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4 - 114.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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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면 그런 연출이 있다.
인간이 내지른 주먹에 주변 환경이 통째로 격변하는 연출.
거대한 범위의 대지가 작살이 난다거나, 수십 층 크기의 거대한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그런 식으로 인간 하나가 터무니 없이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 집어넣은 과장된 연출들 말이야.
그리고, 지금.
그 범주에서도 가장 어이가 없는 수준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차라리 물리적으로 어마어마한 충격이 생겼다면,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카사가 하늘을 향해 내지른 주먹의 끄트머리에 걸린 광경은.
‘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
-.....!!
시간대에 따라 어둑어둑하던 하늘이.
아주 잠깐이지만, ‘부서진다’.
마치 산산조각난 거울처럼 그 표면이 비틀리고, 부서지고, 벗겨지고, 강제로 왜곡된 공간 사이로 지금 시간의 하늘에선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환한 ‘태양빛’이 스며들어온다.
“...개, 씹.”
연속으로 욕지기를 중얼거리며 그 모습을 올려다본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안다.
‘...차원이 통째로 비틀렸어.’
신음을 흘리며 그런 생각을 떠올린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이거 범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일격사 판정으로 처리될 것이다.
방금 그 공격에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은, 이 세계관 굴지의 강자들 수준이 아니면 ‘스치기만 해도’ 모조리 정리될 수준이니까.
역대 최초이차 최강의 검성이라고 불리는 초대 트리스탄 대공은, 허공을 검으로 베어 낮을 치우고 밤이 찾아오게 만들었다고 한다.
비록 찰나에 불과하지만, 비록 아주 국소적인 범위에 불과하지만.
지금 카사는 제자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런 광경을 재현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냐.’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애써 억누르며 그런 생각을 떠올린다.
카사가 권성이란 칭호를 카드 게임 따서 쳐낸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전에 내가 이 사람의 주먹을 막아낸 게 말도 안 되는 요행이었다는 체감이 든다.
“법술은.”
넋이 나간 내 앞으로, 카사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인간의 ‘의지력’에 기반하여 발휘되는 이능이지. 세간에는 부족 연합의 전유물로 알고 있지만, 그건 이쪽이 극한 상황에 자주 노출되어 개화시키기 좋은 환경에 있을 뿐. 다루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그런 말을 하는 카사가,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마경의 지배자들에게서 걷어온 재료들로 만든 인공 신체들이 모두 산산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저만한 재료들로 만들었음에도 단 한 번 사용한 것으로 저 상태다.
사실 한 짓거리를 보면 용케 한 번은 버텼구나 싶을 수준이긴 하다.
“그리고 사람의 정신에 기반하여 발동하는 특성상, 마력이나 신성력과 달리 그 ‘한계’가 없지. 얼마나 간절히 원하냐. 얼마나 간절히 바라냐. 그런 ‘의지’에 따라 능력의 한계가 결정되는 이능이다.”
“...”
“하늘에 닿을 수 있는 의지라면, 이렇게 하늘을 부술 수도 있는 법이야.”
물론, 바꿔 말하면.
원래 자신의 몸도 아니라, 급조한 인공 신체에 불과하다. 그런 걸 달고도 이런 짓을 했다는 소리지만.
“너라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다. 똑같이는 못 해도 비슷하게는 따라 할 수 있겠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태연한 카사가, 다시 자리에 앉아 옆에 놓여있는 곰방대를 주워들며 말했다.
“난 원래 못 배워갈 놈한테는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줘.”
그래. 익숙한 대사다.
게임 안에서도 이런 대사가 떠오른 뒤로 엘리야에게 스킬이 주어졌었지.
‘...흠.’
근데, 나 뭔가 바뀐 거 있나?
저걸 봐도 엄청 대단하다는 느낌만 들지, 어떤 깨달음이 오는 느낌은 아닌데.
능력을 어떤 식으로 쓸 수 있게 되는-
< System Message >
[ 말도 안 되는 경지를 목도하셨습니다! ]
[ ‘특성: 격투술 – 입식立式’에 새 기능이 추가됩니다! ]
[ ‘스탠스 – 하늘 부수기’가 동작에 추가됩니다! ]
< System Message >
[ 귀중한 가르침을 얻으셨습니다! ]
[ ‘특성: 법술 운용’을 획득하셨습니다! ]
“...”
아, 이런 식으로.
나도 뭔가 경천동지할 깨달음을 얻는 걸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건 어쩐지 너무 슴슴하네.
뭐든지 날로 처먹던 나답다면 나답긴 한데.
“표정을 보니까 뭔가 얻어가긴 한 모양이구나.”
내 얼굴을 본 카사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얻어가긴 했지, 확실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는다.
“...이런 걸 하실 수 있는 실력으로 어쩌다 팔다리를 잘리신 겁니까.”
알란 바-토르도 한 가락하는 강자지만, 지금 카사가 부린 묘기를 보면 그 사람이 세 트럭을 꽉꽉 채워서 덤벼들어도 못 이길 수준이다.
이에 카사가 어깨만 으쓱하며 답했다.
“그땐 그놈이 내 씨족의 목숨을 붙잡고 협박했으니까. 그래서 그냥 얌전히 잘려줬을 뿐이야.”
“...”
물론, 그래도 결국에 타티아나의 지시로 알란이 가르다 씨족을 다 죽였다.
‘심지어 거기서 끝낸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알란을 직접 만날 때, 그 몸에 타티아나가 ‘해놓은’ 짓을 생각한다.
인상이 절로 찌푸련다. 구토감이 올라올 정도다.
지금도 폭주하기 직전인 리루가 그걸 보면 무슨 반응이 나올지 얼추 예상이 될 정도로.
“할 수 있겠니?”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자니, 카사가 그런 말을 던졌다.
시선은 수평선 너머에 걸쳐져 있었다. 정확히는 그쪽에서 만들어지는 무시무시한 ‘해일’에 꽂혀있지.
타티아나의 소환 의식은 슬슬 마무리 단계다.
그리고 그렇다는 말은.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때가 됐다는 거지.
그런 창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나도 몸에 힘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한숨을 내쉰다.
“...못 하면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카사 앞에 있는 해안 절벽 쪽으로, 그대로 뛰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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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고 내가 착지한 암석이 부딪히는 게 느껴진다.
몸이 가볍다. 절체절명이 터질 때는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더 그렇다.
‘...확실히, 단련이 되긴 했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느꼈던 일이긴 하지만, 여태 리루랑 같이 열심히 운동하던 게 완전히 헛된 게 아니다.
오죽하면 이런 짓까지 가능할 정도니까.
“-흡!”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차자, 지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멀어진다.
일전에 엘노어가 했던 것처럼 신체 능력만으로 비행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는 거다.
‘...조각 2개 먹기 직전 엘노어 급은 되려나.’
지금 내 신체 스펙은 그거랑 비견되도 괜찮은 수준까진 올라온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득한 높이로 떠오른 김에 주변을 쭉 훑는다.
찾던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바닥에 착지해서 암석 하나를 더 산산조각 내고, 그쪽으로 도약한다.
몇 백 미터는 족히 날아간 몸이, 마치 포탄이 충돌하는 것처럼 부족 연합의 보트 위에 착지했다.
“우, 우왓!”
조종석에 있던 탈리온이 비명과 함께 화들짝 놀랐다.
내 부탁에 따라 마침 여기에 배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녀석이다.
“어, 나 왔-”
그렇게 인사를 건내려다, 탈리온의 머리통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얼음 고양이를 본다.
“...”
아니, 새끼 호랑이인가.
얜 뭔데 이런 걸 머리통에 붙이고 다니냐.
“...그거 뭐냐?”
“어, 그, 빙호의 새끼인 모양인데. 어미가 사라진 이후로 저한테 이렇게 계속 달라붙습니다. 제가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걔한테 새끼가 있었어?”
그건 몰랐네.
염마고 빙호고, 한 번 그렇게 두들겨 패 놓으면 부활할 때까지 적어도 몇 달에서 1년은 걸린다.
그렇게 어미가 없어진 새끼라면, 본능적으로 자길 보호해줄 것 같은 사람한테 저렇게 들러붙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그래서 당분간은 제가 좀 보살펴 주려고 합니다.”
탈리온이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빙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녀석이 골골거리면서 거기에 머리를 비비는 걸 보니 그 사이에 또 친해진 모양이다.
“...근데 그거 마수 아니냐?”
“근본적으로는 동물이랑 비슷하게 구니까 키우는 것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어미 없는 새끼를 그냥 버려둘 수도 없으니까, 산책도 잘 시키고 먹이도 잘 주겠습니다.”
“...”
뭐, 내가 무슨 결정권자도 아닌데. 알아서 해라.
그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위기다.
“...저, 형님.”
“응.”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탈리온에게 짧게 답한다.
“형님이랑 다니다 보면 참 별의별 상황을 다 겪는데 말입니다.”
“응.”
“저번에 용이랑 만났을 때는 그래도 이게 정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뭔가 저를 크게 놀라게 할 뭔가는 없다고.”
“응.”
“...그런데 어떻게 항상 저한테 새로운 충격을 주시는 데 성공하시는 겁니까?”
“...”
저게 좀 무섭게 생기긴 했지?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싱크홀’을 본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처음으로 크라켄이 소환되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다.
다만.
그때와는 그 ‘크기’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 넓은 바다에서도 확연하게 눈에 띄는, 아래로 뚫리는 구멍. 투쟁의 용광로를 통째로 집어 넣는다 그래도 넉넉하게 들어갈 만 한 수준이다.
바닷속으로 깊게 뚫린 구멍 안으로 ‘솟아오른’ 바닷물은 마치 해일처럼 보인다.
뒤집힌 해일. 참 적절한 작명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
-...
-....!!!
‘저주 받은’ 존재가.
‘이 세상’에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침략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궁창 밑바닥에 끈적끈적하고 눅진눅진하게 늘러붙은 검댕이 정신에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존재 자체만으로 온갖 저주를 주변으로 흩뿌리는 녀석만이 풍길 수 있는 분위기지.
첫 번째로 떠오르는 건 거대한 촉수다. 사방으로 피와 저주를 뿜어내며, 거기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 문자들이 기괴한 빛을 뿜어낸다.
저거 하나만으로도 투쟁의 용광로 전체를 감싸쥐고 으스러트릴 수 있는 크기지만, 아직 아래쪽으로 뚫린 싱크홀에는 그 촉수에 이어진 신체가 한참이나 더 남아있다.
저게 몸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거지.
본신의 크기는 까마득하다는 말로도 모자라다.
“형님.”
“응.”
“...한 개도 아니네요, 저거.”
“아니지.”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는 탈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대로는 저거 하나만 상대해야 하지만.
지금은 총 세 개다.
알란 바-토르를 화신으로 지정한 덕분에 발생하는 효과다. 타티아나가 나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안배한 계략.
다른 놈들은 다 어떻게 되든 상관 없으니까 일단 나만큼은 어떻게든 쳐죽이겠다고, 이런 감당 안 되는 놈을 세 놈이나 소환한 거다.
“탈리온.”
“예?”
“예전에 수룡 상대로 이 보트 움직이는 거 열심히 연습했잖아.”
“지금 할 일의 예행 연습이었어.”
“확실히 저런 걸 상대로 도망 다니려면, 그 정도가 예행 연습이라고 해도...!”
“아니, 저게 중요한 게 아니야.”
실제로.
저런 것조차 ‘따위’로 만들어 버리는 최고급의 위협은, 하나 더 있다.
엄밀히 말하면 두 개지.
“...예?”
탈리온이 멍한 반문과 함께.
눈앞에서 솟아오르던 그렇게 거대한 존재의 신체가.
일순간에, ‘분쇄’당한다.
--!!!!!!!!
-!!!!!!!!!!!!!!!!!!!!!!!!!!!!!!!!!!!
하늘과 대지가 동시에 찢어지는 것 같은 음량으로, 바다 아래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던 고대의 존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다.
‘...단박에 죽진 않았네.’
역시 한 챕터 보스전 노릇은 할 정도인가 보다.
‘저거’랑 부딪혀도 바로 안 죽다니.
“다우드 캠베에에에에엘--------!!!!!!!”
괴성 사이로도 똑똑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바다를 뛰어오는’ 인간 한 명이 내지르는 포효였다.
탈리온이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중얼거렸을 정도로 흉흉한 적의가 담긴 목소리기도 했다.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튀어나와아아아앗--------!!!!!!!!!!!!”
“...”
아니.
튀어 나가면 죽겠지.
한숨을 내쉬며 탈리온에게 손짓한다.
“튀자.”
“넵.”
보트가 급발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제 3챕터 보스전.
뒤집힌 해일의 사도, 바닷속 고대의 존재 토벌전, 개막.
그리고 그거랑 동시에.
!!!!!!!!!!!Demon Alert!!!!!!!!!!!
[ ‘악마 관련’ 긴급 이벤트 발생! ]
[ 최중요 이벤트입니다! ]
[ 제한 시간 안에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사망합니다! ]
[ 대상 ‘리루’와 관련된 이벤트입니다! ]
[ 지금 당장 생존을 위해 대비책을 강구하십시오! ]
악마의 그릇 두 명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회피 기동, 시작.
“...”
보스전보다 뒤쪽이 훨씬 더 파멸적으로 보이는 건 기분탓만이 아닐 거다.
“...인기 많아서 좋아 죽겠네, 진짜.”
“죽는다는 점에선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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