“조언을 좀 받고 싶어서 말이네.”
“조언?”
“상황이나, 대사라거나, 전체적인 분위기라거나. 어떤 것들이 그대의 마음을 움직였나?”
“...”
베일이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어쩐지 여기서 대답을 굉장히 잘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야성적? 날 것 그대로의 느낌? 적어도 내 아내는 그랬지.”
“무슨 뜻인가.”
“결혼한 뒤에 죽건 말건, 지금 나와 결혼해주지 않으면 너랑 나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죽는다는 태도로 프로포즈를 받았거든.”
“...”
잠시 침묵하던 엘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는 기색이었다.
“조언 고맙군. 한 번 그대로 시도해보지.”
“...”
그 말에 이어, 다리를 들어올리는 것도 아니고 아예 검을 뽑아드는 모습을 본 베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잠깐. 말하는 건 전부 다 잘 대답해줬지 않나.”
“걱정 말게. 그 답례로 죽일 생각은 없으니.”
“...”
그럼 이건 뭐란 말인가.
“협박하는 거네. 아무리 그래도 다우드를 죽이려 했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나.”
“...”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몇 가지 할 건데, 들어보고 결정하게. 죽을 건지, 따를 건지.”
엘노어가 평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일단 의뢰주는 누구고 그와 관련된 정보부터 싹 뱉어내는 것부터 시작하지. 알겠나?”
“...”
문득, 베일이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아, 그래도 하나는 약속하지.”
엘노어가 문득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성공’하면, 그대에게도 나름 답례를 하도록 하지.”
“...성공이라니, 그걸 언제 시도할 건데?”
엘노어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좋은 조언도 들었겠다, 지체할 이유가 없긴 하다.
그러니.
“오늘.”
뭐든 간에, 큰일은 빨리 해치워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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