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2 - 122. 인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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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드 캠벨이 다치는 꼴이라면 엘노어도 사실 꽤 자주 본 꼴이다.
당장 이 남자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겪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금, 이 모습은.
“...다우드?”
상황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저 ‘고깃덩어리’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할 짓이었으니까.
“...다, 우드?”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식이 새하얗게 점멸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사도. 이거 네가 한 짓이야?”
저 건너편에서, 그런 말이 흐릿해져가는 그녀의 의식 너머로 들려왔다.
피부 아래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섬찟한 살기가 녹아 있는 목소리가 가면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 남자가 이런 꼴이 된 사실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닙니다. 고대신 세 개체를 남겨두고 오긴 했지만, 그들한테서 이런 부상을 입을 가능성은-”
“없지. 그래. 그건 아는데, 왜 이 인간이 이 꼴로 된 건데?”
“...”
“그거 하나 맡겨놨는데 똑바로 하지도 못 하는 게 말이 되니, 타티아나?”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엘노어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이 남자가 이런 꼴이 된 건, 저기 있는 놈들 때문에 엮인 일 때문이라고.
-...
-...
--...!!!!
심장에서 음험한 기운이 요동친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느려진다. 단순히 그녀의 개인적인 감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다.
그녀를 중심으로 세계 전부가 느려지고, 공간에 대한 모든 ‘통제권’이 그녀에게 주어지는 느낌.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기운을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분명히, 이전에 이 기운을 통해 아예 ‘시간을 되돌렸던’ 기억은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다.
물론.
그랬다가는 이 근처 일대가 전부 휩쓸릴 수도 있다는 위험성은 그녀 또한 자각하고 있다.
제국 출신의 대귀족인 그녀가 타국의 중요 시설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하는 셈이다. 대륙 전역에서 공적으로 지목될 수도 있지.
“...”
하지만, 그럼에도.
솔직히 그딴 건 알 바 아니다.
다른 누가 죽더라도. 이 근처에 있는 사람이 얼마만큼 휩쓸리더라도.
지금은 저 남자를 살려야 한다.
설사, 그 뒷감당을 그녀가 전부 혼자 감내해야 하더라도!
-하여 바라옵건데.
고막을 두들기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날아가기 직전의 이성을 붙잡고 고개를 돌리자, 그쪽에는 아까부터 그녀가 예의 주시하고 있던 남자가 손에 제구 하나를 들고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온몸에 달린 장신구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작은 종. 영적인 힘이 가득 찬 기괴한 물건이라는 건 척 봐도 알 수 있지만.
지금 저 남자의 말에 맞춰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고작,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하여 바라옵건데.
그리고, 이어서.
그런 말이 울려 퍼지고, 종에서 은은하게 파동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저 정순할 지어라】
엘노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모든 마기가 일순간에 전부 사라졌다.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심장에서 항상 전해져오던 기운 자체가 ‘사라져 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다는 것처럼.
“...!”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지금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게 남한테 쉽사리 ‘간섭’받을 존재라는 느낌은 안 든다.
그런데도.
지금 저 남자가 꺼낸 말에 의해, 방금 그녀가 불러일으키려던 모든 기운이 소멸했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아니.
정확히는, 지금 그녀가 당한 건 그런 종류의 현상이 아니다.
마치 뭔가에 간섭 받거나 억눌려서 기운이 사라진 느낌이 아니라.
그녀의 몸 바깥으로 기운이 흘러나오던 일이 통째로 ‘삭제’된 것처럼.
“안 되지, 아가씨.”
충격에 굳어있던 엘노어에게, 그런 말이 떨어졌다.
“그런 위험한 걸 꺼내면 쓰나. 저놈 살리고 싶은 건 알겠는데. 스스로 제어도 못하는 걸 막 꺼내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어요?”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엘노어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상대방 쪽으로 돌렸다.
언령言靈.
말 자체에 이능이 깃들어 현상을 일으키는 기술.
극동의 동토를 너머에 존재하는 동방 땅에는, 대륙에서 흔히 다루는 마력이나 신성력이 아닌 온갖 신비한 힘을 부리는 기인들이 널려있다고 들었다.
주술, 도술, 백귀야행과 그들을 다루는 음양사들.
이 남자는 그중 한 분파겠지.
자신의 언어로 온갖 신묘한 현상을 일으키는 주술사. 일명 언령사들.
그런 것들이 있다는 건 엘노어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본 이 능력은.
“...진언眞言?”
엘노어가 신음처럼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동토 너머의 용문국과 숱하게 전투를 치루던 제국의 고사기에도 적혀 있는 가장 강력한 주술 중 하나.
자신의 말로 ‘세상의 법칙’과 소통하는 경지에 이른 자들.
간단하게 말해서.
한정적인 현실 조작이 가능한 자들이다.
문장을 내뱉는 조건만 갖춰진다면, 주변 모든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자들.
“...”
그리고,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이 남자는,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인간 중 한 명이다.
전설 속에서나 튀어나올 괴물 중의 괴물.
그녀의 중얼거림에 경박한 휘파람을 흘려보내며 대답하는 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아는 게 많네. 귀족집 아가씨라서 그런가?”
“...”
“그러면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완성된 그릇도 아니고, 아직 조각 두 개짜리인데 그걸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이 많은 것 아니야? 그거 나름 지옥의 왕이야, 아가씨.”
연이어 낄낄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각. 그릇. 지옥의 왕.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연이어 흘러들어왔지만.
“그래도 트리스탄 공작가면 꽤 유서 깊은 그릇 집안인데, 아예 아무 저항도 못 하는 건 어이가 없네. 어떻게 쓰는지 당신 어머니가 안 가르쳐주든?”
이어지는 말은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네놈, 지금 대체 뭐라고-!”
얼굴을 확 일그러트린 엘노어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돌진하려 했지만.
“-...!”
곧바로 그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타티아나가 들고 있던 완드에서 뿜어져 나온 초록색 빛이 곧바로 그녀의 배를 관통했으니까.
평소대로라면 손쉽게 피했을 공격이다. 느리고, 약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 이상으로 그녀가 ‘약해져’ 있다.
몸이 둔하다.
끔찍할 정도로 가냘프다.
검을 잡기는커녕, 제대로 된 단련도 해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보다도 더 약하게 느껴진다.
“...조각이 봉인 당한 그릇은 그냥 일반인 수준이나 다를 게 없죠.”
타티아나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숨이 말려 들어온다. 호흡이 틀어막힌 엘노어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초록색 광선이 몇 차례 그녀의 몸에 더 틀어박힌다. 팔에, 다리에, 그리고 가슴팍에도.
관통하듯이 발사된 저주가 그녀의 온몸을 꿰뚫는다.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처음부터 선각자님께서 계속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
일부러 자신에게 이 힘을 끌어내서 쓰도록 강요한 것도, 이걸 위해서였나.
마치, 그것만을 노리고 있다가. 정확하게 그녀가 이 힘을 꺼내쓰자마자 그걸 통째로 ‘지워버렸다’.
“...떠벌리는 건 적당히 해, 토커.”
“얼래. 바쁜 사람 불러놓고 이런 소꿉장난에 어울려 달라고 한 건 대장인데? 회색 놈의 그릇이라고 해서 좀 기대했는데, 저번이랑은 너무 다르잖아.”
전신을 저며내는 것 고통 너머로, 저들이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 됐다. 너처럼 입 싼 놈한테 뭘 기대하겠냐.”
“말 한 번 너무하네. 어차피 곧 죽일 여자 아니야?”
“...시끄러워.”
선각자가 한숨을 내쉬며, 엘노어를 제압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타티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이고, 조각은 적당히 회수해 와. 성황국 쪽에 있는 마지막 조각이랑 합쳐야 하니까.”
“받들겠습니다.”
그런 대답과 함께.
타티아나 사제장이 그녀의 눈앞에 섰다.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만, 트리스탄 공녀.”
저주를 뿜어내던 완드가 정확하게 그녀의 머리를 겨눈다.
“저주받은 핏줄을 타고난 걸 죄라고 여기시지요. 선조들의 업보를 받은 죄로 저희들의 표적이 되었으니까요.”
“다우드를, 어떻게 할 셈이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저 남자 걱정이십니까.”
타티아나가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못 봐주겠군요. 추한 발버둥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완드에, 또 다른 저주가 맺힌다.
사형 선고다. 이대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선각자가 그렇게 말하며 다우드를 들쳐 메는 게 엘노어의 눈에 들어왔다.
“그 산송장은 어디에 쓰려고? 이미 죽은 것 아니야?”
“부활시킬 방법이야 찾으면 되지.”
“악취미가 따로 없네. 사자 소생하면서 금제라도 박아넣게? 노예 만들기?”
“...고려는 하고 있어.”
그런 말이 들려왔다.
저들이, 다우드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다.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려 한다.
“...다우드.”
숨이 끊어지기 직전으로, 선각자의 어깨에 대롱대롱 메달려 있는 다우드의 모습을 본 엘노어가 가냘픈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 우드.”
그럴 순 없다.
저치들이 말하는 대로, 저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무르게 내버려 둘 순 없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벽에 틀어박힌 상태에서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수 없다.
절망감이 온몸을 휩싸는 사이.
“...잠깐만. 대장.”
“왜.”
“그 녀석, 뭔가 이상한데?”
다우드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는 것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검은색’을 품고 있는, 뭔가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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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님!”
제일 먼저 위기를 감지한 건 타티아나였다.
엘노어를 향해 완드를 겨누고 있던 그녀가 황급히 그쪽으로 저주를 짜올렸다.
선각자와 다우드 사이로 청록색 벽이 생겨나는 것과 동시에, 두 명의 몸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사이.
그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검은색 기운은, 순식간에 근처로 뭉게뭉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선각자님, 괜찮으십니까!”
“...”
타티아나가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선각자의 시선은 멍하니 다우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단 것처럼.
“...타천의 인장?”
선각자가 그런 소리를 멍하니 내뱉었다.
마치.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본 것처럼.
“...아니, 왜,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거의.
“왜 그 저주받은 년들한테 그렇게까지-!”
절망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런, 씹. 그놈한테서 떨어져!”
이어서.
토커가 방금 전까지도 유지하던 경박함은 어디에도 없이, 긴장감이 가득 들어차 있는 목소리로 선각자에게 그리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몸 전체에 두르고 있던 장신구 중 몇 개를 동시에 떼어내었다.
엘노어를 상대로는 오직 한 개만 사용했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하여 바라옵건데.
-하여 바라옵건데.
【그저 정순할-】
하지만, 그 문장이 완성되기도 전에.
거대한 ‘바람’이 토커 쪽에 밀어닥쳤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있던 다우드가, 제자리에서 날린 ‘주먹’만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어떤 이능도, 어떤 기운도 담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신체 능력만으로 일으킨 현상이었다.
“뭐, 이런...!”
그 때문에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한 토커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사이.
그가 미처 없애지 못한 흑색 기운들이, 다우드의 몸에 완전히 모여들었다.
“...야, 농담이지.”
토커가 실소를 흘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진리’ 하나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관류해온 그 기나긴 세월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법칙.
악마는 총 6 객체다.
흰색, 푸른색, 붉은색, 갈색, 자색, 마지막으로 회색.
그렇다면.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건 뭐란 말인가.
“...”
괴상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몸 전체가 시꺼먼 기운에 둘러싸인 모습은 마치 전신에 흑색 갑주를 두른 것 같은 상태다.
기괴함, 섬뜩함, 불쾌함, 그런 것들을 한데 뭉쳐 넣고 으깨서 비벼 버무린듯한, 그런 느낌의.
그건, 틀림없이.
“...‘검은 악마’ 같은 건, 듣도 보도 못했다고.”
악마의 형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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