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5 - 95. 가스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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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체액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내 품 안쪽에 있던 리루의 입이 쩍 벌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전까지 본인과 탈리온이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하던 대상이, 고작 일격에 이 수준의 치명상을 입었으니까.
“...”
가면을 쓴 상태로 뒤를 돌아본다.
해일 너머로 저 멀리서 통통거리며 다가오는 보트가 보인다.
선두에 서 있는 건 단절자를 뽑아든 유리아다.
“흡!”
일단 챙길 것부터.
그리고 그 일격을 얻어맞아, 몸에서 절단되어 떨어지는 수룡의 팔뚝을 잡아챈다.
‘재료 득.’
용족의 신체는 그 자체로 보물고로 불릴 만큼 사용도가 많은 존재다.
지금까지 모아온 재료만 해도 틀림없이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다.
‘...그나저나.’
이게 한 번에 잘리네.
어지간한 무기로는 씨알도 안 먹힐 게 분명한 용족의 비늘이지만, 상대는 거리 안에 있다면 별철로 만들어진 오토마톤도 일격에 갈라버리던 괴물이다.
진짜 용족이면 몰라도, 수룡 수준에서는 그런 공격을 감당해낼 재간이 있을 리가 없다.
문제는, 방금 그 일격을 얻어맞은 수룡과 유리아 간에 놓여있는 간극이다.
척 봐도 절대로 세 발자국은 아니다.
‘...뭐냐?’
왜 이렇게 세냐?
이 정도 위력은 나도 예상 못 한 수준이다.
< System Message >
[ 대상 ‘유리아’의 타락 수치가 90% 이상에 도달했습니다! ]
[ 아이템 ‘단절자’에 깃든 ‘하얀 악마’의 영향으로 대상 ‘유리아’의 저주가 더욱 강해집니다! ]
“...”
그런 효과까지 있었냐. 이건 나도 몰랐는데.
별철 서클릿을 씌워서 누구든 무차별로 썰어대는 부작용을 진즉에 해제해두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무슨 일이 터져도 진작에 터졌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이 정도 위력이라면, 당초에 내가 의도했던 대로 수룡에게 ‘각인’을 새겨넣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가능하리란 점.
게임 안에서도 특별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대단히 강력한 마수들은 전투를 통해 특수한 각인이 새겨지고, 그걸 이용한 ‘상호 작용’들이 일부 해제된다.
테이밍해서 탈것으로 써먹는 다던지, 전투 중에 지원으로 호출할 수 있다던지, 특별한 아이템을 준다던지.
그리고 수룡의 각인은, 이렇게 자신에게 중상을 입힌 상대에게 ‘분노’를 대단히 강하게 품는단 점이다.
-!!!!
수룡의 눈이 분노로 희번득거리면서 그쪽으로 회전했다.
팔 한쪽이 날아갔다지만, 그래도 저 놈은 카테고리상으론 용족이다. 아직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눈깔아.”
저 멀리서 유리아가 그렇게 싸늘하게 읊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이어서 하얀색 참격이 한 번 더.
다른 쪽 팔이 날아간다.
수룡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튼다.
-!!
한 번 더.
수룡의 몸체 중 일부가 베여나간다.
-!!!
한 번 더, 다리 한쪽.
-!!!!
한 번 더, 꼬리의 일부.
“...”
탈리온과 리루의 표정이 경악을 넘어선 뭔가로 변한다.
지금, 저 여자는.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룡의 몸을 거의 다진 고기로 만들어놓고 있었으니까.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용족이 인간 한 명한테 난도질 당한다구요?”
“전설 속의 용살자도 이 정도로 쉽게 가지고 놀진 못 했어...”
그리고 이번만큼은.
“...동감합니다.”
그런 반응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악마에 의해서 스펙 강화가 될 거라곤 예상했는데.
이 정도로 급격하고 강력하게 올라갈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회색 악마야 악마 중에서도 최강이니까 그런갑다 했다. 엘노어야 원작에서도 최종 보스니까 본체 스펙이 애초에 어마어마했고.
그런데, 유리아도 이 수준까지 강화된다고?
그냥 화나서 타락 수치 좀 올라간 것만으로?
< System Message >
[ 대상 ‘수룡’이 극심한 고통을 느낍니다! ]
[ 대상의 고유 능력인 ‘수류 조작’이 약해집니다! ]
그런 메시지와 함께 해일이 가라앉으며, 수룡이 정신조차 똑바로 못 차리고 몸부림친다.
저 정도로 난도질당한 상태에서도 살아있는 게 대단하다고 해야겠지만, 이내 꽁지가 빠져라 물 속으로 잠수하는 걸 보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게 분명했다.
< System Message >
[ 대상 ‘수룡’이 후퇴합니다! ]
[ 대상에게 ‘공포 각인’이 새겨집니다! ]
[ 앞으로 대상이 ‘유리아’를 볼 때마다 해당 경험을 떠올립니다! ]
“...”
이게 되네?
어떻게 했냐?
‘...아니, 그러니까.’
좋냐 나쁘냐를 따지면 공포 각인이 더 좋기는 하다.
공포 각인이 새겨진 마수는 경우에 따라 테이밍의 최종 테크인 ‘사육’까지 가능해지니까.
마수에게 공포 각인을 새기기 위해서는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위력의 공격을 단기간에 ‘죽이지는 않는 수준으로’ 연속해서 때려넣어야 한다.
즉, 애초에 이런 짓이 가능할 거라고 예상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
“...”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는 사이, 천천히 다가온 유리아의 보트가 마침내 우리의 보트 앞에 맞닿는다.
선두에 서 있던 유리아가 폴짝 뛰어 우리 배쪽으로 건너온다.
동작이야 앙증맞다고 해도 될 정도지만, 방금 이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본 입장에서는 그냥 무섭게 보인다.
하지만.
“...”
심호흡을 한다.
스펙이 예상 이상으로 강력해졌다지만, 그건 그거고.
어차피 이 녀석이 이쪽으로 올 걸 예상했을 때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엘노어가 폭주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라고.’
나한테 그렇게 헌신적인 그쪽이 화가 나서 그렇게 쫒아올 정도면, 이놈도 무조건 온다고 생각하긴 했지.
< System Message >
[ 대상 ‘유리아’의 타락 수치가 위험 상태입니다! ]
[ 잘못된 대응을 한다면 곧바로 긴급 이벤트에 접어들 수 있-]
어쩌구저쩌구.
그런 메시지가 눈앞으로 주르륵 떠올랐지만.
나도 알아.
또 예전처럼 다른 여자 보고 왜 자기가 제일 중요하지 않냐고 화내고, 수습 못하면 내가 죽고.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되어온 패턴이다.
“유리아.”
그리고.
지금 당장,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정표’ 정도는 똑바로 세워야 한다는 게 중요하지.
‘...솔직히 말해서.’
그거, 내 재주로는 그런 식으로 들러붙는 걸 원천 차단할 순 없다.
아무리 이런저런 원작 지식으로 특전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그쪽에서 무조건적으로 사랑받는 체질이라지만, 악마 단위에서 일어나는 치정 싸움을 결국 인간인 내가 어떻게 막겠나. 휩쓸려 나가지 않도록 버티는 게 전부지.
방법은 결국 아무한테도 안 들키고 문어발 연애를 계속해서 가져가는 거다.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이번처럼 계속해서 ‘메인 퀘스트’ 진행 도중에 방해가 들어올 정도면 안 된다. 적어도 다른 때는 몰라도 리루처럼 섬세한 관리가 필요한 악마의 그릇일 경우는 더더욱이.
그걸 막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강수를 좀 둬야 한다는 거지.
“왜 끼어들었어?”
“...예?”
얼굴을 보자마자 튀어나온 내 말에, 유리아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누가 보아도 자기가 추궁당해야 할 남자가 오히려 이런 질문을 꺼내니 그렇겠지.
유리아와 같은 보트에 타고 있던 엘리야가 입을 쩍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게 눈에 들어온다.
낌새를 보아하니, 저쪽은 왜 유리아가 이 날씨에 배까지 끌고 여기까지 튀어나왔는지 알고 있는 기색이다.
그럼 내가 지금 꺼낸 말이, 화약고 안에서 쥐불놀이를 하는 수준의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나오는 반응이겠지만.
“...”
연애 지식은 없지만, 그럼에도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내린 결론이다.
한 번 정도는 이런 걸 보여줘야 오히려 이 뒤가 편하다.
관계는 뭐든 단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란 걸.
즉.
아무리 악마와 인간 간의 관계가
‘저쪽’이 ‘내쪽’을 사랑하고 있는 이상.
비수를 쥐고 있는 건 저쪽만이 아니라는 거다.
[ 칭호 ‘난봉꾼’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당신의 행동에 보정이 붙습니다! ]
“도와달라고 한 적 없던 것 같은데. 나.”
내 싸늘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리아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냉기가 깃든 분위기였으니 오죽할까.
아마 이 녀석으로선 처음 보는 모습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 녀석을 만날 때 보여줬던 건, 정도의 차이는 있다지만 대다수가 일관적인 호의다.
이 녀석이 어떻게 하건 잘 받아줬고, 하자는 건 다 해줬고, 잘 놀아주기도 했다.
즉, 지금 내 모습은 이 녀석이 처음 보는 ‘화가 난’ 내 모습이다.
“...아니, 아니, 그건 애초에 중요한 게 아니라-”
유리아가 힘겹게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왜 자기한테 말도 없이 다른 여자랑 또 단둘이 있냐고 따지려는 거겠지만.
“나한텐 중요한데?”
그쪽 화제로 넘어가기 전에, 꼬리를 잘라버리고 잡아챈다.
분위기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너무 화를 내버리면 그건 역효과다.
상대방과 나의 ‘체급 차이’는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저쪽은 조금만 수틀려도 내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악마다.
관계 자체가 파탄 날 수 있는 격한 표현은 절대 엄금이지. 그랬다간 바로 죽을 테니까.
다만.
관계가 ‘비틀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 조성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금 그 수룡은 네 도움 없이 내가 계획을 짜서 처리하려고 했었어. 잘 되고 있었고, 네가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딱 내가 원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유리아 없었으면 높은 확률로 죽었을 거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은 인식 조성이다.
‘네 잘못’으로 인해 ‘내가’ 피해를 봤다는 식의.
“...그, 그런 것보다, 지금은 왜 다우드 씨가-”
“넌 이 상황에서도 너만 중요하니?”
살짝 움츠러든 유리아의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더욱 싸늘해진 목소리로 그걸 끊어버린다.
“나한텐 방금 그 수룡이 중요했다니까?”
유리아의 몸이 움찔했다. 더욱 움츠러들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다. 눈동자에 깃든 분노가 옅어진다.
“...”
악마와 인간간의 관계라고 해도.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똑같다.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저 사람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
즉, 이 녀석은 지금.
겁먹은 거다.
방금 전까지 제자리에 서서 칼질 몇 번으로 용족을 난도질하던 여자가, 고작 내 말 몇 마디에.
본인과 나의 관계가 비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그저, 평소보다 훨씬 싸늘한 내 태도만으로.
“...”
말하면서도 나도 마음이 아프다.
칼리반이 나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하면서 힐난할지 벌써부터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있잖아.”
나중을 위해서라면, 눈을 질끈 감고 저질러야 한다.
“처음으로, 너한테 좀 실망했다.”
유리아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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