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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31)화 (132/258)

Chapter 131 - 131. 학생의 본분

 

 

“...”

 

“...”

 

 

고생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얼굴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는 법이다.

 

아탈란테를 마주할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다.

 

 

“내기나 하나 해볼까요.”

 

 

역대급으로 초췌한 몰골의 아탈란테가, 그런 문장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기요?”

 

“저희 둘 중 누가 더 안 좋은 소식을 가져 왔는지로요.”

 

“...”

 

 

그것참 적절한 내기구나.

 

엘판테에 복귀하자마자 이 사람한테 호출당한 걸 보면, 이쪽도 진짜 만만찮게 안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한데 말이야.

 

 

“...그랜드 어쌔신이 지금 엘판테 안에 있습니다.”

 

 

먼저 나부터 안 좋은 소식을 꺼내놓는다.

 

실제로 이 말을 들은 아탈란테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누가 들어도 좋은 소식은 아니다.

 

 

“...한 번 고용할 때마다 국가 단위 예산이 든다는 인간 아닙니까?”

 

 

뭐.

 

전 대륙에 있는 그랜드 어쌔신은 두 명이고, 세라스 말고 나머지 하나는 ‘방랑자’들의 수장인 [헤세드]라면 맞는 말이지.

 

완전히 법황 전속인 세라스와 달리, 그쪽은 누구에게든 고용될 수 있는 자유 계약 프리랜서니까.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당신과 관련된 일로 아카데미에 잠입한 것 같은데요. 제가 어떻게든 관련된 조치를-”

 

“...아니요, 내버려 두세요.”

 

“예?”

 

“섣불리 건드리는 게 더 위험해요.”

 

 

아예 나랑 마주치기 전이라면 모를까.

 

내 영향으로 자색 악마의 조각이 각성하기 시작한 상태라면, 정말로 그렇다.

 

자색 악마. 통칭 ‘복종’의 악마.

 

판데모니엄의 지배자 중에서도 가장, 뭐라고 해야할까.

 

특이한 놈이다.

 

 

“...제가 알아서 적당히 상대하겠습니다.”

 

 

대응법만 잘 숙지하면 악마 중에서는 가장 위험도가 낮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만.

 

지금처럼 악마들이 내 ‘점유율’을 두고 있는 상태라면, 놈 때문에 상황이 미친 듯이 꼬이는 건 틀림없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괜히 건드릴 이유가 없지.

 

차라리 내 주변에 두고 적당히 통제하는 게 낫다.

 

즉.

 

지금 나한테 부여된 과업은.

 

1. 엘노어, 유리아, 루시엔을 차례로 달래야 하고.

 

2. 거기에 페이놀의 감정을 일깨우는 작업을 해야하는 와중에.

 

3. 그랜드 어쌔신이라는 폭탄을 항상 등에 이고 다녀야한다는 소리지.

 

 

“...”

 

 

할 만... 하지 않다.

 

아직 4챕터는 시작도 안 했는데 그 전에 해야 할 게 이 수준이냐.

 

 

“...하아...”

 

 

그래도 해야겠지.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중에 할만한 게 있기는 했었더냐.

 

한숨을 쉬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아탈란테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쳐 보이는군요, 당신.”

 

“그런가요?”

 

“예.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계속 그렇게 몰아붙이다가, 어느 순간 정말 큰 일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싶어서.”

 

“...”

 

 

글쎄.

 

 

“...그래도 당분간은 못 쉴 것 같습니다.”

 

 

선각자는, 엘노어를 틀림없이 ‘죽이려고’ 했었지. 챕터 보스급인 뒤집힌 해일을 미끼로 내던지면서, 내 발을 묶어두면서까지 그러려고 했다.

 

원작 게임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루트였다.

 

일단 원작의 선각자는 여자도 아니었고.

 

악마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흔하디 흔한 광신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놈이 보이는 행보는, 마치.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 놈들을... 전부 다 ‘지워버리려고’ 하는 느낌 아닌가.

 

 

“...”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괜히 타천의 인장까지 동원해서 내 종족까지 바꿔버린 게 아니다. 적어도 놈 때문에 내 주변 인간들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놈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가 느긋하게 지낼 일이 당분간 없을 거라는 건 진심이고.

 

 

“...일단 중간 경과 보고나 들어볼까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아탈란테가 한숨과 함께 그런 말을 던져왔다.

 

 

“최근에 그릇들과는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어요.”

 

[...순조롭게?]

 

“...”

 

[너 얼마 전에도 반으로 쪼개지지 않았냐?]

 

 

소울 링커 안에서 칼리반이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딴지를 걸었지만, 일단 숨이 붙어있으면 순조로운 게 맞다.

 

악마 단위랑 얽혀서 이 정도면 선방하고 있는 거 맞다...!

 

그리고, 무엇보다.

 

 

‘칼리반.’

 

[엉?]

 

‘앞으로는 더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어요.’

 

[...]

 

 

대체 사람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보다 더 험한 꼴이 뭐냐는 의문을 담은 침묵이 돌아왔지만, 이건 진심이다.

 

일단 여기 적혀있는 문구부터가 그렇거든?

 

 

< System Message >

 

[ 대상 ‘유리아’의 ‘두 번째 조각’ 관련 이벤트가 곧 해방됩니다! ]

 

“...”

 

 

하얀 악마 관련된 두 번째 조각이라면... 글쎄다.

 

적어도 메인 퀘스트 진행하는 도중에 겹치지 않기만을 바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상시 소지 중인 품속의 가면을 만지작거린다.

 

이게 내 생명줄이다. 한 번이라도 녀석 앞에서 ‘맨얼굴’을 보였다가는, 진짜로 끝장이니까.

 

 

[곧 얼굴 한 번 보이겠군...]

 

“...”

 

[아니, 안 그러냐? 네가 그렇게 말한 것 중에 안 일어난 게 없-]

 

 

아뮬렛을 아예 팔에서 분리해버린다.

 

불길한 소리를 계속 듣느니 아예 잠깐 닥치게 하는 게 훨씬 낫다.

 

 

“...순조롭다면 다행이군요.”

 

 

아탈란테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적어도 제가 가져온 나쁜 소식에 그것까지 겹치면 감당이 안 됐을 테니까요.”

 

“...”

 

 

아, 맞다.

 

우리 내기중이었지.

위에서 내가 말한 세 가지 과업 외에도 뭔가 나쁜 소식 하나가 더 있는 건 분명했다.

 

 

“일단... 투쟁의 용광로에서도 화려하게 저질러주셨더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대족장 교체 관련된 일에 당신의 이름이 오르내릴 줄은 몰랐습니다.”

 

“...얼마나 재앙이었습니까?”

 

 

일단 그런 말부터 꺼내놓는다.

 

내가 저지르고 다니는 일의 뒤처리는 아탈란테가 거의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내가 골치 아픈 정치적 공작과 행정 폭풍에 휘말리지 않도록 이 사람이 방파제 역할을 해줬을 테니까.

 

물론 일은 전부 다 내가 했지만, 이번엔 대외적으로 카사라는 방패가 있었으니 그렇게 수습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영리하게 판을 짜셨더군요.”

 

 

그래, 그것 봐라.

 

 

“하지만 이번 일로 제국 황가에서 본격적으로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우드.”

 

“...”

 

 

아탈란테가 입 바깥으로 꺼내놓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 표정도 굳는다.

 

제국 황가.

 

트리스탄 공작가의 목줄을 잡고 있는 놈들. 세 패권국 중에서도 유난히 폐쇄적인 성향이라, 시나리오 안에서도 따로 분기를 타는 게 아니면 아예 얼굴 구경할 일도 별로 없는 놈들이다.

 

그만큼 음습하고 음험한 성향도 상당하다. 유저에 따라서는 법황 윗줄이라고 놓는 녀석들도 종종 있을 정도로.

 

정확히는, ‘황가’ 전체보다 딱 한 놈이 문제지만.

 

 

“...재상님께서 저한테 관심이라도 가지셨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거 다행이네요. 폐하가 아니라 그쪽이었다면 진심으로 죽고 싶었을 텐데.”

 

 

아탈란테가 이채를 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황궁 내부의 권력 구도까지 알고 있습니까?”

 

 

재상이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인간 쓰레기라는 건 알지.

 

원작 시나리오에서 기드온이 죽는 것도, 그 때문에 엘노어의 타락 수치가 천장을 치는 것도 다 그놈 때문이다.

 

 

“...대충은요.”

 

“그럼 설명하기도 편하겠군요.”

 

 

아탈란테가 눈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뒤에 종합 역량 평가가 있는 건 알고 있겠죠, 당신.”

 

 

아, 그건가.

 

아카데미라면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말하자면 정기 고사지.

 

중간고사에서는 간단하게 한 군데에 처박아두고 배틀 로얄을 하는 게 전부였다면, 종합 역량 평가는 한 해의 말미마다 이루어지는 총 결산 느낌이다.

지필, 실기, 실전, 분야 안 가리고 모든 방면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지.

 

 

“이번에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

 

“정황상, ‘당신’과 직접 접촉하려고 오시는 겁니다.”

 

 

뭐?

 

그 말에 내 표정이 급격하게 멍해진다.

 

아니, 물론 투쟁의 용광로에서도 국가 원수 포지션인 대족장이 직접 아카데미에 찾아오긴 했었지만.

 

‘대족장’과 ‘황제’는 그 직위가 가지는 무게감의 격이 다르다.

 

심하면 한 달 만에 임자가 바뀔 수 있는 얼굴마담 직위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인간의 무게감이 다른 건 당연하지.

 

단적으로 말해서.

 

만약 대족장이 전 대륙 정벌에 나서겠다고 준비하라고 한다면, 순식간에 다른 족장들한테 두들겨 맞고 걷어 차여 쫒겨나겠지만.

 

황제가 똑같은 명령을 내린다면, 그 말 한 마디만으로 제국 전체가 전시 체제로 접어든다.

 

그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고작 나 하나 보자고 직접 행차하신다고?

 

 

“...”

 

 

말없이 생각을 가라앉힌다.

 

황가, 그중에서도 황제의 중요도를 생각하면 이건 메인 시나리오에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허투루 맞이할 수는 없다는 거지.

 

 

“...문제는 말입니다.”

 

 

아탈란테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폐하와 알현하려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보이는 게 보통입니다. 그걸 충족 시키지 못 하면 그 자체로 불경죄에 해당하죠.”

 

“...”

 

 

불경죄면, 특히 그게 황제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건 구금까지 갈 수 있는 중죄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정도로 황제의 권력을 지엄하게 취급하는 게 제국이다. 사실상 살아있는 반신 비슷한 거 취급이지.

 

물론 특히나 악의적으로 해석해야지만 그렇게 되겠지만.

 

문제는.

 

 

“만약 폐하께서 직접 지목해서 알현이 이루어졌는데 그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주변에서 당신을 물어 뜯을 수 있는 명분이 생깁니다."

아탈란테가 여전히 음울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명분이 생긴다면, 당신이 말한 재상과 마주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쪽은 극렬한 황제 반대파니까요. 폐하가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에게 반감을 가질 수 있단 소립니다."

"..."

그래.

그런 조항을 악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놈이 하나 있어서 문제다.

"적어도 당신이 폐하와 마주함에 있어 모자람이 없을 만큼 대단한 인간이라는 건 입증해야겠죠.”

 

“그럼 제가 걱정할 부분이 있나요?”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난 지금까지 학생 레벨에서는 말도 안 되는 실적을 수도 없이 이뤄낸 인간이다.

 

몇 개만 제출해도 자격을 증명하는 거야 어렵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아탈란테가 음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부분에서는 저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흠결’이 잡힐만한 부분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른 부분에서는 걱정할 부분이 있다는?”

 

“당신, 학점이 어느 정도입니까?”

 

“...”

 

 

아.

 

 

“...수업 일수 채운 교과목도 거의 없는 것 같은데요.”

 

“...”

 

 

아니, 어쩔 수 없잖아.

 

시종일관 목숨을 시달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공부할 시간이 어디있어, 내가.

 

 

“바쁜 건 알고 있습니다만, 다우드. 그래서 제가 최대한 덮어드리고는 있습니다만. 상대가 황제 폐하여서야 저도 눈 가리고 아웅은 할 수 없습니다.”

 

“...”

 

“...공부, 하셔야 합니다.”

 

 

아탈란테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다가오는 역량 평가에서 전 교과목 만점 정도는 받으셔야 그나마 만회가 가능해지겠죠.”

 

“...”

 

 

흠.

 

제국 전역에서 수재들이 모여드는 엘판테의 시험에서 전 교과목 만점이라.

 

수업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내가 말이지.

 

 

“...시험이 얼마나 남았죠, 총장님?”

 

“일주일 정도 남았습니다.”

 

“...”

 

 

흠.

 

흐으으음.

 

 

 

 

결국, 모든 상황은 한 가지를 가리킨다.

 

스승이 필요하다.

 

공부를 존나게 잘 가르치는 스승이.

 

그리고, 신성학부 소속 학생인 내 입장에서 당장 먼저 꼬셔야 할 인간은 성녀님이고. 배점이 가장 큰 과목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페이놀 관련된 이벤트로 그쪽에 용건이 있었는데, 우선 순위가 더욱 급등한 셈이다.

 

그래서.

 

재빠르게 그쪽을 ‘달랠’ 수단을 만들기 위해 여길 찾아온 거다.

 

 

“그래서, 네가 그놈이구만?”

 

 

제작학부의 불칸 교수는 그 나이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근육질 몸을 자랑하는 인간이다.

 

모루와 망치, 그리고 용광로의 불빛에 생동감 있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도 곧장 까먹게 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불칸 교수님.”

 

“됐어. 너랑 나 사이에 격식 차릴 필요가 뭐 있겠냐.”

 

 

그리고 그런 외모와 어울리게, 곧바로 호방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격식 차리는 거에 거의 신경을 안 쓰는 이 사람 답-

 

 

“니가 그렇게 예의를 차리면 내가 너한테 심한 말을 할 수가 없잖아.”

 

“...”

 

“말해 봐, 새끼야. 이번엔 어떤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찾아왔냐? 며칠이나 철야할지 벌써부터 궁금한걸?”

 

“...”

 

 

사람이 참 화끈해서 마음에 드네.

 

그렇게 생각하며,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으로는 거의 죽일 것 같은 안광을 내뿜고 있는 불칸 교수를 바라본다.

 

척 봐도 협조적인 태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을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다.

 

마도학부의 학장인 페르시가 제작도를 만든, 정화자를 날려버리는 데 썼던 폭탄을 만든 것도 이 사람. 내가 가지고 있는 울트리마를 개량한 것도 이 사람.

 

투쟁의 용광로에 있던 만능 제작 도구 세피라까진 못 하더라도 대단한 솜씨를 가진 일류 장인이라는 건 분명하다.

 

솜씨가 부족하다는 것도 물건의 품질이 딸린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속도가 조금 모자라단 정도겠고.

 

내가 물건 제작 의뢰를 넘길 때마다 철야를 했다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

 

 

그런 점에서.

 

세피라가 만든 물건에 뒤지지 않는 품질을 자랑하면서, 내가 지금 부탁할 만큼 매니악한 물건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인간밖에 없다.

 

 

“...조금 신기할 수도 있는 의뢰를 드리러 왔습니다만.”

 

“뭐 언제는 안 그랬다고. 뭔데, 부담 없이 말 해봐라.”

 

 

불칸 교수가 망치를 한 구석에 치우며 그런 말을 던졌다.

"..."

글쎄.

진짜 부담 없이 말하면  화낼 것 같은데.

어차피 부담을 가지고 말해도 화를 낼 것 같으니까 그냥 그대로 진행한다.

재료들을 이것저것 꺼내 놓는다.

 

투쟁의 용광로에서 뒤집힌 해일과 싸우며 얻어온 것들이다. 카사의 팔다리를 재구축 하는데 쓰였던 마경의 지배자들의 신체 구성 요소들.

 

사실상의 종합 선물 세트지.

 

거기에 유리아의 서클릿을 만드는 데 사용한 별철까지 추가로 꺼내놓는다.

 

실제로, 그 재료들을 훑는 불칸의 눈에도 이채가 띈다.

 

 

“...재주도 좋구만. 이런 걸 다 어디서 구해왔냐?”

 

“...”

 

 

일시적으로 내 이미지가 조금 나아진 느낌이지만.

 

이어지는 행동을 생각하면 얼마나 갈 지는 의문이다.

 

 

“이걸 이용해서...”

 

 

굳게 마음을 먹고, 불칸에게 ‘설계도’를 내민다.

 

 

“...이걸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설계도를 받아둔 불칸이 면밀하게 그걸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

 

 

예상한 반응이긴 하다.

 

 

“...그래서, 다우드 캠벨.”

 

 

불칸 교수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내놨다.

 

 

“신기할 수도 있는 의뢰라고 하지 않았냐?”

 

“...예.”

 

“존나게 튼튼한 ‘목줄’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의 어떤 부분이 신기하다는 거냐?”

 

“...두 개가 필요합니다.”

 

“누가 개수 물어봤냐, 자식아. 너 지금 제작학부 선임 교수한테 애완동물 용품이나 만들어 달라고 왔어? 이런 재료까지 들고?”

 

 

반쯤 경멸 섞인 시선에, 애써 웃으며 답변한다.

 

 

“...애완동물 용품이 아닌데요.”

 

“뭐?”

 

“사람한테 채울 겁니다.”

 

“...”

 

“두 명한테요.”

 

“...”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긴 했다.

 

사람이 눈빛만 써도 폭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지금 날 바라보는 불칸 교수의 시선에서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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