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03)화 (104/258)

Chapter 103 - 103. 화신 (2)

 

 

세라 세계관에는 다종다양한 신적 존재들이 있다.

 

타티아나가 섬기는 바닷 속의 고대의 존재나 성황국이 섬기는 이면계의 천사를 부리는 신들, 그리고 판데모니엄의 악마들까지 그런 부류에 들어가는 존재들이지.

 

힘으로 따지면 이면계와 판데모니엄의 존재들이 가장 강력하지만,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는 그들 외에도 많단 소리다.

 

그리고 화신은 그런 자들에게 ‘가장 가까운 자’로서 선택받은 존재들이다. 그 신의 힘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도록 대상에게 간택 받은 존재들.

 

원작 안에서 가장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건 악마의 조각을 모두 모은 그릇들, 그 중에서도 회색 악마의 화신이 된 엘노어다.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아도 그쪽 그릇에 조각이 다 모이는 건 최종 보스인 이상 정해진 수순이라.

 

 

‘...상호 작용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선택받아서인가, 조각을 전부 모은 엘노어는 화신 중에서도 가장 ‘부작용’이 없는 축이다.

 

그런 존재들 중에서도 성공적으로 그런 경지에 안착한 놈들은 거의 없으니까. 선택받은 자에게 어떻게든 이득이 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지.

 

 

본인의 인격이나 신체를 멀쩡히 유지한 경우는 극히 희귀 케이스라 그거다.

 

알란 또한 역조의 화신이 되었지만, 그 대가로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게 변해버렸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성공적으로 화신에 영역에 도달한 존재들은, 어떤 법칙으로도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일을 쉽게 일으키곤 한다.

 

예를 들어.

 

완전히 한 번 죽은 경험이 있음에도, 거기에서 다시 살아난 다던지.

 

 

“신기하게 생긴 아뮬렛이네요.”

 

 

페이놀이 그렇게 말하며 빛을 발작적으로 내뿜고 있는 소울 링커를 바라보았다.

 

칼리반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금도 자기 눈앞에 있는 게 자기가 한 번 죽였던 상대라는 걸 못 믿고 있는 기색이지.

 

 

“...신경 안 쓰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울 링커를 뒤로 숨긴다.

 

지금은 이 사람의 존재를 내비쳐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난 아무튼 현재 페이놀에게 협력을 구하러 온 상태니까.

 

 

“솔직히 말해서, 먼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한 페이놀이 우아하게 차를 홀짝였다.

 

설정을 생각하면 이 녀석도 아무튼 귀한 집 여식이긴 하다.

 

보통 귀한 집이 아니라서 자기랑 비슷한 급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놈은 전부 다 무시해버리는 게 문제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일부러 피해 다니셨잖아요?”

 

“...”

 

“굳이 의외라는 표정은 안 지으셔도 된답니다. 당신에 대한 정보라면 항상 듣고 있으니까요.”

 

 

녀석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저를 대하는진 그럭저럭 보인다는 뜻입니다.”

 

 

왜 내가 마주치는 모든 여자마다 나에 대해서 괴상할 정도로 관심이 많은 걸까.

 

아무리 체질이 그렇다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그래도 당신 정도면 꽤 괜찮은 편이죠. 근처에 널리고 널린 벌레들에 비하면요.”

 

“...”

 

“특히 이 야만적인 장소라면 더욱이 그렇죠. 합리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이라면 뭐든지 맹신하는 미개한 국가잖아요?”

 

 

꺼내는 말 하나하나마다 부족 연합에 퍼지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칼침을 꽂으려고 할 발언의 연속이다.

 

이쪽 동네에서 부족의 전통이라는 건 종교에 가까운 위상을 가진다. 알란 바-토르의 정권 강탈이 누가 보아도 해괴한 일임에도 다들 그 치세를 인정하는 건 그게 전통이기 때문일 정도니까.

 

하지만 그런 미친 문장을 내뱉는 페이놀의 목소리는 평안한 걸 넘어 차분하기까지 하다. 마치 담담하게 사실을 토로하는 것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

 

 

페이놀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을 상기하며 속으로 신음을 내뱉는다.

 

이 녀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등주의자다.

 

자기 외에는 모든 인간을 다 쓰레기로 보니까.

 

그나마 나랑 유리아는 각각 이유가 있어서 이 녀석의 허들을 넘어갔을 확률이 높지만.

 

 

‘...이런 놈이니까 조각이 전부 다 모이자마자 폭주했지.’

 

 

엘노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악마의 조각은 모이면 모일수록 대상의 인격에 부정적인 부분이 더욱 더 극대화되는 성질을 가진다.

 

적야 사태가 일어난 것도, 아마 다른 그릇들과 달리 이 녀석은 조각에서 전달되어오는 부정적 효과를 억누를 생각조차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럼 이 자리에서 이놈을 죽여야 해.]

 

‘...칼리반.’

 

[젠장, 너도 모르는 게 아니잖아. 이 녀석은 걸어다니는 재앙이야. 어떻게 한 번 죽었는데도 되살아났는진 모르겠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나중에 또...!]

 

‘나랑 약속했잖아요.’

 

 

허튼짓은 하지 않겠다고.

 

내 말에 칼리반이 이를 악물고 침묵하는 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래. 나도 안다.

 

당장 칼리반의 걱정은 이 녀석이 4챕터의 최종 보스라는 것으로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협력을 요구하러 왔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녀석을 지금 죽이는 건 어불성설이다.

 

 

‘안 죽어요, 이 녀석.’

 

[뭐?]

 

‘안 죽는다구요.’

 

 

4챕터에서 엘리야에게 성검을 쥐어줄 때까지, 이 녀석을 죽일 방법이라고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화신이라는 놈들은 다 그런 괴상한 놈들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아마 굳이 제가 나설 필요도 없을 겁니다.’

 

 

아마, 내 생각이 맞으면.

 

이 녀석도 죽음에서 돌아온 걸 그리 달가워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괜히 데스위시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협력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나한텐 주어진 시간이 없다. 기껏해야 하루 안에 뒤집힌 해일의 사도를 막아낼 방법을 강구해야 하니까.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긴다. 이 녀석의 입에서 나올 협상 카드란 카드는 모조리 정리해서-

 

 

“받아들입니다.”

 

“...”

 

 

너무나도 수월하게 흘러나오는 대답에 눈을 끔뻑이며 페이놀을 바라본다.

 

뭐냐 이거.

 

얘 성격을 생각하면 먼저 요구하러 온 쪽이 나라면 이것저것 해달라고 나한테 온갖 족쇄를 달아놓을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어떤 것을 상상하고 계시는 진 알 것 같습니다만.”

 

 

페이놀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단 심문소에서 당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는 지 알고 계십니까, 다우드 캠벨.”

 

“...그리 좋은 인상일 것 같지는 않군요.”

 

 

악마 관련된 거라면 뭐든 눈을 까뒤집고 배격하는 집단이 거기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악마의 존재를 끌어당기는 내 존재가 거기에 어떤 인상으로 비춰질 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내가 지금까지 이단 심문소란 곳을 이를 악물고 피해 다닌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니까.

 

하지만, 이어서 흘러나온 페이놀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단 심문소는 전심전력을 다해 당신의 신변이 위협에 처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어한답니다.”

 

“...”

 

 

뭣이?

 

 

“한 가지 알려드릴까요, 다우드 캠벨.”

 

 

평탄하게 이어진 목소리였다.

 

 

“이단 심문소에서는 악마의 그릇 보유자들을 주의깊게 추적하고 있지요. 그들이 폭주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요.”

 

 

그렇기 때문에.

 

 

“최근 회색 악마가 폭주했다가, 그 그릇이 다시 시간축을 되돌린 일까지 알아내는 건 조금 애먹었지만요.”

 

 

그렇게 튀어나온 말에 내가 반응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다.

 

 

“...”

 

 

살짝 놀란 눈으로 상대방을 보고 있자니, 페이놀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고 계시냐는 눈치지만... 저도 나름 화신입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진 몰라도, 뭔가가 ‘비틀렸다’는 사실에 회색 악마의 능력을 대입하면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녀석이, 그 붉은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능력 자체보다 놀라운 건, 한 번 폭주한 악마가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는 겁니다.”

 

 

틀림없이.

 

흥미와, ‘소유욕’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당신의 영향으로요.”

 

“...”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악마의 힘은 오롯이 악마의 것. 타인의 영향을 받아 그 방향성이 결정된 경우는 고금을 털어 한 번도 없었던 경우지요.”

 

 

그렇겠지.

 

당장 페이놀이 폭주한 적야 사태 때, 그걸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이 녀석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단 심문소는, 당신과 그릇이 일종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판단하는 중이구요.”

 

 

그 말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아탈란테도 이전에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나와 그릇들의 관계가 그쪽을 봉인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했었던가.

 

그렇게 말한 페이놀이 한 차례 숨을 골랐다.

 

 

“...요컨대, 당신에게 ‘반한’ 악마의 그릇은, 당신을 얼마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그 힘의 ‘제어권’이 당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지. 그런 결론입니다.”

 

 

아탈란테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그 과정은 알 수 없지만,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악마를 봉인하는 게 가능하다고 했던가.

 

지금 이 녀석이 말한 것은 그런 현상의 과정이고.

 

 

“...”

 

 

그래.

 

그건 알겠는데.

 

거기까지 들으니, 이어질 말이 뭔지도 알겠다.

 

그게 나한텐 절대 달갑지 않은 것이란 것도.

 

 

“...당신의 성향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만. 저는, 한 번 죽음에서 되돌아왔습니다.”

 

 

페이놀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나중에 경험하게 되실 일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미리 말씀드리건데. 결코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지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뇨, 죽음이 아니라.”

 

 

페이놀이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죽은 뒤에, 이... 아무것도, 없는, 이 ‘삶’이요.”

 

“...”

 

“붉은 악마의 화신으로서 그 권능의 일부를 통해 ‘부활’하긴 했지만. 대신 좀, 소중한 걸 잃어버렸거든요.”

 

 

그래, 확실히.

 

이 녀석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뭘 ‘잃어버렸는지’는 나도 잘 안다.

 

아까 전에 화신 중에 이 녀석이 부작용 없이 그런 경지에 이른 드문 케이스라고 한 적 있는데.

 

아마 거기에 부연을 하나 더 붙이긴 해야 할 것이다.

 

이 여자의 경우도 ‘결함’이라면 가지고 있다.

 

 

“...”

 

 

그리고, 그 결함이라는 게.

 

생각보다 좀, 무시무시한 거다.

 

죽음보다, 지금 현재 살아있는 걸 더 무서워할 만큼.

 

오죽하면 ‘이해관계’가 서로 맞을 정도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잖아.

 

악마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배격하는 이단 심문소에, 그릇을 넘어 그게 완성된 화신이 붙어있다니.

 

하지만.

 

이단 심문소는 모든 악마들을 잡아다 족치고 싶어하고.

 

페이놀은 자신이 그런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둘이 내린 결론은.

 

결국 양자의 목적을 이루는데, 가장 편리한 ‘도구’가 바로 나에 이른다는 것이겠지.

 

그러면, 이 녀석이 나한테 요구할 게 뭔지도 대단히 뻔하다.

 

 

“다우드 캠벨. 당신이 말하는 건 뭐든지 협조하겠습니다. 전 이단 심문소에서 심문관 대행으로 나와있으니, 전권을 활용하여 협력해드리죠. 다만. 오직 한 가지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페이놀이 싱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 좀 꼬셔주시겠어요?”

 

“...”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세요. 그런 관계를 통해, 제 안에 깃든 악마를 짓누르게 도와주세요.”

 

 

그런 말이, 응접실 안으로 사락사락 내려앉았다.

 

 

“그래야, 제가 다시 죽을 수 있으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