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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25)화 (126/258)

Chapter 125 - 125. 약속은 지켜야지 (2)

 

 

“...”

 

 

카사 가르다가 실소를 흘리며 자신의 손 위에 올라와 있는 명패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어느 순간 또 신출귀몰하게 나타난 다우드 캠벨이 그녀에게 던져놓고 간 물건이다.

 

사실, 그렇게 가볍게 다뤄도 되는 물건이 아닌 건 분명했다.

 

이거, 제국 기준으로는 옥새 같은 거니까.

 

대족장의 증표. 이전까지는 알란이 계속해서 들고 있던 물건일테다.

 

 

“...이건 또 어떻게 받아온 거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에게 그런 것부터 내미는 다우드에게, 카사가 허탈한 목소리로 그렇게 질문했다.

 

 

“뭐, 지금 난리 난 상황 아닙니까. 대족장도 죽고. 그쪽에 연합 전체가 휘둘렸고. 그걸 제가 전부 다 닦아준 거니까. 족장들과 협상만 잘해도 이 정도 뜯어오는 거야 널널하죠.”

 

 

확실히, 그렇긴 하다.

 

부족 연합 입장에서 대족장이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까지 휘둘렸다는 건 틀림없이 수치스러운 일일 테다. 아마 지금 족장 회의에는 전례없는 대혼란이 일어나 있겠지.

 

그렇다 해도.

 

 

“...”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던가.

 

대족장이 제국의 황제나 성황국의 법황처럼 위엄과 권력이 강한 자리는 아니긴 하다.

 

당장 카사가 알란에게 결투를 신청 당해 끌어내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언제든 교체당할 수 있는 열린 직위니까.

 

족장들 중에 ‘가장 강한 이’를 가리는 수준이지 근본적으로 연합체인 부족 연합을 ‘지배’하는 건 아닌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 세 패권국 중 하나를 대표하는 자리 중 하나다. 이런 식으로 ‘외부인’에게 그 결정 여부를 던져줘도 될 자리는 절대 아니다.

 

그래서 그런 의문점을 담아 다시 질문하니.

 

거기에 돌아오는 답변이 또 걸작이다.

 

 

“아뇨, 그냥.”

 

 

심드렁하게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꼬우면 맞짱 한 번 뜨자 그랬거든요.”

 

“...”

 

“어차피 결투해서 주인이 가려지는 전근대적인 자리인데 뭘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구냐. 좋은 말로 할 때 넘겨라. 뭐 대충 그런?”

 

 

카사가 폭소를 터트리게 만들기는 충분한 답변이었다.

 

그거야 그렇겠지.

 

고대신을 때려잡는 모습을 족장들에게 생중계로 보여준 데다가, 트리스탄 공녀가 묵고 있던 곳을 습격한 정체불명의 괴한들까지 격퇴했다는 건 카사도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다.

 

 

“애초에 제가 고대신 잡을 때 쓴 법술이 누구한테 배운 건지는 그쪽도 다 알고 있어요. 제가 외부인이 아니라 당신의 직계 제자 취급당한다는 거죠.”

 

 

카사로서는 다시 낄낄거릴만한 답변이었다.

 

실력적인 부분은 온갖 편법에 사기로 점철되어 있긴 하지만 이미 충분히 증명했으니 그렇다 치고.

 

‘권위’와 관련된 부문에서는 그녀를 들먹여서 해결했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쯤해서 꼭 물어봐야 할 게 있긴 하다.

 

“뭘 꾸미고 있는 거니?”

 

“예?”

 

“패권국의 최고 권위를 노릴 수 있을 정도의 실적과 권위를 조합한 거라면, 원한다면 뭐든 받아올 수 있었어.”

 

 

그런데도, 이 남자는.

 

그런 자리를 받아와서, 그녀에게 넘겼다. 본인이 앉는 것도 아니고.

 

 

“...바라는 게 따로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처사 아니겠니.”

 

“...이유야 여러 가지 있지만, 당신에게도 가장 와닿는 이유로 따지면. 그래야 리루가 행복해질 테니까요.”

 

“그 아이가?”

 

“사실 겨우 대족장 정도 가지고 그런 이유를 말하기엔 너무 이르기도 하지만요. 이제 겨우 시작이라서.”

 

 

그렇게 말한 다우드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 손녀가 뭘 품고 있는 진, 당신도 봤죠?”

 

“...”

 

 

카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루가 몸에서 뿜어내던 기운이 뭔지는, 그녀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게 뭔지 부정하는 것도 힘들고.

 

 

“...악마는 대륙의 공적입니다. 그 힘을 탐내서 노리는 놈들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인류를 위해 반드시 토벌해야 할 존재로 취급하죠.”

 

 

다우드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한숨과 함께, ‘폭탄’을 떨어트린다.

 

 

“그런 인식을 근본부터 뜯어고치려면, 대륙의 최고위층부터 제 영향력을 퍼트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

 

 

카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지금.

 

 

“...지금, 악마가 인류의 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니?”

 

“예.”

 

 

하지만.

 

여전히, 다우드가 딱 잘라 대답했다.

 

 

“적이 아닙니다. 제가 그걸 증명할 거구요.”

 

 

수많은 내용이 생략된 문장이었다.

 

왜 적이 아니라는 건지, 증명은 또 어떻게 한다는 건지.

 

 

“부족 연합의 대족장은 시작입니다. 제국의 황실, 성황국의 교단 본부... 전부 다 제가 ‘빚’을 지워놔야만 해요. 적어도 제가 무슨 부탁을 해도 한 번쯤은 군말 없이 따라줄 수 있도록.”

 

 

터무니없는 소리에, 말도 안 되는 동기에. 그야말로 미친 자나 꾸밀 계획이다.

 

하지만.

 

이어서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하는 지 말할 때 만큼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리루를 포함해서. 그런 걸 품고 있는 인간들이 행복해지려면, 그런 방법밖에 없어요.”

 

“...”

 

 

카사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거, 바꿔 말하면.

 

 

“인류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단다, 아이야. 뿌리 깊은 증오는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야.”

 

“...”

 

“너, 네 여자들을 위해 인류 전체와도 싸우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단다. 알고 있니?”

 

“...그냥 진실을 알리는 것뿐입니다.”

 

 

카사가 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이놈.

 

바보다. 멍청이다. 정신 나간 고집불통의 독불장군이다.

 

 

“그거 참으로 미친 생각이구나, 아이야.”

 

 

하지만.

 

카사는, 그런 인간을 아주 좋아했다.

 

 

“꼭 끝까지 밀어붙이렴. 나도 끼워주고.”

 

 

그리고.

 

그녀의 손녀도 포함되어 있는 일이다.

 

거절할 이유는 없지.

 

 

“...제가 이래서 당신을 좋아합니다, 카사.”

 

 

다우드의 말에 카사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또 다른 질문을 던졌지만.

 

 

“그런데, 그놈들은 왜 트리스탄 공녀 쪽을 습격한 거냐?”

 

“예?”

 

“이상하단 말이지, 아무래도.”

 

 

카사가 새로운 연초 쌈지를 곰방대에 채워넣으며 입을 열었다.

 

 

“마치 고대신을 세 개체나 소환한 것 자체가 ‘눈속임’으로 보인단 말이지.”

 

“...”

 

“너도 그걸 이미 알고 있는 기색이었고. 그렇지?”

 

 

고대신과 싸운 것도, 그 이후에 다우드가 뭘 했는지도 직접 본 입장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남자도, 처음부터 그쪽에 ‘진심’을 쏟아부은 기색은 결코 아니었다.

 

마치.

 

이 뒤에 다른 것이 닥쳐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런 상대방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는 기색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태도겠지.

 

 

“아는 사이니?”

 

“...”

 

 

다우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놈입니다.”

 

“그래?”

 

“아직은요.”

 

 

이상한 대답이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마치 미래에는 그게 누구인지 알게 될 거라는 답변처럼.

 

카사가 잠시 그 말의 의미를 고민했다.

 

 

“...의심 가는 게 누구인지는 꽤 명확하게 짚고 있는 모양이구나?”

 

 

아마, 그런 인간들의 리스트를 명확하게 추려놓고 있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는 답변이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다우드가 꽤 장시간 침묵했다.

 

마치, 그런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된다는 것처럼.

 

 

“뭐, 아무튼.”

 

 

이어서, 그가 그렇게 억지로 화제를 잡아 비틀었다.

 

누가 봐도 의도적인 말 돌리기였지만, 카사는 굳이 그걸 트집 잡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사실이야 한두 가지 있는 법이니까.

 

 

“용건은 이게 전부입니다, 카사. 당분간은 투쟁의 용광로에 체류해주시겠습니까. 필요할 때 연락할 테니까요.”

 

“아, 그건 좋은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려는 다우드에게, 카사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 엘리야라는 아이. 투쟁의 용광로를 떠나기 전에 내쪽으로 한 번만 보내줄 수 있겠니?”

 

“...?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거든.”

 

 

그녀가 보기에, 엘리야는 지금 딱 기로에 서 있는 원석이었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깨닫기 직전의.

 

 

“악마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카사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그 사이에 껴서 고통받는 너에게 아주 특별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야. 믿어도 좋단다.”

 

“...특별한 역할이요?”

 

“그럼.”

 

 

카사가 다우드조차 당황할 정도의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아이, 너를 잡아먹으려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아주 강력한 경쟁력을 갖출 거란다.”

 

“...”

 

“너도 누구를 첫 번째로 맞이할지 아주 대단한 고민에 빠지는 순간이 분명-”

 

“...갑니다.”

 

 

다우드가 재빠르게 카사의 방을 벗어났다.

 

반드시 도망치고 싶은 화제라는 것처럼.

 

 

 

 

< System Message >

[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 보상이 지급됩니다! ]

 

[ ‘부족 연합’과의 특수 상호작용이 추가됩니다! ]

[ 1회에 한해 대상에게 ‘특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

[ ‘특수 지원’은 분야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제한에 가까운 요청을 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일으킬 수 있으니, 신중하게 사용하십시오! ]

 

 

그렇지.

 

한숨과 함께 눈앞으로 올라오는 창을 훑는다.

 

 

“...”

 

 

그런데, 어째 좀 심심하네.

 

그동안 메인 퀘스트를 깨면 이것저것 엄청 퍼줬는데, 고생은 이번에 역대급으로 한 주제에 제일 심심하다.

 

이거로만 끝나면 좀 아쉬울 것 같은데...

 

 

< System Message >

 

[ 물 샐 틈 하나 없는 완벽한 클리어! ]

[ 투쟁의 용광로가 어떤 피해도 받지 않았고, 불필요한 사상자조차 없습니다! ]

[ 다음 챕터를 진행할 때 도움이 될 추가적인 보상이 주어집니다! ]

 

 

오. 그렇지.

 

눈앞에 떠오른 창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래, 사람이 너무 각박하게 살면 안 된다.

 

퍼줄 때는 좀 퍼주고 그래야-

 

 

< System Message >

 

[ 대상 ‘세라스 에바트리체’가 당신에게 보다 이른 시기부터 관심을 가집니다! ]

[ 대상이 곧 ‘황립 아카데미 엘판테’에 당도합니다! ]

 

“...”

 

 

이런 걸 퍼주면 어떻게 하냐.

 

세라스라면 나도 안다.

 

성황국의 법황이 부리는 암약 기관인 ‘초승달의 서약’을 지배하고 있는 주인.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악마의 그릇이다.

 

챕터 진행마다 랜덤으로 배정되는 경향이 있는 악마의 그릇과 다르게, 얘는 페이놀이나 엘노어와 비슷하게 처음부터 확정돼서 나오는 놈이다.

 

자색 악마의 조각을 품고 있는 녀석.

 

아마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이전에도 몇 번 접점은 있었으니까.

 

애초에.

 

 

< System Log >

 

[ 대상 ‘세라스’의 현재 조건을 확인합니다. ]

[ 당신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세라스의 취향에 직격으로 꽂히는 모양입니다! ]

[ 직접 만난다면 첫눈에 반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

[ ‘스킬: 치명적인 매력’이 미리 발동됩니다! ]

 

 

얘 이런 것까지 미리 뜬 놈 아니냐.

 

지금 타이밍에 이 녀석까지 추가된다면, 악마들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내 입장에선 폭탄이 하나 추가되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 시기가 좋은 것도 아니고.

 

내가 이번 챕터도 진짜 지독하게 꼬여있는 걸 주변에 다 줄타기 하면서 클리어하긴 했는데.

 

그 결과가 이거다.

 

 

< System Log >

 

[ 대상 ‘유리아’가 극심한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

[ 대상 ‘루시엔’이 극심한 죄책감에 빠져있습니다! ]

[ 대상 ‘엘노어’가 극심한 무력감에 빠져있습니다! ]

[ 대상 ‘페이놀’이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 기색입니다! ]

[ 이들을 달랠 방법을 찾으세요! ]

 

 

“...”

 

 

위기감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상하다.

 

나 줄타기 꽤 잘한 것 같은데, 왜 다들 이 모양이지?

 

마지막 놈은 또 뭐고.

 

이거 어떻게 수습하냐.

 

나 좀 살려줘...

 

 

“...여기 있었냐.”

 

 

보기만 해도 아찔한 시스템창에

 

지금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기름칠 되지 않은 기계처럼 끼기긱 돌아, 그런 말을 내뱉은 상대방을 돌아본다.

 

 

“리루? 건강해지셨네요?”

 

“...건강해.”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대답하는 걸 보면 평소랑 다른 게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늘 투박하지만 꼼꼼하게 옷을 여미고 다니는 사람인데, 지금은 옷매무새가 엉망이다.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고, 그 덕분에 그 탄탄한 맨살이 평소에 비해 노출도가 훨씬 높다.

 

기분 탓인지 얼굴도 붉다.

 

뭔진 모르겠지만 전신에서 땀도 흘리고 있다.

틀림없이, 정상처럼 보이진 않는다.

'뭔가'에 의해 '강제로 저런 상태'가 된 것 같은 느낌.

 

 

[이야, 왔네. 하루 동안 붙잡혀 있기로 했지, 응?]

 

“...”

 

[그러게 약속은 함부로 하고 다니는 거 아닌데 말이야.]

 

‘...왜 즐겁다는 목소리십니까?’

 

[약속은 지켜야지. 파이팅입니다, 다우드 캠벨.]

 

 

닥쳐.

 

당신은 제발 닥쳐...!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더 쉬시는 게-”

 

 

다급하게 그런 말을 내뱉으니.

 

 

“야.”

 

 

그런 내 말을, 리루가 끊고 들어왔다.

 

터벅터벅. 내쪽으로 걸어온다.

 

가까이 다가오니까, 그 이상함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숨결에 달뜬 한숨과 달콤함이 같이 섞여 있다. 눈꼬리도 살짝 늘어져 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내 멱살을 확 틀어잡는다.

뭔가 대단히 ‘급한’ 기색이다.

 

속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그 모습을 바라본다.

 

 

“...오늘 나 한가한데. 묵고 있는 방에 아무도 없고.”

 

 

등골이 오싹하다.

 

 

“와서 뭐라도 먹고 갈래?”

 

“...그, 리루.”

 

“먹고 가.”

 

“...”

 

 

아니, 그거.

 

먹고 가는 거 맞아?

 

내가 잡아먹히는 게 아니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