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0 - 100. 대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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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어, 할멈.”
“웬일로 일찍 들어 왔... 꼴이 그게 뭐냐?”
카사 가르다가 답지도 않게 식겁하면서 그런 말을 꺼내놨다.
그녀의 손녀딸이 항상 땀에 푹 절어서 들어오는 것 정도야 그녀로서도 익숙한 광경이지만, 이렇게 몸 곳곳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들어오는 건 그녀 기준으로서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틀림없이, 누군가랑 진창이 되도록 싸움이라도 벌이고 돌아온 게 분명하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꽤 자주 있었다지만, 요즘 들어서는 잘 못 보던 모습이기도 했지.
“너, 그놈이랑 훈련하다가 이렇게 된 거냐?”
카사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내놨다.
다우드 캠벨의 체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기초적인 운동이야 리루를 시켜 이미 매일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 훈련을 하는 당사자조차 대체 왜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우긴커녕 이런 체력 단련이나 하고 있냐고 의문을 품고 있긴 하지만, 카사가 워낙 완고하게 주장하는 탓에 아직도 매일매일 행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사냥꾼의 밤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아무튼.
고작 그런 훈련을 한다고 해서 이 정도로 다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당장 리루도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어쩌다 그렇게 됐냔 말이다.”
카사의 말에 리루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걸 지금 상담하는 게 맞나, 하는 깊은 고뇌가 묻어나오는 기색이었다.
“...저기, 할멈.”
“뭐냐.”
“...”
리루가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트리스탄 공녀라는 놈. 할멈도 알고 있어?”
“알기야 알지. 대륙 전체에 소문이 자자한 검술 천재 아니더냐. 그쪽은 왜?”
“그쪽이랑 싸워서 이기려면, 어떤 식으로 훈련하는 게 좋아?”
카사의 표정에 의문이 가득 들어찼다.
“...그쪽이랑은 왜?”
“그냥, 어쩌다가 한 번 싸우게 됐는데 말이야.”
리루가 곰곰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랑 싸우면 단숨에 확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냥꾼의 밤이 끝나기까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렇다면 대족장과 직접 손을 섞을 수 있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럼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은 다 끌어와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이유가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말을 이어가려던 리루가 잠시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으로는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이 절찬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다우드 캠벨이 정체불명의 능력을 동원하여 그녀의 팔에 새긴 문장.
[협조. 안 하면 죽음. 살려줘.]
-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조금 다르게 들리는 문장이다.
다우드 캠벨 ‘본인’이, 그쪽에 ‘협조’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으로.
그러니까.
평소에 엘노어를 ‘무서워하던’ 그 남자의 태도와 조합한다면, 조금 이색적인 결론이 도출된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리루가 멋쩍게 말했다.
“협박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떤 놈이.”
“...뭐?”
카사가 황당하다는 어투로 되묻자, 리루가 입술을 삐죽이며 답했다.
“...그냥.”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역력했지만, 틀림없이.
“억지로 붙잡혀서 결혼 생활하는 놈이 있으면 불쌍하겠단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결연한 ‘의지’ 정도는, 충분히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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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불의 전당을 담당하고 있는 대장장이라고 한다면 우락부락한 대장장이 아저씨가 떠오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부족 연합 제일의 교육 기관의 장비 담당은 그런 것과 억만년은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일단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용자 인식. ID 확인. 엘판테 2학군 교환 학생 다우드 캠벨. 불의 전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후끈후끈한 열기는커녕 거의 응접실처럼 느껴지는 깔끔한 디자인의 방, 그리고 그 정중앙에 놓여있는 거대한 ‘기계’를 바라본다.
가끔 튀어나오는 오버 테크놀로지의 마공학 도구를 제외한다면 전근대 수준의 기술력을 유지하는 세라 세계관에서 특히나 기괴할 정도의 광경이다.
혼자서 장르가 판타지가 아니라 SF에서 놀고 있다고 해도 믿을만한 광경이지.
[저는 불의 전당을 맡고 있는 제작 인공지능, 세피라입니다. 무슨 용건으로 방문하셨습니까?]
“장비 제작.”
[확인했습니다. 투입구로 재료를 넣어주시고 원하시는 도면을 선택해주십시오.]
그런 말과 함께 열리는 옆쪽 구멍을 통해 가지고 온 것들을 기계 옆쪽으로 전부 털어 넣는다.
엑토플라즘. 별철. 적응형 가죽. 그리고 심지어는 얼마 전에 수룡을 패면서 얻은 ‘용의 비늘’까지.
고급 재료가 아닌 게 없다. 뭐 하나만 있어도 어디 가서 떵떵거리며 대장장이에게 맡길 수 있는 최고급품들이지.
‘...사실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쓴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니지만.’
요리에서 온갖 재료를 다 집어넣는다고 맛이 좋진 않은 것처럼, 좋은 재료가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잘못 만들었다가는 궁합이 안 맞아서 안 넣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서, 아마 내로라하는 장인들한테 이걸 그대로 들고가 봤자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할 것이다.
본인은 이만한 재료들을 다룰 자신이 없다고 말하겠지, 분명.
‘이놈은 다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기계를 바라본다.
이런 것들을 들고 굳이 엘판테의 공방에 맡기지 않고 여기까지 들고 온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적어도 뭔가를 ‘만든다’는 점에선, 마탑이란 브랜드를 달고 있는 존재를 따라올 놈들은 대륙 전체를 뒤져도 없으니까.
실제로, 그런 말과 함께 재료를 전부 털어 넣어도 돌아오는 건 무슨 반응이 아니라 기계적인 홀로그램 창뿐이었다.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절대 안 한단 소리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이건 뭘 처넣어도 뚝딱뚝딱 내놓는 만능 제작 기계였으니까.
[재료들을 전부 확인했습니다. 질과 양을 감안했을 때 방어구로 만드는 걸 추천드립니다. 전신을 감싸는 소재로 만드는 게 가장 효율적-]
“아니.”
확실히, 그 말엔 동의한다.
이 정도 양이라면 사실 무기 하나로 만드는 건 비효율적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방어구는 안 돼. 무기도 안 되고.”
타티아나와 알란의 보스전 구도를 생각한다면 필수적인 조건이다.
아마 이런 걸 요구한다면 대다수의 대장장이에게 곧바로 축객령이 나오겠지만, 이번에도 세피라는 얌전하게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장비의 분류를 선택해주십시오.]
무기 내지는 방어구 같은 장비의 대분류로 시작해서, 검, 창, 투구나 방패 같은 소분류로 이어지는 연속된 카테고리들.
무슨 키오스크에서 음식 시켜 먹는 것처럼 대단히 현대화된 디자인이다.
‘...혼자서만 다른 세상에서 놀고 있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홀로그램 창을 조작한다.
원작에서의 모습을 생각해봐도, 마탑은 이렇게 아예 혼자서 다른 장르에 있는 것 같은 물건을 뽑아내는 놈들이다.
패권국 중 가장 기술력이 뛰어난 부족 연합 기준으로도 여기에 비한다면 한참 모자랄 정도로.
부족 연합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장비’를 제작하는 부분을 굳이 마탑에서 들여온 물건으로 대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돌아오는 대답만 해도 그렇지.
[ 예상되는 장비 제작 시간은 30분입니다. ]
“...”
아마 엘판테 제작학부의 불칸 교수한테 맡겨도 일주일은 걸릴만한 작업량인데 그걸 그냥 30분 만에 때우네.
마탑에서 제작된 모든 장비들이 공통적으로 더럽게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마탑제 전지’를 사용하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세계관 기술 수준이 뒤바뀌었을 것이다.
워낙에 폐쇄적인 집단이라 자기들 기술을 남들이 못 써먹게 하려고 목숨을 걸거든.
성향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연구에만 관심이 있는 과학자들이라서.
‘...나중에 한 번 방문은 해야겠지만.’
그리 멀지도 않고, 당장 마탑과는 다음 메인 시나리오 분기인 4챕터에서부터 연을 쌓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피라의 인터페이스 전면부에 새겨져 있는 ‘제작자’의 각인을 살핀다.
[ 제작자: 말소된 기록입니다. ]
[ 조수: 페이놀 라이펙 ]
“...”
익숙한 이름이 있다.
마탑 장비에 새겨져 있는 이단 심문소 소속 마법사의 이름은 꽤 이질적이지만, 그 놈 배경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페이놀이 4챕터에서 최종 보스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실마리’ 중 하나고.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자니, 세피라의 전면부가 열리며 내가 요청한 장비를 컨베이어 벨트 위로 죽 미끄러트렸다.
곳곳에 형형색색으로 재료들이 엮여있는 ‘건틀릿’ 두 쌍.
무기와 방어구의 경계에 가장 애매하게 걸쳐있는 장비다.
‘그렇지.’
생각보다도 잘 나온 것 같은 느낌에 미소를 띄며 그걸 집어든다.
[ 인피니티 건틀릿 ]
[ 장비: 유니크 ]
[ 온갖 고급 재료들이 사용되어 갖가지 효과를 갖춘 건틀릿입니다. ]
[ ▶ 용의 비늘: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부서지거나 마모되지 않는 내구력을 가집니다. ]
[ ▶ 엑토플라즘: 각종 이능에 대단히 높은 융화율을 보입니다. 장비를 대상으로 시전된 강화 및 버프 스킬 적용 시 효과가 2배로 적용됩니다.]
[ ▶ 별철: 각종 저주에 대단히 높은 내성을 가지며, 신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
[ ▶ 적응형 가죽: 타격 시 대상의 속성을 자동으로 복사합니다. 두 번째 타격 시 대상의 속성을 자동으로 약화시킵니다. ]
‘완벽하군.’
이게 내가 지금까지 온갖 재료를 모았음에도 바로 쓰지 않고 세피라를 기다린 이유다.
투입한 모든 재료의 성질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농담이 아니고 엘리야가 다음 챕터에서 얻게 될 ‘성검’ 턱밑까지 따라갈 성능까진 된다고 봐도 좋다.
물론 주인공 전용 무기란 점에서 성검의 천장까지 따라가진 못 하지만, 그래도 한 명에게 주어지기엔 과하게 좋은 장비라는 건 틀림없지.
아예 안 부서지고, 통상 장비보다 더 쉽게 강화되며, 저주엔 저항하고 신성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있는 ‘대상의 속성을 약화시킨다’는 특징은.
거의 타티아나를 저격할 수 있다고 봐도 좋은 능력이다.
이름이 꼭 장갑 위에 돌이라도 올려놔야 할 것 같은 명칭인 게 좀 웃기지만.
‘...리루 가져다 주면 좋아하겠네.’
두 쌍을 뽑은 이유는 하나는 리루 가져다줘야 하니까.
아마 그 사람도 이런 극상품의 장비를 받으면 틀림없이 좋아할 것-
< System Message >
[ ‘푸른 악마’의 그릇인 ‘리루 가르다’와 ‘¾̶̛͙̦͎͖͈̘̔͑͛͋́̊́̃̂̐̊͋̎̕Æ̷̬̩̲̲͓̹͈̗̕À̸͈̮̜̹̤̥͘Ì̴̛̫͌̽̀̊͑̕̕͘͝͝Ḁ̸̢̗͈͙̦͙̤̰̤̲̭̈̎͂̓̔̑́̍̊̃͑́̚͘͝Ü̶̳͖͂̽̂̇͌̃̓̈́͠’의 그릇인 ‘엘노어’ 간의 특수 상호 작용이 개방됩니다. ]
[ 두 그릇 간의 접촉 빈도가 높아집니다! ]
“...”
일단 리루가 양반은 못 된다는 점은 잘 알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스템 창의 뉘앙스를 보니 그렇게 위협적인 상황까진 아니라는 점.
아마 이게 내 목숨에 위협이 가는 이벤트였다면, 이놈 특성 상 빨리 가서 막으라는 식으로 경고했을 테니까.
'...뭐 접점이야 생겼을 텐데.'
굳이 내가 다리를 안 놓더라도 먼저 가서 들이박는 것만 봐도 그렇지만, 굳이 나를 통하지 않아도 그 둘은 이미 서로 교류가 몇 번 있긴 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압도적으로 졌으면 리루 성격에 당분간 마주치는 것도 싫어할 텐데, 접촉 빈도가 늘어난다는 건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다.
대체 뭐 때문에?
“아, 여기에 있었군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대단히 불쾌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들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타티아나다.
언제나처럼 그 기계적인 미소를 얼굴에 걸고 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잠잠하게 있던 놈이 갑자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전투를 벌여 날 죽이려는 속셈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가는 곧바로 엘노어한테 머리가 날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아마, 그쪽을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쪽에 무력 시위를 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을 것이다.
슬쩍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니, 타티아나가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족장님께서 투쟁의 용광로에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모두들 환영회를 준비하고 있죠.”
“...그렇습니까.”
그럴 때긴 하지.
벌써 며칠 전부터 그 인간이 여기에 방문한다고 기사가 흩뿌려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타티아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분 께서 가장 먼저 당신을 보고 싶어하신다는군요, 다우드 캠벨.”
내 표정은 역으로 찌푸려졌지만.
‘...알란과 벌써부터 접촉시킨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를 모르겠다.
그건 이 녀석이 꽁꽁 숨겨야 정상인 히든 카드다. 나한테 벌써부터 그걸 굳이 보여줘서 정보를 흘릴 필요가 없을 텐데.
“아.”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내 표정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오시는 길에는, 리루 가르다와 카사 가르다도 함께 데리고 오시겠어요?”
“...”
“대족장님께서 그 두 명도 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틀림없이, 그리 유쾌한 울림이 담긴 문장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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