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6 - 136. 일석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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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안 물어볼 테니까.”
베아트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어둑어둑한 훈련장 안으로 그런 말을 던졌다.
“그쯤 해둬. 슬슬 뒷감당하기도 힘들어지고 있으니까.”
“...”
이어서, 그녀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10년 지기를 바라보았다.
훈련장 한가운데에 땀 범벅이 되어 대자로 뻗어있는 엘노어의 모습이야 대단히 익숙한 모습이다.
이 여자는 어느 순간 머리가 조금 복잡해지기라도 하면 늘 여기에 와서 전신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는 건 늘 있던 루틴이었으니까.
다만.
“...이게 다 뭐야. 예산 거덜나겠다, 이러다가.”
트리스탄 공녀가 요즘 체력단련실과 훈련실을 전세 내고, 스스로에게 거의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하고 있다는 건 학원 안에서 꽤 유명한 소문이다.
베아트릭스가 거의 폭풍에 맞은 몰골의 훈련장 안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엘노어가 말없이 땀을 닦으며, 방금 전까지 근력 운동을 하는데 사용하던 매직 덤벨을 옆으로 툭 던져놓았다.
사용자가 임의로 무게를 조절할 수 있도록 양쪽에 마석이 박힌 물건이다.
별 생각없이 그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거기 적힌 750kg이라는 숫자를 읽은 베아트릭스가 식겁을 하며 엘노어를 돌아보았다.
이걸 양팔에 들고 운동했다고?!
“...너 그걸로 몇 세트 했어?”
“300번밖에 안 했네.”
“...”
그래. 소문은 아주 정확하다.
이딴 걸로 그런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진짜 말도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이미 단련의 범주는 한참 넘었다.
그냥 자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너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최근에 아무랑도 안 만나고 훈련실에만 틀어박혀서. 운동 열심히 하는 건 알았지만 한 번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잖아.”
“...”
엘노어가 말없이 땀을 닦으며 침묵했다.
그 모습의 베아트릭스의 표정도 같이 찌푸려졌다.
이전에 자주 보여주던 엘노어의 모습이다.
완고할 정도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감정을 내 비추지 않으려는.
분명히, 어렸을 때 감정을 드러내는 걸 ‘나약함’의 발로라 배웠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간단하다.
이전과 달리, 그런 ‘약함’을 최대한 지워야겠다고 결심했단 뜻이다.
이어지는 말도 그런 맥락이고.
“...과분한 꿈을 꾸었다고 깨달았을 뿐이네.”
“뭐?”
“우리 가문의 저주받은 핏줄은 늘 비극을 끌어들이지.”
엘노어의 침침한 목소리가 어둑어둑한 훈련장에 번져나갔다.
“...그 남자가 그동안 너무나도 잘 헤쳐 나가고 있어서, 잠시 잊었을 뿐이네.”
“...무슨 말이야?”
“다음에도, 다음에도, 또 그 남자를 지키지 못한다면. 나와 관련된 일 때문에 다친다면. 혹여나, 혹여라도-”
죽기라도 한다면.
엘노어의 머릿속으로 이미지 몇 개가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남자는 자신 앞에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두 번째에도, 어딘가에서 무슨 일을 해결한다고 반쯤 시체꼴이 되었지.
그리고 얼마 전에는.
정말로.
그녀의 눈앞에서, 그 남자를 빼앗길 뻔했다.
손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영혼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과 무력감은, 지금도 신경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선각자.’
그녀가 가면을 쓴 여자를 떠올리며, 엘노어가 손을 움켜쥐었다.
안 된다.
그따위 여자에게, 다우드를 빼앗길 순 없다.
그러니 이 정도 단련이야 별 것도 아니다.
더, 더 강해져야-
“...심정은 알겠는데, 엘노어.”
베아트릭스가 또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억누르며 엘노어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지. 황가의 호출이야.”
“...”
그 말을 들은 엘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벌떡 일어났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기색이었다.
“...폐하께서 부르신 건가?”
“황녀님은... 아니지, 이제는 즉위하셨으니까. 폐하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않으신 것 같아.”
“...”
엘노어의 표정이 다시 찌푸려졌다.
베아트릭스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뵌지도 한참 됐지?”
“...항상 바쁘셨으니 말일세.”
“꼬박꼬박 네 소식 정도는 확인하시잖아. 황녀님 성격에 어릴 적 절친했던 사람을 신경 안 쓰실 리도 없고.”
“알고있네.”
그런 것 치고는 좀 삐진 것 같긴 한데.
하긴.
세상에서 엘노어가 그나마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 두 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는 베아트릭스 본인이고, 나머지 하나는 황녀님... 아니, 황제 폐하 본인이다.
그나마도 몇 년 넘게 보지 못했으니 이런 부루퉁한 반응도 이해하지.
베아트릭스가 실소를 흘리며 서류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다만 엘판테에는 곧 체류할 예정이 있으신 모양인데. 그걸 위해 너하고, 트리스탄 대공 둘 다 참석해야 해.”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한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이었다.
평소의 엘노어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녀로서도 말을 꺼내는게 달가운 문장은 아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단히 의외였다.
“...그거 잘 됐군.”
“뭐?”
이게 진짜 엘노어 입에서 나온 소리인가?
그녀가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그렇게 반문하자, 엘노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늙은이에겐, 알아내야 할 것도 있으니 말일세.”
“알아내? 뭘?”
베아트릭스가 그렇게 반문했지만, 엘노어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으로는 이전에 들은 말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악마의 조각, 악마의 그릇, 이전에 그녀와 대치한 언령술사로부터 그런 말들을 들었었지.
그리고.
-그래도 트리스탄 공작가면 꽤 유서 깊은 그릇 집안인데, 아예 아무 저항도 못 하는 건 어이가 없네. 어떻게 쓰는지 당신 어머니가 안 가르쳐주든?
그게, 무슨 뜻인지.
적어도 ‘관련자’한테 물어보긴 해야했으니까.
엘노어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안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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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십니까?”
수업이 끝나자 탈리온이 책상에 앉아 턱을 감싸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들은 수업에 대한 생각.”
황제가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게 곧이다. 아탈란테의 말대로 그쪽에 책을 잡히기는 싫으니까 수업은 꼬박꼬박 들어야지.
“아, 그러고 보니 최근 수업에 성실하게 나오긴 하시더라구요. 공부는 잘하고 계십니까?”
탈리온이 그렇게 말하며 필기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내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 사이에 이걸 다 정리하신 겁니까? 분명히 필기에서 높은 성적을 받을 예정-”
“아니, 성적은 포기했어.”
“...”
탈리온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와 노트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럼 이건 다 뭡니까?”
“성녀님이 나 대신 정리해준 거.”
“...”
일반 신자 중 최고봉에 있는 인간을 내 필기 도구 비슷한 것으로 써먹었다는 걸 들은 탈리온이 잠시 침묵했다.
“...그런 분한테 그런 짓까지 시켜 놓으시고 공부를 포기하신다구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탈리온이 거의 정신이 나갈 것 같다는 기색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이건 진심이다.
어차피 내가 그동안 빼먹은 학점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에서 무조건 만점을 때려 박아야 하는데,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딱히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엘판테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학습량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이제 와서 공부한다고 해서 만점을 받을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란 거지.
성녀님한테 부탁해서 교과목에 대한 1:1 과외를 받고 있긴 하지만, 전 대륙에서 그쪽에 가장 정통한 사람한테 과외를 받고 있음에도 수업을 따라가는 게 고작이다.
이래서야 황제를 만날 ‘자격’이 충족 안 되는 건 기정 사실이다.
‘...황제라.’
단순히 ‘제국의 지배자’라는 호칭은 차치해두고서라도, 그쪽은 나중에 엘노어의 전용 퀘스트인 ‘가문의 광증’을 해제하는 데 있어 핵심 키다.
당장 바쁘다고 해도 허투루 맞이할 수는 없단 거지.
“...그럼 종합 역량 평가는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요.”
“간단해.”
그렇게 말하며 중앙 게시판에 붙어있는 서류의 사본을 책상에 탁, 올려놓는다.
엘판테는 근본이 전투와 관련된 인재들을 육성하는 기관답게 해당 방면에서의 성취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이번 종합 역량 평가의 배점에서도 그런 경향을 여실히 엿볼 수 있지.
가장 배점이 높은 건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전투’와 관련된 부문을 평가하는 실기 시험.
2학군의 경우는 특히 이쪽에서 점수를 많이 받으면 성적이 폭등한다.
성녀님한테 미친 듯이 과외를 받아서 필기에서 평균점은 어떻게 따놓는다 치면, 일발 역전의 기회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다 패 죽인다.”
“...형님,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사제 아닙니까?”
“...”
“사제 직군은 보통 자원봉사나 신학 공부에 열중하는 신실한 학생들이 주류인데, 왜 기사 학부나 마도 학부같이 전투 계열에서나 떠올릴법한 발상을...”
그럴 수도 있지.
깐깐하게 굴지 마라.
애초에 내가 지금까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일반적인 사제 클래스의 방법은 전혀 아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실기 시험 방식은 항상 랜덤으로 정해지는 것 아니냐?”
탈리온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자, 녀석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총괄 교수님이 누군지에 따라 얼추 예측은 가능합니다. 이번에는 기사 학부의 학장이신 콘라드 경이 맡으시니, 아마 모의 점령전이 제일 유력할 겁니다.”
모의 점령전이면... 아마 그거다.
소수의 상급생 몇 명이 다수의 하급생이 특정 지역 안까지 못 들어오도록 막아내는 것.
게임 안에서도 몇 번 접했었던 컨텐츠지.
“신입생 때도 그런 방식으로 한 번 봤었습니다. 그때 최고점은 엘리야가 기록했었죠. 이 자리에 있었다면 도움이 됐을 텐데요.”
“...그런데 걘 뭐 하고 있냐?”
마지막에 카사가 자기한테 한 번 보내놓고 가라는 말은 들었지만, 벌써 며칠째 엘판테에 복귀를 안 하고 있다.
리루야 일 정리할 게 있어서 늦는다지만, 그 녀석은 왜?
“글쎄요... 듣기로는 아예 체류 기간 연장을 신청했다는데요. 다시 엘판테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모양입니다.”
탈리온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며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녀석이 빨리 돌아와 줘야 좋은데. 그래야 다음 챕터 관련된 일을 이것저것 정리할 수 있거든.
챕터 4, ‘적야’의 핵심 인물은 총 세 명이다.
성검의 주인이 될 엘리야, 그리고 챕터의 보스인 페이놀.
나머지 하나는.
“...”
말없이 팔에 채워진 아뮬렛을 바라본다.
[왜?]
‘그런 게 있어요.’
칼리반의 목소리에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답한다.
이 인간이다.
이번 챕터에서 ‘히든 카드’로 활약할 영혼.
아무튼 이 사람 조각 풀로 채운 그릇까지 한 번 죽여본 경험이 있는 인간이다. 지금이야 그냥 날 놀리는 동네 형 같은 포지션이지만.
“...”
뭐, 아무튼.
“모의 점령전이라...”
그럼, 해야 할 일도 명확해진다.
팀메이트를 구해야지.
난 이제 2학군이니까 수비측에 편입될 확률이 높다.
“최대 정원이 3명이었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제가 도와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동급생들이랑 묶여서 점령 공격조로 편입되는 측이라...”
“아냐, 괜찮아. 항상 신세만 질 수는 없지.”
그래도 아쉽기는 하다. 탈리온이면 믿고 맡길 수 있을 텐데.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팀메이트까지 발품 팔아서 찾아다녀야 한다니.
유리아는 특성상 진짜 안전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서 이런 시험에서 써먹을 순 없고, 엘노어는 애초에 나랑 조로 묶이는 것 자체가 학칙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 System Log >
[ 대상 ‘엘노어’가 극심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유리아와 성녀님과 달리, 이쪽은 아예 나와 모든 접촉을 일절 피하고 있는 느낌이라 풀어주기도 힘든 느낌이고.
이쪽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느낌이다.
‘...안 그래도 바쁜데.’
할 일이 쌓여있거든.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페이놀이 한 달 안에 자기 꼬셔달라고 말한 게 가장 급하다. 실패했을 경우 가장 위험 부담이 큰 쪽이지.
물론 놈의 성향을 생각하면 서두른다고 해서 될 게 아니라서 당장은 내버려 두고 있다.
하지만 수업은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그대로 모가지다. 당장은 이쪽에 시간을 쏟을 수밖에 없단 거지.
거기에 내 뒤통수엔 계속 날 스토킹하는 그랜드 어쌔신이 매달려 있고.
당장 공격하려는 기색은 없지만, 그래도 날 지켜보는 감시의 시선은 계속 느껴진다.
“...”
흠.
흐으으음.
눈을 감고 잠시 고민한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나를 주변에서 괴롭힌다면, 급진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페이놀도 달래야 하고, 내 뒤통수에는 계속 암살자가 달라붙어 있으며, 그 상태로 실기 시험까지 잘 봐야 한다?
“탈리온. 부탁 하나만 하자.”
“예? 무슨 부탁을?”
“뒷산 공터에 가면 붉은색 머리를 한 마도 학부 학생 하나가 있을거야. 페이놀이라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잇는다.
“걔한테 내가 좀 보자 한다고 전해줄래?”
“예,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지금은 어디 가시는 겁니까?”
“마지막 팀메이트 구하러.”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딴 건 몰라도 솜씨는 기가 막히는 사람을 하나 알거든.”
대륙에서 단 두 명밖에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지.
당장 나를 죽이지 않을 정도로 '밑작업'이 들어간 상태니, 내가 지금 하려는 짓도 그럭저럭 먹힐 것이다.
‘...두 놈 전부 한꺼번에 작업해야겠다.’
상남자 특징.
짜증 나면 일 한꺼번에 처리함.
[...미친놈인가?]
“...”
[이제 그냥 따로 양다리 걸치는 것도 귀찮아서 동시에 처리하냐?]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날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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