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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40)화 (141/258)

Chapter 140 - 140. 간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으로 시스템창 하나가 떠올랐다.

 

 

< System Message >

[ 위기 상황이 감지됩니다. ]

[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

[ ‘스킬: 절체절명’을 EX등급으로 적용합니다. ]

 

 

그리고 그에 걸맞게, 눈앞에는 내 말을 듣자마자 아무런

 

마치 호흡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무서울 정도로 미동도 안 한다.

 

 

“...주인님은, 어? 내가, 필요 없...? 어...?”

 

 

녀석이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 기색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눈동자에서 색이 점점 빠져나간다.

 

 

< System Message >

 

[ 대상 ‘세라스’의 타락 수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습니다! ]

[ 곧 확정적으로 폭주 상태에 접어듭니다! ]

 

 

“주인님, 내, 주인님이 아니야...?”

 

“...”

 

 

정말.

 

그냥 근처에 오지 말라고 축객령 한 번 내렸을 뿐인데 애 멘탈이 이 정도로 산산조각 나는거, 진짜 귀찮다.

 

물론, 그래도.

 

 

“그래. 5m 안으로 접근하지 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만약 이런 선이라도 안 그어놓으면, 이 녀석 진짜로 나한테 하루 종일 달라붙어서 온갖 종류의 사고를 다 치고 다닐 게 분명하다.

 

 

“대신.”

 

 

물론 그렇다고 방금 말한 것처럼 밀어내는 순간 타락 수치가 터지니까,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래서는 안 되지.

 

말을 덧붙인다.

 

 

“10m 이상으로 벗어나지도 마.”

 

“...”

 

 

세라스, 정확하게는 자색 악마의 표정이 혼란으로 가득 차올랐다.

 

 

< System Message >

 

[ 대상의 타락 수치가 급격하게 감소합니다! ]

 

 

아무튼 ‘내치는 게’ 아니라는 명령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녀석의 표정이 살짝 밝아진다. 타락 수치도 떨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안 되지.

 

 

“그리고, 나랑 절대 매일 만날 생각 하지 마.”

 

 

< System Message >

 

[ 대상 ‘세라스’의 타락 수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습니다! ]

 

 

“대신 일주일에 하루는 무조건 너랑 놀아줄게.”

 

 

< System Message >

 

[ 대상의 타락 수치가 급격하게 감소합니다! ]

 

 

“그리고 나랑 하루 만날 때도...”

 

 

그렇게 말을 계속 이어갈 때마다, 이 녀석의 타락 수치가 치솟아 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한다.

 

전부 내가 이 녀석을 밀어내려고 할 때는 치솟고, 가까이 둔다고 할 때는 가라앉는 형국이다.

 

 

[...뭐 어쩌라는 거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말라는 거냐?]

 

‘거리감 조절하는 중이잖아요.’

 

 

여기 오기 전에도 말했지만.

 

자색 악마를 상대할 때는 거리 조절이 생명이다.

 

사실상 대놓고 거리를 두고 관리하겠다는 거지만, 이런 사실을 전부 다 늘어놓아도 괜찮다.

 

 

“대신, 명령을 잘 지키면.”

 

 

그냥 무작정 명령을 잘 지키라고 하는 것보다.

 

핵심은 이 녀석을 나에게 맞춰 ‘길들이는’ 거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그대로 내 목숨이 날아가는 위험한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느낌으로 접근하면 되지.

 

다른 악마들한테는 불가능한 접근법이지만, 이 녀석한테만큼은 통한다.

 

 

“상을 줄게.”

 

“...상?”

 

“거리도 점점 가까워지게 해줄게. 잠도 조금 덜 자게 해줄게. 놀아주는 시간도 점점 더 늘려줄게.”

 

 

그렇게 말하며, 내 위에 올라타 있는 세라스의 머리를 득득득 쓰다듬어준다.

 

방금 전에 쭉 이어진 말을 듣고 혼란스러운 표정만이 가득하던 녀석의 얼굴이, 머리를 벅벅 쓰다듬는 동안 헤실헤실 웃는 표정으로 녹아든다.

 

이렇게 나한테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둘도 없을 행복이라는 기색이다.

 

 

‘...악마는 그릇과 불가분의 관계다.’

 

 

이전에 세워놨던 이론을 다시금 떠올린다.

 

푸른 악마와 리루의 관계에서 반쯤 확신을 얻은

 

악마는, ‘그릇’의 영향을 생각보다 크게 받는다.

 

그러니.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말을 잘 들어준다면.”

 

 

지금 내가 이 녀석에게 전하는 말은.

 

자색 악마와 ‘세라스’ 두 명에게 동시에 건내는 말이기도 하다.

 

 

“절대로 너를 버리지 않을게.”

 

“...”

 

 

헤실헤실 웃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딱 굳었다.

 

서서히 웃음이 사라지더니, 이내 눈동자를 끔뻑거리면서 나를 내려다본다.

 

그 상태로, 한참을 침묵한다.

 

내가 지금 꺼내놓은 이 말은.

 

이 녀석이 ‘복종’할 대상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이유와 맞닿아 있는 문장이다.

 

더불어, 세라스의 과거와도.

 

 

“...약속이야, 주인님?”

 

 

한참을 침묵하던 녀석이, 이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해도 정신없는 모습만을 보이던 녀석치고는 이례적인 모습이다.

 

 

“어.”

 

“나랑, 그릇, 둘 다 안 버리고, 계속 같이 있어줄 거야?”

 

“어.”

 

“끝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악마 6명 다 데리고 산다고 얼마 전에 선언한 참이다.

 

사고 치고 다니는 대형견 비슷한 것도 감당 못하면, 그런 거 어떻게 이룬다고 그러나.

 

 

“...”

 

 

물론 사고 치고 다니는 스케일이 좀 어마어마하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다. 이 녀석까지 포함해서 커버한다고 한 것도 진심이고.

 

 

“그러면.”

 

 

그래서, 그런 생각을 담은 대답을 확고하게 돌려주니.

 

세라스, 정확하게는 이 녀석을 조종하고 있는 자색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들을게.”

 

 

그런 말과 함께, 배시시 웃으면서 나한테 약지를 내민다.

 

 

“엄지검지 걸고, 약속. 알겠지?”

 

“...”

 

 

악마치고는 대단히 유순한 요구다.

 

하지만, 이 녀석이 이런 유아 같은 모습을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

 

악마의 조각은 그릇이 억누르고 배격한, ‘결핍’을 상징하는 역할을 겸한다.

 

이런 ‘활발한 어린아이’는, 세라스가 절대로 가지지 못한 것을 상징하는 모습이란 소리다.

 

 

“...”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엄지검지를 걸어주자, 이내 녀석이 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럼, 주인님.”

 

 

그런 말과 함께.

 

 

“다음에 또 봐.”

 

 

세라스의 몸이 실이 끊어진 것처럼 내 몸 위로 푹 엎어졌다.

 

그 신체를 움직이던 악마가, 다시 심상 세계 안쪽으로 물러난 게 분명하다.

 

 

“...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쉰다.

 

희소식 하나.

 

다우드 캠벨, 오늘도 살아남다.

 

 

 

일단, 결론은.

 

적어도 또 반으로 쪼개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이다.

 

 

[...근데, 너 괜찮냐?]

 

“예?”

 

[아니, 너가 아까 전에 했던 약속들 있잖아. 그거 괜찮냐고.]

 

“...아, 그거요.”

 

 

내가 자색 악마와 한 약속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일정한 거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대륙 최고의 암살자에게 스토킹을 받게 될 거다.

 

그 외에도 온갖 것들이 있지만, 일단 당장 두드러지는 거부터 떠올리면 그 정도지.

 

 

“...”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할만한데요.”

 

[어디가?!]

 

“어차피 그거 그 녀석이 안 해도 다른 그릇들이 언젠가는 시도할 것 같은데?”

 

[...]

 

 

내 말에 칼리반조차 동의하는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째 집착의 악마는 따로 있는데, 난리는 이쪽이 더 난리네.]

 

“그쪽은 집착을 좀 심하게 할뿐이지 아주 몰상식하진 않거든요.”

 

 

물론 하얀 악마도 안전하진 않지.

 

조각 모이고 내가 맨얼굴 보여주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의 대형 사고가 터지니까.

 

물론 그렇다 해도, 조각 한 개밖에 없는데 사람을 이 정도로 시달리게 하는 건 자색 악마가 유일하다는 건 동의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복도를 걷고 있자니.

 

 

“...”

 

 

머리가 핑 돈다.

 

나도 모르게 비틀거리다가 벽을 잡고 간신히 균형을 회복한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나온다. 시야도 살짝 흐려진다.

 

 

[...야. 너 괜찮냐?]

 

“...예, 뭐.”

 

 

순간 나도 깜짝 놀라서 상태창을 통해 몸을 점검해봤지만, 타천의 인장이 잘못되었다거나 어디 한 군데가 고장났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뭐지.

 

왜 갑자기 이런 증상이.

 

 

[...너 요즘 얼마나 쉬었어?]

 

“...”

 

 

아.

 

그렇지.

 

잠도 못 자고 거의 여기저기 일처리 하러 다니기만 했다.

 

투쟁의 용광로에 체류하던 기간을 포함해서, 오랜 기간동안 거의 한 순간도 못 쉬었으니까.

 

 

‘공부도 해야 하고, 악마들 관리도 해야 하고, 페이놀 감정도 깨워야 하고, 나중에 황제가 아카데미에 방문했을 때 거기에 파생되는 이벤트도 정리해야 하고...’

 

 

늘어놓기만 해도 어마어마하네.

 

같이 준비해야 하는 이벤트가 한두 개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문제다.

 

동시에 진행되는 것도 진행하는 건데, 최상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라면 하나라도 허투루 처리해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선각자라는 변수도 항상 고려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도 안 돼, 이 녀석아.]

 

 

칼리반이 혀를 차며 그런 말을 던졌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처리해야지.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도 안 된다. 몸만 축나고.]

 

“...웬일로 건설적인 조언도 하고 그러십니까.”

 

[너, 요즘 위태위태해. 특히 저번에 줄타기 하다가 한 번 떨어진 이후로 더 조심하는 것 같고.]

 

“...”

 

 

그건... 그렇지.

 

나도 항상 완벽하게 모든 일을 다 처리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이전에도 내가 직접 반으로 쪼개지면서 증명했으니까.

 

문제는.

 

 

“...제가 실수하면, 다른 사람이 죽을 수도 있잖아요.”

 

 

메인 시나리오가 통제 불가능한 폭주 기관차처럼 계속해서 탈선하는 건 이미 몇 번이고 겪은 일이다.

 

그 원인인 나라는 것도 명확하고.

 

즉, 지금 내 상황에서는.

 

내가 실수하면 나 혼자 피해보는 게 아니란 점이다. 나 때문에 일어난 돌발 이벤트 때문에, 다른 사람이 휩쓸릴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엘노어가 제일 중요해요.”

 

 

한숨과 함께 그런 말을 꺼낸다.

 

선각자가 그쪽을 가장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쪽 관련해서 준비해놓은 계획도 이것저것 있는데...

 

 

“...좀 한 번이라도 보고 싶네요.”

 

 

문제는 거기서 날 만나줄 생각조차 안 한다는 거지.

 

온갖 루트를 통해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쪽에서 완강하게 날 튕겨내는 바람에 아직도 얼굴 한 번 못 봤다.

 

투쟁의 용광로에서 헤어진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조차 못 했으니까.

 

 

“꼭 보고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제가 요즘 진짜로 힘들어서...”

 

 

그런 말을 힘없이 중얼거리며 벽에서 몸을 땐다.

 

심하게 찾아오던 현기증과 어지럼증이 사라진 덕분에 행한 일이지만.

 

그런 행동을 하자마자 곧바로 깨닫는다.

 

아, 이거.

 

회복된 게 아니라 그냥 쓰러지기 직전이라 잠깐 몸에 기력이 돌아온 것뿐이다.

 

회광반조마냥.

 

 

[어, 야, 얌마?!]

 

 

칼리반의 그런 목소리가 들렸지만,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그대로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우드? 다우드! 이보게, 그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마찬가지로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어쩐지 익숙한 색깔의 머리카락도 보인다.

 

"..."

어라.

이거 엘노어지.

나오는 타이밍이 좀 공교로운데. 마치 근처에 있다가 내가 쓰러지자마자 튀어나오는 것 같다.

혹시 대화하는거 듣기라도 했나.

칼리반이랑 대화하는거 좀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았으려나.

아니, 그보다 말실수는 안 했나?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이 연이어 스쳐지나가고.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의 죄책감이 증폭-]

 

 

느닷없이 떠오른 그런 메시지를 전부 다 읽기도 전에.

 

눈앞이 까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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