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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 사랑받는 운명입니다 (148)화 (149/258)

Chapter 148 - 148. 초대

 

 

“...살아 있냐?”

 

“...”

 

 

대답이 없다. 시체인가 보다.

 

탈리온 아르망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대참사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은 조로 편성되어 있던 놈들이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로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엘판테 신입생이라면 그래도 나름 다들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놈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5대1로 덤벼들어서 2초만에 전멸했다고 한다면,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가 가야 정상이지만.

 

 

“...”

 

 

이런 광경을 보면 오히려 허탈한 감정밖에 들지 않는다.

 

반경 몇십 제곱미터가 통째로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심지어는 어떤 지팡이나 제력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만들어 낸 광경이다.

 

기사로 따지면 검 없이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지.

 

 

‘...이거 형님이랑 비슷한 수준 아니야?’

 

 

직접 고대신을 한 방에 갈아버리는 광경을 본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여자가 선보인 술식 운용은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수준의 위력이다.

 

이능의 운용을 통한 술식의 발현은 엘판테의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들의 강체술, 신성을 이용한 가호, 제작학부의 연공 등은 모두 그런 것들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런 모든 이능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은, ‘오래 모을수록 강하다’라는 아주 직관적인 성질이다.

 

그런데.

 

2초 모아서 쏜 술식으로 이 정도라고?

 

만약 일반적인 마도학부 학생들처럼 천천히 서서, 오랫동안 영창을 준비하고, 마력을 천천히 부어서 술식을 제련하면 대체 어느 수준의 위력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같은 1학군 맞습니까?”

 

 

엘리야만 해도 벅찬데, 이런 괴물은 또 어디에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그런 질문에, 페이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계속하실 건가요?”

 

“아니요. 전 포기입니다. 애초에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그렇게 말한 탈리온이 자신의 머리 위에 달라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빙호의 새끼를 쓰다듬었다. 명백하게 페이놀을 보고 겁먹은 기색이다.

 

딱히 겁쟁이라고 타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지금 주변에 있는 동급생들 꼬라지가 되지 않은 건, 이 새끼가 자신의 눈앞으로 얼음의 장막을 펼쳐줬기 때문이니까.

 

 

“공평하게 말씀드리면, 그냥 제 마력만 모아서 쏜 건 아니긴 해요. 너무 자괴감을 느끼실 필요까진 없으실 겁니다.”

 

“...예?”

 

“그냥, 어느 정도까지 통제가 되나 궁금해서 써본 거니까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탈리온을 앞에 두고, 페이놀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

 

 

가슴이 요동친다.

 

오랫동안 아예 접촉조차 하지 않은 놈이지만, 감정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와중이라 오랜만에 그 힘을 살짝 꺼내서 써본 것이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제어가, 됐어.’

 

 

예전에는 힘을 아주 살짝만 써도 그대로 폭주 직전까지 가버렸는데.

 

그녀의 생각이 정확했다.

 

감정을 점점 되찾아갈수록, 지금 그녀의 생명을 강제로 유지시키는 악마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

 

자신이 그 남자에게 빠지면 빠질수록, 붉은 악마는 그녀의 통제권 안에 들어온다.

 

그러니.

 

자신이 마침내 그 남자에게 완전히 ‘함락’ 당한다면.

 

 

‘...쉴 수, 있어.’

 

 

얼마 안 남았다.

 

그녀가 짊어진 것들은 전부 다 내려놓고.

 

무無의 영면에 접어들 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탈리온의 머리에 붙어있던 빙호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옳지, 옳지, 이제 싸울 일 없어. 너무 겁먹지 마.”

 

 

탈리온이 자상하게 그쪽을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페이놀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괜찮은 마력 생명체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탈리온이 떨떠름하게 답했지만, 그녀로서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저 생명체, 생각보다 굉장히 영민하다.

 

지금도 단순히 겁을 먹은 게 아니라, 그녀의 ‘몸속’에 있는 게 뭔지 얼추 눈치채고 경계하는 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성장하면 당신과 궁합이 꽤 좋겠는데요.”

 

“...예?”

 

“창을 쓰시는 분 아닙니까, 당신.”

 

 

창과 탈것에 탑승한 수없이 오래된 전투의 역사에서 수 차례 그 위력을 증명한 바가 있다.

 

성장한 빙호에 올라탄 창잡이라면, 틀림없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게 분명하지.

 

 

“조만간 있을 ‘용사 선정’에도 꽤 경쟁력 있는 조합이 될 겁니다.”

 

“...예?”

 

 

탈리온이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용사 선정이라니, 그런 행사가 존재한다는 정보 자체를 못 들어봤다.

 

애초에, 용사라는 것 자체가 인류의 희망이라고 불릴 만한 중책이다.

 

전 대륙 단위에서 스스로 그 가치를 끝없이 증명한 인간 중에서도, 모든 패권국이 동의해서 ‘이 녀석이 적임이다!’라는 도장을 찍어주는 인간이어야지만 그런 호칭을 다는 것이 허락된다.

 

지금은 아직 그런 수준까지 성장한 인간이 없어서 용사 자리가 공석인거고.

 

그런데.

 

느닷없이 그걸 ‘선정’한다니, 대체 무슨?

 

문장에서 전달되는 느낌이, 마치 ‘어쩔 수 없이’ 용사가 필요한 상황이라 피치 못 하게 누군가를 앉힌다는 그런 느낌 아닌가?

 

 

“뭐, 머지않아서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페이놀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저 때문에 곧 그런 일이 생길 거거든요.”

 

“...”

 

“당신은 미리 알아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

 

“그래야지, 그 남자가 선정에서 지지할 ‘용사 후보’에게 좀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이단 심문소와 성황국은 틀림없이 그 남자를 견제하려고 할 느낌이라.”

 

 

당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탈리온이 당혹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녀석을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탈리온은 자신이 이해한 범위 안에서만 대응하기로 했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빙호가 다시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안 싸운다니까. 왜 이래, 정말.”

 

 

탈리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쪽을 쓰다듬었다.

 

정말, 겁쟁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런 전언을 철회해야-

 

 

“...뭐?”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페이놀이 멍하니 그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저 빙호가 ‘느낀 것’을 그녀 또한 같이 느꼈으니까.

 

이어서 페이놀의 고개가 꺾이듯이 홱 돌아갔다. 다우드가 위치한 비탈길 너머였다.

 

 

“...말도 안 돼.”

 

 

이어서, 그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 어디 가십니까? 아직 시험 진행 중...!”

 

 

곧바로, 그녀가 급하게 몸을 돌리는 걸 본 탈리온이 그렇게 제지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장 그 남자 쪽으로 가야 해요!”

 

“...예? 형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하다. 그 남자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가 느끼기에.

 

 

“...있으면 안 될 녀석이 있습니다.”

 

“예?”

 

“존재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놈이 있다구요!”

 

 

적어도 세상의 법칙이 멀쩡하게 굴러가는 한.

 

지금 그녀가 느끼는 이 기운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부류다.

 

불타는 얼음. 얼어붙은 용암. 그런 말도 안 되는 단어 두 개를 배합한 것 같은 녀석.

 

그리고 그런 존재의 기척은.

 

다우드가 있는 곳, 바로 근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새삼 느끼는 점 하나.

 

엘노어는 생각보다 연애적 측면에서 방어력이 굉장히 낮다.

 

특히 주변에 시선이 있을 경우에는 몇 배로 더.

 

 

“...어허어억...”

 

 

나한테 한 대 얻어맞고 거의 반쯤 뻗어 있는 브릭스가 괴상한 신음을 내뱉고 있는 사이, 엘노어가 몸을 배배 꼬면서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휘감았다.

 

몸 안에서 그런 소리를 들어서 기분 좋은 느낌과 자신은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다.

 

 

“...그, 그런 말로, 나를 또 구워삶으려 하는 것 아닌가, 그대?”

 

 

이번에는 후자가 이긴 모양이다.

 

붉어진 얼굴로, 떠듬떠듬 내뱉는 모습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그런 말을 꺼내놓은 엘노어의 모습을 보니 그렇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 사람은 이런 방면에서 방어력이 꽤 약하다.

 

그래서, 한 번은 견뎌냈다고?

 

 

“구워 삶으려기보다,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할까요.”

 

“...”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부려먹기 좋은 도구로 보는 녀석이 기꺼울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 두 번도 견뎌내나 보자.

 

이래도 안 넘어와?

 

 

“...그, 그래도 말이지, 자, 자기 여자라느니 그런 말을, 왜 다른 사람들이 다 듣는 앞에서...”

 

 

엘노어가 소심하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여기서 연단까지의 거리가 꽤 돼서 그걸 들을 수 있을 사람도 거의 없을 텐데 별 걱정도 다 한다 싶지만.

 

 

“그거야 엘노어가 제 여자니까요.”

 

 

이건 공격 찬스다.

 

세 번도 견뎌내나 보자.

 

이래도 안 넘어와??

 

 

“...”

 

 

엘노어가 할 말을 잃은 기색으로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흠, 모자랐나.

 

그럼 한 가지 더 얹어보자.

 

 

“전 세상 누가 와도 엘노어가 제 여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그대, 지, 진짜...”

 

“가능하다면 세상 전체에 선언하고 싶은데요. 이 사람이 내 약혼자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운 좋은 남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몸통에 주먹이 틀어박혔다.

 

정확하게 간이 있는 곳에 송곳처럼 틀어박힌 리버샷이었다.

 

 

“...”

 

 

내가 단말마도 외치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지는 사이, 엘노어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문장을 내뱉었다.

 

“그, 그대는, 체, 체통이란걸 좀 알아야 하네!”

 

 

그럼 그냥 말로 하셔도 되잖아요.

 

사람이 눈앞이 노래질만큼 아프게 쥐어팰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하아...]

 

“...”

 

[소년왕, 그 양반 왜 지금 잠들어 있냐. 딱 지금 같이 박수칠 타이밍-]

 

 

시끄러워.

 

온몸을 감싸는 격통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돌린다.

 

다행히, 영혼을 담은 이빨 까기로 엘노어가 이상한 요구를 걸고 나를 쥐어패려고 달려드는 건 잠깐 멈춰든 느낌이다.

 

그럼 이쯤해서, 반드시 ‘반응’이 올 녀석이 있다.

 

 

‘...나와라.’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재상이 앉아있는 연단 쪽에 시선을 맞춘다.

 

제국 사교계에 떠도는 공공연한 소문 중 하나.

 

설리번 재상은 트리스탄 공작가와 그렇게 원만한 사이가 아니다.

 

반反 재상파에 속하는 귀족 중 가장 강력한 인간들이 켄드리드 변경백과 트리스탄 공작가다. 제국 2대 대귀족이 그쪽을 떠받들고 있어서 그나마 아직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지.

 

재상이 국권 대부분을 집어삼켰음에도 황제가 그나마 명맥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이들이라는 말마저 돌아다닐 정도니까.

 

그래서, 설리반과 트리스탄 공작가는 원작에서 견원지간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지.

 

즉.

 

이 정도까지 엘노어와 나 사이에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저쪽에서도 어떤 식이든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단 거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눈앞에 어떤 창이 떠올랐다.

 

아마 예상대로 저쪽에서 뭔가 반응이 나오는-

 

 

< System Message >

 

[ 대상 ‘설리번’이 격한 분노를 느낍니다! ]

[ 부정적인 영향이 각인됩니다! ]

[ 부정 각인 1중첩! ]

[ 수령 가능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 스킬: 악의 지배가 발동됩니다. 대상에게 사용 가능한 명령권 1회를 얻습니다! ]

 

[ 시나리오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입니다! 해당 인물과의 상호 작용 여부에 따라 후속 퀘스트가 전부 변경됩니다! ]

[ ‘기프트: 근묵자흑’의 강화 조건이 충족됩니다! ]

 

 

‘...뭐?’

 

 

내용을 보자마자 눈이 크게 떠진다.

 

아니.

 

물론, 화를 내는 거야 그럴 수 있는데.

 

내 기억이 맞으면, 애초에 이 스킬이...

 

 

< Skill Info >

 

[ 스킬: 악의 지배 ] [ 등급: E ]

[ 당신에게 충분히 영향받은 선善 성향 인물에게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

[ 악의 지배가 적용된 인물은 당신이 요청한 것을 반드시 한 가지 들어줘야 합니다. ]

[ 적용 중인 인원: 루시엔 그레이하운처, 설리반 악시온 페트로누스, 엘리야 크리사낙스 ]

 

 

...선善 성향 인물한테만 적용되는 거다.

 

그런데.

 

재상이, 선 성향?

 

게임 안에서 기드온 사망에 확정적으로 기여하고, 엘노어 폭주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인간이.

 

선역이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눈앞으로 ‘황금색’의 포탈이 열렸다.

 

페트로누스 가문을 상징하는 색깔 중 하나다. 재상의 퍼스널 컬러라고 해도 되겠지.

 

 

“...”

 

 

잠깐만.

 

포탈을 여는 마석은 시가로 아무리 적게 따져도 집 한 채 가격이다. 그런데 겨우 지금 저 연단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이걸 그냥 써먹는다고?

 

재상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건 그만큼 ‘급했다’라는 느낌이 대단히 강하게 든다.

 

마치 당장이라도 지금 여기에 끼어들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듯이.

 

 

“오랜만입니다, 트리스탄 공녀.”

 

 

포탈 안에서 천천히 걸어나온 재상을 본 엘노어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답지 않게 대단히 당황한 기색이다.

 

 

“...각하를 뵙습니다.”

 

 

제국 안에서 이 사람이 이런 예를 취해야 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재상은 그런 예외 중에서도 가장 특출난 케이스다.

 

그러니까 재상도 간단히 목례만 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곧바로 취한 것이겠지.

 

그러니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서.

 

자기 품에 꼭 안는 것 말이지.

 

 

“...!”

 

 

무릎을 꿇고 있는 엘노어가 기겁하면서 몸을 일으킨다.

 

예를 차리는 것조차 잊을 만큼 파격적인 행동이었으니까 그렇겠지.

 

 

“각하, 그게 무슨...!”

 

“변함이 없네요, 당신은. 정말이지.”

 

 

여자치고는 대단히 신장이 큰 재상이다. 나름 키가 큰 편인 나와 비교해도 눈높이가 거의 맞을 정도라, 내 뒷덜미를 잡고 푹 누르자 내 얼굴이 곧바로 재상님의 가슴에 파묻혔다.

 

폭신폭신하고 몽글몽글한 감각이 얼굴 전면부에 덮쳐온다.

 

 

“...”

 

 

아니.

 

진짜.

 

잠깐만.

 

뭐냐 이거?

 

 

< System Message >

 

[ 대상 ‘엘노어’의 타락 수치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중입니다! ]

 

 

재상님 품에서 버둥거리는 사이, 아까 전까지 얼굴을 붉히고 있던 엘노어의 눈에서 점점 생기가 빠져나가는 게 실시간으로 관찰된다.

아니,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억울하다.

난 진짜로 이 사람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

 

 

“아프셨죠? 당신은 이런 폭력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

 

“고생 많이하셨어요, 다우드. 시험은 이쯤이면 됐으니 푹 쉬시죠.”

 

 

그렇게.

 

그런 자세를 취한 상태로, 끈적끈적한 ‘호의’가 묻어있는 목소리를 들려온다.

 

 

‘...뭐냐?’

 

 

이 상황. 대체 뭐지.

 

적응이 안 된다. 이해가 안 간다.

 

애초에 악마의 그릇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납득이라도 하겠다. 걔네들이 나한테 호감을 가지는 건 아무런 전조도 개연성도 없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대체 왜 나한테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거지.

 

 

“...오랜만에 저녁 식사나 같이 하시죠, 트리스탄 공녀.”

 

 

날 품에 안은 재상님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그런 말을 엘노어에게 던졌다.

 

말투야 평탄했지만.

 

아마 눈치 좋은 사람이라면 그 아래 깔린 얼음장같은 살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배제’해야할 적수를 만난 것 같은, 그런.

 

 

“...다우드에 대해 물어볼 것이 아주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이미 무표정이 되어있던 엘노어의 표정에 섬뜩한 적의를 깃들게 만드는 문장인 것도 틀림없을 거고.

 

 

“...”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이거.’

 

 

시스템 창에 떠올랐다는, 재상이 분노했다는 것.

 

이 사람이 ‘분노’한 대상은, 내가 아니라 엘노어다.

아마 트리스탄 공작가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원작이랑 동일한 것 같은데.

 

내가 트리스탄 공작가와 친해서 화난 게 아니라, 감히 트리스탄 공작가 따위가 '나와 친하다'는 사실에 화난 거다!

‘...아.’

 

 

왜.

 

대체 왜.

 

왜 이런 폭탄이 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긴 했네?]

 

“...”

 

[재상이 난입하면서 판을 뒤엎었잖아. 이제 저 공녀님이 당장 하룻밤 같이 자자고 달려들진 않겠네. 축하한다, 야.]

 

“...”

 

[저녁 식사하는 도중에 뭔 일이 생길 진 모르겠지만.]

제발.

 

맞는 말로 사람 화나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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