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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87)화 (88/258)

Chapter 87 - 87. 처음은 드라마틱하게

 

 

완전히 반으로 갈라진 투쟁의 용광로가 기우뚱하면서 가라앉고 있다. 누군가 사과를 중앙을 반으로 잘라서 각 조각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여기저기로 사람들이 중심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굴러 다닌다.

 

 

“선생님, 빨리 피해야-!”

 

“너, 거기서 멍하니 뭐하고 있-!”

 

 

리루와 엘리야의 비명도 들린다.

 

귓가에서 멀리, 느리게, 점점 더 희미하게 늘어지기 시작한다.

 

 

“...”

 

 

하지만, 그런 광경조차 전부 ‘느려지고’ 있다.

 

엘노어의 몸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회색 기운이 주변을 전부 뒤덮고 있었으니까.

 

회색 악마 권능인 ‘침식’이다. 근처의 모든 시공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능력.

 

그리고, 원작에서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렇게 침식 상태에 놓인 공간은 단순히 시간이 멈추는 걸 넘어서서, 전부 비틀리고, 왜곡되어, 결국 전부 짓이겨지고 만다.

 

세계의 일부를 ‘지워버리는’ 능력. 회색 악마가 진정한 힘을 개방하면 그런 현상까지도 간다.

 

아직 조각 3개를 전부 모은 상태가 아니라서 진짜 최종 보스 상태의 위력은 안 나오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투쟁의 용광로 전체가 작살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주변으로 모든 것이 느려지는 와중에, 그런 창이 눈앞으로 떠오른다.

 

악마의 폭주 이벤트는, 메인 시나리오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한 경우는 대부분이 ‘게임 오버’ 기폭제다.

 

지금 아무런 짓도 안 했는데 이런 광경을 만들어낸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폭주한 악마가 세계를 멸망시키니 어쩌니 하는 건 결코 빈말이 아니다.

 

 

〚...〛

 

 

그리고.

 

디디고 서 있을 공간도 없지만 공중에 둥둥 떠서 뚫어지는 것처럼 날 노려보는 엘노어의 붉은색 눈동자에 깃든 건, 틀림없이 살기 직전의 적의다.

 

괜히 시스템 창에 생존 확률 0%라고 표기된 게 아니다. 애초에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게 무의미한 힘의 격차니까.

 

회색 악마 본인이 튀어나오는 거라면 어떻게 얘기라도 하겠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악마의 그릇이 폭주하는 건 악마 본인이 강림하는 게 아니라, 그릇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는 악성惡性이 조각의 영향으로 미친 듯이 증폭되는 현상이니까.

 

악마의 마기를 그릇이 부리고는 있지만, 지금 이 현상을 일으키는 주체가 ‘악마’가 아니라 엘노어 ‘본인’이라는 거다.

 

즉.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나는 방금 전에, 확정된 죽음을 선고받은 참이다.

 

온 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정신 차려, 이 멍청아! 가만히 서서 죽을 거야!]

 

 

그런 감각 사이로, 칼리반의 호통이 정신 사이로 번쩍 치고 들어온다.

 

 

[...그냥 네 의도로 그런 것 아니라고 설명하면 알아듣는 것 아니야? 너도 방금 빠져나오려고 열심히 몸 비틀었잖아?]

 

 

내 기색을 본 칼리반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에 내가 엘노어한테 반지를 받기 직전에 시달릴 땐 아무래도 좋다는 기색이지만, 지금은 이 사람도 그런 느낌은 안 든다.

 

당장 눈앞에서 터져 나오는 엘노어의 기세가 너무 흉흉하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걸로는, 해결 안 돼요.”

 

[뭐?]

 

“이성적인 설명이 먹힐 거였으면 굳이 폭주라는 말을 쓸 리가 없죠?”

 

 

요즘 이래저래 나한테 쌓인 게 많아서 한 번에 몰아 터진 느낌이다. 단순히 말로 설득해서 될 문제가 아니지.

 

그런 설명을 듣기는커녕 당장 칼을 뽑아서 나를 썰어버리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

 

 

그런데, 잠깐만.

 

그런 사실을 떠올리니까 오히려 정신이 멀쩡해진다.

 

시스템 창에서 말했듯이, 생존 확률 0%잖아.

 

엘노어가 날 죽이려고 하면 진작에 죽일 수 있었단 소리다.

 

그럼 폭주까지 해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리도 없는데, 난 왜 아직 안 죽었을까.

 

분명히, 지금 엘노어가 제정신이 아님에도 나한테 폭력을 휘두르는 걸 막고 있는 요소가 분명히 있단 소리다.

 

실제로, 지금 폭주한 이후로 엘노어는 아무런 말도 꺼내놓지 않고, 어떤 추가적인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그 기색을 자세히 살핀다.

 

 

[설명이 안 먹히면 지금 당장 도망이라도 쳐, 멍청아! 엘리야는 꼭 데리고-]

 

“아뇨.”

 

 

그리고, 마침내 뭔가를 깨닫는다.

 

 

“저거, 싸우고 있는 거에요.”

 

[...뭐?]

 

 

아까 전과 비하면, 초점이 아예 없다. 아예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대신, 그 눈동자에 깃드는 ‘분위기’가 매 초, 매 분마다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설정을 생각하면, 저건 주도권 싸움이다.

 

아마 폭주의 영향으로 증폭된 엘노어의 악한 부분은 날 죽이라 하고 있을 거고, 그걸 거절하고 있는 건 엘노어의 이성적인 부분이겠지.

 

 

“...”

 

 

즉.

 

저 사람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영향으로, 폭주한 악마의 조각에 정신이 잠식당하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그것과 싸우고 있단 소리다.

 

본인 손으로 나를 죽이지 않으려고.

 

 

[...진짜 갸륵하긴 한데. 그게 지금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됩니다.”

 

 

정신이 전부 잠식당한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렇다.

 

그건 아직 ‘설득’의 여지가 남아있단 소리니까.

 

 

[...어떻게 하려고?]

 

“화를 풀어줘야죠.”

 

 

그럼 할 일은 간단하다.

 

화가 나서 폭주했으면, 화를 풀어주면 된다.

 

애초에 시스템 창에서 대놓고 뭐 때문에 화났는 지 적혀 있는 판국이다.

 

그 이유만 똑바로 납득을 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방금 전에는 말을 해도 들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면서?]

 

“말은 못 들어도, 해볼 만한 건 있어요.”

 

 

아무리 저쪽이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내 의사를 저쪽에 닿게 해줄 ‘행동’ 정도야 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맞으면, 저쪽에 ‘충격’을 좀 주기만 하면 될 일이다.

 

판단은 빠르게. 결정은 그것보다 더 빠르게.

 

 

[ ‘스킬: 판데모니엄의 왕’을 발동합니다. ]

[ 5분 동안 악마 타입의 적에 대한 절대적 상성 우위를 가집니다! ]

[ 동격의 능력을 가진 대상과 마주합니다. ]

[ 대상의 고유 능력 ‘권능: 침식’에 저항합니다! ]

 

 

그런 스킬을 발동하자, 점점 느려지는 내 몸에 다시 속도가 달아온다. 모든 물리 법칙마저 점점 느려지는 와중에 나만이 이곳에서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다.

 

주변 모든 것이 점점 더 느려지는 와중에, 다리에 힘을 준다.

 

이전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얼마 전에 근력과 민첩 내구도를 E랭크까지 올려뒀다.

 

절체절명을 EX까지 적용받는다면, 분명히 가능할 거다.

 

 

“...흡!”

 

 

그리고 그렇게 기합성을 지르고, 엘노어 쪽으로 도약하자.

 

내가 땅을 박찬 반동으로 바닥 일부가 아예 산산조각나며, 충격파가 주변으로 일어난다.

 

안 그래도 기우뚱거리던 주변이 그 영향으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친다.

 

 

“...이런, 미친-!”

 

 

근처에서 엘리야가 느릿느릿하게 소리를 지르며, 리루도 천천히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마치 추진체를 단 로켓마냥, 내 몸이 쭉쭉 튀어나간다.

 

 

“...”

 

 

좀 어이가 없긴 하네.

 

나 등급 딱 하나 올렸다. F에서 E등급으로.

 

이전에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의 능력치 증가 폭이긴 했는데, 지금 내가 한 짓은 크라트는 못 되어도 조각 2개 먹은 엘노어의 스펙까진 비빌 수 있는 수준이다.

 

새삼 내가 들고 있는 스킬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곱씹으며, 다른 스킬들도 순차적으로 발동시킨다.

 

 

[ ‘스킬: 신앙의 증명’을 발동합니다. ]

[ 모든 스텟 추가분이 일시적으로 ‘내구’ 스텟으로 변경됩니다! ]

 

 

엘노어와 충돌하기 직전에 내 맷집을 풀로 땡겨 놓는다.

 

아마, 내 생각에.

 

이건 좀 아플거다.

 

 

“...허억...!”

 

 

그쪽에 부딪히자마자 숨이 말려 들어간다. 마치 전봇대에 맨몸으로 태클이라도 한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통에 비하면 그것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

 

 

엘노어의 몸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덕분에, 내 몸에도 회색 악마의 기운이 그대로 파고 든다.

 

온 몸이, 불에 타서 그대로 녹아내리는 것 같다.

 

이전에 모습을 현현한 회색 악마가 날 얼마나 배려해주고 있었는지 단박에 느껴지는 감각이다.

 

최근에는 고통에 좀 많이 무뎌지긴 했는데, 그럼에도 이건 진짜 못 버틸 수준의 지옥이다.

 

 

〚...〛

 

 

하지만, 내가 그런 과정을 겪는 동안에도.

 

엘노어는 미동조차 없다.

 

여전히 가만히 공중에 둥둥 떠서, 가만히 선 상태로, 이렇게 부딪힌 내 모습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모습이다.

 

내가 고통에 헐떡 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엘노어의 몸에 매달릴 때까지 그 상태인 걸 보면 틀림없이 그랬다.

 

 

[...그래. 이렇게 붙어서, 뭘 하려고?]

 

“칼리반.”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잡는다.

 

발을 디딜만한 땅바닥이 없어서 순전히 팔로만 몸 전체를 지탱해야 해서 제법 난이도는 있었지만.

 

그래도 바라는 자세 정도는 가능했다.

 

내 얼굴과 엘노어의 얼굴이 ‘마주 보는’ 자세.

 

 

“원래 첫 경험은 뭐든 드라마틱한 게 좋죠?”

 

 

사실, 이건 드라마틱해도 너무 드라마틱 한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아무튼 그럴 것이다.

 

 

[그건 또 뭔 개소리-]

 

 

그런 문장이 이어지기도 전에.

 

내 입술이, 엘노어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

 

이어서.

 

여태 멍하던 엘노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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