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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17)화 (118/258)

Chapter 117 - 117. 뒤집힌 해일

 

 

머리가 멍하다.

 

그런 느낌이야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받고 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

 

 

리루가 부들부들 떨리는 스스로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찢어죽일 년을, 한시라도 찾아서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이 몸 안에서 끓어 넘치고 있다.

 

 

 

‘...아니.’

 

 

그년만 문제인 게 아니야.

 

머릿속으로 최근에 있었던 짜증 나는 일들, 열 받았던 일들이 하나하나가 전부 다 떠오른다.

 

전부, 이 힘으로 찍어서 부숴버리고 싶다.

 

 

“...”

 

 

스스로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실낱같은 자각은 있지만, 그런 것들조차 모조리 덮어버리는 감정의 격류가 의식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비이성적인 분노. 불합리한 파괴 충동.

 

 

-안녕하세요, 리루.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눈앞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자신’의 목소리였으니까.

 

 

“...”

 

 

리루가 초점 없는 눈으로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거, 누구지?

 

왜 자신의 형상을 띄고 있는 거란 말인가.

 

 

-아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글쎄요. 조각 하나만 있는 그릇 중에서는 당신이 유일하겠죠. 다른 녀석들은 하고 싶어도 ‘격’의 차이가 너무 나서 못할 테니까. 약하다는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네요.

 

 

...조각? 그릇?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으로 뭉게뭉게 떠다니는 사이, 상대방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오히려 당신을 도와주고 싶지만... 이미 계약을 해버려서 그건 안 되겠네요. 우리들은 전부 계약에 종속되어 있으니까요.

 

 

목소리가, 쿡쿡거리는 웃음과 함께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너, 누구야.”

 

-당신의 인격에서 여성스러움을 담당하는 부분이랍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눈 지는 좀 됐죠?

 

“...”

 

-농담이에요. 히히.

 

 

늘어지는 기색으로 쿡쿡거린 목소리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보다는 진지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당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말씀 못 드려요. 이단 심문소 놈들의 냄새가 좀 나서. 그쪽이랑 엮일 건수는 최대한 줄이는 게 좋거든요?

 

“...헛소리만 늘어놓을 거면 꺼져. 귀신인지 뭔지 모를 년아.”

 

-어머.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의식이 꽤 돌아온 모양이네요.

 

 

자신의 형상을 띄고 있는 정체불명의 ‘뭔가’가, 이내 리루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의식이 탁 트였다.

 

머리를 혼탁하게 어지럽히던 분노가 한 순간에 가라앉는 느낌.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네요.

 

 

그 느낌에 리루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있자니, 상대방이 다시 그런 말을 던져왔다.

 

 

-우리 며칠 뒤에 또 봐요, 리루.

 

“...뭐?”

 

-‘같이’, 재미있는 일을 하나 할 수 있으니까요. 아시겠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끌려 나온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진 모르겠지만, 리루가 가장 먼저 느낀 건 그런 감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색 기운이 일제히 사라진다.

 

 

“어, 우왓!”

 

 

주변을 전부 뒤덮고 있던 푸른 기운이 사라지자마자, 더 이상 바다 위에 서 있을 수 없게 된 리루가 바다 안쪽으로 첨벙 가라앉았다.

 

다행히, 수영 정도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라 쉽게 몸을 띄울 수 있었지만.

 

 

“뭐야, 나 지금 여기서 뭘-”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다.

 

자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다우드 캠벨을 바라본다.

 

 

“...”

 

“...”

 

 

이건 또 뭐야.

 

언제부터 붙어있던 거야.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아직 정신을 차리지도 못 한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육편과 핏덩어리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

 

 

자신은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자니.

 

눈을 감고 있던 다우드의 몸이 스르륵 움직여,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

 

 

그녀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정신 차렸으면 빨리 떨어...!”

 

 

이어서, 리루가 곧바로 성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몸에서는 아까 사라진 푸른색 기운이 다시 살짝 배어나오고 있었다.

 

또 이쪽에 휘둘리는 건 질색이다. 무슨 말을 꺼내 놓을 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또 이상한 변명을 들었다간 정말로-

 

 

“미안해요.”

 

 

나직하게 나온 목소리에, 그녀가 몸을 딱 굳혔다.

 

평소의 분위기와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닫는 덴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평소에는 결코 자기 진심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는 놈이다. 눈치가 있는 이상, 이 녀석이 항상 뭔가 속에 꿍꿍이를 숨겨놓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겠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절절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따지고 들려던 리루도 멋쩍게 코를 쓸어 넘기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갑자기.”

 

“미안해요.”

 

“...”

 

 

밑도 끝도 없이 나온 사과였지만.

 

가슴에 쿡, 하고 쑤셔박히는 문장이었다.

 

 

“...”

 

 

리루 본인은 항상 직설적인 화법을 선호하는 사람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뭐 때문에 화 났는지 알기는 해?’라는 문장이었다.

 

연애하면서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는 여자들을 이해 못 하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음에도.

 

그저, 이 남자가 자신을 조금 더 ‘챙겨줬으면 좋겠다’라는 심리의 발로로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다시 진심 어린 사과가 날아들었다.

 

 

“제가, 당신에게 그 정도로 소중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다시, 가슴에 뭔가 쿡 하고 날아와서 박혔다.

 

얼굴이 아까보다도 훨씬 더 붉어진다.

 

평소대로라면 네까짓 것 따위는 하나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받아쳤겠지만, 다우드의 목소리에 녹아있는 확신이 그녀의 혀를 굳게 만들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다.

 

그리고, 리루 본인조차.

 

지금 그런 말을 부정하라고 한다면, 강하게 부정할 자신이 없었다.

 

 

“죄송해요.”

 

“...”

 

 

따지고 보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이미 자신은 이 남자한테 꽤 휘둘렸다. 감사한 일도 물론 있지만, 그것 이상으로 따지고 싶은 일도 많다.

 

그러니까.

 

화, 내야 한다.

 

화를 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무시해서,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좋을 대로 써먹어서 정말로 미안해요. 저 때문에 그런 심한 일을 겪어서, 정말, 정말로 미안해요.”

 

 

이렇게.

 

자신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죄를 털어놓는 것처럼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미안해요.”

 

“...”

 

 

가슴이, 간지럽다.

 

이 남자가 이렇게 진심으로 자기 마음을 자신에게 부딪히는 게, 이 정도로 쑥쓰러운 일일 줄은 몰랐다.

 

 

“...있지.”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이내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진짜, 친구로 지낼거야?”

 

 

생각해보면 그것 때문에 이 남자에게 그렇게 화를 냈던가.

 

그런 문장 한 마디에.

 

 

“...”

 

 

이상하긴 하네.

 

스스로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당신이 원한다면요.”

 

“...”

 

 

원하지 않아.

 

그것보다는, 조금 더.

 

조금 더, 긴밀하게.

 

 

“...몰라. 닥쳐.”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말을 꺼낼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

 

그래도.

 

 

“더 세게 끌어안아.”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겠지.

 

 

“...예?”

 

“미안하면 더 세게 안아달라고.”

 

“...”

 

 

다우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감싸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이 남자의 몸이, 더 긴밀하게 그녀에게 밀착되었다.

 

 

“...더.”

 

“...”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온기에 파묻힌다.

 

리루가 눈을 감고 다우드의 가슴팍에 이마를 푹 파묻었다. 자신의 팔도 이 남자의 등 뒤로 끌어 안아서 고정한다.

 

그 상태로.

 

이 남자를 느낀다.

 

심장 고동을 듣는다. 숨소리를 듣는다.

 

 

“...”

 

 

전신이 이완되는 느낌.

 

뭐라고 해야할까.

 

엄청, 안심된다.

 

 

“고마워.”

 

 

리루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엿 같은 걸 봐버려서. 좀 안심되는 게 필요했어.”

 

“...”

 

 

그렇게 말하는 리루의 모습에, 다우드의 시선이 슬쩍 돌아갔다.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알란의 몸. 그리고 거기에 결합되어 있는 가르다 씨족의 ‘신체’.

 

리루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걸 봐서, 무서워하고 있는 것처럼.

 

 

“...”

 

 

다우드가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리루.”

 

“응.”

 

“저런 짓을 한 놈은, 대가를 치룰 겁니다.”

 

“...”

 

“내가 그렇게 만들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다우드의 눈은.

 

 

“그리고. 제가, 지금부터.”

 

 

근처 바다에 다시 만들어 지고 있는 거대한 싱크홀에 틀어박혀 있었다.

 

2페이즈. 뒤집힌 해일의 본체.

 

타티아나가 섬기는 ‘주신’들. 그 여자가 부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

 

 

“저 놈 상대로. 제가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합니다.”

 

 

그런 말과 함께.

 

천지를 찢어놓는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해양 생물’이, 이윽고 바다 아래에서 그 거체를 드러냈다.

 

 

 

 

“엘끼야아아아악-!”

 

“...”

 

 

절벽에 걸터앉아 있던 카사가 가늘게 뜬 눈으로 곰방대를 바닥에 툭툭 내리쳤다.

 

그래. 이맘 때쯤 올 것 같기는 했다만.

 

이 정도로 호들갑스럽게 등장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등 뒤에서 튀어나오는 인간을 돌아보았다.

 

 

‘...말도 안 되는 재능을 품고 있는 아이로구나.’

 

 

카사가 눈물 맺힌 눈으로 이쪽에 돌진하고 있는 주황 머리 소녀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등 뒤로는 귀신같은 기색으로 하얀색 기운을 줄기줄기 흘리고 있는 작달막한 소녀 한 명이 따라붙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고를 친 건 선생님인데 왜 저한테 그러시냐고요-!”

 

“하지만, 엘리야 씨. 다우드 씨가 어디있는 지 분명히 알고 있으실 것 같고. 저한테 숨기시는 것 같고. 조금 괴롭히다 보면 알려주실 것 같고.”

 

“이상한 말투로 추궁해봤자 저도 모른다고요-!”

 

“...”

 

“끼야아아아악-!”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하얀색 참격을 간신히 피한 엘리야의 옆으로, 유리아가 바닥을 박차며 도약했다.

 

거의 순간 이동에 가까운 동작이었지만.

 

엘리야 역시, 그런 속도에 ‘반응’한다.

 

몸을 통째로 비틀어 참격을 피하고, 그 원심력을 그대로 이용해 검집채로 자신에게 달려든 검은색 소녀를 쳐낸다.

 

 

“오오.”

 

 

구경하고 있던 카사가 저도 모르게 그런 감탄성을 흘릴 만큼 효율적인 동작들이었다.

 

순간적인 임기응변과 센스가 이미 학생 수준은 한참 넘었다.

 

당장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그쪽으로 달려들 던 검은색 소녀가 속수무책으로 날아간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

 

비거리가 상당하다. 슝- 하고 카사가 있는 위치를 넘어 해안 절벽 너머로 날아가 버릴 만큼.

 

 

“...”

 

 

죽지는 않겠지.

 

보아하니 보통 소녀는 아닌듯하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서 어떻게 될 모습은 아니다.

 

애초에 그 다우드라는 놈이 했던 말을 좀 떠올려 본다면, 저렇게 날아가서 절벽 아래로 날아가는 것 자체를, 그, 뭐냐.

'계획'해둔 감이 있으니까. 그놈의 성향이 그렇듯이.

 

그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더 죽을 모습이다.

 

 

“헉! 흐악! 아하아악...! 선생님, 말, 다시는, 안 듣, 아으으으...”

 

“...”

 

“그, 그런데, 누구세요?”

 

“...숨은 다 골랐니?”

 

 

다 죽어가는 기색으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던지는 엘리야를 본 카사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마 네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스승님쯤 되는 것 같은데.”

 

“...”

 

 

그 말에 엘리야가 뜨악한 시선으로 카사를 바라보았다.

 

이게 저런 반응을 보일 말인가? 싶어서 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그 사람 이제 이 정도 나이 차이도 커버할 수 있는 거야? 대체 수비 범위가 어느 정도...”

 

“...헛소리하지 말고 내 옆에 와서 앉으렴.”

 

 

카사가 하나 남은 팔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용사 후보잖니, 너. 그렇다면 지금부터 일어날 걸 놓쳐서는 안 되지.”

 

 

엘리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를 아세요?”

 

“알다마다.”

 

 

그녀가 곰방대를 다시 입에 물며 말했다.

 

연초는 항상 그녀의 좋은 벗이었다.

 

하물며 이런 좋은 구경을 할때는 더더욱.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해안은, 때마침 바다 아래에서 거대한 괴물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우드와 리루 근처에 있는 곳으로.

 

하나도 아니고, 총 세 개.

 

불가능한 싸움일 것이다.

 

 

“...이차원의 고대 신은, 인간 수준에서 상대하려면 국가 단위의 전력이 튀어나와야 하는 괴물이지.”

 

 

틀림없이, 온갖 불가사의한 능력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놈이라지만.

 

결코 인간 한 명이 대적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바다를 가르며 튀어나오는 고대의 괴물이 아니라.

 

 

“잘 봐두렴, 미래의 용사. 네가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혼자서.

 

 

“넌 지금부터, 불가능과 싸워 이기는 인간을 구경하게 될 테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대를 향해 달려드는, 남자 한 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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